역 사
라워 왕국의 전설적인 초대국왕 쁘라여 깔라와르나디뜨(Phraya Kalavarnadit)는 서기 450년경에 개국을 했다.(주1) 이 국가 역시 드와라와띠의 여러 도시국가들 중 하나였다. 깔라와르나디뜨 국왕은 "쭐라사까랏"(Chulasakaraj)이란 새로운 연호를 사용했는데, 이 연호는 19세기까지도 시암(태국)과 버어마에서 사용되었다.
7세기경에는 첸라(Chenla, 眞臘)의 이사나와르만 1세(Isanavarman I )가 군사작전들을 펼치면서 짜오파야 계곡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주2) 그리하여 크메르 세력권에 복속한 도시국가들은 "라워왕국"으로 뭉쳤고, 크메르 세력권이 미치지 않았던 짜오프라야 강 서안의 도시국가들은 "수빤나품"(Supannabhum) 왕국으로 뭉쳤다.(주3) 라워는 크메르제국이 드와라와띠 지역을 장악할 때 그 중심지 역할을 했다.
라워왕국 초기의 언어로서 발견된 것은 몬어(Mon) 뿐이다. 하지만 라워를 구성했던 사람들이 몬족뿐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라워의 지배층이 몬족(Mon)이긴 했지만, 백성들은 몬족과 와족(Wa: 팔라웅어[Palaungic] 계통)이 혼합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주4) 또한 따이족(Tai, 따이민족군) 사람들이 짜오파야 계곡으로 진출해들어온 것이 라워왕국 시대라는 가설도 존재한다.
크메르제국을 통해 힌두교와 대승불교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긴 했지만, 라워왕국의 주요한 종교는 상좌부불교(소승불교)였다.(주5) 7세기말에 라워왕국은 북쪽으로도 세력을 확장했다. 하리푼차이(Haripunchai, 하리뿐자야)의 초대국왕인 짬테위(Jamadevi, จามเทวี) 여왕도 라워 국왕의 딸이었다고 전해진다.
라워왕국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현재 우리가 가진 지식들은 대부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만 확보된 것이다. 중국 당(唐)나라 시대의 사서들은 라워왕국을 "토우호로"(Tou-ho-lo)라 기록하고 중국에 조공을 받쳐왔다고 전한다. 현장(玄奘, Xuanzang) 법사도 드와라와띠와 라워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가 말한 지명 "토우로뽀티"(Tou-lo-po-ti)는 "드와라와띠"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장은 이 나라가 첸라 왕국과 파간(Pagan) 왕국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송(宋)나라 시대에는 라워를 "로호우"(羅渦, Lo-hou)라 불렀다.
11세기에 버어마의 파간 왕국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라워 왕국에 대한 크메르제국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087년 파간왕국의 짠싯따(Kyanzittha) 왕이 라워를 침공해왔지만, 나라이(Narai) 왕이 이끄는 라워의 군대는 이를 격퇴할 수 있었다. 당시 라워는 비교적 강성하여 버어마의 파간왕국과 크메르제국 양쪽 모두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이후 나라이 왕은 도읍을 아유타야(อยุธยา, Ayutthaya)로 천도하고,(주6) 서쪽에 있던 수빤나품 왕국에 대해서도 압력을 가해 그 도시들을 서서히 병합해나갔다.
하지만 자야와르만 7세(Jayavarman VII) 치세의 크메르제국은 다시금 라워를 침공해 들어왔다. 이때 라워는 크메르제국의 종교적 세계인 힌두교와 대승불교에 동화되었다. 이 당시의 크메르 문화는 라워 예술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고, 그 영향을 빵삼욧(Prang Sam Yot) 사원의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39년 따이족(Tai)이었던 수코타이(สุโขทัย, Sukhothai)의 관찰사가 반란을 일으켜, 라워왕국에서 독립한 후 수코타이 왕국을 개국했다. 태국의 연대기들은 라워를 "크메르계"라고 기록하고, 랑캄행(Ramkhamhaeng) 대왕이 이끄는 수코타이가 세력을 팽창하면서, 13세기에 라워왕국은 급격히 쇠퇴하여 라워와 아요다야(=아유타야) 주변부만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나라이 왕을 제1대로 하는 아요다야(Ayodhaya) 계보에서 제10대인 워라쩻(Vorachet) 왕이 바로 아유타야 왕국을 개국한 라마티버디 1세(สมเด็จพระรามาธิบดีที่ 1, Ramathibodi I ), 즉 우텅(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อู่ทอง, Uthong) 왕이라는 가설이 주장된 바 있다.(주6) 라워왕국의 우텅 왕과 수빤나품 왕국의 버럼 라차티랏 1세(สมเด็จพระบรมราชาธิราชที่ 1, Boromma Rachathirat I : 팡우아[Pa Ngua, ขุนหลวงพะงั่ว])는 연합으로 아유타야 왕국을 세우고, 우텅 왕이 이 도시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팡우아 왕은 우텅 왕의 아들인 라메수완 왕(สมเด็จพระราเมศวร, Ramesuan: 1339–1395)으로부터 1370년에 왕위를 찬탈했고, 라메수완은 다시 라워로 돌아갔다. 1388년 라메수완 왕은 다시금 팡우와 왕의 아들인 텅란 왕(สมเด็จพระเจ้าทองลัน, Thong Lan)으로부터 왕위를 되찾으며 복수했다. 1424년 팡우아 왕의 조카인 나가린탓티랏(Nagarinthrathirat)은 다시금 아유타야를 수빤나뿜 왕가로 복귀시켰다. 이후 라워 왕가는 숙청을 당했고, 16세기까지 아유타야의 평범한 귀족계급으로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