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호주 <The Conversation> 2016-12-1 (번역) 크메르의 세계
[분석] 라마 10세 국왕이 즉위한 태국 : 군주제의 미래는 존재하는가
Thailand’s future under King Rama X: lessons from three Asian countries
기고 : 패트릭 조리 (Patrick Jory)
호주 '퀸즐랜드 대학'(University of Queensland) 역사/철학 연구대학원, 동남아시아 역사학 선임 강사
(동영상: CCTV)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12월1일 밤 국가입법 회의의 즉위요청을 수락하고 '라마 10세' 국왕으로 즉위했다.
태국 왕세자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이 라마 10세(Rama X) 국왕으로 즉위했다. 공식 칭호를 "보틴트라데바야와랑꾼"(Bodindradebayavarangkun)이라 칭한 그는 지난 10월13일 사망한 부왕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1927년생) 국왕의 뒤를 이어 즉위했고, 짜끄리 왕조(Chakri dynasty)의 10번째 국왕이 됐다.
하지만 태국 국내 학자들 및 해외의 관찰자들 사이에서, 태국이란 국가 및 그 군주제의 미래는 대단한 불확실성 속에 남아 있다.
특히 관심의 초점은 인기 없는 왕세자의 성격에 모아져 있다. 국제 언론은 변덕스러운 사생활을 주목하지만, 그의 무자비함이 그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러한 요소는 태국에서 압도적 존경을 받아왔던 군주제에 해를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왕실 중심의 주의 깊은 선전선동에 의해) 태국의 군주제는 입헌군주제의 외양으로 비춰지긴 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보수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제 푸미폰 국왕이 서거한 상태에서, 태국의 군주제는 스스로를 현대화시켜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태국의 왕당파는 다른 어떤 국가도 태국과 비교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태국 정치의 미래를 추정해보는 데 있어서, 최근 아시아 역사에서 최소 3가지 비교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사진) 12월1일 즉위수락 행사장에서, 라마 10세 신임 국왕(우측)이 임시 섭정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의자에 착석한 이)과 군사정권 지도자 쁘라윳 짠오차 총리(머리를 든 이) 등 주요 관료들의 하례를 받고 있다.
마오쩌뚱(모택동)의 중국
첫번째는 1976년에 사망한 마오쩌뚱(毛澤東, Mao Zedong: 1893∼1976)의 중국이다. 중국에서 마오쩌뚱 집권기의 마지막 10년은 푸미폰 국왕 치세의 마지막 10년과 마찬가지로 대단한 정치적 혼란기였다. 이념적 측면에서 양국은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위치하지만, 마오쩌뚱과 푸미폰은 자국을 지배하는 정권들의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즉, 마오쩌뚱은 중국 공산당에 관해 그러했고, 푸미폰은 태국의 군부-관료-왕당파 연합 기득권층에 관해 그러했다.
두 사람은 대중매체를 통한 선전선동 및 교육 시스템을 통해 전파된 전체주의적 개인 우상화의 주체였다. 또한 두 사람은 정치적 비판의 영역 바깥에 서있는 이들이기도 했다.
이들 두 나라에서는 통치자가 제시한 기괴한 이념(태국의 경우: 충족경제)에 대한 순응만이 이성적 토론이 이뤄져야만 할 자리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나라 모두에서, 통치자가 노쇠하고 쇠약해져가자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입장에 선 세력들이 통치자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그러한 권력공백을 자신들의 권력 장악에 이용했다. 중국에선 사인방(四人帮, Gang of Four)과 홍위병(紅衛兵, Red Guards)이 그러했고, 태국에선 광적인 왕당파 가두 시위대와 군부 내 왕당파 파벌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1976년 마오쩌뚱이 사망한 직후 사인방은 신속하게 숙청당했고, 덩샤오핑(邓小平, Deng Xiaoping: 1904~1997)이 독자적인 권력 부상의 계책을 꾸몄다. 덩사오핑이 독자적인 권위를 축적하자, '중국공산당' 내 마오의 추종자들은 결국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덩은 이후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 Cultural Revolution)으로 초래된 혼란을 종식시키고, 서방과의 관계를 강화했으며, 중국의 경제 개혁을 시작하면서, 개방정책에 나섰다.
(사진: Stringer/Reuters) 마오쩌뚱과 마찬가지로 푸미폰 국왕도 개인우상화 정책의 대상이었다.
수하르토의 인도네시아
역내에서 태국과 비교할만한 또 다른 국가는 인도네시아이다. 양국은 많은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태국의 푸미폰 국왕과 인도네시아의 군사독재자 수하르토(Suharto: 1921~2008)는 모두 냉전시대의 동남아시아에서 극도로 양극화된 정치 환경 속에서 권좌로 부상했다. 그리고 양국 모두에서 군부독재가 강화됐다.
푸미폰 국왕과 수하르토는 모두 열렬한 반공주의자였고, 공산주의 탄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은 재정, 군사, 외교적으로 양국 정권들을 지원했다. 또한 두 사람은 경제자유화 정책의 채택과 자본주의적 변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하르토는 스스로를 "개발의 아버지"(Father of Development)라고 부르면서, [인도네시아 주류민족인] 자바족(Javanese)의 술탄(sultan)처럼 행동했다. 반면 푸미폰 국왕은 북한 스타일의 선전선동을 통해 "개발의 국왕"(development king)으로 찬양됐다.
1946년 푸미폰 국왕이 즉위했을 때, 태국 왕실의 재정은 극도의 곤경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태국 왕실은 세계 최고의 부유한 왕실이며, 산유국 왕실들이나 영국 여왕을 능가하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와중에서 수하르토가 1998년 5월 사임하자, '신질서 군부독재'(New Order military dictatorship)는 붕괴했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신속하고 광범위한 정치적 개혁을 거쳐 국가적 변혁을 겪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는 아마도 모든 분야에서 동남아시아 최고의 민주 국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당 서기장이라는 자리와 새롭게 건국한 국가의 대통령이란 현대적인 정치적 직위들이다. 반면 태국의 국왕은 한편으로는 고대의 신분계급인 '무사 국왕들'(warrior-kings)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의 붓다'(future Buddha)로 여겨진다. 태국에서 군주가 군사 및 종교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그 연원이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오쩌뚱과 수하르토는 죽었지만 중국 공산당과 인도네시아의 대통령제는 여전히 존속한다. 하지만 푸미폰 국왕이 사망한 태국에서 군주제의 생존 여부는 불확실하다.
(사진: Enny Nuraheni/Reuters) 1996년의 수하르토.
샤의 이란
3번째 비교대상은 [봉건군주인] '샤'(Shah) 이후의 이란이다. 얼핏 보면 불교국가인 태국을 이슬람 국가인 이란과 비교하긴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놀랄만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양국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는 달리 낡은 군주제가 식민지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온전히 살아남았다. 두 왕국들은 형식적으론 독립을 유지했지만,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 특히 대영제국의 영향 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 여파로 양국 모두 군주제가 약화되고 의회 민주주의가 탄생했고, 좌파 정치세력이 부상했다.
냉전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양국의 수구 반동 세력은 미국의 지원 하에 당시 부상 중이던 민주 정권들과 충돌했다. 그 중 유명한 사건은 미국 CIA와 영국 Mi6의 지원 하에 이뤄진 이란의 1953년 쿠데타이다. 이 쿠데타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하메드 모사데그(Mohammed Mossadegh: 1882~1967) 총리를 실각시키고, '샤' 팔레비(Mohammad Reza Pahlavi: 1919~1980)의 권위주의 정권을 복원시켰다.
냉전시대에 이란과 태국은 미국의 핵심적인 동맹국이 됐고,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각각 중동의 거점과 동남아시아의 거점 역할을 했다. 미국은 이들 양국 군주제를 보수적 안정성으로 강화시켰다. 양국에서는 정권에 대한 위협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감시/검열 네트워크와 탄압의 기제가 설치됐다.
양국에서 민주세력 및 좌파세력이 살해되고 투옥되거나 은신하고, 농민단체, 노동조합, 정당들이 금지당하거나 정부에서 간부들을 임명하는 가운데, 양국의 군주들은 자국 사회를 급변시키면서 양극화시킨 급속한 경제성장 정책에 자신들의 권위를 위탁했다.
여기서 양국의 유사성은 끝이 난다.
이란의 팔레비 국왕은 1978~1979년 사이에 발생한 이란 혁명(Iranian Revolution)을 통해 축출됐다. 이 혁명은 2,500년의 역사를 지닌 이란의 군주제를 종식시켰고,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지역에서는 공산 군대가 승리하고 태국에서도 자생적 공산 반군이 성장했지만, 태국에서는 푸미폰 국왕과 군주제가 살아남았다.
(사진: Lucy Nicholson/Reuters) 미국에 거주하는 한 이란계 미국인이 팔레비 국왕의 흉상을 보여주고 있다.
티핑 포인트
아시아의 이들 세 나라에서 마오쩌뚱, 수하르토, 팔레비라는 권위주의 통치자들이 사망한 후,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뒤따랐다.
태국 사회는 지난 10여년간 매우 극단적인 양극화 분열 속에 있었다. 오랜 정치적 갈등의 지속은 이 나라가 왕위계승 과정이 혼란을 거친 후, 종국에는 과거 푸미폰 국왕 재위 시의 정치적 혼란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정치적 타협에 도달할 것이란 사색을 유발시켰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아시아 3개국에서 그들의 강력한 통치자들이 사망한 후 발생한 드라마틱한 경험들이 어떤 전례로서 활용될 수 있다면, 왕위계승 과정에서 태국이 더욱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생각은 단견이 될 것이다.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태국 뉴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Who am I 작성시간 16.12.0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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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universalface 작성시간 16.12.11 번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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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2.12 오랫만에 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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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아투 작성시간 16.12.22 바쁘실텐데 번역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올려 놓으시면 보기만
하는데 미안합니당~~.....
확고한 의지가 없으면 참 쉽지 않은 일인데.... 돈생기는 일도 아니구요...
아무튼 고생하십시요. -
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12.22 안녕하셨습니까..
가뜩이나 세상이 점점 재미 없어지니..
그냥 공부나 해보는 거죠..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