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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정치와 제도

[(전문자료)][분석] 탁신 정권기의 태국 경제 :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영향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16.03.31|조회수1,280 목록 댓글 2

(보도) The Diplomat 2016-3-20   (번역) 크메르의 세계

 

 

[분석] 탁신 정권기의 태국 경제 : 국가 자본주의의 성장과 그 영향 

The Rise of State Capitalism in Thailand

 

 

기고 : 조슈아 쿨란트칙 (Joshua Kurlantzick)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 선임연구원


* 본 기고문은 필자의 신간 <국가 자본주의: 국가주의 복원과 세계의 변화>(State Capitalism: How the Return of Statism is Transforming the World)(발행: Oxford University Press)의 내용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태국의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전 총리의 가문은 원래 북부지방 치앙마이(Chiang Mai) 외곽을 기반으로 하는데, 그는 여러 해 동안 해외 망명 생활을 해왔다. 그러나 2014년 봄까지만 해도, 치앙마이에서는 마치 그가 태국을 단 한번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택시 기사들은 차량 앞유리 앞에 불상 및 고대 왕족들의 초상화와 함께 탁신의 사진도 붙여놓곤 했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들은 그가 해외에서 행한 연설들을 방송했고, 마을 근처 노점상들은 웃음을 띤 탁신의 초상화나 그의 사진들이 인쇄된 티셔츠를 팔곤 했다. 또한 탁신 및 그의 정당 소속인 이 지방 출신 정치인들의 모습이 담긴 입간판들도 거리 양편의 풍경을 주도하고 있었다. 치앙마이 외곽의 한 상점 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탁신은 가난한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최초의 정치인이다. 그는 여기에 와서 우리의 애로사항을 청취했고, '민주당'처럼 우리에게 말만 하지도 않았다. 그 이전에는 방콕에서 온 사람들 중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었다."('민주당'은 [보수파의] 주요 정당이지만, 빈곤층으로부터는 그다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당이다.)

 

하지만 빈곤층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처럼 보인 것이 탁신의 진정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농촌의 태국인들은 그로 하여금 2001년 총선에서 정권을 잡도록 해주었고, 그의 정당을 태국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조직으로 만들어주었다. 태국 군부가 2014년 5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그러한 탁신의 정치적 장치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였을 뿐이다.

 

탁신의 국가 자본주의(state capitalist) 정책은 대다수 빈곤층 및 노동자 계급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2000~2001년 사이의 선거운동 기간 중, 심지어 탁신은 경제에 대한 여러 유형의 국가적 개입 정책을 유권자들에게 참다웁게 공약으로서 제시한 태국 최초의 정치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정책은 소상공업을 위한 새로운 형태의 정부 대출, 국가가 재정을 부담하는 보편적 의료복지 계획(30바트 의료정책) 등 다양했다. 태국의 유권자들과 정치학자들은 그 같은 공약을 신뢰했고, 그가 2001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사진) 탁신과 잉락 전 총리의 사진을 든 레드셔츠 시위대


 

 

탁신의 국가 자본주의

 

1997아시아 금융위기는 그 해 여름 태국 바트화 가치의 대폭락과 함께 시작됐고, 이후 아시아 여러 국가들로 퍼져나갔다. 이 사건 이후, 당시 태국의 집권당이었던 [보수 정당] '민주당'(Democrat Party)은 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정통적인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에 따른 처방을 내놓았다. '민주당'은 '국제통화기금'(IMF)의 도움에 의존했고, 서구의 다양한 컨설팅 기관들이나 채권자들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민주당'은 실패한 태국의 은행 및 금융기관들을 강제로 파산시켰고, 악성 채권들을 말소시켰으며, 과도한 정부 지출을 삭감하고, 은행 및 대기업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감소시켰다. 또한 과도한 부채에 시달리던 56개 금융기관의 자산을 동결했다. '민주당' 정권의 경제정책이 어떤 점에서는 후퇴한다는 것 때문에 인기는 없었지만, 이 정권은 약 60개에 달하는 공기업 민영화를 위한 신속 조치들도 마련했고, 외국인 투자자도 이들 기업의 지분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민주당'이 추진했던 여러 경제정책들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당시 태국의 금융산업은 제대로 된 규제 장치가 없이 마구잡이로 운용되고 있었고, 자기자본의 비율이 낮아 상당한 신용 리스크를 안고 있었고, 방콕의 엄청난 부동산 거품을 창조하고, 실속 없는 주식시장의 주가를 상승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정권의 개혁 조치와 외부의 지원, 그리고 아시아 지역 전체의 경제 회복을 통해, 태국 경체는 1990년대 말엽부터 느린 회복세를 보였다.


하지만 실업률은 확고하게 높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민주당'이 추진한 경제개혁과 민영화 전략은 많은 은행들과 비대해진 기업들의 규모를 축소시켰다. 그러한 기업들은 비효율적이고 때때로 노골적인 불법의 온상이 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태국인들을 직접 고용하거나 건설노동자, 음식 노점상, 가정부 등 여타 노동 계층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제이기도 했다. 2001~2011년 선거운동 기간 중, 탁신과 그 동맹세력은 '민주당'을 무정한 엘리트 계급으로 묘사하면서, 서방의 명령을 좇아 태국의 보통사람들에게 위험한 정책을 펼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잔인하지만 성공적인 전략이었고, 또 현실의 묘사이기도 했다.


탁신은 2001년 총리에 취임한 것과 거의 동시에 국가의 광범위한 경제 개입을 약속한 공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탁신 정권은 일련의 경제 개입 정책을 실시했고, 이 정책에는 이후 "탁시노믹스"(Thaksinonomics)란 별칭이 붙었다. 그는 미국의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와 마찬가지로 공식적인 독립성을 갖고 있던 중앙은행 '태국 은행'(Bank of Thailand)을 묵살하면서, 대규모 국가 재원을 경제에 투입한다는 자신의 정책을 따르게 하면서, 일부 민영 기업들을 매입토록 만들었다. '태국 은행'은 FRB와 마찬가지로 선출직 정치 권력으로부터 면책 특권을 갖고 있었지만, 탁신의 정책을 따르지 않는 은행 총재들은 사임을 강요당했다. 그와 동시에 탁신은 고무, 항공, 쌀 등 국가 전략산업이라 판단되는 부문에 대한 정부의 의사결정 권한을 강화하며 통제력을 확보해나갔다.


탁신 정권 하에서 태국 정부는 소상공업 대출을 위한 새로운 국가 기금을 마련했고, 금리를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낮추기도 했다. 저금리와 소상공업을 위한 국가 기금은 주로 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던 북부 및 북동부 지방에 저금리 대출의 홍수를 쏟아부었다. 그 결과 새로운 자동차, 주택, 휴대폰, 트럭 등의 소비를 촉진시켰다.


이토록 막대한 통화 공급 자체는 이례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케인즈 학파의 전형적인 경제위기 대응책과도 유사했다. 그리고 오바마 행정부가 제1기 집권기에 펼친 정책이나, 여타 서방국가들이 2008~2009년 경제위기 때 취했던 정책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탁신은 태국 경제를 전형적인 케인즈주의 전략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으로 몰고 갔다. 그는 저금리 정책 외에도, 촌락 소액대출은 물론 "전략산업"으로 분류된 보다 큰 산업들에도 극도로 저금리 대출을 해주도록 은행들을 압박했다. 말이 압박이지 사실상 강제였다. 이러한 "전략" 산업들에는 이사회 등을 통해 탁신 정권이 사실상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던 여러 기업들도 포함됐다. 탁신은 국영 전력공사로 하여금 항공, 석유 및 가스 생산, 시멘트 산업 등 전략산업에 전력을 저가로 공급토록 만들었고, 그와 동시에 이 중 많은 기업들에서 사실상의 경영권 장악도 해나갔다. 탁신 정권은 여러 선도적인 기업들을 사실상 장악해나가면서, 태국 최대 및 최고 유명 기업들 중 일부를 직접 경영하는 일도 병행했다.


탁신 정권은 싱가포르의 리콴유(Lee Kuan Yew) 및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메드(Mahathir Mohamad) 같은 권위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직 총리들을 공공연히 칭송하면서, 태국의 물리적 인프라 개선을 위한 새로운 "메가 프로젝트들"도 추진했다. 태국에 새로운 인프라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 사업들은 주로 태국의 주요 건설회사들과 물류회사들에 자금을 유입시킨다는 내용으로 돼 있었다. 그에 따라 이들 기업들은 국가 시책 하에서 힘을 축적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고무 생산과 같은 일부 부문들에서 탁신은 생산자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태국산 고무의 수출가격을 인상시키기 위한 카르텔 형성을 목표로 한 것이기도 했지만, 소비재 시장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을 증가시키려는 목적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2006년 9월의 쿠데타는 탁신을 권좌에서 실각시켰고 친-탁신계 정당의 힘을 빼기 위해 헌법도 개정했지만, 농촌의 빈곤층에게 탁신이 지니고 있던 호소력까지 제거하는 데는 실패했다. 탁신은 해외 망명 중에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고, 그의 정당 역시 이름은 달라도 동일한 정책을 유지하며 새로운 계승 정당으로 신속하게 재탄생했다. 쿠데타 후 군부가 임명한 과도정부는 2007년에 총선을 개최했다. 군부의 과도정부는 탁신의 국가주의 경제전략이 갖고 있던 인기를 희석시키고, [보수정당인] '민주당'이 정권을 획득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탁신이 망명 중에 꼭두각시 당대표를 내세웠음에도, 새로운 친-탁신계 정당(국민의 힘 당: PPP)이 다시금 압승했다. 이 승리는 부분적으로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계속하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 [이후 '국민의 힘 당'마저도 기득권 보수 세력이 사법부 및 대중시위 전략을 이용해 실각시켜 버리자,] 결국 탁신은 자신의 여동생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을 얼굴로 하는 새로운 정당을 또 만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잉락이 이끄는 정당(프어타이 당: Pheu Thai Party)은 2011년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잉락 정권은 탁신의 국가주의 정책을 계승했다. 그것은 기업에 대한 축적된 통제력, 저금리 대출, 사회복지 프로그램의 강화 등으로 요약된다. 전반적으로 볼 때 잉락 정권 하에서 공공 부채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최고 의사결정권자들 사이에서는 은행의 직접 대출, 핵심 산업 기업의 관리, 여타 경제부분의 통제에서 정부가 적극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관념은 더욱 확고해졌다.


태국의 국가 부채가 급격히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국내 및 해외 경제학자들은 경제성장에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탁시노믹스'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탁시노믹스'가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핵심 산업을 강화하며, 아시아 금융위기 이후의 관련 산업 재편에 권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탁신의 경제 사회 정책에 관해 만장일치의 판단은 불가능하다. 여러 경제학자들과 태국의 정치평론가들은 '탁시노믹스'가 약간의 목표를 달성하긴 했지만 미래 세대에 엄청난 채무의 부담을 지웠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일부 경제학자들은 '탁시노믹스'가 민간 기업들에서만 출현할 수 있는 종류의 혁신을 장려하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즉, 여러 산업들에서 기업들은 [국가가 지원한] 해당 산업의 최강자와 경쟁하면서 결국 패배하곤 했다는 것이다.




선출직 독재자의 부상


탁신은 과거 십여년 사이에 개발도상 지역에서 출현한 새로운 형태의 지도자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즉, [선거를 통해 선출된] '선출직 독재자'(elected autocrat)라는 것이다. 지난 20여년간 현대적인 국가 자본주의가 출현해서 성장한 데는 선출직 독재자의 부상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퇴행적 양상을 보이는 여러 국가들에서, 국가 자본주의는 정치적 퇴행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이집트나 러시아 등 일부 정치적 퇴행 사례를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미 국가의 기업 통제 역사가 존재하던 곳들이다. 탈냉전 시대에 이들 국가들은 정치개혁과 경제개혁을 동시에 진행했다. 그리고 태국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초반 무렵엔 더 이상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규정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탁신을 비롯하여 초창기 선출직 지도자들은 민주주의 발전에는 그다지 기여하지 않았고, 민주주의 제도 및 민주주의 문화를 후퇴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초창기 세대의 선출직 독재자 거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민주적 제도들을 갉아먹으면서 관치 경제의 늪을 더욱 더 깊게 만들었다.


개발도상국들에서 제1세대 선출직 지도자들이 민주적 제도를 포용하는 데 실패했을 때, 국민들은 선출직 독재자에 대한 정치적 응전을 해나가면서 때때로 비민주적 대응책을 내놓기도 한다. 특히 대중적 지지로 선출된 독재자에게 정치적 권력을 빼앗긴 중산층 엘리트 계층은 민주주의 반대에 나서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태국, 이집트에서, 이들 엘리트 계층과 도시 중산층들은 선출직(그리고 상당한 결격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던) 지도자들을 상대로 대규모 폭력 시위를 일으켰다. 태국 중산층과 기득권 계층이 보여준 바 있듯이, 일부 사례들에선 군부의 개입과 "선출직 민주주의 종식"을 공공연히 요청하면서, 군부 개입(=쿠데타)을 위한 사전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2006년, 태국 군부는 군부 개입을 요구하며 방콕 사내를 마비시킨 ['옐로셔츠'(PAD)] 시위대에 부응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응답했다. 그리고 2009년에는 군부 지도자들이 --- 일설에 따르면 왕실의 동조 하에 --- 선출직 정부를 실각시키는 정계개편의 배후에서 중재를 하기도 했다. 2014년, 방콕에서 중산층 시위로 인한 정치적 소요가 발생하자 태국 군부는 다시금 쿠데타를 일으켜 응답하고, 보다 통제되고 덜 민주화된 형태의 통치체제로 이양할 것이란 약속을 한 상태이다.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군부 지도자 출신 지도자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총리는 태국에서 일정 기간 총선이 없을 가능성도 열어두었다. 더욱이 군사정권은 설령 태국이 선출직 민주주의 체제로 복귀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체제가 기존의 어떤 규준으로도 선출직 민주주의와 유사성이 없을 가능성까지도 시사했다.


하지만 이들 국가들에서 중산층과 기득권 세력이 탁신 같은 선출직 독재자를 전복시키는 데 조력을 했다고는 하지만, 뒤이어 들어선 권위주의 정권들이 경제의 많은 부분을 국가가 통제하는 일을 포기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태국의 경우, 군정 지도자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2014년 정권을 잡은 이후 탁신 및 잉락 정권이 시행했던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실각한 잉락 전 총리의 최대 지지층인 빈곤층과 하위 중산층이 군사정권에 반기를 들고 봉기하는 일을 방지하고자 함도 그 부분적인 이유이다. 실제로 쁘라윳 총리는 몇 가지 정책들을 제시했다. 여기에는 태국에 대한 외국인의 투자 장벽을 더욱 높이는 일도 포함되며, 이런 정책은 잉락 정권이 추진했던 정책보다도 더욱 관치의 늪이 깊어진 것이다.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태국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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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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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3.31 태국에 관해 근래 나온 연구성과 중에선
    매우 중요한 출판물로 보이는군요..

    조슈아 쿨란트칙..
    역시 이름 값을 하는군요..
  • 작성자빔빔 | 작성시간 16.03.3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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