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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론] 미국 기독교의 역사 (하)
History of Christianity in the United States
20세기 및 현재
4. 20세기의 미국 기독교
4.1. 사회적 복음 (사회 복음주의)
* 이 부분의 상세한 정보는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 사회복음) 항목을 참조하라. |
사회적 복음(Social Gospel)은 189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에 유행했다. 이들은 기독교 윤리를 사회적인 문제들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는데, 특히 경제적 불평등, 빈곤, 알콜중독, 범죄, 인종간 긴장, 슬럼화, 아동 노동, 불충분한 노조, 열악한 학교, 전쟁의 위험 등 사회정의와 관련된 이슈들에 관해 더욱 그러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적 복음주의자들은 <주기도문>(Lord's Prayer - Matthew 6:10)의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라는 내용을 적용하길 바랬다.(주34) 그들은 전형적인 후-천년주의(postmillennialism, 후천년설) 신봉자들이었다. 즉, 그들은 인류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사회적 악을 제거하지 않는 한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의 재림(Second Coming)은 올 수 없다고 믿었다.(주35)
사회적 복음은 평신도들보다는 목회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더 높았다.(주36) 사회 복음주의의 지도자들은 사회적 현안에 관해서는 전형적인 보수적 관점을 고수했지만, 그들 중 압도적인 다수는 진보 운동(Progressive Movement)의 자유주의 계파에 속했고, 자유주의 신학(Liberal Christianity 혹은 liberal theology) 계열이 대부분이었다. 사회 복음주의의 주요 지도자들로는 리차드 엘리(Richard T. Ely: 1854~1943), 조시아 스트롱(Josiah Strong: 1847~1916), 워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 1836~1918),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 1861~1918) 등이 있다.(주37)
사회 복음주의는 20세기 초에 그 절정에 달했다. 일부 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시킨 공포가 사회 복음주의 이념 및 인류의 영광된 미래에 대해 많은 환멸을 남겼다고 주장하는 반면,(주38) 일부 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실제로는 사회 복음주의자들의 개혁 노력을 촉진시켰다고 보기도 한다.(주39)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적 복음 운동이 쇠퇴한 원인에 관해서는 종종 신 정통주의(neo-orthodoxy: '위기의 신학'[theology of crisis] 혹은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으로도 불림)의 흥기를 거론하기도 한다.(주40) 사회 복음주의 이념들 가운데 많은 내용들은 1960년대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 시민권 운동)에서 다시 출현한다. "사회적 복음"의 원칙은 [1990년대에 출현한 기독교 자선 기업인] 빈곤퇴치 기독인들(Christians Against Poverty: CAP) 같은 보다 새로운 운동들에도 영감을 제공했다.(주41)
(주34) Cecelia Tichi, Civic passions: seven who launched progressive America (and what they teach us) (2009) p.221.
(주35)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전-천년주의(Premillennialism) 신학을 거부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사회적 악에 대처하기보다는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더 열정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주36) Jill K. Gill (2011). Embattled Ecumenism: 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the Vietnam War, and the Trials of the Protestant Left. Northern Illinois University Press. p.33.
(주37) Ronald C. White, Jr., Liberty and Justice for All: Racial Reform and the Social Gospel (1877-1925). (1990).
(주38) White (1990).
(주39) Willem A. Visser 't Hooft, The Background of the Social Gospel in America (1928).
(주40) Ahlstrom (1974).
(주41) Christopher H. Evans, The social gospel today (2001) p. 149. |
4.2. 스콥스 원숭이 재판
스콥스 원숭이 재판(Scopes Monkey Trial)은 1925년에 있었던 주요한 공개적 사건으로서, 근본주의자들이 <성서>에 관해 가진 믿음에 자유주의자가 도전을 하는 양상을 보인 재판이다. 이 사건은 원래 테네시(Tennessee) 주에서 시행된 <버틀러 법>(Butler Act) 위반에 관한 형사 재판이었다. <버틀러 법>은 어떠한 공립 학교도 "<성서>의 가르침인 신(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창조론)을 부인하는 이론을 가르치는 일"과 "인간이 보다 하등한 동물로부터 유래했다는 이론(=진화론)을 가르치는 일"을 불법으로 규정했다.(주42) 이 법률은 종종 진화론에 관해 조금이라도 가르치는 일을 금지한 것으로 해석됐다. 따라서 이 재판은 미국의 창조론-진화론 논쟁에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주43)
<버틀러 법>이 제정되자 '미국 시민자유연맹'(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ACLU)은 한 시범적 사건에 재정적인 후원을 했다. 테네시 주, 데이턴(Dayton)의 고등학교 교사였던 존 스콥스(John Scopes: 1900~1970)가 고의적으로 <버틀러 법>을 위반했던 것이다. 대단한 주목을 받은 이 사건은 당대의 출중한 변호사 2명이 서로를 상대로 공방을 펼치도록 만들었다. 검찰측 변호인은 3번이나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됐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 1860~1925)이었고, 스콥스의 변호인은 클래런스 대로우(Clarence Darrow: 1857~1938)였다. 스콥스는 [벌금 100달러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혐의가 기각된 셈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개신교) 근본주의 운동(Christian fundamentalism) 세력이 진화론 교육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함에 따라, 이 재판의 여파는 이후로도 몇년 동안 지속됐다.(주44)
(주42) <버틀러 법> 전문.
(주43) Constance Areson Clark, "Evolution for John Doe: Pictures, the Public, and the Scopes Trial Debate," Journal of American History (2001) 87#4. pp.1275~1303, JSTOR.
(주44) Michael Lienesch, In the Beginning: Fundamentalism, the Scopes Trial, and the Making of the Antievolution Movement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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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kepticism.org/경향신문) 진화론을 가르쳐 기소된 존 스콥스(가운데 흰색 셔츠)가 1925년 7월21일 ‘원숭이 재판’ 선고를 받기 위해 법정에 나와 있다. 그는 벌금 100달러를 선고받았다. 재판 이후에도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은 끊이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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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클래렌스 대로우(좌측)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우측)이 스콥스 재판 중 법정에서 환담을 나누고 있다. 당대 최고의 법조인이었던 두 사람은 이 사건에 평생에 걸쳐 축적한 법리적 철학과 정열을 모두 바쳤으며, 그 결과 브라이언은 이 재판이 끝난 후 며칠만에 사망하기도 했다. |
4.3. 복음주의
20세기에는 미국 및 세계의 여타 지역들에서 개신교(Protestantism) 교파들 내의 복음주의(Evangelicalism) 세력이 두드러진 증가를 보였다. 특히 교단 내 복음주의 파벌이 보다 배타적인 복음주의 성향을 지닌 동시에, 주류적인 자유주의 교회들이 쇠퇴하던 교파들의 경우엔 더욱 더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에 복음주의 교회 붐이 일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의 미국은 번영을 누렸고, 그러한 시대상은 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많은 수의 교회 건물들이 세워졌고, 복음주의 교회들의 활동도 물리적 팽창과 더불어 성장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빌리 그래함: 1918~ ) 같은 지도자들로 대변되는 복음주의 세력이 주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면서, 설교단을 두들겨대던 시골 전도사들의 이미지를 대체해나갔다. 새로운 원형은 점차 성장해나갔다.
'복음주의'라는 명칭은 대단히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때로는 빌리 그레이엄, 척 콜슨(Chuck Colson: 1931~2012), 버논 맥기(J. Vernon McGee) 같은 목사들을 가리키기도 했고, 때로는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 ) 전 대통령 같은 이들을 가리키기도 했다. 혹은 '고든-콘웰 신학대학교'(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보스톤)나 '트리니티 복음주의 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TEDS, 시카고) 같은 복음주의 기관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다.
전세계 복음주의 공동체 내에는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이 모든 복음주의자들을 묶어주는 연결고리는 분명하다. 몇가지만 언급하자면 <성서>를 "숭상하는 관점"(high view),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앙을 통해 얻은 은총을 통한 구원,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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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미국 남침례교의 복음주의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은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설교한 목회자로서, 그의 청중은 22억명에 달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닉슨 등 여러 미국 대통령들의 영적 자문이었고, 특히 중산층과 온건 보수파에 커다란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그의 유명 설교 장면들을 편집한 동영상. |
4.4. 오순절 교회
20세기의 기독교는 오순절 교회(Pentecostalism)의 부상과 발전과정을 지켜봤다. 오순절 운동은 경건주의(Pietism) 운동과 성결 운동(Holiness movement)에 그 근원을 두고 있고, 1906년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개최된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Azusa Street Revival, 아주사 대부흥회)의 도시 선교 집회들을 통해 부상했다.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을 이끈 것은 흑인 목사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 1970~1922)로서, 이 운동은 1906년 4월 14일 아프리카 감리교 감독회의 교회(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혹은 AME Church)에서 시작돼, 대략 1915년 무렵까지 지속됐다.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의 특징은 방언(speaking in tongues 혹은 glossolalia)을 동반하는 황홀경의 영적 체험, 드라마틱한 예배, 다인종의 어우러짐 등이었다. 이 운동은 오순절 교회가 부상하는 데 촉매제로 작용했고, 신의 기적적 임재함이 출현했었다고 믿는 체험자들을 통해 전파돼 나갔다.
오순절 운동의 많은 이들은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수용했지만, '환원주의'(restorationism, 회복주의)란 용어를 수용한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인 오순절 운동에는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1707~1788)가 주창한] 웨슬리주의(Wesleyanism)적 성결주의, [1858년 영국에서 시작된] 더 높은 삶 운동(Higher Life movement), 일체 오순절주의(Oneness Pentecostalism)라는 3가지 경향이 존재한다.(주45)
오순절 운동은 1960년대에 이미 존재하던 교단 내에 은사주의 운동(Charismatic movement, 성령쇄신운동)을 탄생시켰다. 오순절주의자들 중 일부는 '오순절주의'이란 용어와 '은사주의 운동'이란 용어를 상호 교환 가능한 용어로도 봤다. 오순절주의는 전세계적으로 2억5천만명 이상의 신도들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주46) 은사주의를 오순절주의에 포함시킬 경우, 오순절주의 신도 수는 전세계 기됵교 인구 20억명 중 거의 4분의1 수준으로까지 늘어나게 된다.(주47)
[역주] '한국 오순절교회 협의회'에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여의도 순복음) 등 7개 교단이 참여하고 있다.
(주45) Patterson, Eric; Rybarczyk, Edmund (2007). The Future of Pentecostalism in the United States. New York: Lexington Books. p.4.
(주46) BBC - Religion & Ethics (2007-06-20). "Pentecostalism".
(주47) Pew Forum on Religion and Public Life. "Pentecostalism". |
4.5. 로마 가톨릭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미국의 로마 가톨릭(천주교) 인구는 총인구의 6분의1 정도였다.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 가톨릭 교도들은 필리핀, 폴란드, 특히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라틴 아메리카) 등지에서 오고 있다. 이러한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와 다양성은 미국 가톨릭의 성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많은 교구들에서 미사가 영어 및 스페인어로 봉헌되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현상들 가운데 하나이다.
4.6. 동방 정교회
4.6.1. 개요
지난 100년간 그리스와 근동(Near East)에서 온 이민자들은 미국 및 여타 지역들에서 상당한 규모의 동방 정교회(Eastern Orthodox Church: 공식표기-Orthodox Catholic Church) 이민자 집단을 만들어냈다. 미국에는 그리스, 아랍, 세르비아, 알바니아,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정교회 국가들의 출신자들이 존재한다. 서구의 동방 정교회의 경우, 소위 '관할권주의'(jurisdictionalism)라는 것 때문에 분파들을 이루고 있다. 이 점은 각각의 정교회 운동에 통일된 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인종적 구성에 따라 집단화가 이뤄지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당 인종의 나이 든 신자들이 점점 더 많이 사망하면서, 교회들은 새로운 신자들을 위해 개방성을 보이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새 신자들은 각각의 정교회 집단에 입문하기 위해 언어와 문화를 공부하는 수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최근 많은 정교회 교회들이 해당 지역에 따라 현대 영어나 스페인어, 혹은 포르투갈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4.6.2. 러시아 정교회
1920년, [북미 교구의 주교였다가 모스크바 정교회의 수장이 된] 티혼(Patriarch Tikhon of Moscow: 1865~1925) 총대주교는 포고령(ukase)을 반포하여,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교구들 가운데 교회 최고 권위(즉, '최고 회의'[Holy Synod] 및 총대주교)의 통치행정으로부터 단절된 교구들은 최고 권위와의 관계가 정상화될 때까지 독자적으로 관리하라는 교시를 내렸다. 러시아 정교회 북미 교구('메트로폴리아'[Metropolia]라는 명칭으로 불림)는 이 포고령에 근거하여 사실상의 자치권을 행사하며 존재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일정 정도 행정적 혼돈이 초래되면서 북미에 있던 여타 국가들의 정교회 공동체들이 종교적 활동과 행정 면에서 각기 모국의 교회(본부)로 전향하면서, 러시아 정교회 북미 교구도 재정적 곤란을 겪었다.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 1917~1922)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군의 정교회 주교들이 러시아를 떠나 유고슬라비아(Yugoslavia)의 스렘스키 카블로브치(Sremski-Karlovci: 현재는 세르비아의 도시)에 모였고, 친-왕당파의 입장을 채택했다. 이 그룹은 자신들이 전체 "자유" 러시아 정교회를 대변하는 교구라고도 주장했다. 이들은 오늘날까지도 러시아 해외 이민자들 중 상당한 규모를 형성한 지역을 포함했지만, 1922년 티혼 총대주교의 명령에 따라 공식적으로 해체당했다. 티혼 총대주교는 플라톤(Platon)과 에플로기(Evlogy)를 각각 미국과 유럽의 주교들을 관장하는 수석 대주교(metropolitan bishop, 추기경)로 임명했다. 이들 두 사람은 스렘스키 카블로브치 교구와 계속해서 간헐적인 관계를 이어갔다.
전간기(Interwar period, 戰間期: [역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의 시기. 1918~1939)에 북미 교구는 훗날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Outside Russia: ROCOR)란 명칭으로 불리게 될 독립적인 교구와 병존하면서 때때로 협력을 했다. ROCOR는 '해외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 Church Abroad)라고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ROCOR이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뉴욕으로 본부를 옮기고 북미 전체의 러시아 정교회 파생 교단들에 관한 관할권을 주장했다가 실패하면서, 북미 교구와 ROCOR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러시아가 공산 정권의 치하에 놓이면서 북미 교구와 러시아 교회 사이에 일시적 단절이 있긴 했지만, 북미 교구는 원래 러시아 교회의 하위 교구로서 출발했고, 러시아 교회를 최고의 교회적 권위로 인정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북미의 양대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북미 교구는 1960년대 초에 모스크바 교회와 연락을 재개한 후, 1970년에는 자치독립권(autocephaly)을 인정받았고, 그에 따라 미국 정교회(Orthodox Church in America: OCA)라는 명칭을 사용했다.(주48)(주49)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통합 총대주교(Ecumenical Patriarchate of Constantinople)나 여타 일부 권위들은 OCA의 자치독립권을 공식적으로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미 교구의 자치독립권은 정교회 전체로 보면 보편적인 지위를 획득한 것은 아니다. 가령 미국에서 콘스탄티노플 통합 총대주교의 권위를 따르는 정교회 교단은 그리스 정교회 미국 대교구(Greek Orthodox Archdiocese of America)란 명칭으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 통합 총대주교, 모스크바 총대주교, 여타 교회적 권위들은 OCA 및 ROCOR과 영적 교감(communion)을 공유하고 있다. 이후 모스크바 총대주교는 미국과 캐나다의 교회들에 대한 이전의 교회법적 권리를 포기하게 됐다.
4.7. 전국적인 연합회
1908년에 결성된 '미국 연방 교회 협의회'(Federal Council of Churches: FCC)는 미국 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성장 중이던 교회 일치 운동(ecumenical movement 혹은 Ecumenism: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교회 운동)이 최초로 발현된 주요한 성과였다. FCC는 특히 빈곤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공공부문 및 민간부문 정책의 개혁에 적극적인 압력을 행사했고, '사회적 신조'(Social Creed)에 관한 포괄적이고도 광범위한 토론을 일으켰다. '사회적 신조' 논쟁은 미국인의 삶을 개선하려던 이들에게 인도주의적 "권리장전"(bill of rights)으로 기능했다.
1950년, 일반적으로 미국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NCC)로 불리는 '미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National Council of the Churches of Christ in the USA)가 출범하여 에큐메니칼 협력의 발전사에서 드라마틱한 팽창을 보여줬다. NCC는 FCC, '국제 종교교육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Religious Education), 그리고 여타 몇몇 교파 협의체들이 통합된 것이다. 오늘날 NCC는 미국 내 기독교 교파 35개, 회중교회 10만개, 소속 신자 450만명의 합동 기구가 되고 있다. NCC의 회원 단체에는 전통 개신교(Mainline Protestant: 주류 개신교), 정교회, '흑인 교회'(black church 혹은 African-American church), 복음주의, 역사적 평화 교회(historic peace churches)가 망라돼 있다. NCC는 민권 운동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1946년 <개역 성서>(Revised Standard Version of the Bible: RSV)(<구약> 부분은 1952년 발행) 발행을 촉진했고, 이어서 1989년 발행된 <신 개역 성서>(New Revised Standard Version: NRSV)의 발간도 주도했다. <신 개역 성서>는 1946년부터 최초로 발견된 <사해 문서>(Dead Sea Scrolls)의 연구결과가 최초로 반영된 영문 번역 성경이다. NCC의 본부는 뉴욕 시에 있지만, 공공정책 사무소를 워싱턴 D.C에 별도로 두고 있다. NCC는 수백개의 지역적 교회협의회들 및 전세계 여타 국가들의 교회협의회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 같은 단체들과 공제회적 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러한 단체들은 모두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1941년 9월에는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ire: 1906~2002)의 주도로 미국 기독교 교회 협의회(American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ACCC)가 결성됐고, 현재 7개 회원 단체들이 가입돼 있다. ACCC는 보다 전투적이고 근본주의적 성향을 지닌 기구로서 [특히 교회일치 운동을 반대하면서] NCC를 반대한다. ACCC의 본부는 펜실바니아(Pennsylvania) 주, 베슬리헴(Bethlehem)에 있다. ACCC는 국제 기독교 교회 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CCC)와 공제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 칼 매킨타이어는 '통합 행동을 위한 복음주의자들'(Evangelicals for United Action)도 자신의 운동에 초대했다. 하지만 그가 세인트 루이스(St. Louis)에서 만난 '통합 행동을 위한 복음주의자들' 대표들은 매킨타이어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진) 1957년 1월 라디오 설교 중인 칼 매킨타이어.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과 '전미 복음주의 협의회'(NAE) 등을 '용공'이라고 공격했던 극우 근본주의자였다. 그의 주장들은 한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장로교 등 일부 한국 개신교 교단의 교단 내 권력투쟁과 분열에도 일조하면서, 한국 현대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특히 한국 장로교 교단의 분열 과정을 보면, 매킨타이어의 주장을 따른 이들이 어이 없게도 그가 공격했던 NAE의 한국 지부를 자임했었다는 점에 이르면, 과거 한국 개신교계가 미국의 개신교에 얼마나 무지했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크세]
1941년 일리노이(Illinois) 주, 시카고(Chicago)에서는 라이트(Wright)를 의장으로 하는 한 위원회가 최초의 회의를 갖고 창립됐다. '복음주의자들의 통합 행동'을 위한 전국 대회를 1942년 4월 개최키로 예정했다. 1942년 4월 7~9일 세인트 루이스에는 147명이 모여 전미 복음주의 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NAE)를 창립했다. 최초에는 '통합 행동을 위한 전미 복음주의 협의회'(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for United Action)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곧 '전미 복음주의 협의회'(NAE)라는 짧은 명칭을 사용했다. 현재 NAE에는 60개 교파와 4만5천 곳의 교회들이 가입돼 있다. NAE의 본부는 워싱턴 D.C.에 위치한다. NAE는 세계 복음주의 협의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 WEF)와 공제회적 관계를 갖고 있다.
4.8. 오레곤 주 의무교육법
* 이 부분의 상세한 정보는 '오레곤 주 의무교육법'(Oregon Compulsory Education Act) 항목을 참조하라.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일부 주들은 이민자들 및 "외래적" 가치의 영향력을 걱정하여 공립학교 지원에 눈을 돌렸다. 각 주들은 공통적인 미국 문화를 증진하는 데 학교를 이용할 방안을 모색했다.
1922년 프리메이슨리(Freemasonry) 교단의 오레곤주 그랜드 롯지(Grand Lodge: [역주] '프리메이슨리'의 국가나 주별 단위 조직)는 취학연령에 있는 모든 아동들이 공립 학교에 출석토록 하는 법안의 제정을 후원했다. 당시 주지사는 KKK 단(Ku Klux Klan, 쿠 클럭스 클랜) 단원이자 '민주당' 소속이었던 월터 피어스(Walter M. Pierce: 1861~1954)였다. 피어스의 후원 하에 <의무교육법>(Compulsory Education Act)은 유권자 11만5,506명의 찬성과 10만3,685명의 반대로 통과됐다. 이 법의 주된 목표는 오레곤 주 내의 가톨릭 학교들을 폐교시키는 것이었지만, 여타 사립학교들과 군사학교들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후 위헌성 문제로 법원에 제소됐고, 결국 대법원의 피어스 대 수녀회 건 재판(Pierce v. Society of Sisters: 1925년)을 통해 이 법률은 효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폐기됐다.(주50)
오레곤 주의 <의무교육법>은 가톨릭 신자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켜, 가톨릭 교도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가톨릭 학교에 보낼 권리를 지키기 위해 지역 및 전국적 조직을 결성했다. 미국 대법원은 '피어스 대 수녀회 건 재판'의 판결문을 통해 <의무교육법>이 위헌이라고 판결했고, 이 판결은 "교구 학교 시스템의 마그나 카르타(대헌장)"(the Magna Carta of the parochial school system)라는 별칭을 얻게 됐다.
4.9. 신 정통주의
새로운 대안들 중 별로 많은 인기를 얻지 못한 것으로는 신 정통주의(neo-orthodoxy: '위기의 신학'[theology of crisis] 혹은 '변증법적 신학'[dialectical theology]으로도 불림)가 있다. '신 정통주의'는 자유주의 신학보다는 성서에 대해 보다 고도의 위상을 부여했지만, 성서적 영감을 받은 이론들을 엄밀하게 하는 작업을 기독교 신앙의 교설들과 연결짓지는 않았다. 신 정통주의 진영의 사상가들이 무언가 특별한 점이 있다면, 트집잡기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지녀야 할 의무로부터 산란되게 만드는 위험한 것이라고 거부한 일 정도일 것이다. 신 정통주의는 추론 과정에서 대단히 맥락 의존적 방식을 사용하여, 미국 사상가들은 그들이 주장한 주된 전제들을 대단히 불가해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일도 많았다.
4.10. 민권 운동
흑인 교회들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으로서 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흑인 교회의 역사는 흑인 공동체의 구심점이자 흑인과 백인 세계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으므로, 흑인 교회들에게 민권 운동의 목표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1968, 사진) 목사는 민권 운동에 참여했던 여러 주목할만한 흑인 목사들 중 한명일 뿐이다. 킹 목사는 1957년 남부 기독교 지도자 회의(Southern Christian Leadership Conference: SCLC)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그는 비폭력 불복종운동을 통해 분리 및 인종 차별 종식을 위한 노력을 펼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1968년 암살당했다.
민권운동에 참여했던 그 밖의 주요한 목회자 활동가들로는 랠프 아버나티(Ralph David Abernathy, Sr.: 1926~1990), 존 버나드 리(John Bernard Lee: 1908~1981), 프레드 셔틀워스(Frederick Lee "Fred" Shuttlesworth: 1922~2011), C. T. 비비안(Cordy Tindell "C. T." Vivian: 1924~ ), 제시 잭슨(Jesse Louis Jackson, Sr.: 1941~ )을 들 수 있다.(주51) 이들은 1950년대 및 1960년대에 진행된 이 운동의 말기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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