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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분석철학 : 발전사를 중심으로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16.01.17|조회수1,115 목록 댓글 0


본 게시물은 한국어 위키백과의 '분석철학' 항목을 옮겨와서, 원어 및 링크를 첨가하고 가독성을 높이도록 윤문을 가한 것이다. (크세)




[개관] 분석철학 : 발전사를 중심으로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分析哲學: ☞ 영문판)은 철학 연구에 있어서 언어 분석의 방법이나 기호 논리의 활용이 불가결하다고 믿는 이들의 철학을 총칭한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철학은 특정한 인생관이나 세계관을 토대로 고정된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학파가 아니라, 철학하는 방법적 경향이 유사한 학파를 지칭한다.



(사진) 비트겐슈타인  




시대적 구분


현대 분석철학이 발전되어 온 과정은 4기로 구분하여 논할 수 있다.




1기(1900-1920년 전후)


하나의 운동으로서 '철학적 분석'(philosophical analysis)의 시작을 알린 것은 영국의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과 G. E. 무어(G. E. Moore: 1873~1953)였다. 이들은 헤겔(G. W. F. Hegel: 1770~1831)의 영향을 받은 브래들리(F. H. Bradley: 1846~1924) 류의 '신관념론'(혹은 영국 관념론[British idealism])을 비판했다.


그러나 러셀이 자신의 논문 <지칭에 관하여>(On Denoting)에서 논리적 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고틀롭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가 이뤄놓은 선구적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프레게는 수학의 기초를 산술(=산수)에서 찾으려 했으며, 수학적 언어의 명료화를 위해서 '기호논리학'(symbolic logic)을 제안했다. 그러나 프레게는 이 기호논리학이 단순히 수학적 언어의 명료화를 위한 도구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명료한 철학적, 과학적 사고의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고, 그러한 믿음에 근거해 '명제'(proposition)와 '의미'(meaning)에 관한 철학적 이론을 상당 부분 개진해 놓았다. 따라서 언어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철학적 문제를 해결한다는 언어 분석의 방법론은 프레게와 러셀을 통해 비로소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이것이 초기 분석철학의 토대이자 근간이 되었다.


초기 분석철학의 근간은 러셀과 무어의 신관념론 비판, 무어의 신실재론, 러셀의 '논리적 분석'(logical analysis)과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 등이지만, 다른 한편 이 시기에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전개됐던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39~1914)의 기호 논리와 존 듀이(John Dewey: 1859~1952)의 '프래그머티즘'(pragmatism, 실용주의)도 훗날 분석철학에 영감을 준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20세기 초반의 미국 철학이 콰인(Willard Van Orman Quine: 1908~2000)과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 1926~   ) 등 20세기 중반의 분석철학 발전을 주도한 미국 철학자들을 통해 분석철학의 흐름에 통합됐기 때문이다.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프레게로부터 훈련을 받았고, 그의 소개로 영국으로 건너가 러셀과 무어에게 교육을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1기가 끝날 무렵 <논리철학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論理哲學論考: 1921년)를 통해서 분석철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 본인은 러셀이나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가 자신의 철학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논리철학논고>(역칭: 논고)가 이 시기에 철학적 사조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2기(1920-1945년 전후)


분석철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비엔나 학파'(Vienna Circle, Wiener Kreis, 빈 학파)가 제창한 '논리실증주의'(혹은 '논리경험주의'[logical empiricism])의 단계에서다. '비엔나 학파'는 1920년대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리츠 슐릭(Moritz Schlick, 슐리크: 1882~1936) 지도로 결성됐고, 루돌프 카르납(Rudolf Carnap: 1891~1970) 등이 주축을 이룬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집단이다. 또한 한스 라이헨바흐(Hans Reichenbach, 라이헨바하: 1891~1953)가 주축이 된 '베를린 학파'(Berlin Circle)도 이들과 모토를 같이 하였다.


'논리실증주의'는 ['경험론'(empiricism)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의 철학적 정신을 충실히 이어받아, 실증적(과학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형이상학'(metaphysics, 形而上學)을 배격하고, 의미 있는 과학 언어의 내용은 경험적이어야 하고 그 형식은 논리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이들이 생각한 철학 역시 이러한 과학적 언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었다. 비엔나 학파는 국제 학술회의들을 주최하고 학회지를 발행하며 공동 연구를 진행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부터는 나치 정권의 위협 때문에 학문 연구가 중단됐고, 논리실증주의자들 대부분이 유럽을 떠나 미국과 영국으로 망명했다. 특히 시카고 대학에 자리잡은 카르납은 미국에서 논리 실증주의가 뿌리 내리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논리 실증주의의 성서로 받들었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이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1921년에 <논고> 집필을 끝냈던 비트겐슈타인은, 이 2기의 시기에 자신의 후기 철학으로 전환하는 시기를 가졌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부터 새로운 철학적 관점을 내보이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의 사상은 그의 사후에 출판된 유작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 약칭: 탐구)(1953년)에 실렸다.




3기(1945-1960년 전후)


영미의 대학을 중심으로 분석철학이 본격적으로 강단을 지배하며 주류 철학이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이다(편집자 주: 하지만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에서 '분석철학'이 제도권의 주류 철학이 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논리 실증주의의 활동이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 논리철학(philosophy of logic),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 인식론(epistemology) 등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고 발전돼 가는 과정으로도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논리 실증주의 이념에 대한 결정적 비판과 새로운 조류가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하면서 여러 갈래로 분기가 이루어진 시기다.


영국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를 통해 새로운 철학적 접근법을 제시하였고, 오스틴(J. L. Austin: 1911~1960)과 길버트 라일(Gilbert Ryle: 1900~1976) 등도 논리적인 과학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 일상언어(ordinary language)의 분석을 통해 철학적 논의를 진행시켰다.


미국에서 논리 실증주의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것은 카르납의 제자인 논리학자 겸 철학자 콰인이었다. 그의 논문 <경험주의의 두 가지 도그마>(Two Dogmas of Empiricism)(1951년)는 논리 실증주의의 '검증주의' 의미론의 토대에 일격을 가한 것이었는데, 그는 <말과 대상>(Word and Object)(1960년), <존재론적 상대성 및 여타 논문집>(Ontological Relativity and Other Essays)(1969년) 등을 통해 '신-프래그머티즘'(neopragmatism, 혹은 linguistic pragmatism is)이라 불릴 만한 철학을 미국 철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한편, 칼 포퍼(Karl Popper: 1902~1994)는 이미 1930년대에 논리 실증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했는데, 그가 자신의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를 더욱 발전시킨 것도 이 시기의 주요한 경향으로 볼 수 있다.




4기(1960-1990년대 후반)


분석철학은 이전까지 전통적인 철학에 대한 파괴적 논제를 내세우는 데 주력했지만, 이 시기에 들어와 분석철학은 전통적인 철학과의 친화력과 연속성을 회복해나가면서, 대화적인 철학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였다.


이 시기의 흐름은 "흄 철학의 지배에서 칸트 철학으로의 복귀"로 그 대강을 설명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윌프리드 셀라스(Wilfrid Sellars: 1912~1989) 등은 콰인을 비판하면서 흄 식의 좁은 경험주의가 아니라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철학이 더욱 유력한 철학적 전통임을 선구적으로 강조했다. 이러한 흐름은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 존 맥도웰(John McDowell: 1942~   ), 로버트 브랜덤(Robert Brandom: 1950~   ) 등을 통해 유럽 철학(하이데거, 헤겔 등)의 통찰을 분석철학 영감의 원천이자 대화 상대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다.


논리적 실증주의와 콰인 류의 흄 주의에 대한 반격은 콰인의 제자 도널드 데이빗슨(Donald Davidson: 1917~2003)이 '칸트의 초월론'(선험철학[transcendental idealism])을 통해 언어철학을 발전시킨 것에서도 드러난다. 솔 크립키(Saul Kripke: 1940~   )나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 논의 역시 1960년대 이후 언어철학의 선회를 가져온 결정적인 기여로 볼 수 있다.(주1)


 (주1) 김재권, "최근 철학의 칸트적 경향", 《관념론과 실재론》(한국분석철학회 편, 철학과현실사, 1993)등을 참조.



'칸트주의'의 도래는 윤리학(ethics 혹은 '도덕철학'[moral philosophy])에 대한 언어적, 논리적 분석인 메타 윤리학(meta-ethics)이 축소되고 규범 윤리학(normative ethics)이 다시금 복귀하는 것에서도 나타났다. <정의론>(A Theory of Justice)(1971년)의 저자 존 롤즈(John Rawls, 존 롤스: 1921~2002)는 윤리학에서 칸트주의를 복귀시킨 가장 큰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는 최근 의료윤리(medical ethics)를 중심으로 새로운 상황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해, 구체적인 문제들에 윤리적 규범을 적용할 수 있는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이 시기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토마스 쿤(Thomas Kuhn: 1922~1996)의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1962년)를 빼놓을 수 없다. 논리 실증주의적인 과학관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은 이미 1930년대부터 가스똥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나 칼 포퍼에 의해 진행됐지만, 토마스 쿤의 역사적인 과학철학적 접근이 1960년대에 가져온 혁명적 영향에는 비할 수 없었다.


논리적 분석에 치중했던 규범적 과학철학이 "패러다임"(paradigm)으로 지칭되는 역사적 상대성의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전통적인 관점을 유연하게 수정하여 대처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아직도 규범적 전통 안에 있는 임레 레카토슈(Imre Lakatos: 1922~1974) 류의 과학철학부터 시작하여, 과학의 인지적 과정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자연주의(naturalism)적 접근법, 그리고 더 나아가 역사적 상대성의 논제를 통해 규범성 자체를 파괴적으로 거부하는 파울 파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 1924~1994)의 '인식론적 아나키즘'(epistemological anarchis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향으로의 발전과 논쟁이 벌어졌다. 1980년대 이후에는 '규범성'과 '역사성'의 통합을 꾀하면서 실험과 과학자 사회, 과학 제도 등 실제 과학 연구에 대한 실증적인 통찰을 토대로 한 아이언 해킹 식의 접근법도 나타난다.


장 급진적으로 분석철학의 변화를 주도하고 단언한 인물로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 1931~2007)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영미의 분석적 철학과 유럽의 대화적 철학의 전통이 서로 교류하고 대화를 나누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고, 특히 영미 분석철학의 전통이 아카데미의 협소한 전문가주의에 매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분석철학은 한편으로는 칸트와 헤겔 등 독일 관념론과 진지하게 조우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의 동시대적 철학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스 및 중세 철학의 철학사적 연구가 분석철학의 방법론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거꾸로 분석철학의 논의에 영향을 끼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로티의 말대로 '분석'(analysis)은 하나의 스타일이며, 철학에는 다양한 스타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영미의 많은 분석철학자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어철학과 과학철학, 그리고 분석


'분석철학'은 초창기엔 '논리 실증주의'(논리 경험주의)와 동일시됐다. 이에 따르면 과학적 명제가 유의미할 수 있는 조건은 바로 (1)경험적, 실증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고, (2)논리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논리적인 언어 분석을 중시한다는 이유에서) '분석철학'을 '언어철학'으로 부르거나, (과학적 명제의 분석을 중시한다는 이유에서) '과학철학'이란 명칭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석철학, 더 나아가 철학 일반에 대한 오해와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엄밀히 보면 '분석철학'은 철학의 학파적 성격을 지닌 데 반해 '과학철학'은 철학의 한 '분과'를 지시하므로 양자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런 명칭의 혼란은 '언어적 철학'(Linguistic philosophy.)이나 '과학적 철학'(scientific philosophy)이란 표현을 '언어철학'(philosophy of language)이나 '과학철학'(philosophy of science)과 혼동하면서 생겨난 오해일 뿐이다.


'언어적 철학'이나 '과학적 철학'은 분석철학의 방법론이나 성격을 다른 측면에서 강조한 명칭이다. 그러나 '분석철학'이라고 해서 (과학적 명제에 대한 언어적) '분석'만을 주된 방법론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일찍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분석의 방법' 못지않게 '종합'과 '통일'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 1882~1945), 카르납, 찰스 모리스(Charles W. Morris: 1901~1979)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 코펜하겐, 케임브리지, 보스턴 등지에서 '통일과학(Einheitswissenschaft, Unified Science)에 관한 국제회의'를 다섯 차례나 연차적으로 개최한 바 있으며, 노이라트는 193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국제통일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38년부터 <통일과학 백과전서>(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IEUS)라는 총서를 기획, 미국에서 이를 계속 발간하였다. 노이라트가 편집하던 <통일과학 논단>은 그가 사망한 직후(1946), <종합>(Synthese)이라는 이름으로 네덜란드에서 속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인식론, 방법론 및 과학철학에 관한 세계 굴지의 잡지인 가 라이렐 출판사에 의해 네덜란드와 미국 보스턴에서 출간되고 있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특히 1959년부터 현재까지 <종합총서>(Synthese Library)가 계속 출간되어 분석철학 4기의 특징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오늘의 분석철학을 대표하는 잡지나 총서 중 하나가 '종합'이란 명칭을 지니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분석철학이 편협하게 일방적으로 '분석'만을 일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M.K. 뮤니츠, 《현대분석철학》, 박영태 번역, 서광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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