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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관습과 민족

[(번역)][분석] 미얀마 불교 고승 시타구 사야도의 비-불교도에 대한 폭력 옹호 발언의 의미

작성자울트라-노마드|작성시간17.11.13|조회수803 목록 댓글 6

(출처) 호주국립대학(ANU) 발행 온라인 저널 <뉴 만달라>(New Mandala) 2017-11-13  (번역) 크메르의 세계



[분석] 미얀마 불교 고승 시타구 사야도의 비-불교도에 대한 폭력 옹호 발언의 의미

Sitagu Sayadaw and justifiable evils in Buddhism



기고 : 폴 풀러 Paul Fuller 

영국 카디프 대학(Cardiff University) 불교학 강사




(사진: @sayadawsitagu on Facebook) 시타구 사야도 승려가 10월 30일 설법을 하기 위해 '바인나웅 부대 겸 군사학교'(Bayintnaung garrison and military training school) 강당에 입장하고 있다.




시타구 사야도(Sitagu Sayadaw: 1937년생)는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중 한명이다. 그는 설법과 자선사업으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따라서 그가 지난 10월 30일 까인 주(Kayin State)에서 특별히 충격적인 메세지를 담은 설법을 했을 때, 미얀마 국내는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당시 그의 설법은 불교도가 아닌 사람들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거나, 혹은 전혀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근거를 들면서, 그들을 죽이는 것이 정당화될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설법 내용에 관해선 온라인 상에서 많은 토론이 있었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는, 시타구 사야도가 비-불교도는 인간보다 낮은 존재들이며, 그들을 해치는 것은 용인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는 견해이다. 시타구 사야도처럼 그토록 존경받는 승려가 어떻게 그런 메세지로 설법을 할 수 있었던 것일까?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설법이 무슬림 소수민족 로힝야족(Rohingyas)과의 갈등에 참여할 수도 있는 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이다. 그런 방식의 해석은 로힝야족 학살에 대한 불교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도 있는 일이다.


(동영상) 시타구 사야도 승려의 2017년 10월 30일 설법 모습. 총 세 시간의 설법이었지만, 이 동영상에는 문제의 발언을 포함하는 부분 12분 정도를 담고 있다. 이 글의 저자 폴 풀러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 발언 내용의 버마어 녹취 및 자신의 영문 번역을 공개해두었다.

 

 

실제로 시타구 사야도의 설법은 '바인나웅 부대 겸 군사학교'(Bayintnaung garrison and military training school)에서 군인들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그는 미얀마 군대의 행동과 군인들의 국가 수호 의무 실천의 결과 사이의 관계를 고찰하는 가운데, 5세기 스리랑카(Sri Lanka)의 연대기 <마하왕사>(Mahāvaṃsa: 大史)를 인용했다. 또한 그는 <마하왕사> 제25장 "둣타가마니 왕의 승리"(The Victory of Dutthagamani)에 실린 악명높은 구절도 인용했다. 문제의 구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이해하는 내용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해당 구절의 해석 중 하나는 "불교도도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위선적이고 이중잣대를 갖거나 자기 주장만 할 수 있다"고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필자는 둣타가마니 편의 해당 구절이 지닌 주된 의도가 그 자체로 불교도가 아닌 살아있는 존재의 살해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제안하고자 한다. 물론 우리가 그러한 논리에 합의를 보지 못할 수는 있겠지만, 그 문장의 요점은 불교를 수호하거나 방어, 혹은 "불법(붓다의 가르침)을 영광스럽게 만들" 의도로 행한 행동은 '불살생'(不殺生) 계율 같은 보다 수용할만한 윤리적 규정보다 우선 순위를 지닌다는 것이다. '담마'(Dhamma, 法: 불교의 진리)의 수호 행위는 일반적인 '까르마'(karma, 業)의 작용을 피해나간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는 과보(결과)를 갖지만, 의도가 고귀한 것이라면 그런 행위들(불법의 수호)의 과보가 경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데, 필자는 존경받는 사야도 승려가 그런 극단적인 입장에서 해당 구절을 인용한 일이 현명하지 못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두고자 한다. 또한 해당 구절은 폭력의 사용에 관한 주류적인 불교 사상과 매우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는 문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불교의 수호와 보존에 '해로운 업'(버마어: arkhutho, 빨리어: akusala-kamma, 不善業)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묘사하는 데 해당 문장을 이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해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마하왕사>에 서술된 유명한 일화에서, 둣타가마니 왕은 수많은 사람이 살해된 기나긴 유혈 전쟁을 벌이는 동안 극단적인 불쾌감과 후회로 고통받았다. 그러자 초능력을 통해 그의 정신적 고통을 인지한 8인의 아라한(Arahant, 阿羅漢)이 둣타가마니 왕을 찾아 떠났다. 아라한들은 초능력을 이용해 삐얀구-디빠(Piyangudipa) 섬을 떠나 허공을 날아 국왕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하지만 둣타가마니 왕은 아라한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떻게 제게 편안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 존자들이시여. 저야말로 수백만의 학살을 일으킨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아라한들은 유명한 조언을 남긴다.


"이 행동으로 인해 귀하가 천상으로 가는 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오, 군주시여. 여기서 귀하가 죽일 수 있는 자는 온전한 인간과 반쪽 짜리 인간 뿐입니다. 온전한 인간은 (3가지) 안식처를 찾은 자이고, 반쪽 짜리 인간은 스스로 5계(戒)를 수지한 자입니다. 나머지는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 邪見)를 지닌] 불신자(不信者)들과 사악한 삶을 산 자들이며, 그들은 짐승보다 더 많이 존중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여러 방법을 통해 불법(佛法: 불교의 진리)을 영광스럽게 하셨으니, 오, 통치자시여, 부디 그 마음으로부터 걱정을 떨쳐버리소서."


사야도의 설법 및 그가 발딛고 있는 원전 텍스트에는 "불교도"나 "비-불교도"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빨리어나 버마어로도 그에 해당하는 용어는 없다. 그러나 시타구 사야도의 설법 내용을 보도한 많은 뉴스들은 그런 메세지를 담고 있다고 암시하면서 일정 정도 과장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해당 구절의 외관상 의미가 다른 '살아있는 존재'(有情)를 군사적으로 살상한 데 대한 과보를 사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는 것이다. 시타구 사야도가 그 문장을 인용한 것이 바로 그런 태도를 보인 것이다.


<마하왕사>의 일화는 둣타가마니 왕의 후회를 분석한 것이다. 둣타가마니는 수백만 명의 죽음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후회했다. 그는 자신이 매우 파괴적인 '해로운 업'(버마어: arkhutho, 빨리어: akusala-kamma, 不善業)을 저질렀다고 여겼다. 아라한들은 위로의 말을 통해 그런 행위가 예견되는 과보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수백만 명의 '인간'(manussa)을 죽인 '행위', 즉 '업'(kamma)도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상태 때문에 부정적 과보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 아라한들의 분석이다. 아라한들은 그들이 지닌 '최상의 지혜'(abhiññā, 增智)를 통해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의 존재론적, 영적 본성에 관한 판단을 내렸다. [독일의 동양학/불교학자] 빌헬름 가이거(Wilhelm Geiger: 1856~1943)의 번역문에서는 둣타가마니에 의한 희생자들을 "불신자들"(unbelievers)로 번역했는데, 보다 정확히는 그들이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 邪見)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사악한 삶을 산 자들'(dussilā, 惡戒者)이며 윤리적 행위를 실천하지 않은 자들이다. <마하왕사>의 논리에서, 그들은 '인간'(human beings)이 아니라 '짐승 같은 자들'(pasusamā)이다.


그렇다면 <마하왕사>에서 '인간'은 어떻게 묘사돼 있을까? 온전한 인간은 불(Buddha: 붓다), 법(Dhamma: 가르침), 승(Sangha: 승단) [즉 '삼보'(三寶)에서] 안식처를 구한 이들이다. 둘째로, 아라한들이 설명한 맥락에서 보면, 인간은 '5계'(pañcasīla)를 실천해야만 한다. 이것은 재가자(속인)를 위한 다섯 가지 윤리적 실천 덕목, 즉 불살생, 불투도, 불음행, 불망어, 불음주이다. 따라서 아라한들의 조언에서 '5계를 수지하지 않는 자들'은 '반쪽 짜리 인간'이 된다.


이러한 관점이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라고 가정하면 명백한 잘못이다. 아라한들은 둣타가마니를 위로한다는 특정한 임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내용을 폭력에 대한 정당화로 이용한다면, 명백하게도 원전의 오독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함축은, 아라한들의 추론이 불교를 영예롭게 하는 일이 옳고 그름에 관한 보다 자연적인 관념을 앞선다고 하는 점이다. 둣타가마니는 "붓다의 가르침을 영예롭게"(bahudhā buddhasāsana) 했다. 그것이 바로 <마하왕사>의 보다 앞선 장들에서 나타나는 주제이다. <마하왕사>가 불교 수호 및 그를 위한 폭력의 사용에 관한 독설에 찬 혼합물이란 점은 분명하다.


"[국가] 주권의 영광을 위한 일은 이곳 내 땅의 일이 아니다. 나의 고군분투는 정각자(Sambuddha, 正覺者)의 가르침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


시타구 사야도는 무엇을 위해 이 악명 높은 구절을 인용한 것일까? (흥미로운 점은 사야도 역시 그의 설법에서 자신이 주창하는 메세지의 민감함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아라한들이 말한 바"라고 지적하여, 해당 내용을 가르치는 이가 자신이 아님을 반복적으로 암시했다.)


최근 미얀마에서 진행되는 불교와 국가 정체성 사이의 관계에 관한 담론에서, '불교(sāsana)의 수호'는 그 핵심 내용이었다. '불교의 수호'는 미얀마 불교 민족주의자들의 시위 구호이고, '버마인다움'이 의미하는 바의 핵심 요소이다. 쇼비니즘(chauvinism: [역주] 광신적 애국주의, 배외주의) 형식의 불교가 지지세력을 얻고 있는 여러 다른 국가들에서도 불교와 국가정체성이 문제가 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국가정체성이 "국가, 언어, 종교"(amyo-barthar-tharthanar)라는 이념을 둘러싸고 첨예화되고 있다. (역주: 같은 상좌부 불교 국가인 태국과 캄보디아는 공히 '국가, 종교, 국왕'이란 모토를 헌법에 규정하고 있다) 이곳에선 불교가 위협을 받고 있고 보호받을 필요가 있다는 관념이 존재한다. 그리고 항상 그러한 위협이 '증가하는 무슬림 인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하왕사>의 구절은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항하는 입장이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불교 근본주의 지도자 위라투(Wirathu: 1968년생) 승려가 이끄는 단체] '마바타'(Ma Ba Tha: 인종종교수호위원회)는 최근  <민족과 종교 보호에 관한 4대 법안> 제정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데, 이 법안들 역시 그와 같은 관념(=무슬림 인구가 증가한다는 생각)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시타구 사야도가 <마하왕사>와 둣타가마니 왕의 이야기를 자신이 설법한 방식으로 사용한 일도 그다지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이 촉발한 분노의 많은 부분들이 정당화된다. 그 메세지는 불교의 근본 원칙들 중 많은 것과 모순된다. 그러나 이것이 <마하왕사>에서 주장하는 바를 떨쳐버리진 못할 것이다. <마하왕사>는 한 가지를 말하고 있다. 즉, 때대로 불교 전통을 수호하는 일이 윤리적 우려들보다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적 가르침의 초점은 언제나 깨달음의 획득과 관련이 있다. 불교도의 길은 윤리적 행동 및 신체(身), 언어(口), 마음(意)의 '3업'(三業)을 통한 건전한 행위의 선양에 착수함으로써 시작된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불교 승려들이 <마하왕사>란 문헌을 폭력의 정당화에 사용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자비와 친절에 기반을 둔 보다 사랑받고 친숙하던 버마 불교로부터, 현대 미얀마의 민족주의적 불교가 얼마나 멀리 떠어져나왔는지에 관해, [극소수지만] 버마인 불교 공동체 스스로의 반성을 촉발시켰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시타구 사야도의 설법은 우리로 하여금 미얀마 불교의 본성에 관해 우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관념들에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사야도 승려의 명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사야도 승려가 로힝야족에 대한 모든 형태의 폭력을 포기하게 만들 것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팩트는 그가 도리어 우리에게 정반대의 경각심을 일깨워줬다는 것이다. 즉, 미얀마에서 이전보다 더욱 불관용적인 형태의 불교가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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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13 더 이상 종교마저 필요없는 시대가 됐는데,
    역사 공부도 팩트나 지정학 위주로나 공부해야지,
    역사적 인물들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교훈을 얻거나 논하는 것도
    어찌보면 부질없는 일이 돼버린 것 같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민주주의"나 "인권" 개념조차 없던 시대의 인물들이란 것이죠..
    즉, 2017년의 관점에서 보면 이미 대부분은 "원시인"들이죠..

    또한 어찌보면 지금 인류의 최대 문제점 중 하나는..
    자신들이 이미 "2010년 이전의 인류"와는 "새로운 생물종"으로 집단 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전의 그 인류와 동일한 인류라고 착각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새로운 현생 인류인 우리에겐 새로운 전범(norm)이 필요하죠..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13 가만히 보면
    "호국불교"(폭력의 정당화)가 전세계 불교의 공통적 요소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21세기는 이제
    (그나마 이성적 종교였다고 생각되던) 불교마저도 떠나야 하는
    "상식의 종교화"를 목표로 하는 시대에 도달했다고 봅니다..

    향후 50년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6천만명/현재 인구 기준으로 1억5천만?)보다 많은 사람이 죽겠지만,
    세계대전 이후 세상의 상식이 발전했듯이,
    그 이후엔 분명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다만 그런 세상을 우리가 살아서 볼 수 없다는 게 흠이긴 합니다만... ㅠㅠ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13 트위터에서 한 트친 님께서 올린 다음과 같은 멘션이 참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전부터 주장해온 일이지만,
    '사상적 광기' 에게 '종교' 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만으로,
    일체의 고찰이나 반박의 가치도 없는 광기가
    순식간에 학술적으로 해결해야할 모순이나 과제라는 특혜적 지위가 주어짐.
    인류는 이 멍청한 짓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이제 저는 새로운 관점에서 새로운 시대를 살아볼까 합니다..
    언제까지 살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죠..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13 어찌됐든,
    최근 들어 극소수이긴 하지만
    로힝야족의 인권보호를 외치는
    주류 버마족 불교도 출신 인권운동가들이 용감하게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위안이군요..
  •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7.11.15 "종교개혁 500주년"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군요..

    지난 500년 역사가 아마도
    "종교와 철학(과학적 세계관)이 서로 간섭 없는 별거를 정착시키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정식으로 이혼하고 둘 중 하나가 서브컬처의 지위로 도태되는 시대로 전환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시대는 그 과도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과도기"란 항상 혼란하기 마련이죠..
    도태되는 쪽이 최후의 저항을 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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