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크세 연구회'가 웹진 '신대승 네트워크' 창간호(2016년 4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원본은 다음과 같은 위치에 게시되어 있는데, 본 카페에서는 한 편으로 통합 정리하고 관련 링크를 복원했다. - 제1편 http://webzine.newbuddha.org/article/1 - 제2편 http://webzine.newbuddha.org/article/25 |
[분석 보고서] 태국 불교의 승왕 추대 파동과 '국교화' 운동의 광기
좌절한 양극화 사회의 기성 종교가 벌이는 현실 정치의 대리전
글/편집 : 크세 연구회
('크세 연구회'는 2009년 결성된 동남아시아 전문 온라인 연구공동체이다.)
군사정권 치하의 태국이 사회 경제적 활력을 상실하면서 비교적 조용한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불교계만큼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시끄럽다. 태국 불교의 수장인 승왕(Supreme Patriarch, 쌍카랏[สังฆราช, sangha-raja]) 선출을 두고 발생한 이 분규는, 급기야 2월16일(월)에는 승려들의 시위와 몸싸움 모습까지 노출하면서 국제언론의 주목도 받았다. 이들은 "정부는 종교에 개입하지 말고" 승단이 선출한 승왕 후보자의 인준절차를 조속히 시행하라고 요구했다.
(동영상) 2월16일(월) 솜뎃 추웡 현 승왕 권한대행의 신속한 공식 인준을 요구하는 승려들이 방콕 인근 나콘빠톰에 위치한 불교 공원에서 집회를 하려다, 군인들의 제지를 받자 공원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 집회에 참가한 승려들의 주축은 '왓 탐마까이' 사찰 소속 승려들이었다.
(사진: Reuters) 이날 '푸타몬톤 불교공원'(Phutthamonthon Buddhist park)에 모여든 승려들와 속인들은 총 1,200여명 정도였고, 이들은 '태국 승가재가동맹'(Sangha and Buddhists Alliance of Thailand: SBAT)이란 단체명을 사용했다. 이 동맹은 '태국 불교수호센터'(Buddhism Protection Centre of Thailand: BPCT)와 '불교학자 연합회'(Association of Academics for Buddhism)가 공동 구성한 것이었다.
태국에선 보기 드문 승려들의 몸싸움 모습으로 인해 승왕 임명 문제가 국제적 관심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 내막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다.
태국의 '승왕'(쌍까랏)은 남방상좌부(일명: 소승불교) 전통의 양대 종단인 마하 니까야(Maha Nikaya)와 탐마윳 니까야(Dhammayuttika Nikaya, 담마윳띠까) 모두를 대표하며 30만명에 달하는 태국 승려 전체의 수장으로서, <승가법>에 따라 '승가 최고회의'(Supreme Sangha Council: SSC)에서 추대된 후, 총리의 임명 제청과 국왕의 인준 절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임명된다.
태국 사회는 최근 몇년 간 승왕직을 둘러싼 논란에 휩싸여 있었다. 2013년 10월 세수 100세로 입적한 니야나상와라 수와다나(Nyanasamvara Suvaddhana, 솜뎃 프라 냐냐상완[สมเด็จพระญาณสังวร]: 1913~2013) 승왕은 무려 24년간 승왕의 지위에 있었다. 하지만 니야나상와라 승왕은 말년에 직무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어, 2004년부터는 솜뎃 끼야우(Somdet Kiaw: 1928~2013) 스님이 직무대행을 맡았지만, 그는 니야나상와라 승왕보다 2달 앞선 시점인 2013년 8월에 사망했다.
솜뎃 끼야우 스님의 뒤를 이은 인물은 솜뎃 프라 마하라차몽칼라찬(Somdet Phra Maharatchamongkhalachan, 솜뎃 추웡[Somdet Chuang]: 1925년생) 스님으로서, 대형 사찰 '왓 빡남 파시짜른'(Wat Pak Nam Phasi Charoen)의 주지이다. 그는 솜뎃 끼야우 직무대행이 사망한 후부터 직무대행을 수행하다 2014년 1월 '승가 최고회의'에서 새로운 승왕으로 지명됐던 인물이다. 하지만 2014년 5월에 발생한 쿠데타 등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국왕의 인준절차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이후 승단 내부의 갈등과 부패 폭로전 속에서 승왕 추대 절차는 정체 상태에 있었다.
(사진: Chanat Katanyu / The Bangkok Post) '승가 최고회의' 의장인 솜뎃 추웡 스님이 1월11일 차기 승왕 후보를 결정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이 회의는 그를 제20대 승왕으로 추대했다.
솜뎃 추웡 스님은 온갖 비난과 공격 속에도 여전히 승왕 권한대행 직을 유지하면서 '승가 최고회의' 의장도 겸직해왔다. 금년 1월11일 '승가 최고회의'는 8명의 후보자 중 솜뎃 추웡 스님을 승왕으로 추대한다는 새로운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 결정은 태국 불교의 최고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사회적 갈등으로 확전되고 있다.
불교의 정치화 : '레드 불교' 대 '옐로 불교' ?
일부 개혁주의자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20세기의 태국 불교는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전통적인 기득권 체제의 영적 토대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불교계는 새로운 양상의 정치적 갈등에 봉착했다.
태국은 이동통신 재벌 출신 정치인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총리의 시대로 21세기를 시작했다. 탁신은 태국 역사상 최초로 4년 임기를 무사히 마친 총리가 됐고, 2005년 총선에서도 압승을 거둬 재선됐다. 그의 제1기 임기는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의 충격을 완전히 극복하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시기였다. 그는 특히 태국 정치인들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빈곤층에 돌려 획기적인 복지정책을 실시했다. 북부 및 북동부 지방 농민과 도시 빈민층들은 유권자의 다수를 차지하지만, 탁신 이전에는 정치인들의 관심 밖이었다. 남부지방 무슬림 소요사태와 마약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학살과 인권유린 등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탁신 정권은 저금리 농경자금 대출 등 경제적 지원정책과 30바트 의료정책 등 복지정책을 통해 기층에서 열광적 지지와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닦았다.
하지만 탁신의 정치적 성공은 왕당파, 군부, 사법부, 방콕 중심의 중상류층 등 전통적인 기득권 계층과 고무농사를 중심으로 상대적 풍요를 누리던 태국 남부지방 사람들에겐 위협으로 간주됐다. 그들은 곧 반발하기 시작했다. 방콕에서 중상류층 대중이 대규모 시위로 바람을 잡고 군부 쿠데타(2006년 및 2014년)로 정리하는 방식을 통해, 그들은 친-탁신계 정권을 3번이나 연속으로 전복시켰다. 이 과정에서 태국은 '레드셔츠'(UDD)와 '옐로셔츠'(PAD)로 상징되는 첨예한 "컬러" 양극화 사회가 됐다. '레드셔츠 운동'은 친-탁신 성향의 북부/북동부 지방 농민 및 도시 노동자 중심 대중운동이고, '옐로셔츠 운동'은 반-탁신 성향 방콕/남부지방 중심 중상류층의 대중운동이다. (이 중 '옐로셔츠 운동'은 테러나 다름없는 '국제공항 점거사태'라든지 "민주주의 반대"라는 비상식적 주장 등 대외적으로 이미지가 실추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지개 셔츠 운동'이나 '멀티컬러 운동' 등으로 외투를 갈아입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0년 이후 친-탁신 진영은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고, 그때마다 반-탁신 진영은 쿠데타나 사법부의 선거무효 판결 등을 통해 정권을 붕괴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양 진영의 대립은 너무도 첨예하여, 이제 내전의 발발조차 전혀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됐다.
불교계 역시 이러한 사회적 분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승왕 임명을 둘러싼 갈등은 태국 정치의 양대 진영이 펼치는 싸움의 완벽한 대리전이다. '옐로셔츠' 진영이 친-탁신 성향의 승왕 추대를 반대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임 승왕 대행 솜뎃 끼야우 스님 역시 '옐로셔츠 운동'을 창시한 언론재벌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의 반대에 시달렸고, "살아있는 아라한"(생불)로 불리던 루웡따 마하 부워(Luangta Maha Bua: 1913-2011) 스님으로부터도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었다. 마하 부워 스님은 'IMF 채무 반환 모금운동'을 주도하면서 초기에는 탁신 정권과 관계가 좋았지만, 이후 반-탁신의 입장으로 돌아서서 솜뎃 끼야우 승왕 대행을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솜뎃 추웡 현 승왕 대행의 추대 파동 역시 동일한 구도이지만,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이번에도 표면에는 부패 의혹이 불거져 있지만, 현 승왕 대행의 지지자들은 반대파의 의혹 제기가 정치적 동기에서 기인했다고 주장한다. 솜뎃 추웡 승왕 대행은 '왓 프라 탐마까이(담마까야)'(Wat Phra Dhammakaya) 사원과 밀접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왓 탐마까이 사원'은 "친-탁신 사원"으로 인식되는 사찰이다. 따라서 불교계의 갈등은 표면상 솜뎃 추웡 승왕 후보자 개인에 대한 찬반 논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왓 탐마까이 사원' 세력과 불교계 내의 범-보수파 사이의 싸움이며, 넓게 보면 친-탁신 진영과 반-탁신 진영의 대리전이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태국이 "사실상의" 불교국가란 점을 감안하면, 불교계의 첨예한 갈등은 국가체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도) 2011년 7월 총선 결과. 붉은색은 친-탁신계 정당 '프어타이 당' 후보들이 당선한 지역이고, 푸른색은 보수정당 '민주당' 후보들의 당선 지역이다. 태국의 국론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양분된 양상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북부 및 북동부 지방의 인구밀도가 높기 때문에 의석 수 역시 압도적으로 많다. 수도권 지역 확대지도를 보면, 수도권 내에도 남북 분열 현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방콕 중산층들이 '민주주의 반대' 시위를 벌여 유명한 시내 중심가는 '민주당'의 아성이란 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방콕 중심가의 여론은 전국적인 여론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왓 탐마까이 : 태국 불교의 신흥종단
'왓 탐마까이 사원'은 유명한 명상스승 프라 몽콘 텝무니(Phramongkolthepmuni: 1885~1959) 스님이 개창하여, 그의 수제자이자 여성 수행자(=매치, mae chi) 짠 콘녹융(Chandra Khonnokyoong: 1909~2000) 스승 시대를 거쳐, 현재의 주지 프라 탐마차요(Phra Dhammachayo: 1944년생) 스님의 지도체제로 이어진 종교전통이다.
이 종교운동은 현대적이면서 거대한 사원 시설과 첨단 마케팅 전략을 활용한 포교전략을 통해 신흥 부유층 사이를 파고들어 "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찰"로 부상했고, 그 자체로 하나의 신흥 종단이기도 하다. 이 운동은 세계적으로도 가장 빠른 교세 성장을 보인 종단으로서, 미국 캘리포니아 주, 아주사(Azusa)에 '담마까야 개방 대학'(Dhammakaya Open University: DOU)을 설립하는 등 세계 각국에 40곳의 지부도 두고 있다. 아마도 태국 불교에서 탐마까이 사원이 차지하는 위상은 한국 개신교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차지하는 위상보다 클 것이다.
탐마까이 종단이 정말로 "친-탁신 사찰"인가에 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이 종단이 이미 대중적으로는 '친-탁신 사찰'이란 이미지를 확고히 지니고 있는 한, '옐로셔츠' 진영이 이 종단에 적대적임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분파가 '광신적 신앙'(cult: 컬트)을 가르친다는 의혹은 불교계 내 여타 정통 보수파까지도 이 사찰에 비판적 입장을 갖도록 만들었다. 보수 성향 영자지 <방콕포스트>(The Bangkok Post)의 전 논설주간 사닛수다 에까차이(Sanitsuda Ekachai)는 승왕 추대 파동에 관한 컬럼(2016-1-6)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한편, 탐마까이 종단은 개인이 얻게 될 공덕(범어-puṇya, 빨리어-puñña, 功德)의 양이 탐마까이 종단에 기부(보시)하는 재물의 양에 달려 있다고 가르친다. 열반(Nirvana) 역시 천상에 있다고 가르친다. 개인이 누리게 될 호사와 안락 역시 그가 보시한 재물의 양에 달려 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지불한 만큼 받는다는 것이다.
순수주의자는 이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전통적인 태국의 민간 불교신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 그런가? 하지만 탐마까이 종단은 현대적 마케팅 전략과 인센티브 시스템을 이용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펀드를 조성했다. 그 덕분에 태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찰이 됐다.
그들이 성대한 의식을 거행할 때는, 새로운 신자들을 더 많이 데려오고 더 많은 돈을 보시한 신자들부터 주지스님에게 더 가까운 자리에 앉도록 한다. 내부자나 탈퇴자들이 폭로한 탐마까이 교단의 우주론을 살펴보면, 그 주지인 프라 탐마차요 스님의 위상은 단순한 승려가 아니다. 그는 성자이고, 종말의 날이 왔을 때 중생들을 구원할 구세주이다.
전통 사찰들은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경우가 많은 반면, 탐마까이 사원은 질서, 청결, 우아함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점이 중산층과 신흥 부유층들의 코드에 맞았다. 그들은 초자연적 힘을 믿지만, 자신들의 세속-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현대적 외형과 스타일을 지닌 사찰을 원한다.
[산하의] 펀드 모집 단체들 역시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대도시에서 상당한 규모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탐마까이 종단과 관련 있다는 점은 밝히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 탐마까이 종단은 여타 종단들이 하지 못했던 요구에 부응했던 것이다."
프라 탐마차요 스님은 지난 2012년 발언을 통해, 자신이 명상 중 사망한 애플 CEO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영혼을 만났다고 주장해 국제적인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역사학자 겸 원로 불교 사회운동가 술락 시와락(Sulak Sivaraksa, 술락 시바락사: 1933년생)은 기본적으로 군주제를 옹호하는 보수적 인물이긴 하지만, 태국 사회에선 비교적 양심적 비평가 중 한명으로 인식된다. 그 역시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많은 이들이 그(=솜뎃 추웡 승왕 대행)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가 탐마까이 측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탐마까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그 무언가를 가르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 종단은 불교가 자본주의 및 소비자주의와 함께 해야 한다고 선전한다."
(동영상) 탐마까이 운동의 종교행사를 기록한 홍보용 동영상.
(동영상)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같은 상좌부불교 국가들에서는 스님들이 안거를 마치고 해제를 하는 날인 까텐(Kathen)은 매우 중요한 명절이다. 불교도들은 이날 사찰에 가서 스님들에게 새로운 법의(=승복)를 공양한다. 이 동영상은 '왓 프라 탐마까이' 사원의 대회당에서 진행된 2014년 카텐 행사를 녹화한 것이다. 법의 공양 및 설법과 명상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사닛수다 에까차이는 승왕 추대를 둘러싼 종교 권력의 변화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탐마까이 종단은 부유한만큼 불교계 장로들(원로 스님들)의 처우를 돌보는 데 경제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고, 장로들 역시 탐마까이 운동의 교세 확장을 기성 승단의 도움 없이 태국 상좌부불교를 국제화시킨 것으로 여기고 있다. 또한 탐마까이 종단이 그 동안 승려들의 장학사업을 벌인 것도 전국적 지지세 형성에 기여했다.
만일 차기 승왕이 탐마까이 종단 지지자일 경우, 이 논란의 종단이 태국 승가 전체를 장악할 것이란 두려움이 존재한다. 그 경우 왜곡된 형태의 불교 교설은 제도화될 것이고, 승단 내 직제들도 탐마까이 종단의 의지에 따라 할당됨으로써, 이 종단이 승단 공동체 전체를 장악하게 될 것이다."
탐마까이 종단의 주지 프라 탐마차요 스님은 1999년 및 2002년에 사기 횡령에서 부정부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고소 고발에 시달렸지만, 친-탁신 정권의 '국가 불교청'(Thai National Office for Buddhism)에서 모든 혐의를 기각했다. 또한 사망한 니야나상와라 승왕이 그를 불교 교리의 왜곡과 절도 혐의로 처벌할 것을 교시했지만, 솜뎃 추웡 스님이 의장으로 있는 '승가 최고위원회'는 체탈도첩(=강제환속)에 이를 수도 있는 승왕의 교지 내용을 거부한 바 있다. 프라 탐마차요 스님은 일종의 저축은행인 클렁찬 신용조합(Klongchan Credit Union Cooperative: KCU)에서 발생한 횡령사건과 관련해 현재도 사법 당국의 수사대상으로 올라 있다.
빈티지 벤츠, 극우 승려, 특수수사국
지난 1월11일, '승단 최고위원회'는 논란 속에서 솜뎃 추웡 승왕 대행을 새로운 승왕으로 선출했다. 이날 오전 정부청사의 총리실에는 저명 승려 한명이 나타나 솜뎃 추웡 승왕의 추대를 반대하는 탄원서를 접수시켰다. 이 탄원서에는 30만명의 서명이 첨부돼 있었고, 총리가 솜뎃 추웡 승왕 후보를 국왕에게 천거하는 대신, 국왕에게 또 다른 승왕을 임명하는 전권을 위임하라고 요구했다. 탄원서의 대표 제출자는 보수 진영의 유명한 극우 승려 붓다 이싸라(Buddha Issara)였다.
(자료사진: khaosodenglish) 태국 기득권 극우 왕당파 진영의 주요 지도자 붓다 이싸라 승려.
붓다 이싸라는 잉락 친나왓(Yingluck Shinawatra) 총리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2013년 12월부터 2014년 5월 사이에 진행된 기득권층 대중의 가두시위 당시, 수텝 트억수반(Suthep Thaugsuban) 전 부총리와 함께 시위대의 선봉장 노릇을 한 인물이다. 당시 시위는 친-군부, 친-기득권, 친-왕실 성향을 갖고 있었고, 군부 쿠데타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 역할을 담당했다. 이 시위 당시 붓다 이싸라의 지도 하에 있던 사수대(=자경단)는 과격하고 무자비한 폭력을 휘둘러 주목을 받았다. 이 시위의 주최측은 자신들을 '국민민주개혁위원회'(PDRC)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옐로셔츠 운동'의 새 버전이었다. 따라서 이싸라 승려가 솜뎃 추웡 승왕 반대운동에 나선 것은 옐로셔츠 진영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군사정권은 솜뎃 추웡 승왕 임명 문제에 우회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솜뎃 추웡 승왕과 '레드셔츠' 진영과의 연관성 때문에 군정의 거부감은 당연한 일이지만, 군사정권 지도자 쁘라윳 짠오차(Prayuth Chan-ocha) 총리는 "승단의 일은 승단에서 해결해야 한다"든가, "정 해결이 안 되면 당국이 개입할 수도 있다"는 정도의 언급만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무부 산하 '특수수사국'(DSI)을 통해 빈티지 벤츠 사건의 강도 높은 수사와 헌법기관인 옴부즈맨(행정감찰관실)의 "추대 반대" 표명을 통해 압박하고 있다. 승왕 측은 문제가 된 벤츠를 "원래 시주한 신도에게 반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무시됐고, DSI는 3월7일 해당 벤츠를 압수했다.
그리고 같은 날 군 당국은 솜뎃 추웡 승왕 지지 단체인 '태국불교수호센터'(Buddhism Protection Centre of Thailand: BPCT) 사무총장 프라 메티탐마짠(Phra Methithammajarn) 승려를 "태도 교정"이란 명목으로 연행 후 잠시 동안 억류하기도 했다. "태도 교정"이란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군 당국이 반체제 인사나 학생 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데 사용하는 절차로서, 군 부대 내에 단기 혹은 장기 구금하면서 위협을 가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고위급 승려를 "태도 교정에 초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사진: Pornprom Satrabhaya / The Bangkok Post) 태국 특수수사국(DSI)이 3월7일 솜뎃 추웡 승왕이 주지로 있는 '왓 빡남 파시짜른' 사원에서 문제의 빈티지 벤츠 차량을 압류하고 있다. 이 사찰은 관광객 유치를 위해 빈티지 차량들을 전시했는데, 그 중 한대인 이 차량이 수입 통관절차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불교의 국교화 운동과 불교 민족주의
승왕 추대 파동은 '불교의 국교화 운동'이 부상하는 흐름과 겹쳐지며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2월16일 시위 당시, 승왕 지지 단체인 '태국 승가재가동맹'(SBAT)은 "승왕의 조속한 인준" 뿐만 아니라 "불교의 국교화"도 함께 요구했다. 불교 국교화 운동에 부정적인 이들은 군사정권이 국교화를 통해 반대자를 탄압하는 데 이용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이러한 주장을 군부와 대척점에 선 승왕 지지파가 외쳤다는 점은 이례적이다.
그런 점에서 '불교 국교화'의 의제가 태국 정치의 양대 진영 중 어느 한쪽에서만 우세한 주장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최근 불교의 국교화 주장을 선도하는 단체는 '국교로서의 불교 진흥회'(Committee to Promote Buddhism as the State Religion: CPBSR)이다. 그러나 CPBSR이 태국 정치의 양대 진영 중 어느 정파에 더 친화적 성향을 지녔는지는 아직 불분명하다. 아마도 전체 인구의 90% 이상이 불교도인 태국에서, 국교화 주장은 양대 진영 모두에서 일정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의 국교화' 주장이 특히 무슬림에 대한 경계심에서 기인했다는 증언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국제적인 인권감시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 태국지부의 수나이 파숙(Sunai Phasuk) 씨는 <로이터 통신>(Reuters)과의 회견에서 "[태국 사회에서] 무슬림에 대한 의심이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기에는 통상 2가지 요소가 언급된다. 하나는 2004년 이후 태국 최남단 3개 도에만 국한해서 진행 중인 무슬림 무장반군 소요사태로서, 지난 10년간 6천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됐다. 무슬림 소용사태는 무슬림들이 중앙정부로부터 소외와 차별을 받는다는 정서에서 출발했다. 여러 반군 단체들은 그 실체가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아 태국 정부가 누구를 협상 대상자로 삼아야 할지도 모호한 상태이다. 하지만 이 지방 주류인구인 말레이계 무슬림들의 자치권 요구는 모든 반군의 공통점이다. 반군들은 주로 군인, 교사, 공무원을 공격대상으로 삼는데, 불교 승려들 역시 태국의 체제적 상징으로 보아 공격대상으로 삼는다.
(사진: AP Photo / Apichart Weerawong) 태국 최남단 지방인 빳따니 도에서, 정부군 병사들이 아침 탁발을 나가는 불교 승려들을 호위하고 있다. 2011년 6월 17일 촬영.
다른 하나는 이웃국가인 미얀마에서 반-무슬림 불교 근본주의가 급성장한 것에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미얀마에서는 특히 위라투(Wirathu: 1968년생)라는 저명 극우 승려가 '969 운동'이라는 급진적 버마 민족주의 캠페인을 벌이면서, 군사정부의 묵인 하에 범-무슬림 인구에 대한 학살, 방화, 성폭행 등이 자행됐다. 특히 미얀마 서부 해안지대에 거주하는 로힝야족(Rohingya people)에 대한 박해는 극에 달해, 동남아시아 바다에 지중해 난민 사태보다 규모가 큰 보트피플 물결과 국제 인신매매 파동을 출현시켰다. '969운동'의 흐름은 보다 체계적인 단체 '마바타'(Ma Ba Tha: 인종종교수호위원회)로 이어졌고, 정부로 하여금 친-불교 반-무슬림 법안을 제정토록 만드는 단계에 이르렀다. 태국 불교계에도 최근 미얀마의 사례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고, 미얀마의 불교 근본주의자들과 교류도 증가하고 있다.
(참조: 미얀마 극우 승려들은 스리랑카 극우 승려들과 빈번한 교류를 갖고 있는데, 스리랑카 극우 승려들 역시 극단적인 반-무슬림 정서를 갖고 있고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동영상) 2013년 3월 미얀마 중부 메이틸라(Meiktila)에서 촬영된 무슬림 공격 사태 현장. 미얀마 극우 승려들은 "무슬림을 때려 죽이자"는 구호조차 거리낌 없이 외치곤 하는데, 이 현장에선 승려가 무슬림 주민을 집단폭행 살해하는 데 직접 가담한다. 주변에는 정부군 등 공권력이 배치돼 있지만, 이들의 폭력을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국 불교의 국교화 추진 움직임이 단순히 반-무슬림 정서에서만 추동된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한 배경을 갖고 있다는 의견들도 제시되고 있다. 태국의 헌법학자 켐텅 통사꾼랑루웡(Khemthong Tonsakulrungruang)은 호주국립대학(ANU) 발행 온라인 저널 <뉴 만달라>(New Mandala)에 기고한 칼럼(2016-1-15)에서, 국교화 움직임이 불교 내부의 모순을 손쉬운 방법으로 타개하려는 시도로 진단했다.
"태국 불교는 단 한번도 현대화 혹은 이성적 개혁을 이룬 적이 없기 때문에, 오늘날 태국 사회에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은 절대화된 상태이고, 그러한 정설에 대한 도전은 거부되며, 불교 철학도 낡은 사상이 됐다. 주지승들이 축적한 부와 승려들의 저지른 비행들 때문에 '승가'의 약점에 대한 비판도 증가 중이다. 불교는 보다 젊고 비판적인 세대에게 호소력을 얻는 데 실패했다. (중 략) 태국 불교의 약화와 권력 쟁취의 야망은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된 국가적 진흙탕 싸움에서 출현한 징후이다. 불교는 너무 망가졌고, 그 결과 보다 다원화된 세계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할 만큼 약화됐다. 이제 그들은 국가 권력에서 궁극적인 해법을 찾으려 한다. (중 략) 불행하게도 불교 정치가 태국을 위험한 길로 들어서게 만들고 있다."
<사우스이스트 아시아 글로브>(Southeast Asia Globe)의 분석(2016-2-11)은 다양한 사회적 차원의 요인들을 전하고 있다. 영국 '리즈 대학'(University of Leeds) 정치학 교수 던칸 맥카고(Duncan McCargo)는 최근의 국교화 움직임이 "태국이 절망적인 양극화 정치로부터 탈출할 출구가 없다는 정서"에서 기인한 "집단적인 민족적 불안"의 증가로 파악했다. 그의 이 같은 진단은 동남아 전문 저명 언론인 토마스 풀러(Thomas Fuller)가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에 기고한 심층 탐방 기사(2015-11-29) 내용과도 일치한다. 풀러는 2014년 5월 쿠데타 이후 일년 반 동안 진행된 군사정권의 경제정책 실패 현장을 취재하여 "타격받지 않는 태국"(Teflon Thailand), 즉 "정정이 불안해도 태국 경제는 괜찮을 것"이란 오랜 신화가 붕괴되면서 발생한 사회적 좌절감을 생생하게 보고했다.
호주 '애들레이드 대학'(University of Adelaide) 인류학 교수 제임스 태일러(James Taylor)는 태국의 도시인들 사이에서 '시골스런 것'(country things)에 대한 향수가 증가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도시 중산층 태국인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시골에 대한 향수를 갖고, 전통의상 착용이나 근교의 별장 구입 등 전원생활을 모방하는 풍조가 생겨났는데, 특히 과거 농촌사회에서 공동체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불교의 전통적 위상에 대한 그리움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대중문화의 '태국판 7080 열풍'과 더불어, 좌절된 "자신감"을 소위 "태국다움(Thai-ness)의 징표"인 불교에 집착함으로써 얻고자 한다는 것이다.
한편, 태국인들의 좌절감이 사회 심리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해야만 한다. 태국 불교는 여타 남방불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대 정령신앙과 각종 미신, 흑마술에 기반을 둔 주술 등 다양한 토착신앙 및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강력한 기복적 성격을 갖고 있다. 가령 '삭얀'(sak yant, สักยันต์)이라 불리는 전통 문신, 붓다나 고승의 초상화를 삽입해 제작한 '프라 크릉'(พระเครื่อง)이라 불리는 호부(호신용 목걸이), 전통적 기법의 부적 등에 태국인들의 심리적 의존성은 매우 강하며, 이는 상류층이나 고학력 신자들에게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또한 "영험한" 부적이나 문신을 새기거나 예지력을 지녔다고 믿어지는 승려나 도인에게도 '아짠'(ajahn: 선생님, 범어 '아짜리야'의 태국식 발음)이란 호칭이 사용될 정도이다. 승려들과 사찰들은 시주금과 성지순례 관광객 유치를 위해 각종 주술적 요소들 및 고승들의 행적을 우상화하고 상업화한다.
(참조: 상좌부 불교가 전파되기 전인 5~13세기의 동남아시아 지역에는 인도로부터 직접 수입된 힌두교와 대승불교가 정착됐었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에 따라 실제의 사찰 문화에는 미륵신앙이나 보살사상도 발견되며, 후대에는 화교들의 이주와 더불어 포대화상이나 관음신앙도 대중성을 얻었다.)
이러한 주술적 요인들이 사회적 좌절감과 결합하면 광기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최근 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반려인형 '룩텝'(luk thep: 천사 아기) 신드롬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반-무슬림 정서와 함께 태국의 불교문화가 지닌 이러한 전근대성은 '불교의 국교화' 운동의 또 다른 추동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몇년 간 불거진 마약, 사치, 성매매 등 태국 승려들의 각종 비행과 물신화 풍조는 대중들로 하여금 근본주의 움직임에 친화적으로 만들 우려도 존재한다.
2014년 5월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기존의 헌법(2007년 헌법)을 폐지시켰다. 그렇지만 이때 폐지된 헌법도 실은 탁신 정권을 최초로 실각시켰던 2006년 9월의 쿠데타 후 군사정권 감독 하에 제정된 것으로서,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요소가 많은 헌법이었다. 따라서 향후 등장할 신헌법은 <2007년 헌법>보다도 더욱 퇴행적 성격을 지니게 될 것임은 분명하다. 그 사이 군정이 임명한 국가 입법회의(National Legislative Assembly: NLA)와 '헌법초안위원회'(Constitution Drafting Committee: CDC)가 새로운 헌법을 한번 초안했지만, 역시 군사정권이 구성한 '국가개혁회의'(National Reform Council: NRC)가 작년 9월 CDC 작성 개헌안을 부결시키면서 정상적인 정치일정의 복원을 다시 한번 무기한 연기시켰다.
부결된 헌법안은 "전문가들"과 더불어 군부의 고위 장성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국가적 위기" 때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상원을 부분적으로만 선출직 기구로 만드는 조항도 있어서 많은 이들로부터 비민주적이란 비판을 받았다. 이후, 다시금 헌법 초안을 위한 새로운 CDC가 설치됐고, 이 기구는 4월 중으로 새로운 헌법안을 내놓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금년 7월 중에 개헌안 국민투표를 거칠 것이고, 정상적이고도 민주적인 총선은 빨라야 2017년에야 가능할 전망이다.
만일 군사정권이 제시하는 신헌법이 기존의 그 어떤 헌법안보다 퇴행적 내용을 갖는 것이라면, 경제정책 실패와 더불어 군정 및 신헌법 지지율은 하락할 수 밖에 없다. '불교의 국교화' 운동을 주창하는 세력은 바로 그러한 허점을 파고들어, 새로운 헌법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킬 계기를 찾고 있다.
절대왕정을 붕괴시킨 군사 쿠데타 '1932년 혁명' 후 제정된 헌법을 시작으로, 태국에서는 그 동안 18차례 개헌이 있었다. 그러나 정부가 "불교 및 여타 종교들을 진흥시킬 의무"만을 명문화했을 뿐, 불교를 국가의 공식종교로 지정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불교는 비공식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각종 헌법들에서 보호받았고, 헌법 조문 내에도 불교 및 불교적 이념의 언급이 많이 나타난다. 또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적 의례와 관행들을 통해 "사실상의 국교"로서 그 지위를 누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 내의 강경파들은 대내적, 대외적 불안감을 '국교화'를 통해 타개하려 시도하고 있다.
되살아나는 불씨와 왕위계승전쟁
2014년 5월 쿠데타 후 태국 사회의 역동성은 떨어졌지만, 군정의 공포정치 하에서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여왔다. 강력한 세력을 지닌 반-군부 반-기득권 친-탁신 세력의 움직임도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하지만 이제 그 고요가 깨지려 하고 있다.
해외에 거주하는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최근 들어 국제적인 언론들과 연속적인 회견을 갖거나, 미국을 방문해 강연하면서 군정의 신헌법 제정 계획이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것"이라며 여론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이에 부응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친-탁신 진영의 군부 원로이자 전직 총리이기도 한 차왈릿 용짜이윳(Chavalit Yongchaiyudh: 1932년생) 장군은 3월13일(일)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태국의 갈등상황을 끝낼 '제3의 세력'을 준비 중"이란 폭탄선언을 했다. 그는 "100만명의 소수민족과 1천만명의 빈곤층에서 유사시 동원할 20~30만명의 병력을 조직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 병력이 "비무장"이지만 갈등과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민심을 추스르는 데 동원될 것이라면서, 군정이 협상을 해온다면 요청에 응할 것이라며 압박했다. 태국 군 전체 병력이 20여만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차왈릿 장군이 제시한 병력 규모는 엄청난 것이다. 또한 친-탁신 진영 내에서 차왈릿 전 총리가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하면, 그의 발언이 탁신과 조율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다.
군사정권은 탁신의 발언 소식을 "개가 사람을 문 뉴스"라거나, 차왈릿 장군을 "한때 영화를 누렸던 절간 앞에 앉은 늙은 개"라는 식으로 비하하며 역공을 펼치고 있지만, 태국 정치가 다시금 꿈틀대기 시작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탁신 진영의 이 같은 움직임은 새로운 총선을 2017년 이후 실시하려는 군정의 정치일정을 순순히 수용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사진: 탁신 친나왓 페이스북) 탁신 친나왓 전 총리가 3월9일 뉴욕의 '세계정책연구소'(World Policy Institute)가 주최한 포럼에 참석해 대담을 갖고 있는 모습. 그는 "태국 민주주의의 후퇴"에 관해 역설했다.
태국의 양대 진영이 벌이는 정치적 갈등은 복잡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 지배체제와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대중주의 문화가 맞부딪히는 세계관의 충돌인 동시에, 태국 사회를 오랜 기간 지배해온 수구적 기득권 세력을 한편으로 하고 신흥재벌 및 노동자/농민 연합세력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투쟁이기도 하다. 또한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북부지방과 고무농사 및 수산업에 기반을 둔 남부지방 사이의 지역 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태국의 정치 갈등은 왕위계승전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비록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선동술에서 벤치마킹한 우상화 정책과 가혹한 왕실모독법을 동원한 여론통제의 덕분이긴 하지만, 그 동안 거의 신적인 추앙을 받아오던 푸미폰 국왕이 2009년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현재는 사실상 금치산자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태국은 형식적으로는 입헌군주국이지만, 모든 권위가 국왕에게서 나오는 유사-절대왕정 국가이다. 더욱이 왕실은 최대 기업집단 '시암시멘트 그룹'(SCG)을 비롯하여, 막대한 부동산과 현금성 자산들을 보유한 태국 최대 부호이기도 하다. 왕실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는 사실상 태국 경제 전반으로 이어지며, 그와 관련된 인적 네트워크와 정치권력, 특히 군부 내 이권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거의 70년간 재위해온 푸미폰 국왕이 사망할 경우, 태국의 모든 권력관계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이다.
국왕의 사망과 최소 일년 이상의 장례식, 그리고 새로운 국왕의 즉위과정은 태국사회 미래 권력의 물적, 정신적 토대를 재결정하는 과정이 될 것이고, 이 기간을 누가 관리할 것인가가 현재 태국 정치가 당면한 과제이다. 지난 수십년간 왕실 권력을 실질적으로 관리했던 사람은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였고, 현 군부의 주류(제21연대 파벌) 역시 그녀의 후원 하에 성장했다. 하지만 왕후 역시 2012년 뇌졸증으로 쓰러진 후 푸미폰 국왕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인 것으로 전해진다.
태국의 기득권 세력이 탁신을 반대했던 커다란 원인 중 하나는 탁신과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의 유착 때문이었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젊은 시절부터 여성편력과 기행을 일삼아왔고, 예측불가의 폭력성도 보여줬다. 현 왕조인 '짜끄리 왕조'(Chakri dynasty)에는 개국 초기부터 "라마 9세로 왕조의 수명이 다할 것"이란 예언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푸미폰 국왕이 바로 라마 9세이고, 만일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즉위한다면 그는 라마 10세가 된다. 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모순이 극에 달한 상태에서, 이 같은 예언은 주술적 힘을 신봉하는 태국 국민들에게 "종말론적 불안"을 더욱 가중시키는 요인이 된다.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은 2013년에 공개한 자신의 논문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를 통해 이 시대 태국이 처한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물론 그의 논문과 이후 발행된 단행본은 태국 최대의 금서가 됐고, 마샬 역시 태국의 일급 수배자로 등록됐다.
(참조: 태국 정치 연구의 최대 난점 중 하나는 왕실모독법의 영향으로 정보의 부족 및 진실을 말해주는 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폭로된 미 대사관 외교전문들을 철저히 분석한 앤드류 마샬의 연구는 태국 정치에 관한 그 이전의 대부분 연구들을 거의 무가치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강력한 것이다.)
마샬의 논문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태국의 기득권 세력은 지난 수십년간 왕세자의 등극을 막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펼쳐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군사정권이 주도하는 행사들을 살펴보면, 태국 군부와 기득권 세력은 왕세자와 타협을 하고 공존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전개되는 탁신 진영의 반격은 이전과는 또 다른 차원의 불확실성이 시작됨을 의미한다.
태국 불교의 정치화, 그 뿌리깊은 전통
승왕 추대를 둘러싼 갈등이 현실 정치의 완벽한 대리전이란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태국 불교의 정치화는 비단 최근의 경향만은 아니다. 태국 사회에서 '불교와 정치의 관계'에 관한 담론이나 연구는 금기시되는 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태국 불교의 정치화는 유서 깊은 뿌리를 갖고 있다. 근대 이전에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은 '신왕'(deva-raja, 神王) 사상을 통해 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기여했고, 봉건체제의 일부로서 특히 기초 교육 부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사진: Reuters/Damir Sagolj) 군사정권 지도자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왕족의 생일 기념 법회에 참석하여 스님에게 예를 표하고 있다.
그러나 태국 승단이 보다 체계적으로 국가적 통제 하에 들어간 것은 몽꿋(Mongkut, 라마 4세: 1804~1868, [재위] 1851~1868) 국왕의 시대였다. 몽꿋 국왕은 즉위 전 27년간 승려였고 저명한 불교학자로서 불교의 개혁에도 노력했지만, 승단의 행정조직을 지방 단위까지 확대하면서 중앙집권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흐름은 쭐라롱꼰(Chulalongkorn, 라마 5세: 1853~1910, [재위] 1868~1910) 국왕 시대인 1902년에 최초의 <승단법>(Sangha Act)이 제정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 승단의 제도적 형식이 완성됐다. 승단의 근대화는 국가권력에 이념적, 영적 근거를 제공하는 대신,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고 승려들의 사회적 특권을 보장받는 관계를 더욱 공식화한 것이다.
일부 전통적인 태국 승려들이 보다 본격적인 정치 승려로 탈바꿈한 것은 1932년 혁명 이후의 일이다. 이후 태국이 19회에 달하는 쿠데타를 겪을 때마다 새로운 실세 정치인들이 탄생했고, 그러한 정치인들과 유착을 강화하는 승려들도 등장했다. 특히 공산 반군이 활동했던 1970년대 냉전기에는 불교계 내에서도 이념투쟁이 극에 달했고, 지도급 정치 승려들도 탄생했다. '쭐라롱꼰 대학'(Chulalongkorn University) 정치학 교수였던 솜분 숙삼란(Somboon Suksamran)이 1982년에 출판한 <태국 불교와 정치: 태국 승단 내부의 사회정치적 변화와 정치적 행동주의 연구>(Buddhism and Politics in Thailand: A Study of Sociopolitical Change and Political Activism in the Thai Sangha)는 방대한 문헌자료와 대면 인터뷰를 통해 태국 승단의 정치화 과정을 상세히 살펴본 보기 드문 연구에 속한다. 특히 1970년대 승단 내부의 이념투쟁에서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악업이 아니다"라는 구호까지 등장하는 데 이르면, 최근 태국 불교계에 나타난 정치적 광기의 모습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란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태국 정국은 다시금 불확실성의 미래를 예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중인 승왕 추대 파동은 그 최종 결과를 예상하기 쉽지 않다. 더구나 불교계 일각에서 제기되는 '불교의 국교화' 주장은 사태의 전개에 더욱 큰 안개를 드리우며 복잡성을 증가시키는 중이다. 다만, "국가 종교(불교) 국왕"을 국가 구호로 내세우는 태국에서, 정치가 동요하면 종교도 동요할 것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탈고일: 2016-3-15)
* 참조용 게시물
- "[태국 르뽀] 불교의 타락 VS 군정의 탄압"(이유경 2016-7-6)
- "[르뽀] 해탈을 ‘파는’ 태국 불교, 정교분리 원칙마저 위태하다"(이유경 2016-7-14)
* 상위화면 : "[기사목록] 2016년 태국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