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e-매가진 '신대승' 제6호 (2016년 12월)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시리즈 제3화 - 태국 1편>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 전문기자)
- 전쟁폭력, 국가폭력 그리고 체제의 협력자
“라마 6세 (1910-1925) 통치 기간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났다. 국왕의 (영프 동맹군으로) 전쟁 참여 결정에 일부 승려들이 반대했는데 그 댓가로 승려직을 박탈 당했다. 폭력과 군에 반대했던 그 정신이 인상 깊었다. 모든 불교를 좋아하진 않는다. 베트남 전쟁 당시 ‘공산주의자’ 죽이는 걸 지지한 불교는 좋아하지 않는다”
태국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인 네티윗 초티팟파이산(Netiwit Chotiphatphaisal)은 2014년 9월 5일 18번째 생일을 맞아 병역거부 선언을 했다. 그는 선언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있는가고 묻자 과거 어떤 승려들을 포함시켰다. 그가 언급한 ‘참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승려직을 박탈당했던 승려’,그는 라마 6세 와지라윳 국왕(Vajiravudh) 시대를 살았던 프라 텝 몰리 시리찬토(Phra Thep Moli Sirichantoe)승려다.
프라 텝 몰리 승려는 ‘전쟁’과 ‘군’에 대한 비판적 설교집을 출간했다. “좋은 지식은 진보를 가져오지만 나쁜 지식은 부패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반전논리 제 1 전제다. 그리고 “나쁜 지식”의 범주안에 ‘군사학’을 집어 넣었다. 또, ‘세계1차 대전’을 같이 언급함으로써 그 전쟁에 참전을 결정한 라마 6세의 결정을 간접적으로 비판했다.
라마 6세 와지라윳 국왕 (위키피디아)
그의 비판이 지금 시대와 다른 맥락에서 이뤄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태국은 (당시 국호 “시암Siam”) 절대왕정 체제였다. 국왕의 결정이 곧 법이던 시대다. 그 결정을 비판한다는 건 위법행위이자 항명적 언동으로 인식됐다. 결국 그는 사제 신분을 박탈당했고 ‘사원 내 구금’(Temple Arrest)을 당하다 1916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이 반전 승려의 이야기는 네티윗처럼 군사주의를 거부하는 반전론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전쟁과 폭력을 반대한 승려 중에는 부다다사(Buddhadasa Bikkhu)라는 인물도 있다. 유네스코에 “대사상가”로 등재됐을 태국이 낳은 위인중 한 명이다. 그는 종교간 화해와 접목을 과격하게 시도하며 ‘무교’(No Religion)이라는 개념을 만들기도 했고, 태국불교의 미신적 상업주의 문화인 부적문화를 비판하기도 했다. 1932년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암혁명의 지도자 프리디 바뇨몽(Pridi Banomyong)도 부다다사의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맑시스트 언론인이자 소설가로 잠시 승려생활을 했던 쿨랍 사이프라딧(Kulap Saipradit)도 부다다사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50년대 초 한국전 참여 반대운동에 동참하기도 했다. 한국전 참전반대 운동은 타이공산당(CPT)이 ‘연합전선’(United Front)을 결성하며 주도했는데 ‘미제국주의 반대, 한국전쟁 반대’를 내걸었던 전선에는 학생, 언론인 노동자, 농민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승려들 일부도 동참한 것으로 전해진다.
2010년 5월 19일 군의 레드셔츠 무력 진압 당시 레드셔츠 시위대에 함께 있던 승려가 잡혀가고 있다. 태국의 전투적 불교에서 ‘저항’의 코드는 극히 미약하다. ‘저항’이라면 반정부 시위 현장에 참여하는 이런 승려들을 맞딱드리는게 최대치다. 그보다는 전쟁폭력이나 전쟁에 준하는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전투적 불교는 존재감을 유지해왔다. (사진 : 이유경)
그런데 이런 장면들을 뒤집어 보자. 태국의 주류 불교는 지배체제의 정당화 도구로 국가정책에 협력하고 충성해왔다. 그 정책이 전쟁과 같은 폭력의 장일지언정 주류불교가 택한 건 폭력과 살상 반대가 아니라 왜 가담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정당화 설교를 푸는 작업이었다. 그런 불교를 국가는 ‘국가의 종교’로 관리(patronizing)하고 보호해왔다. 이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공식화하는 것과는 달리 해석적 차원에서의 개념이다. 태국은 공식적으로 제정일치 사회였던 적이 없고 근대사에서도 세속주의를 제법 잘 유지해온 편이다. 그럼에도 ‘불교국가, 태국’이라는 고정 브랜드가 굳혀진 건 불교를 관리, 보호해온 지배체제의 노력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지난 10월 13일 라마 9세 푸미폰 국왕의 사망에 슬퍼하는 태국민들. 푸미폰 국왕은 절대군주 시대가 아닌 1946년 입헌군주 시대에 라마 9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이듬해 1947년 쿠테타 발발을 계기로 되살아난 왕실, 국가, 불교 3대 지배이념의 시대 속에서 체제가 만들어낸 거의 절대적 신망의 군주로 70년 재임했다. 태국 불교는 이런 체제의 수호자였다. (사진 : 이유경)
이 지배체제에서 왕실이라는 거대 변수를 빼놓을 수 없다. 라마 6세 와지라윳 시대를 지나 라마 7세 프라차티뽁(Prajadhipok) 시대에 이르러 거사로 진행된 1932년 시암혁명 전까지 태국은 절대군주통치 국가였다. 시암혁명 이후 국가와 왕실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잠시 분리를 보았다.
1932년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시암혁명 기념 민주탑. (2014년 촬영) (사진 : 이유경)
그러나1947년 11월 7일 발생하여 하루만에 종료된 ‘시암 쿠테타’로 상황이 뒤집혔다. 이 쿠테타는 독재자 피분 송크람(Phibunsongkhram)을 다시 총리로 불러들였고, 피분 송크람 정부는 절대왕정의 전통을 상당 부분 되살려놨다. 피분 송크람 정권이 이듬해 기안한 1948년 헌법은 입헌군주시대 가장 왕정주의적이고 보수적인 헌법으로 평가받는다. 왕실(Phramagakasat), 국가(chat), 불교(Sangha) 등 태국의 지배구조를 떠받드는 3대 기둥 논리는 바로 피분 송크람 시대가 만들어낸 공식 지배이데올로기다.
따지고 보면 3대 기둥이 떠받드는 지배구조의 본질은 절대군주시대나 입헌군주시대나 ‘혁명적’ 차이를 보이는 것 같지 않다. 예컨대, 절대왕정이 무너진 지 84년이나 지난 올해(2016) 8월, 프라윳 찬오차 군사정권하에서 통과된 20대 헌법 7조는 “국왕은 불교도로서 종교(불교)의 수호자”라고 명시해 놓았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태국 불교계가 좀 더 다변화되고 신생종파의 등장을 보아온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헌법을 포함한 국가의 주요 문서가 규정한 불교상과 절대왕정 시대의 불교는 그닥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왕실은 불교의 수호자였고, 국가는 왕실의 준대리권력으로 행세했으며, 불교는 국가통치의 이데올로그였다. 영국출신 태국정치 전문학자로 ‘왕정주의 네트워크’(Network Monarchy) 개념을 도입해 태국 사회를 분석한 던칸 맥카르고(Duncan McCargo) 교수는 민주화 과정에서 조차 태국 불교는 다양하고 리버럴한 정치변화에 여전히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정통보수(Orthodox)의 태도를 유지했다고 지적한다.
태국의 전투적 불교는 바로 이 3대 기둥이 일사불란하게 떠받드는 지배질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옆나라 미얀마나 불교 주류의 다른 아시아 나라들과 달리 식민지 경험이 부재한 태국에선 역동적 ‘저항’ 코드가 내포된 전투적 불교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저항’이라면 반정부 시위 현장에 참여하는 승려들을 맞딱드리는게 거의 최대치다. 그보다는 전쟁폭력이나 전쟁에 준하는 국가폭력의 현장에서 그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서 전투적 불교는 존재감을 유지해왔다.
왕실, 국가, 불교 그리고 군사주의
태국불교가 전쟁과 얽힌 사건은 16세기 아유타야 왕국(1351-1767)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유타야 왕국 21대 군주로서1590년부터 1605년까지 15년 통치했던 나레수완 (Naresuan the Great, 1555-1605) 대왕 시대는 그어느 때보다도 열렬한 애국주의가 투영된 시기다. 태국의 역사책, 기록물 그리고 영화 등 나레수완 대왕이 전사로서 벌인 대 버마 ‘아유타야 왕국 해방’ 전투는 다양한 형태로 출판, 제작되어 왔다. 특히 2007년부터 2014년까지 5편의 연작영화로 제작된 ‘킹 나레수완’은 2006년 탁신 정권을 몰아낸 쿠테타 이래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군인정치 복귀시대와 궤를 같이 한다. 또, 2014년 6월 현 쿠테타 정권이 이 영화의 5편 ‘코끼리 전투’의 공짜표를 돌리며 국민적 관람을 독려한 건 이 시대 애국적 군사주의 흐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아유타야 시대의 대 버마 전투를 벌인 나레수완 대왕의 코끼리 전투를 형상화한 그림 (출처 미상)
태국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쿤은 ‘왕정주의-민족주의 역사기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제시하며 시암의 독립을 지켜온 위대한 ‘왕들의 서사’가 주 초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레수완 대왕의 대 버마 전투 ‘신화화’는 그런 작업의 한 사례라 볼 수 있다.
태국 역사학자 통차이 위니차쿤. 그는 ‘왕정주의-민족주의 역사기술’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설명하며 시암(태국)의 독립을 지켜온 위대한 ‘왕들의 서사’가 주 초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나레수완 대왕의 대 버마 전투 ‘신화화’는 그런 작업의 한 사례라 볼 수 있다. (사진 : 이유경)
나렌수완 대왕 시대 신화화의 수위를 알 수 있는 사건이 하나 있다.
왕정주의자임에도 왕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소신있는 발언을 해온 원로 사회운동가 술락 시바락사(Sulak Sivaraksa)는 2014년 10월 5일 탐맛삭 대학 세미나에서 나레수완 대왕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술락에 따르면 나레수완 대왕은 ‘잔인한’ 인물이었고 그를 역사속 영웅으로 만든 ‘코끼리 전투’는 (허구로) 구성된(constructed) 것이라 말했다. 그의 발언은 즉각 페이스북에서 “당신 버마인이냐”는 비아냥섞인 댓글세례를 불렀다. 술락은 또, 두 명의 은퇴장성으로부터 왕실 모독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 태국의 왕실 모독법인 형법 112조는 사망한 국왕에 대한 보호규정이 없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나레수완이 상징하는 애국주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될 지배질서의 신화(mythology)임을 방증했다.
태국 원로 사회운동가 술락 시바락사. 2014년 탐맛삭 대학에서 탐맛삭 학살 기념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나렌 수완 왕이 잔인했고, 코끼리 전투가 구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말했다가 왕실 모독법 고발을 당했다. (사진 : 이유경)
바로 이 애국적 신화의 단골 역사에서 불교 승려가 등장한다. 영화 속 승려들이 전사로 분한 건 아니다. 그들은 전쟁을 치유하는 심령술사 같은 존재들이다. 그리고 태국의 역사책은 이 시대 주도적 역할을 한 어떤 승려를 반복해서 주목해왔다. 승려는 전쟁 전후 나레수완 대왕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던 인물이다.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85km 떨어진 유적 도시 아유타야에 위치한 와이 차이몽콘 사원은 이 역사와 관련이 깊다. 이 사원내 중심 파고다인 프라 체디 차이몽쿤(Phra Chedi Chaimongkol)은 나레수완 국왕의 코끼리 전투를 기념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레수완 대왕은 전장에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 아유타야 전사들을 모두 처형하려고 했지만 한 승려가 이를 막았다는 설이 있다. 그는 솜뎃 프랏 와나랏(Somdej Phra Wanarat)이다. 나레수완 대왕이 솜뎃 프라 와나랏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사들을 처형 대신 이 기념 파고다를 짓게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처형을 막았던 승려의 ‘비폭력 서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전쟁군주시대 조력자 역할을 하던 불교의 배경도 담고있다. (**)
방콕에서 북쪽으로 약 85km 떨어진 유적도시 아유타야에 위치한 와이 차이몽콘 사원내 프라 체디 차이몽쿤(Phra Chedi Chaimongkol). 나레수완 국왕의 코끼리 전투를 기념하여 기념하여 지은 파고다. 전투당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 아유타야 전사들을 처형하려다 승려의 조언으로 이 파고다를 짓게 했다는 게 역사의 기록이다. (출처 미상)
전사들의 심령술사, 전쟁군주의 조언자 : 16세기 전쟁과 불교
20세기 초, 태국 불교는 1차대전(1914-1918)이라는 전쟁 기류를 맞닦드리게 된다. 당시 국왕이던 라마 6세 와치라윳은 1893년 왕자의 신분이었을 당시 영국으로 건너가 왕립군사학교(Britain’s Royal Military College)에서 수학한 사관생 출신이다. 그는 옥스포드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공부했으나 학위를 마치지 못한 채1902년 귀국했다. 1910년 10월 23일 국왕에 오른 그는 1914년 세계 1차 대전이 터지자 참전을 결정하게 된다.
군주의 전쟁 참여 결정에 대해 앞서 기술한 프라 텝 몰리 시리찬토 승려 처럼 반대한 이도 있지만 승가의 고참 승려들은 국왕의 참전을 적극 지지했다. 승가의 최고 지도자인 제 10대 승왕(1910-1921) ‘와지라나나와로라사 (Vajirananavarorasa)’는 그 대표적 인물이다.
와지라나나와로라사_Vajirananavarorasa : 와지라나나와로라사 왕자는 라마6세 시대의 승왕이자 국왕 와지라윳의 삼촌이다. 그는 1916년 불교의 전쟁 참여와 폭력 가담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저술을 발표하여 라마 6세의 1차대전에 참전을 합리화했다. (위키피디아)
그는 전쟁 참여를 ‘방어폭력’의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논리를 폈다. 1916년 발간된 그의 설교집 ‘국방과 행정에 대한 불교도의 태도’(Buddhist Attitude Towards National Defense and administration)는 참전을 합리화하는 이념적 토대를 제공했다. 불교계의 수장으로서 왕국의 전쟁 폭력 참여에 이데올로그를 자임한 셈인데 승왕 자신이 왕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승왕 와지라나나와로라사는 국왕 와지라윳의 삼촌이자 라마 4세인 몽굿(Mongkut) 왕의 아들이다. (와지라윳 왕은 몽굿왕의 아들 출라롱콘 대왕의 77명 자녀 – 아들 33, 딸 44 - 중 33번째다) 그는 왕족 칭호 ‘His holiness prince’를 유지한 승왕이다. 그리고 태국어, 팔리어를 섞어 쓴 그의 설교집 ‘국방과 행정에 대한 불교도의 태도’를 영어로 번역한 건 라마 6세 와지라윳 국왕이라는 설이 있다. 번역본 ‘옮긴이의 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전략) 붓다가 모든 형태의 전쟁을 비난하고 전쟁과 연계된 비즈니스를 전부 비난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방어 전쟁’의 필요성에 관한 한 붓다도 용인했다는 걸 증명하는 문구는 많다. 붓다가 비난한 건 “군사주의”라는 이름으로 잘못 명명된 이념이다. 불관용적이고, 증오를 부추기며 복수와 잔인한 만행을 보여주는 그런 이념 말이다. 그 잔인한 정신을 용인하는 종교라면 종교의 이름을 유지할 가치도 없다. (후략)”
이 설교의 기조를 관통하는 건 결국 ‘국방’의 이름을 단 방어 폭력이다. 선제 공격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면 폭력 동참이 정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분쟁이 신사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때 폭력사용은 정당하다”고 덧붙였다.
두번째로 제시된 정당화 논리는 ‘잠재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폭력 대비용’으로서의 폭력 정당화론이다.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국방은 정부의 정책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정당화되며 무시해서는 안된다. 전쟁은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 고로 전쟁에 대한 대비책은 마련돼 있어야 한다. 평화로운 시국일지라도 일단 준비는 돼 있어야 한다”
세번째 논리는 매우 흥미롭다. 시암이 번영할 수 있었던 배경에 시암의 신민들이 모두 전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일명 ‘모든 신민은 전사다’론이다. 그리하여 왕국이 오랫동안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고 설파한다. 왕족 승왕의 이 전투적 불교 논리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한 종교로서의 입지를 대변한다기 보다는 국가체제에 복속되고 동원된 불교의 처지를 또렷이 말해준다.
“모든 신민은 전사다” : 20세기 초 태국 전투적 불교
한편, 이 설교가 와지라윳 국왕에 충성하던 사병조직 <와일드 타이거대> (Wild Tigers Corps 이하 “와일드 타이거”) 류의 민병대 필요성을 강변한 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와일드 타이거는 1911년 5월 11일 와지라윳 국왕이 창설한 준 사병 조직이다. 약 4천명의 전국 조직으로 출범하여 1925년까지 활동하다 해체됐다. 국왕의 와일드 타이거에 대한 지나친 편애는 정규군의 반발을 샀고 창설 다음해인 1912년 ‘왕실의 반란’, 즉 쿠테타를 야기했을 정도다.
와일드 타이거는 태국 전투적 불교는 물론 태국 지배체제 전반에 중요한 래거시(Legacy)를 낳았다. 왕실, 국가, 불교 이 3대 기둥 수호하겠다고 나선 극우민병대나 준군사조직들이 태국 역사에 우후죽순 범람하게 된다. 이런 조직들의 활동이란 건 본질적으로 정치적, 체제적 반대 세력 제거이고 그런 현상이 가장 사악하게 드러난 시기는 70년대다.
동남아 공산화의 도미노 현상이 태국에 도착하는 걸 필사적으로 막기위해 태국 지배세력들의 반공정책은 강도를 높여갔다. 왕실, 국가, 불교를 내건 민병대 활동을 적극 장려했고, 살상임무를 띤 폭력 전선이 눈앞에 펼쳐지는 가운데 전투적 승려들은 예의 나팔을 불었다. 그 상황이 최악으로 응축된 1976년 탐맛삭 학살은 아직도 금기의 역사로 남아 있다.
또한 이 민병대 래거시는 태국 최남단 3개주에서도 두드러진다. 말레이 무슬림들의 분리주의 운동이 벌어지는 태국 남부지역에서 무슬림 반군에 대한 대항마로 “불교”를 내건 군사조직들이 그러하다. 이 불교도 민병대 이니셔티브를 2004년부터 일찌감치 주도한 건 다름 아닌 시리낏 왕비였다. 시리킷 왕비는 2007년 전투적 불교관을 드러내는 발언을 통해 자신이 기여한 불교 민병대 운용에 힘을 실어줬다.
“우리는 그들(태국 남부 불교도)이 무사히 생존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그들이 군사 훈련을 받고자 한다면 훈련을 시켜라. 그들이 무장하고 싶다면 무장케 해라”
** 아유타야 왕국 시대 대버마 전투와 관련한 역사기술은 1917년 담롱 왕자에 의해 자세히 집필된 바 있다. : Damrong Rajanubhab, Prince Disuankumaan (2001) [1917]. Our Wars with the Burmese: Thai-Burmese Conflict 1539–1767. Translated by Baker, Chris. Thailand: White Lotus Co. Ltd. ISBN 974-7534-58-4)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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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의 전투적 불교 1편 : 전쟁폭력, 국가폭력 그리고 체제의 협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