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e-매가진 '신대승' 제7호 (2017년 1월)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시리즈 제4화 - 태국 2편>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 전문기자)
- 민병대를 배회하는 전투적 불교
<탐맛삭 학살의 아이콘 사진 ‘나무’에 목매달린 시위대를 향해 의자로 확인 ‘사살’하는 폭도추정 군중의 모습. 이 모습은 아크릴판에 인쇄되어 지난 10월 40주년 기념식 공간에서 전시되었다. - 사진 : 이유경>
금기의 역사 속 전투적 불교
태국의 70년대를 연구하는 이라면 예외없이 한 승려의 이름을 만나게 된다. 바로 키띠우도(Kittiwudo Bhikku, 세속명은 ‘키띠삭 자런사따분 Kittisak Jaraensathabuwn’) 승려다. 키띠우도 승려는 1936년생으로 21세 되던 1957년 출가했다. 불교사상 전파를 명분으로 여러 재단을 설립했고 방콕과 가까운 촌부리 지방에는 누비스 승려들을 위한 사원 학교도 개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건 부다의 가르침을 전파해서도, 승려들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해서도 아니다. 섬찟한 프로파 간다를 일삼은 극우반공주의 독설가로 그는 이름을 남겼다. 그의 악명이 잘 드러난 기록 중에는 1976년 <자뚜랏>(Chatturat)이라는 매거진과의 인터뷰가 있다. 그는 이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책망받을 일(demeritorious)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공산주의자를 죽이는 것은 “승려를 위해 물고기를 죽여 요리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도 했다. ‘생선을 죽이는 것은 작은 죄이지만 승려에게 시주하는 것은 보다 큰 선’이라는 논리다.
“불교를 믿는 우리 태국인들도 좌파세력을 (죽임으로써)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국가와 종교(불교) 그리고 국왕을 파괴하는 세력은 온전한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그들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악마를 죽이는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게 태국인들의 의무다.”
키띠우도 승려가 살상을 옹호하면서까지 수호하고자 했던 건 국가, 종교(불교) 그리고 국왕(왕실)이다. 태국의 지배구조를 떠받드는 이 3대 기둥을 위해 그가 살상해도 된다고 말한 대상은 “공산주의자”다. 표현은 “공산주의자”이지만 그 용어가 포괄한 범위는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반체제, 반정부 세력 모두를 가리킨 것이었다. 실제로 70년대 반정부 세력 중에는 공산주의에 대해 정확한 이해가 없었다고 말하는 이가 적잖다. 출라롱콘대 학생으로 탐맛삭 학살을 경험한 후 태국 공산당(CPT) 게릴라에 가담했던 언론인 피룬 찻와니쿤역시 “(당시) 공산주의가 뭔지 잘 몰랐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싸웠다기 보다는 전체주의적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헌법과 자유를 위해 싸웠던 것”이라는 게 그가 밝힌 바다. 그러나 키띠우도 승려는 피룬같은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고 “국가의 적”이며 “태국인이 아니(Non-Thai)”라는 프레임을 덧씌웠다. 해석이 필요없는 직설법 탓에 키띠우도는 태국 전투적 불교사에 가장 선명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등재됐다.
그렇다면 당시 전투적 불교는 어떤 시대를 관통한걸까.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쿠테타 전통이 공고화된 시기였다. 1947년 11월 7일 쿠테타 이후 도입된 보수적 헌법에 따라 태국 사회가 후퇴해갔다는 점은 <태국의 전투적 불교 1편 : 전쟁폭력, 국가폭력 그리고 체제의 협력자> 편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47년 쿠테타는 하룻밤 잔치로 끝났지만 군인독재자 피분 송크람 (Plaek Phibulsongkhram)의 재집권을 촉발했다 (피분송크람은 1938년 12월 16일부터 1944년 8월1일까지 첫 총리직을 수행한 바 있다). 그 시점부터 1973년 10월 14일 민주항쟁으로 또 다른 군부 독재자 따놈 키띠카촌(Thanom Kittikachorn, 이하 “따놈”)이 쫓겨날 때까지 26년간 태국은 단 한번도 민간정부를 가져보지 못했다. 그 사이 쿠테타는 실패와 성공을 모두 포함하여 7번 발생했다. 1932년 입헌군주 혁명 이후 첫 4번의 쿠테타까지 합하면 총 11번이다. 권력투쟁의 성격도 있고, 진보적 인물로 평가받는 프리디 바뇨몽(Pridi Banomyong)정파의 ‘뒤집기 쿠테타’도 1949년과 1951년 두번 있었다. 모두 실패했다. 심지어는 자기 정부를 스스로 뒤집는 ‘자가 쿠테타’(self-coup)도 있었다. 1958년 사릿 따나랏(Sarit Thanarat, 이하 “사릿”)의 두번째 쿠테타와 1971년 따놈의 쿠테타가 그런 경우다.
<따놈 끼티카촌 : 1973년 민주항쟁으로 쫓겨난 군부독재자. 1976년 승복을 입고 귀환했다. 70년대 독재자와 손잡은 태국 불교는 국가, 종교,왕실 수호를 내걸고 폭력적 캠페인에 동참하며 전투적 불교의 선명한 족적을 남겼다. - 사진 : 위키피디아>
둘째, 왕실이 입헌군주국의 상징성을 넘어 ‘기능적으로’ 일부 복원되고 있었다. 1946년 6월 9일, 형 아난다 마히돈 (라마 8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얼떨결에 즉위한 라마 9세 푸미폰 전 국왕이 시골 구석구석을 다니며 ‘현지시찰’하는 장면은 바로 50년대 후반부터 가속화된 장면이다. 1957년 쿠테타를 일으킨 사릿은 이전 피분 송크람 시대에 제한돼 있던 국왕의 활동을 공개적으로 재개하고 부추겼다. 뿐만 아니라 사릿은 1873년 출라롱콘 대왕 (Chulalongkorn, 라마 5세 : 1853.09.20.~1910.10.23.)시대에 폐지됐던 큰 절 ‘그랍’을 부활시켰다.그랍은 왕실가족 앞에서 일반시민들은 반드시 무릎을 끓고 머리를 땅에 대거나 구부정하게 앉아야 하는 깊은 절의 자세다. 시민을 ‘신민’으로 만드는 행위로 해석되고 있다.
그런 사릿을 푸미폰 전 국왕은 친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사릿이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국왕은 21일간의 추모기간을 선포했고그의 시체는 100일 동안 왕실의 관리를 받았다. 국왕 부부는 1964년 3월 17일 사릿의 화장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이 적극 지원한 왕실 프로파간다는 국왕을 반신반의 대열에 올려놓았다. 태국은 동남아 공산화 도미노 현상에서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은 최후의 보루였다. 왕실은 군과 함께 반공애국 전선을 지키며 지배체제의 실질 권력자로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셋째, 기층 민중들 사이에선 반란의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참고로 태국어 “파티왓Patiwat”은 혁명revolution, 반란rebellion, 정권교체regime change까지 두루 담고 있다). 전투적 불교가 덩달아 요동친 건 이런 혁명적 기운에 대한 반동현상이다. 그동안 태국의 70년대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 정도로 얼버무려졌다. 하지만 가장 거칠게 요동친 계층은 인구의 78% 정도를 차지하던 소농계층이었다. 게다가1965년부터 시작된 태국 공산당(CPT) 무장투쟁은 북부, 동북부 그리고 남부 일부지역에 거점을 넓혀가면서 70년대 중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들은 ‘국가’에 저항했고, ‘종교’와 ‘왕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리적 상황을 고려하면 공산당의 무장 투쟁과 농민들의 반란 모드는 상호상승 작용을 탔을 것으로 보인다. 농민들은 사릿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따놈(Thanom Kattikachorn) 정부를 향해 농촌부채 탕감과 쌀값 안정을 요구했다. 따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소농들의 압박은 도심 학생들의 신헌법 요구 시위와 함께 1973년 10월 14일 민주항쟁(이하 “십시 뚤라” – 10월 14일 이라는 뜻)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항쟁으로 독재자 따놈이 망명길에 오르자 각계각층의 자기권리 찾기와 민주화 요구는 폭발적으로 쏟아졌다. 물론 ‘십시 뚤라’는 한계가 뚜렷했다. 1973년 10월 13일 방콕의 라차담넌 거리를 행진하던 수십만 행진대열에는 국왕 부부의 사진이 들려 있었고 승왕사진과 불교 깃발도 펄럭이고 있었다. 탐맛삭 대학 학생운동 지도자인 섹센 파세큰(Seksen Pasertkul)은 시위대를 이끌고 국왕에게 조언을 구하겠다며 왕궁을 향해 행진했다. 따놈 축출을 요구한 건 시민들이지만 결국 그의 하야를 ‘명령’하고 망명을 보낸 건 푸미폰 전 국왕이었다. 10월 14일 따놈이 물러나자 즉각 후속 총리를 임명한 것도 국왕이었다. 탐맛삭 대학 법대 학장이자 전 고등법원장을 지낸 판사 사냐 다르마삭티(Sanya Dharmasakti)가 독재자 따놈의 뒤를 이었다.
바로 이시기 민주화 요구가 봇물 터지던 73년부터 76년까지는 “짧은 민주화기간 3년”으로도 표현된다. ‘민주화 3년’은 그러나 반체제 세력에 대한 탄압이 활개치던 엄혹한 시기이기도 했다. 극우 민병대와 자경단 활동은 최정점을 향해갔고 정치적 암살이 횡행했다. 1974년 3월부터 1975년 8월 사이 암살당한 태국농민연맹(FFT) 지도자만 21명이다. 치앙마이 등 북부 지역 농민들이 주로 대상이 됐다. 그러나 농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1974년 8월 납세거부를 선언하고 태국 시민권을 반납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옥죄던 지주의 땅을‘소농들의 자치해방구’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이 운동을 주도한 태국농민연맹(FTT)은 1976년 10월께 태국 전역 72개 지방 중 41개 지방에 지부를 둘 만큼 전국적으로 세를 넓히고 있었다. ‘삼 프라산’으로 불리는 농민, 노동자, 학생 3주체의 연대도 고조되고 있었다.** 76년 9월 초 두명의 노동운동가가 또 암살됐다. 그리고 10월 6일 탐맛삭 학살이 벌어진 것이다.
70년대 중반 노동자, 농민 운동가 겨냥 정치암살 극성
이 시기 극렬했던 극우 민병대는 크게 네 조직이다. 레드가우어(Red Gaurs), 나와폰(Nawaphone 혹은 Nawapol), 그리고 빌리지 스카웃(Village Scouts)과 빌리지 스카웃의 상위조직 격인 '경찰 국경순찰대'(BPP)가 있다. 이 중 나와폰과 레드가우어는 1974년 국내치안작전명령부(Internal Security Operation Command, 이하 “ISOC”)의 지원으로 창설됐다. ISOC은 1965년 국내치안담당을 내걸고 군내에 개설된 기구로서 70-80년대 반정부 세력 탄압의 소위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
이들 민병대중 전투적 불교가 가장 직접적으로 관여한 조직은 나와폰이다. 70년대 미국 급진주의 운동가 린던 라루스(Lyndon LaRouch)그룹이 창간한 대안적 인텔리전스 보고서(Executive Intelligence Review [EIR])는 탐맛삭 학살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1976년 10월 11일자 ‘태국의 CIA 쿠테타(CIA Coup In Thailand)’를 보면 나와폰과 레드가우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레드가우어, 나와폰) 그들은 체이스 맨하탄 은행(Chase Manhattan Bank)과 아시아 파운데이션(Asia Foundation: 사실상 CIA 프런트 조직-필자)으로부터 직접적 제정 지원을 받는 불교단체들과 연계돼 있다”
그 “불교단체들”은 다른 어느 기록에서도 명명된 바 없다. 다만 키띠우도가 세웠다는 여러 재단들(foundations)일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나와폰 ‘대변인 노릇’을 했던 인물이 바로 키띠우도 승려였다. 두 조직 모두 ‘애국 불교도’를 자처하며 반정부 세력 암살에 관여했다. 나와폰이 암살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중에는 1975년 7월30일 전문적 저격수의 총에 암살된 태국농민연맹 부의장 인따 시분루앙(Intha Sribunruang)이 있다. 인따의 가족과 생존자들은 인따의 암살 배후로 줄곧 나와폰의 역할을 지목해왔다. 또, 인따 시분루앙의 장례식이 치뤄지던 그해 8월 4일, 태국 신문 ‘프라차띠파타이’(Prachathipatai)는 “당시 치앙마이 주지사였던 ‘아사 맥사완 (Asa Meksawan)’이 인따가 암살당하기 전에 ‘사전 경고’를 내보낸 적이 있다”는 기사를 다뤘다. 기사에 따르면 아사 멕사완 주지사는 인따에게 ‘머잖아 농민운동가들을 겨냥하여 나와폰이 암살을 벌일 것이라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100명 이상의 암살자들이 준비 중이니 조심하라는 것. 이 시기 암살당한 또 다른 주요 인물에는 사회당 사무총장이었던 분사농 푸뇨디아나(Boonsanong Punyodyana)도 있다. 1976년 2월 28일 분사농이 암살당하자 그의 당을 포함하여 많은 좌파 운동가들이 태국공산당의 정글캠프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 횡행한 태국의 정치 암살에 대해 ‘상상의 공동체’ 저자 고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 교수는 1977년 한 저널 기고***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태국에서 정치적 반대자를 겨냥한 정치 암살은 드물지 않지만 대체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대중들은 무슨일이 벌어지는 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 1974-1976년 사이 발생한 정치 암살이 놀라운 건 이 만행들이 상당히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종종 통제력을 상실한 성난 군중들이 자행하는 암살마저 벌어졌다”
한편, 나와폰은 암살 뿐 아니라 심리전과 홍보전에도 능했다. 이 조직을 이끌던 인물은 군 정보국 출신 왈롭 로자나와싯 중장(Gen. Wallop Rojanawasit, 이하 “왈롭”)으로 알려졌다. 왈롭은 지금은 폐간된 <파 이스턴 이코니믹 리뷰>(Far Eastern Economic Review)와의 인터뷰에서 1953년 미국에서 심리전(Psychological Warfare)을 공부하던 시절부터 나와폰 같은 조직에 대해 구상하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나와폰에는 극우승려들은 물론 정치인, 사업가, 군정보국 인사 등 태국 사회의 엘리트 계층도 참여했다. 이 점은 레드가우어나 빌리지 스카웃과 인적 구성에서 약간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일례로, 지난 10월 13일 푸미폰 전 국왕의 사망 직후 한달여 섭정 체제로 돌입했을때 섭정으로 자리를 옮긴 추밀원장 프렘 틴술라논다(Prem Tinsulanonda)를 대신하여 추밀원(Privy Council)장 직을 임시 물려받았던 이는 타닌 끄라이위치엔(Tanin Kraivichien)이다. 극우 반공주의자로 유명세가 남달랐던 타닌이 추밀원장에 오르자 언론이 주목했던 건 그가 나와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타닌은 탐맛삭 학살 당일 발생한 쿠테타 세력에 의해 임명 총리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투철한 극우 반공 이념이 임명된 주 이유였다는 분석이다.
나와폰에는 또 해외 유학파들의 참여도 눈에 띄었다. ISOC가 만든 것이긴 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와타나 키우위몬(Wattana Kiewvimol)이라는 인물이 창시한 것으로 기록 되어 있는데, 와타나는 ‘미주태국학생연합’(Thai Students Association in the United States) 의장을 지낸 ‘미국파’ 엘리트다. 나와폰 대표의 ‘하이쏘’ 계급성과 이 조직이 의회 민주주의에 대해 반대했던 건 오늘날 ‘옐로우 vs. 레드’ 분쟁에서도 유사하게 투영되고 있다. 계급갈등, 계층갈등 그리고 지역 갈등까지 70년대 부상한 분쟁 요소는 오늘의 분쟁요소이기도 하다. 태국 역사학자이자 탐맛삭 학살을 경험한 통차이 위니차쿤 위신콘신대 교수는 지난 10월 고국 방문 길 방콕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혹뚤라 (탐맛삭 학살)와 2010년 레드셔츠 학살은 유사성이 있다”고 말했다. “(두 사건 모두) 잔인함의 정도, 시위대가 어떤 식으로 죽어갔는가 하는 점 그리고 역사가 이들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 점” 등을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통차이 교수가 입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가해자 영역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성역’이 존재한다는 점도 40년을 뛰어 넘는 두 사건의 유사점으로 남아 있다. 물론 온전히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민병대 극우반공폭력 노선에 함께 한 전투적 불교
또 다른 극우조직 레드 가우어(Red Gaur 혹은 “크라팅 댕”) 역시 순사이 하스딘(Maj. Gen. Sudsai Hasdin)이라는 전 군 정보국 인사가 관여한 조직이다. 1974년 레드 가우어 창설 당시 순사이는 ISOC의 소령이었다. 그는 훗날 프렘 정부하에서 (1980년 3월~1988년 4월) 총리실 장관직까지 역임했다.
레드 가우어는 벌건 대낮에도 물리적 폭력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대단히 폭력적인 조직이다. 주로 직업학교 학생들(태국의 직업학교 Vocational colleage는 제도상 한국의 상공업계 고등학교와 유사), 고교 중퇴자들 등 비교적 어린 청소년들도 푼돈을 받고 폭력에 고용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 등 군인출신들이 주 구성원이었다. 레드 가우어는 1975년 4월 총선 직후 진보정당 신세력당(New Forces Party) 사무실에 폭탄공격을 한 바 있다. 그해 8월 탐맛삭 대학에 무단 침입하여 난장판을 만든 전력도 있다. 노동자들 파업현장, 학생 농민 시위현장에 나타나서 난장판을 만드는 것도 이들의 주 업무였다.
레드가우어가 주로 도심에서 활동을 벌였다면 시골 지역에서는 빌리지 스카웃이 유사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스카웃은 국경순찰대(Border Patrol Police)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이들로부터 군사훈련도 받는 등 레드가우어 보다는 좀 더 격식 갖춘 조직이었다. 빌리지 스카웃은 1971년 국경순찰대와 내무부가 같이 신설한 조직이다. 국경 순찰대가 반군작전의 임무를 띤 만큼 빌리지 스카웃 역시 대 공산반군 작전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들 행사에는 유독 국왕 부부와 최근 라마 10세로 추대된 신임 국왕 와지라롱콘 당시 왕세자가 자주 등장하며 스카프와 깃발을 직접 수여하기도 했다. 따놈 정부의 발표를 인용한 AP보도는 매월 9만명 이상이 빌리지 스카웃에 동참한다고 했으나 이 엄청난 숫자를 확인할 길은 없다. 국경순찰대가 빌리지 스카웃을 위해 마련한 훈련 프로그램은 정치성이 짙었다. 그 훈련을 담당한 이들 중에는 극우 승려들이 포함돼 있었다.
<70년대 빌리지 스카웃을 만나는 전 푸미폰 국왕. 빌리지 스카웃의 공식 행사에는 유독 왕실가족들의 등장이 잦았다. - 출처 미상>
한편, 여러 관련 자료에는 라오스에서 CIA가 지원한 대 반군전쟁에 참여했던 위툰 야사왓(Vitoon Yasawat)이라는 태국 사령관이 자주 거론된다. 그는 빌리지 스카웃과 레드 가우어를 두루 지휘한 것으로 보인다. 탐맛삭 학살이 벌어지던 10월 5일부터 6일까지 방콕 안팎에서 그의 모습이 목격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밖에도 1976년 초부터 이미 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이들 중에는 ‘탐맛삭대학 불교와 문화 협회’라는 학내 불교 조직도 있었다.
극우 민병대 빌리지 스카웃 정치교육 담당 : 극우 승려들
따놈의 귀환 : 반대하는 민중 VS. 환영하는 왕실
탐맛삭 학살을 촉발한 직접적 계기는 3년전 쫒겨났던 따놈 그리고 따놈과 함께 쫒겨났던 부총리 프라파스 초루사띠엔(Praphas Charusathien, “이하 프라파스)의 귀환이었다(둘은 심지어 사돈지간이다). 8월 프라파스가 먼저 타이완에서 도착했다. 그리고 따놈이 9월 싱가포르에서 들어왔다. 승복을 입고 돌아온 따놈이 직행한 곳은 ‘왕실 관리’ 사원인 방콕의 보웬니웬 사원이었다. 그를 맞이한 건 국왕 부부였다. 10월2일에는 호주에 머물던 와지라롱콘 왕세자까지 급거 귀국하여 보엔니엔 사원을 찾았다. 그 역시 승려가 된 따놈에게 경의를 표했다.
독재자의 귀환을 환영하는 왕실가 분위기와 달리 시민들의 분노는 폭발직전이었다. 3년전 이룩한 민주화 성과가 흠집났다는 절망감도 있었고, 그 3년간 성장한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의식도 얼마나 큰 분노로 뭉쳤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중 9월 24일 따놈 축출을 요구하던 두명의 노동운동가 살해된 채로 발견됐다. 그리고 10월 6일 탐맛삭 학살이 벌어지기까지 태국은 그야말로 매일 폭풍전야를 맞고 있었다. 5~6일로 넘어가는 새벽 나와폰과 국경수비대, 레드 가우어가 대학 캠퍼스에 들이닥치며 캠퍼스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탐맛삭 대학 교문근처 구석에 작게 세워진 탐맛삭학살 기념물. 학살이 발생한 시대 잔인한 선동을 주도했던 태국의 전투적 불교는 이후 단 한번도 사과나 인정을 한 바 없다. - 사진 : 이유경>
극우 승려 키띠우도의 프로파간다는 10월 6일 학살 당일에도 계속됐다. 그는 군이 운영하는 라디오 방송 ‘얀 크로’(“장갑차” 라는 뜻)를 통해 계속 선동했다.
“방콕에 있는 시민 여러분 공산주의자들을 죽이십시오. 그게 바로 국가와 불교와 국왕을 지키는 길입니다.”
이 ‘장갑차’ 라디오를 통해 선동한 인물 중에는 사막 순다라웻(Samak Sundaravej) 전 총리도 있다. 그는 당시 민주당 소속 내무부 차관이었다가 학살 하루전인 5일 같은 당 의원 3명이 “공산주의자”라고 ‘폭로’하며 항의의 뜻으로 차관직을 사퇴했다. 사막은 탐맛삭 학살 후 들어선 타닌 정부의 내무부 장관으로 되돌아왔다. 훗날 줄을 바꿔 탄 사막은 2008년에 친탁신계 정당인 피플파워당 정권의 총리직을 역임했던 건 왕당파로부터 공격을 완충해보고자 했던 탁신 전 총리의 영악한 선택이었다. 사막이 총리직에 오르자 그의 과거가 논란이 됐다. 사막 전 총리는 2008년 9월 초 CNN, 알자지라 와의 언터뷰에서 탐맛삭 학살 당시 역할을 부인했다. 또, “운 없는 놈(unlucky guy) 단 한명 죽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극우가 어때서? 극우는 왕과 함께, 극좌는 공산주의자와 함께였다”
1976년 10월 6일 상황에 대해서는 그 당시 탐맛삭대 총장이었던 푸어이 웅파콘(Puey Ungphakorn) 박사의 글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푸어이 박사는 학살 직후 항의의 표시로 총장직을 사퇴했고 극우세력의 살해협박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학살 이듬해인 그가 발표한 글 “태국의 폭력사태와 군사쿠테타”(Violence and the Military Coup in Thailand)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새벽 2시 35분 : 레드 가우어 멤버 일부는 학생 사수대에게 심경의 변화가 있다며 학생들을 지지하는 듯 말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들은 건물 안에 들어서자 마음이 변했다.”
"오전 10시 : 좀 더 많은 학생들이 극우민병대의 의해 (탐맛삭 대학) 축구장으로 끌려나왔다. 극우 폭도들은 시체를 발로 차고 불교 문양을 찢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불교도가 아니다'”
“저녁 6시 : 왕세자는 빌리지 스카웃 대원들을 정부청사로 불러 모았고 해산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국가행정개혁위원회’란 이름을 내건 한 무리의 군인들이 정권을 접수했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게엄령이 선포됐다. 방콕의 의회 정치 실험 3년은 그렇게 종료됐다.”
“공산주의자들은 진정한 불교도가 아니다”
70년대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고로 “진정한 불교도가 아니었던” 학생 운동가 중에는 파이산이란 인물이 있다. 파이산은 탐맛삭 학살의 후유증을 딛고 1983년 출가하여 프라 파이산 위살로(Phra Paisal Visalo)라는 법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현재 동북부 차이야분(Chaiyaphum) 지방에 있는 수카토 정글 사원(Sukato Forest Monastery)의 주지승으로 있다. 그는 참여불교(Engaged Buddhism)에 깊이 관여하고 있으며 왕성한 기고, 저술활동도 하고 있다.
극우 반공주의와 결탁한 전투적 불교의 폭력을 살아낸 그가 최근 인종청소까지 가담하는 미얀마의 전투적 불교를 보며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남겨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13년 미얀마 중북부 지방에서 발생한 멕띨라(Meiktila) 학살 직후였다. 그는 두 나라 불교도 모두에게 가하는 호소어린 일침을 가했다.
“인구 4%밖에 되지 않는 무슬림들이 미얀마를 정복할 거라고?..무슬림을 탓하지 마라. 불교도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 불교를 정말 보호하고 싶다면 우리는 미얀마 불교도 형제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말해야 한다. 무슬림 형제들에게 이제 그만 폭력을 중단하라고.”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제 5화-태국 3편에서는 <‘군인승려’ ‘군인사원’ : 키띠우도의 환생과 태국남부의 전투적 불교>가 이어집니다.
**1973-76년 사이 태국 농민들의 저항에 대해서는 호주국립대(ANU) 연구원인 티렐 하버콘(Tyrell Haberkorn)의 저서 <혁명 저지당하다 Revolution Interrupted : Farmers, Students, Law, and Violence in Northern Thailand> (Madison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11)의 일독을 권한다. 이 시기를 가장 잘 기록한 책이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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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의 전투적 불교 1편 : 전쟁폭력, 국가폭력 그리고 체제의 협력자"
- "태국의 전투적 불교 제2편 : 민병대를 배회하는 전투적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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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7.01.30 한국 국정원 놈들이 태국의 "느린 쿠데타"를 정말 많이 연구한 게 틀림없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에서 수꼴 단체들이 진행하는 소위 "태극기 집회"도..
최종적으로는 바로 이렇게 하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군대는 봉기하여 계엄령을 선포하라!"면서,
드디어 "종북 좌빨을 때려죽이자!"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지요..
이유경 기자님의 이 글은 방대한 내용을 잘 정리하여
정말로 중요한 메세지를 보여주네요..
좋은 글 쓰시느라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
작성자황금자객 작성시간 17.02.03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