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e-매가진 '신대승' 제8호 (2017년 2월)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시리즈 제5화 - 태국 3편>
군인승려, 군인사원 : 키띠우도의 환생과 태국 남부의 전투적 불교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 전문기자)
- 기자납치, 반대파 취조 : 무장경호원의 ‘대부’ 붓다 이싸라
- “시간을 죽이는 건 사람을 죽이는 것 보다 더 큰 죄다” : 레드셔츠 무력진압 촉구한 와지라메 승려
- “승려 한명 죽을 때마다 모스크 하나 불태우자” : ‘태국의 위라뚜’ 자처한 아피찻 프롬잔
- “불교도를 무장 시켜라” : 왕비’명’은 성공했나
- 군캠프가 된 불교사원, ‘군인’과 ‘승려’를 오고가는 ‘군인승려’들
혁명과 반란의 70년대 전투적 불교의 정점을 찍은 태국 불교는 80-90년대를 지나며 일종의 ‘다원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승려들의 섹스,부패 스캔달 등 ‘세속적’ 면모가 미디어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기존 승가질서를 비판하며 새로운 불교 운동을 선언한 산띠 아속(Santi Asoke) 개혁 운동이라든가 기복신앙에 기대어 물질주의 부추기는 담마까야 사원(Dhammakaya Temple)등도 그런 ‘다원화’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산띠 아속 운동은 1973년 사마나 보디락(Samana Bodhirak)이라는 젊은 승려에 의해 시작됐다. 채식주의와 금욕을 강조하며 다소 ‘극단적’인 개혁파로 통한다(‘급진적’radical이라는 수식어 대신 “극단적”extreme이라고 쓴 건 이 운동이 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받는 걸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산티 아속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고 보수왕정주의를 지향하는 옐로우 셔츠 운동의 주축세력이다). 담마까야 사원은 ‘위자 담마까야 (Vijja Dhammakaya)’라는 명상법의 창시자 프라 몬쿨텝무니(Phra Monkultepmoni) 제자였던 비쿠니 콘 녹영의 제자 차이분 시티폰(Chaiboon Sitthiphol)이 1969년 시작한 명상센터에 뿌리를 두고 있다. 70년대 공산주의자들의 집합소로 낙인 찍히기도 했던 담마까야 명상센터는 1979년 불교사원으로 변모한 이후 ‘해탈을 파는 불교’로 상징되는 상업주의 불교의 대명사가 됐다. 두 운동 모두 2000년대 이후 태국 사회를 휘감고 있는 ‘레드 vs. 옐로우’ 정치분쟁에도 일정하게 발을 담그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산티 아속은 옐로우 셔츠에 참여해왔고, 담마까야는 노골적인 참여를 보인 적은 없지만 탁신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레드셔츠 인맥과 연계돼 있다는 의미다.
태국의 전투적 불교도 이 ‘색깔정치분쟁’을 거치며 2000년대 중반부터 서서히 부활했다. 비슷한 시기 재개된 태국 남부 분쟁에서도 전투적 불교가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1세기 태국의 전투적 불교는 지역과 특징에 다음과 같이 두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얄라, 파타니, 나라띠왓 지방 등 태국 최남단 분쟁지역에서 나타난 전투적 불교다. 이 지역에서는 ‘익명성’(unidentified), ‘집단성’(collective) 그리고 국가권력의 공개적 지지(overtly state-sponsored)를 특징으로 한다.
둘째, 방콕을 중심으로 태국 남부 이외의 지방에서 나타나는 전투적 불교다. ‘기명성’(identified), ‘개인성’(personalized) 그리고 은밀한(covert) 배후(patron)의혹을 꾸준히 사고 있다. 이 유형에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이는 누가 뭐래도 ‘루앙 푸 붓다 이싸라’(Luang Pu Buddha Isara, 이하 “붓다 이싸라”)승려다. 그는 현재 방콕 북부와 인접한 나콘파톰 지방 오노이(O Noi) 사원의 주지승으로 있다.
(사진 : 붓다 이싸라 페이스북) : 붓다 이싸라 승려가 전 푸미폰 국왕 사망 100일제를 지내고 있다.
익명성, 집단성, 선명한 배후 vs. 기명성, 개인성, 은밀한(?) ‘배후’
세속명 수윗 통파라잣 (Suwit Thongprasert), 붓다 이싸라는 1956년 1월 1일 방콕에서 태어났다. 스무살 되던 1976년 수윗은 방콕의 왓 클롱터이나이(Wat Khlong Toe Nai)에서 승려서품을 받았다. 그러나 다음해 군에 입대하여 2년간 군복무를 하게 된다. 태국은 부분 징병제 국가다. ‘평균’ 60%의 병력이 자원병으로 우선 충당되고 나머지 40%는 만 21세 이상 남성 가운데 제비뽑기를 통해 보충하는 독특한 시스템이다. 붓다 이싸라의 군복무가 이 제비뽑기 방식으로 참여한 경우인지 아니면 자원입대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태국의 여타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부유한 상류층 출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군복무를 마친 후 1978년부터 1983년 방콕 클롱터이나이 사원에서 다시 승려서품을 받기까지 5년간 붓다 이싸라의 행적은 알려진 게 없다. 그리고 1990년, 그는 도심의 사원을 떠나 ‘고행’의 길로 들어서게 그는 정글에서 엄격한 고행을 체험하는 두탕가(Dhutanga)를 5년간 수행했다. 물론 그가 보여온 전투적 행보는 두탕가를 실천했던 승려의 모습과는 좀체 접목되지 않는다.
붓다 이싸라의 전투성은 2013년 말부터 2014년 5월 22일 쿠테타가 발생하기까지 약 7개월간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방콕을 마비시킨 시위대 ‘민중민주주의개혁위원회(PDRC, 이하 “PDRC”)’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붓다 이싸라는 늘 무장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녔다. PDRC는 방콕의 여러관공서를 점거했는데 챙 와따나 지구에 위치한 정부종합청사 등 북부 지역이 붓다 이싸라 그룹이 점거한 주 무대이다.북부는 좀 더 과격하고 전투적인 공간이 되었다.
여기서 잠시 붓다 이싸라의 전투적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 PDRC 방콕 셧다운 시위배경을 간략히 살펴보자.
2013년 11월 초 잉락 친나왓 정부는 탁신 전총리는 물론 2010년 레드셔츠를 유혈 진압했던 정치적 반대세력까지 두루 사면하고 화해하자는 취지의 사면법을 밀어붙였다. 이에 대한 반대로 촉발된 시위는 반탁신 진영인 옐로우 셔츠의 방콕 셧다운(Bangkok Shutdown)으로 이어졌다. PDRC는 옐로우 셔츠의 마지막 화신이다. 사면법 반대라는 이들의 초기 구호는 충분히 대의명분을 갖는 것이었다. 사실상 레드셔츠 진영에서도 골수 친탁신계를 제외하면 사면법을 반대했다. 레드셔츠 입장에서는 2010년 자신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유혈진압의 책임자들이 사면이 아니라 처벌받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PDRC 시위가 단순히 사면법 반대를 위한 게 아니었다는 게 곧 드러났다. 사면법은 바로 폐기되었고 잉락총리는 시위대의 요구를 수용하여 의회를 해산했지만 시위는 계속됐다. 사실 시위대가 반대한 건 한 가지 더 있었다. 상원의원 전원을 선출직으로 하자는 잉락 정부의 헌법 개정안까지 이들은 반대했다. 상원의원 100% 선출 조항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태국 최고의 민주헌법으로 평가받는 ‘1997헌법’이 보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2006년 1차 반탁신 쿠테타를 주도한 군사정부가 이듬해 다시 헌법을 기안하며 선출직 50%, 임명직 50%로 후퇴시켰다. 잉락 정부는 ‘2007헌법’의 상원의원 조항을 1997년 헌법대로 100% 선출직으로 바꾸려 했지만 보수왕정주의 진영은 저항했다.
여기까지는 ‘사실’(Fact)에 관한 기록이다. 진실(Truth)을 풀어본다면 왕정주의 진영은 잉락 정부 타도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1인1투표라는 평등한 투표권 부여에 반대해왔다. 교육받지 못한 어리석은 자들(주로 시골 출신)과 교육수준 높은 중산층, 엘리트들이 평등한 정치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계급주의적 사고(classism)는 의외로 깊고 팽배했다. 전자에 속하는 이들이 탁신 정치세력에게 투표를 하는 한 정치발전은 어렵다며 이들이 선호하는 건 도덕적인 소수 엘리트들이 통치하는 귀족정치(aristocracy)다. 그리하여 이들은 태국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이슈인 왕실을 방패삼았다. 쿠테타를 통해 ‘통치 경험’ 많은 군과 중산층, 남부지역민들 중심으로 참여한 PDRC시위대에게 ‘부패한 탁신세력 몰아내기’는 그럴듯한 명분까지 지닌 편리한 정치적 도구였다.
이런 PDRC 시위현장에서 붓다 이싸라가 어떤 연유로 ‘지도자’ 노릇을 하게 됐는지는 상당히 의문이다. 그는 2014년 2월 <방콕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사원을 떠난 단호한 결의를 피력한 적이 있다.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목표를 성취하지 못하면 사원으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내가 (사원을 떠나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을 때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이미 받아들였으니까. 전사 코끼리가(War Elephant)가 전투 중 부상을 입는 건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그는 PDRC현장에서 샤프란 승복을 입고, 무장경호원을 대동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전투적 승려로 본격 데뷔했다. 붓다 이싸라 그룹은 PDRC 내에서도 가장 과격한 이들로 통했다. 반대파 추정 시민은 물론 심지어 군인 경찰까지도 ‘체포’, 취조 혹은 공격했다. 잉락 정부가 의회를 해산한 후 헌법에 의거하여 치르려던 조기총선도 이들이 앞장서서 방해했다.
(사진: 이유경) 2013년 PDRC 대변인이 기자회견 중이다. PDRC는 ‘선거전에 개혁을’ 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를 내걸고 선거를 반대, 방해해 왔다. 사실상 이들이 속한 옐로우 셔츠 진영은 선거 결과를 지속적으로 거부함으로써 두번의 군부 쿠테타를 성공시켰다.
(사진: 이유경) 잉락 시나왓 전 총리 2011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기자회견중이다.
잉락 총리는 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의 사면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잉락 정부가 2013년 밀어붙인 사면법은 정치적 반대진영이 거리시위를 시작하는데 호기를 제공했다.
(사진: 이유경) 2014년 2월 2일 방콕 딘댕 지역 주민들이 PDRC의 방해로 투표가 철회되자 신분증을 보이며 항의하고 있다. 선거방해는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으며 붓다 이싸라 그룹은 선거 하루전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2014년 2월 1일, 바로 그 총선 하루 전날이었다. 방콕 북부 락시(Laksi)구에서 붓다 이싸라 그룹이 투표함 이송을 방해하는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발했다. 이 ‘락시 총격전’은 “팝콘”이라 적힌 부대자루 안에 M16을 숨기고 카메라 앞에서 대범하게 움직이던 “팝콘 총잡이”로 상징화됐다. 팝콘 총잡이 위왓 욧파싯(Vivat Yodprasit)은 지난 해 5월 3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핏사누록 지방 출신인 그는 알고 보니 평범한 일용직 노동자였다. 그는 방콕에서 일자리를 구하던 중 ‘PDRC 사수대’ 라는 일자리를 얻고 일당 9달러(참고로 태국의 하루 최저임금은 300바트, 10달러 미만이다)를 받아왔다고 말했다. 그리고 무기 사용법을 간단히 배웠다는 것. 일당이 아쉬워 총까지 들었던 지방 청년은 지금 장기수가 되어 복역 중인 반면, 그를 고용하여 총잡이로 만든 PDRC 지도부는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특히 락시 총격전 그룹의 보스인 붓다 이싸라는 여전히 승복을 입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있다. 물론, 락시 총격전 이후 부다 이싸라에 대한 반란죄 혐의로 경찰의 체포영장 심사 청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잉락 정부하의 국가기관들은 사실상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5월 22일 쿠테타로 이어진 것이다. PDRC는 환호했다. 재벌2세, 극우정치인 등이 어우러진 PDRC 지도부는 샴페인을 터뜨렸다. 샴페인 파티 드레스 코드는 군복. 태국재벌 싱하(Singha) 맥주회사의 후계자이자, 세련된 영국식 영어를 구사하며, PDRC ‘지도자’에 속했던 젊은 엘리트 여성 치파스의 ‘파티복’ 상의에는 “부라파 파약”(Burapha Phayak)이라고 적혀 있었다. “동부 타이거”라는 뜻의 이 말은 쿠테타의 주역 프라윳 찬오차가 속한 “왕비근위대”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편, 붓다 이싸라의 전투성은 벌건 대낮 취재 중인 외국기자를 납치하려던 시도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그해 5월 7일 - 쿠테타 발생 보름전 - 독일 사진기자 닉 노스티츠는 헌법재판소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할 뻔 했다. 괴한들은 “루앙 푸 스님께서 좀 보자신다”며 닉을 잡아끌었다. 주변 기자들과 경찰의 도움으로 닉은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고 나중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와야 했다. 닉은 이 납치 시도가 있기 약 4개월전 호주 국립대 동남아 학회 블로그인 <New Mandala> 기고문에서 한 넝마주이를 비롯 PDRC 그룹에 ‘체포된 후’ 고문당한 이들을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 레드셔츠’기자로 찍혀 있다. 2013년 11월 25일에는 PDRC시위를 취재하던 중 시위대에 물리적 폭력을 당했고 이어 옐로우 셔츠 지지성향 시민들 사이에서 ‘증오 캠페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와 경제적 어려움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던 닉은 태국에서 안전하게 살 수 없다 판단하고 지난 해(2016) 10월 태국인 아내와 입양한 아들과 함께 태국을 떠났다. 23년 살던 나라를 뒤로하고 독일로 돌아간 그는 가족과 함께 쉽지 않은 적응과정을 밟고 있다.
(사진: 이유경) 현 군정과 갈등이 지속되는 담마까야 사원. 이 사원의 전 주지승 담마차요는 2010년 당시 반탁신 민주당 정부에 의해 블랙리스트에 오른바 있다.
외국기자 납치 시도, 선거방해 총격전
붓다 이싸라가 등장하기 몇 해전인 2010년 레드셔츠가 방콕 중심가를 점령했을 때에도 승려들의 시위 참여는 있었다. 규모는 수백명이었고 이중 일부는 군의 유혈 진압 당시 끌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지도부를 자처하거나 무장경호원을 몰고다니는 보스 스타일 승려는 없었다. 조용하게 지지하는 수준의 참여였다. 그해 3월 민주당 정부는 레드셔츠와 연계된 212명의 각계 인물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적이 있다.
흥미롭게도 그 리스트에는 11명의 승려들이 포함됐다. 요즘 군정과 갈등을 빚고 있는 담마까야 사원 전 주지승 담마차요 승려는 물론 승려평의회(Monastic Council) 의장, 시사켓 사원 부주지승은 물론 불교대학들의 총장들이 포함되어 있다. 영국 리즈대학 동남아 정치학자인 맥 카르고(Mc Cargo)는 태국의 승려들(대략 30만 내외 추정) 70-80%는 레드셔츠 성향으로 분류된다고 쓴 바 있다. 승려들 다수의 출신 지역과 계층적 배경이 레드셔츠의 그것과 유사한 데서 오는 사회경제적 기반의 연계성이 작용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또, 국가 불교 왕실 등 체제를 떠받드는 3대 기둥의 한 축으로 존재하며 유지해야만 했던 승가사회의 강고한 위계질서가 일부 승려들 사이에서 반발심을 누적시켜왔을 거라는 건 그리 놀라운 건 아니다. 이 과정에서 승려사회 역시 권력투쟁적 요소도 담고 있던 색깔 정치 분쟁에서 분열상이 더욱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리즈대학 던칸 맥카르고 교수는 “레드셔츠 승려가 보수적 기성 체제에 대비 진보적이고 민주적일 거라고만 단순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고 지적한다. 레드셔츠 승려들 중에는 민족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많고, 따라서 불교 국교화를 주장하는 이들도 다수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다수의 승려가 조용히 참여했던 레드셔츠 시위 당시에도 전투적 발언으로 논란의 중심에 선 승려가 있었다. 바로 와지라메디(Venerable Vajiramedhi)다. 그는 2010년 4월 9일 밤 10시대에 레드셔츠가 다음과 같은 트윗을 날린 적이 있다. 당시는 레드셔츠가 한달여 방콕 시내 두 곳을 점거 시위중이었다.
“시간을 죽이는 건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더 큰 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트윗이 뜬 다음날인 4월 10일 군은 평화시위를 벌이던 레드셔츠를 1차 유혈 진압하게 된다. 첫 진압으로 군인 4명을 포함 25명이 사망했고 이날 이래 시위는 더이상 평화적이지 않았고 무력충돌은 계속됐다.
와지라메디 승려의 트윗은 유혈진압을 촉구한 것 이상의 충격을 가져왔다. 1976년 탐맛삭 학살에 가담한 민병대 나와폰의 선동가였던 승려 키띠우도와 거의 판박이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태국의 전투적 불교 제2편 : 민병대를 배회하는 전투적 불교" 참조).
(캡처: 이유경) 와지라메디 승려가 2010년 4월 9일 밤 남김 트윗 “사람을 죽이는 것 보다 시간을 죽이는게 더 큰 죄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트윗이 뜬 다음날인 4월 10일 군은 평화시위를 벌이던 레드셔츠를 1차 유혈 진압하게 된다. 첫 진압으로 군인 4명을 포함 25명이 사망했다.
(캡처: 이유경) 레드셔츠 유혈진압을 부추겼던 와지라메디 승려는 소위 “방콕중산층의 달링(darling)”으로 불린다. 그는 지난 해 10월 유엔난민기구 타일랜드의 홍보영상에도 등장했다.
와지라메디 승려는 “방콕 중산층들의 달링(darling)”으로 통한다. 보수 중산층의 사랑을 받던 승려는 유엔난민기구 타일랜드(UNHCR Thailand)가 선호하는 유명인이기도 하다. 2016년 10월 ‘유엔난민기구 타일랜드’는 ‘Nobody Left Outside’라는 난민돕기 홍보영상에 그를 출연시켰다.
유엔난민기구 타일랜드는 지난 해 10월 전 푸미폰 국왕 사망 이후에도 부적절한 성명으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왕실 모독법 위반으로 프랑스에 망명 중인 트렌스 젠더 여성운동가 사란추이차이 (일명 “움네코”)에 대해 난민기구는 “그가 국왕 서거와 관련하여 부정적 코멘트를 남긴 것을 강력히 비난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유엔난민기구가 ‘꾸짖는’ 바로 그 지점이 움네코가 난민이 된 정치적 이유다. 정치적 성향에 관계없이 박해받는 난민들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저버린 성명이었다.
한편 색깔정치 분쟁을 넘어서 전투성을 과시한 방콕의 승려도 있었다. 아피찻 프롬잔(Aphichat Promjan, 31)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방콕 두짓(Dusit)구에 위치한 벤자마보핏(Benjamabophit) 사원 소속이다. 이 사원은 왕실관리 사원이며 “대리석 사원”(Marble Temple)으로도 알려져 있다. 2015년 10월 29일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남부에서 승려가 한 명 죽을 때마다 모스크 하나 불태워야 한다”
“남부”라는 건 말레이족 무슬림들의 반군활동이 계속되는 태국 최남단 3개주를 일컫는다. 아피찻 프롬잔 승려가 방콕 중심의 다른 전투적 승려들과 결정적 차이를 보인 게 있다면 바로 타종교, 타인종을 겨냥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얀마에서 무슬림 증오 스피치를 주도하는 위라뚜 승려를 모델로 삼고 있다. “태국에서 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모델로 삼을 만하다”고 말했고 “나는 위라뚜 방식을 태국에 적용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의 무슬림 혐오 발언에 ‘가짜 승려’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게 비난한 그룹 중에는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사랑하고 지지합니다 (We love and defend Palestine)’라는 페이스북 그룹도 있다. 아피찻 승려는 이들을 지난 1월 25일 ‘사이버 범죄’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자신을 비난하는 무슬림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며 다음과 같은 발언을 이어갔다.
“정부가 태국 남부에서 ‘도적떼 같은 말레이놈들’(Malayu Bandits) 폭력에 속수무책 노출된 승려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불교도들을 무장시켜야 한다”
아피찬 프롬잔 승려의 등장은 그가 21세기 전투적 불교의 두 카테고리를 잇는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하다. 즉, 방콕 중심으로 기명성을 갖고 활동하지만 익명성이 두드러진 남부의 전투적 불교 의제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태국 남부의 ‘불교도 무장론’을 아피찻보다 먼저 설파한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시리킷 왕비다. 2004년 11월 16일 시리킷 왕비는 빌리지 스카웃 대원들 앞에서 ‘불교도 무장론’을 설파한 바 있다.
이듬해 2005년 4월 26일자로 기록된 위키리크스 미 대사관 케이블에 따르면 3일 전에도 왕비는 불교민족주의를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6개월도 안 되어 왕비가 다시 공개 석상에서 발언을 한 건 매우 드문 경우인데 두 연설 모두 빌리지 스카웃 대원들 앞에서 이루어졌다. 빌리지 스카웃은 70년대 이래 반공을 내걸고 국가, 불교, 왕실의 체제기둥을 떠받들던 조직이다.
“여러분들이 국왕 폐하와 내 앞에서 국가, 종교, 왕실에 충성을 다하겠노라. 그리하여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맹세하던 것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사진: 이유경) 태국 남부 파타니 지방 중앙 모스크. 모스크 탑에 태국 국기가 휘날리고 있다. 태국(시암)왕국을 점령과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보는 말레이 무슬림들에게 모스크 꼭대기에 달린 태국 국기는 모욕으로 전달되고 있다.
이슬람 적대감 드러내는 승려의 탄생
태국 남부 3개주는 말레이 무슬림들이 이 지역 전체 인구의 약 70~80%를 차지한다. 15세기 이래 파타니 독립 왕국을 유지해오다 19세기 시암 왕국에 정복당했고, 1902년 합병됐다. 합병은 1909년 앵글로-시암조약에 의해 굳어졌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와의 국경선도 확정된 것도 이 조약에 근거한 것이다. 1968년 5월 1일자로 작성된 ‘태국의 소수민족과 반군활동’(Ethnic Minorities and Insurgency in Thailand) CIA 보고서에는 남부와 관련하여 이렇게 적혀 있다.
“1832년 시암 왕국에 정복당하기 전까지 이 지역은 ‘파타니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 지역 말레이 인구의 55% 에 해당하는 697,000명은 태국어를 할 줄 몰랐다. (오늘날에도 ‘읍내’정도에 해당하는 무앙 디스트릭트를 벗어나 시골 변방으로 들어가면 주민들은 태국어를 잘 모른다. 말레이어의 방언인 ‘야위’어만 하는 이들이 다수다.-필자) 당시 태국 정부는 CIA 프런트 조직인 <아시아 파운데이션>의 지원을 받아 남부 공립학교에서 태국어 가르치기에 열을 올렸다.”
태국 남부의 정치적 저항은 이미 19세기부터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꾸준히 이어졌다. 그러다 ‘분리주의’를 내건 운동이 시작된 건 1947년이다. 당시 ‘파타니지방 이슬람평의회 (Pattani Provincial Islamic Council)’ 의장이던 하지 술롱(Haji Sulong)이 ‘파타니 민중운동’(Patani People’s Movement)을 창설하며 본격화됐다. 하지 술롱은 곧 체포됐다. 감옥살이 끝에 1952년 석방됐으나 이내 곧 아들과 함께 의문 실종됐다. 이후 60~70년대 냉전시대를 지나며 남부의 분리주의 운동은 조직이 증폭됐다. 흥미로운 건 이들이 같은 지역을 무대로 싸우던 말레이시아 공산당과 협력하는 등 좌파 영향력도 일부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태국 남부의 분쟁을 두고 “2004년 1월 4일부터 시작된..” 이란 설명이 붙는 건 80~90년대 분리주의 기운이 가라앉은 후 다시 시작된 시점을 의미한다. 일부 분석가들은 그 배경으로 2002년부터 탁신정권이 ‘남부국경지방 행정위원회’(Southern Border Province Admin Committee, SBPAC)와 민-군-경 협력기구(Civilian Police Military Task Force 이하 “CPM 43”)를 해체하면서 상황이 악화됐다고 지적한다. SBPAC 위원회는 1981년 프렘 틴술라논다 총리 시절 세운 일종의 남부 행정기구로 남부 주민들의 고충을 듣고 방콕과 남부의 상호이해 증진을 의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 물론 분리주의 진영 등에 대한 첩보수집을 통해 효과적인 대반군전략도 이들의 주요한 목적이었다. 시점상 이 체제가 해체된 뒤 찾아온 분리주의 운동은 일명 2세대로 불린다.
2세대의 시작은 2004년 1월 4일 50여명의 무장 괴한들이 나라띠왓 지방 초아이롱 지구 제 4군 캠프를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4명의 불교도 군인은 살해했고 말레이 무슬림 군인들은 ‘체포되었다’. 공격자 한 명은 “파타니 메르데카!”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파타니에 자유를!”이라는 뜻이다. 이 구호는 이들이 분리주의 운동 세력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2세대 분리주의 운동은 1세대와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전례없는 공격대상을 설정했기 때문인데 그게 바로 ‘불교’와 연관된 것들이다. 이들에게 불교공격은 종교에 대한 공격이라기보다는 국가, 불교, 왕실 등으로 상징되는 점령국가 태국에 대한 공격의 일환이다. 같은 논리로 학교 역시 꾸준히 공격 대상이 돼왔다. 2007년5월 이들이 방화한 학교 옆에서 발견된 유인물에는 이런 시각이 잘 담겨 있다.
“경고한다! 모든 파타니 무슬림들에게. 지금 파타니 무슬림들은 이교도 시암(태국) 점령 세력과 전쟁 중이다. 학교방화와 같은 우리의 공격은 그 점령 세력의 상징물들이라는 점을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 이런 공격은 시암의 지배를 완전히 끝장내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당신들의 아이들의 그들의 학교로 보내지 마라. 그 학교는 아이들을 개종시킬 것이고 파타니 무슬림으로서의 자의식을 앗아갈 것이다. 당신들의 아이는 포노(Ponoh, 이슬람학교)로 보내야 한다. 당신은 시암 점령 세력이 그들의 학교를 새로 짓는 데 돈을 낸다든가 노동력을 제공하는 식으로 돕지도 협력하지도 말기를 경고한다. 시암 점령 세력을 어떤 식으로 보조하든 그건 죄악이고 심각하게 처벌될 것이다.”
반군들이 불교와 학교를 국가지배체제의 상징으로 보고 공격했다면 이들에 대한 국가의 반응은 불교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도 무장론에 정당성을 듬뿍 불어넣었다. 남부는 이 복잡한 시각이 얽히면서 표면적으로 불교와 무슬림의 대립구도처럼 비춰졌고 이에 따라 전투적 불교가 등장하는 토대가 마련됐다.
(사진: 이유경) 태국 군인들이 파타니 시내를 순찰하고 있다. 말레이 무슬림들의 2세대 분리주의 운동이 진행중인 남부 3개주에는 동북부 출신 징병군인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다.
태국남부의 전투적 불교는 세가지 양상으로 전개됐다.
- ‘불교도만의 민병대’의 조직
- 민병대에 불교도들이 참여하는 경우
- 불교사원의 군캠프화와 승려군인들
우선, 불교도 민병대를 보자. 불교도 민병대 조직에 이니셔티브를 보인 건 당연하게도 태국남부 불교도 무장론을 가장 먼저 설파한 시리킷 왕비다. 그렇게 시작된 단체가 ‘오 로 보’(Or Ror Bor, Village Protective Volunteers) 즉 마을보호 발런티어 부대다. 오로보는 2004년 9월 출범했다. 당시 시리킷 왕비는 남부 나랏티왓 탁신 라차니웨 궁전에 두달(9-10월) 머물고 있었다. 11월 왕비가 빌리지 스카웃 대원들 앞에서 ‘불교도 무장론’ 설파한 건 불교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면서 이미 조직되고 있는 불교도 민병대를 합리화하는 효과까지 낸 것이었다.
오로보는 초기 1,000명을 훈련시키면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7일간 훈련을 받았고 1년에 두번 5일간의 보충훈련을 받는다는 것. 훈련을 담당한 건 전 2군 사령부를 책임지던 퇴역장성 나폰 분탑(Naphol Boontap)이었다. 다른 민병대들이 내무부나 제4군 사령부(4th Army Division, 남부 관할)의 휘하에 있는 것과 달리 오로보는 국방부 산하 왕실보좌부대(Royal Aide de Camp Department) 휘하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실보좌부대는 왕실가 보호를 책임진다. 나폰 분탑은 이 부대의 부대장을 맡고 있었다. 그는 왕비의 충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2011년 방콕 슬럼가와 인근한 구역이자 전년도 레드셔츠 시위와 진압이 극렬했던 본까이 커뮤니티에 대한 왕비의 기부금 계획을 발표한 것도 나폰 분탑이었다.
오로보는 각자의 무기를 쉽게 소지할 수 있다. 2000년대 후반 이 지역 현장조사를 집중했던 <비폭력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오로보 대원들은 숏건을 60% 할인받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비폭력 인터내서널>는 2009년 보고서에서 나라띠왓 지방 부지사를 인용하여 오로보 대원은 월 4,500 바트(약 150달러)를 받는다고 전했다. 물론, 오로보를 훈련시켰던 나폰 분탑 중장 측은 이를 부인해왔다. 이들은 또 각 소대당 매월 30만 바트(약 980만원) 예산을 지원받는다. 돈은 국방예산에서 나온다.
여러 보고서들이 이 조직이 가장 ‘트러블 메이커’로 지목하고 있다. 위키리크스 2010년 2월 11일자 미 대사관 케이블도 오로보를 “문제아”(Problem child)로 묘사한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마을 수호 발런티어 (VPV)는 문제적 민병대 (problematic militia)”라고 적고 있다. 케이블 내용은 남부에서 태국정부가 무장 시키는 다양한 민병대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
**태국 남부의 민병대 전반에 대해서는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보고서 <Southern Thailand : The Problem with paramilitaries>(2007)가 잘 담고 있다.
오로보가 트러블 메이커나 문제아로 인식되는 데는 이들이 남부 분쟁을 점령과 복속과 차별 등에서 비롯된 갈등이 아니라 종교 갈등에 지나친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2009년 6월 8일 나라띠왓 지방 초 아이롱 지구에 위치한 알 푸르콘 모스크에서 총격이 발생하여 11명의 무슬림들이 기도 중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폭력 사태는 바로 오로보의 소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부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오로보의 존재를 나폰 중장 뿐 아니라 왕비와 연계해서 보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왕비에 대한 인식이 악화될 우려가 있다는 한 언론인의 지적도 미 대사관 케이블은 담고 있다. 오로보는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 태국 남부 출신으로 이지역 분쟁에 정통한 기자 D의 말이다.
“오로보 구성원들이 엄청 기세등등했다. 오히려 군인들더러 “충분히 애국적이지 않다”며 비판을 해대니까 군으로선 오로보가 머리가 너무 커져 독자적으로 가는 걸 원치 않았다”
D는 오로보가 거의 실패했다고 봤다. 왕실도 불교도 민병대의 존재가 반군 작전에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을 인지하고 거의 ‘포기’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불교도 민병대’의 군 비판 : “충분히 애국적이지 않다”
오로보가 불교도들만으로 구성된 민병대라면 남부의 다른 민병대들은 구성원 다수가 지역 인구의 다수인 무슬림들이다. 그리고 물론 불교도들도 가담하고 있다. 그런 조직 중에 초로보(Cho Ror Bor, Village Defense Volunteer)라는 조직이 있다. 오로보 보다는 좀 더 격식 갖춘 조직으로 남부 3개주 총 1,580 개의 마을에 30개 소대로 나뉘어있다. 2004년 초 결성 당시 24,300명에서 5년만에 약 47,400명으로 증가했을 만큼 숫적으로 빠른 확산을 보여왔다. 이들은 내무부 산하에 있는 조직인 동시에 국내치안작전명령부(ISOC)의 명령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급은 없으며 소대별로 월 2만바트(약 65만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는데 이는 오로보 보다 훨씬 적은 예산으로 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저녁 8시 이후 자정까지로 순찰을 도는 게 이들의 주업무다.
현존하는 민병대 중 가장 오래된 오 소(Or So, Volunteer Defense Corps) 역시 남부에도 기반이 있다. 이들은 불교민족주의 이념으로 충만하고 70년대 활약이 큰 빌리지 스카웃의 남부 버전으로 이해하면 된다. 남부에서 약 2만명 추산되며 80%가 무슬림이고 나머지는 모두 불교도들이다. 오 소 85%는 전 군인 출신이며 대졸자도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 소 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45일간의 훈련을 받고 일년에 두 차례 체력테스트를 한다. 남부에 배치된 오 소의 월급은 약 4000-4500바트로 다른 지역보다 좀 더 많다.
비공식적 불교도 민병대 루암 타이(“단결된 태국인”이라는 뜻)라는 것도 있다. 2005년 후반 얄라 지방에서 피탁 이얏코(Phitak Iadkaew)라는 전 국경순찰대(Border Patrol Police) 소령이 만든 비밀 민병대로 23개 소대로 존재한다.
“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모인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고, 절대 다수는 불교도로 알려져 있다. 2007년 하반기 그의 경찰 동료들은 6천명의 민간인을 모집하여 훈련시켰다고 전해진다. 이중 200명의 무슬림으로 알려졌다. 제도 밖에 구성된 민병대라 무기는 스스로 충당한다. 2007년 3월 14일 송클라 지방 야하 지구에 있는 모스크와 찻집 공격으로 두명이 사망하고 21명이 부상을 입었던 사고는 루암 타이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 : 이유경) 태국 남부 얄라 지방에서 민병대원들이 보초를 서고 있으나 매우 지루한 모습이다. 남부에는 불교 민병대를 포함 4-6만 가량의 민병대원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도 독점 민병대와 불교도들이 참여하는 민병대 등 우후죽순 넘쳐나는 남부의 민병대는 암울한 결과를 예고하고 있다. 지역사회 전체가 무장의 길로 향하며 ‘민병대화’ 되는 신호가 곳곳에서 감지돼기 때문이다. 일례로, 2007년 3월 초로보 출신 한 대원이 송클라 지방(3개주 바로 위 지방으로 분쟁의 부분 영향지대) 종파 폭력 위험지대인 사바 요이(Saba Yoi) 타운에 ‘불교도 수비 그룹’을 자체 결성한 사례가 있다. <국제위기그룹> 보고서에 따르면 그는 20여명 가량의 마을 불교도들을 모았고 소총과 라디오를 장만하고 총기류 라이선스는 구청 공무원으로부터 어렵지 않게 얻었다. 그리고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초로보 대원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았다는 것. 초로보는 불교도가 독점한 민병대는 아니지만 그 조직을 거쳐간 인물이 다시 불교도 민병대를 만들어낸 새로운 유형을 창출했다.
비폭력 인터내셔널(Non-Violence International)에 따르면 민병대가 난립하는 태국 남부 지역은 한 마을당 50명의 빌리지 스카웃 + 5명의 내무부 소속 민병대원(오소) + 30명의 초로보 대원 + 20명의 오로보 대원이 있다. 한 마을만 해도 반군에 대비한 무장진영이 엄청난 수로 짜여져 있으니 폭력의 발발 가능성은 곳곳에 상존해 있는 셈이다. 저강도 분쟁지역인 남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일 폭탄과 오토바이 총격전, 참수 등 공격과 폭력 소식이 끊이지 않는 건 무기가 넘치고 무장한 사람이 넘치는 남부 그 자체를 반영한 것이다. 위키리크스 2010년2월 11일자 케이블을 보면 남부에는 정규군이 2만, 경찰은 1만5천명, 레인저(민병대의 일종) 9,000-11,000 그리고 오로보를 포함하여 “마을 수비”를 단 조직들이 4만에서 6만에 이른다.
불교도 무장 현상은 남부 주민들의 시각엔 중앙 정부가 불교도 자경단 그룹을 전략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따라서 남부 분쟁의 커뮤널 갈등 즉 불교도 vs. 무슬림 갈등라인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불교도 민간인들 무장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 불교 승려들도 일부 총을 차고 직간접적으로 분쟁에 연루되고 있어 불교 전체가 전투화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사진: 이유경) 태국 남부 얄라 지방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민병대원. 태국 남부에는 불교도 민병대는 물론 여러 민병대에 불교도가 다수 참여하고 있다.
‘불교 민족주의’ 전도사가 되어 남부로 파송가는 승려들
2004년 이래 2세대 분리주의 반군들은 단 한번도 자신의 소행을 밝힌 적이 없다. 거의 매일 ‘유령의’ 반군들을 공격하고 공격받는 이곳은 태국의 징병제를 통해 모집된 군인들이 배치되기를 가장 꺼리는 지역이다. 사병들은 구조적 모순으로 징병제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동북부(통칭 “이산”이라고도 한다) 지방 빈곤계층 출신 청년들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런데 동북부 지방에서 최남단으로 향하는 그룹에는 비단 사병만 있는 게아니었다. 2009년 7월 3일자 <더 네이션> 보도에 따르면 148명의 승려들이 태국 공군기를 타고 최남단 나라티왓 지방으로 날아간 일이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승려들은 얄라, 파타니, 나라티왓 세 지방 100개 사원에서 머무를 예정이라고 했다. 이 지역 사원에 승려가 없다는 게 이유다. 그리고 2012년 8월 5일 <더 네이션> 보도 역시 그해 7월 27일 또 다른 60명의 승려들이 북부와 북동부에서 남부로 보내졌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동북부의 승려들은 왜 남부로 파송되는 걸까. 이 또한 시리킷 왕비의 발런티어 승려 프로그램 (VMP)의 일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 ‘불교도의 분노(Buddhist Fury)’(2011) 저자 마이클 제리슨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경우에 있어서 승려들이 문자 그대로 정부대사가 되어 시리킷 왕비의 발런티어 승려 프로그램(VMP)에 따라 남부로 파견된다. 그들은 남부에서 국가지배체제(State)와 승가사회(Sangha)를 수호하고 대표하는 존재로 자리하는 것이다.”
마이클 제리슨은 저서에서 이 승려 파송 프로그램을 통해 국가가 불교를 홍보하는 건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의 씨를 뿌릴 뿐이라고 지적한다. “국가와 불교를 밀접하게 연계시키는 건 이 지역에서 군사주의를 증가시키고 분쟁을 악화시킬 뿐” 이라는 게다. 이미 남부는 국가와 불교가 한통에서 뒤얽힌 게 현실이고 이는 남부 불교사원들 다수가 군부대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나는 바다.
승려파송과 ‘군인승려’ 혹은 ‘승려군인‘(프라 타한)이 직접 연계성을 갖는지는 아직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남부의 ‘무장승려’ 문제가 꾸준히 지적돼온 바인데 동북부로부터의 승려 파송이 남부의 ‘군인승려’ 머릿수 늘리기와 무관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태국남부에서 승려들은 ‘무장한 채 분쟁에 참여하는 그룹’이라는 게 태국의 전투적 불교를 연구한 이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승려 군인들이 소총과 심지어 M-16으로 무장하고 군인 월급까지 받으며 승려와 군인 사이를 편의에 따라 오가는 한 이 주장이 사라질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관련 연구자들은 이 현상이 대략 2002년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군인들이 휴가기간 승려 서품을 받아 불교사원의 승려 머릿수를 채우는가 하면 승려서품을 받은 이들이 무기를 들고 사원을 지키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는 것이다. 붓다 이싸라 승려가 승려에서 거리의 투사에서 다시 승려로, 승려에서 다시 거리의 투사로 두 세계를 자유롭게 오고가고 있듯이 말이다.
(사진: 이유경) 태국남부 한 군캠프로 전용된 불교사원에 놓인 M16.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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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국의 전투적 불교 1편 : 전쟁폭력, 국가폭력 그리고 체제의 협력자"
- "태국의 전투적 불교 제2편 : 민병대를 배회하는 전투적 불교"
- "태국의 전투적 불교 3편 : 군인승려, 군인사원 : 키띠우도의 환생과 태국 남부의 전투적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