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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역사 개론 (5) : 공산정권과 현재의 상황
History of Laos since 1945
1945년 이후의 라오스 역사 (하편)
주의 : 이 부분에서 라오스어 고유명사들을 표기할 때 채택한 방식은 마틴 스튜어트-폭스(Martin Stuart-Fox)가 <라오스 역사>(A history of Laos)에서 사용한 자역(transliteration, 字譯) 방식이다. 따라서 다른 부분에서 사용하는 표기방식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역주: 역자는 번역 과정에서 일반적인 표기를 복원하여 병기해 놓았다.) |
7. 공산정권
7.1. 개 설
1975년 3월, 북-베트남(월맹)은 미국이 더 이상 인도차이나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할 여력이 없다는 확신 하에, 남-베트남(South Vietnam, 월남)에 대한 최후의 군사적 공격을 시작했다. 그 결과 북-베트남은 4월 말에 사이공 함락(fall of Saigon)과 함께 승리를 거뒀다. 그보다 며칠 전에는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즈(Khmer Rouge) 군대가 프놈펜(Phnom Penh)을 함락시켰다. 이제 라오스에서도 빠텟 라오(Pathēt Lao 혹은 Pathet Lao, ປະເທດລາວ: 파텟 라오, 라오 조국) 반군이 자신들의 승리가 다가왔음을 느꼈고, 베트남 전쟁(Vietnam War,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5.11.1.~1975.4.30.)이 끝나면 북-베트남이 라오스의 권력 구조에 권한을 행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위앙짠(Vientiane, 비엔티안)에서는 우파를 비난하고 정치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위들이 발생했다. 우파 각료들은 사임한 후 해외로 도망쳤고, 이후 왕립 라오스 육군(Royal Lao Army: ARL)의 고위 지휘관들이 그 뒤를 이었다. '빠텟 라오' 측 장관이 군사부문을 장악하여, 군부 내에서 '빠텟 라오'가 정권을 장악하는 데 있을 수도 있는 어떠한 기회도 박탈해버렸다. [중도 진영의 수장이었던] 수완나 푸마(Suvannaphūmā 혹은 Souvanna Phouma, ເຈົ້າສຸວັນນະພູມາ: 1901~1984) 왕자는 추가적인 분쟁을 겁내면서, 외형적으로는 [좌파의 명목상 수장인] 수파노웡(Suphānuvong 혹은 Souphanouvong, ສຸພານຸວົງ, 수파누봉: 1909~1995) 왕자가 제시한 온건한 정책을 펼치겠다는 약속을 신뢰했다. 그에 따라 수완나 푸마는 '빠텟 라오'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고, 미국은 라오스에 주재하던 외교관들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5월이 되자 '빠텟 라오' 군대는 라오스 남부의 주요 도시들로 들어왔고, 6월 초에는 루앙프라방(Luang Prabang)에 입성했다. 대부분의 재계 인사들과 많은 관료들, 그리고 장교들 및 미국에 협조했던 여타 사람들이 메콩 강(Mekong River)을 통해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태국으로 옮기는 일을 서두르면서 위앙짠에서는 패닉 상황이 연출됐다. [항아리 평원(Plain of Jars)의 친미 군벌] 왕 빠오(Vang Pao: 1929~2011) 역시 상황이 기울었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휘하에 있던 수천명의 몽족(Hmong) 전투원들 및 그 가족들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 결과 라오스 몽족 인구의 3분의 1이 해외에 거주하게 됐다. '빠텟 라오' 군대는 8월에 거의 폐허가 된 위앙짠에 입성했다.
'빠텟 라오'는 처음 몇달 동안 온건한 정책을 취하겠다는 약속을 지키는 것처럼 보였다. 연립 정권의 외피도 유지됐고, 체포나 공개재판도 없었고, 사유재산 제도도 존중됐다. 미국이 즉각적인 원조 중단에 들어갔지만, 미국과의 외교 관계도 유지됐다. 여타 서방 국가들은 계속해서 원조를 제공했고, 떠나간 미국 전문가들을 대체할 소련(Soviet Union: USSR)과 동유럽의 전문가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7.2. 권위주의의 시작
1975년 12월, 급격한 정책적 변화가 있었다. 정부와 자문회의(Consultative Council: 42인으로 구성된 입법부)의 합동회의가 열렸고, 이 자리에서 수파노웡은 즉각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그리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12월2일, 시사왕 와타나(Savāngvatthanā 혹은 Sisavang Vatthana, Savang Vatthana, ເຈົ້າສີສະຫວ່າງວັດທະນາ: 1907~1978 혹은 1984, [재위] 1959~1975) 국왕이 퇴위했고, 수완나 푸마 왕자도 사임했다. 수파노웡 왕자를 대통령으로 하는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LPDR)의 수립이 선포됐다. 그리고 베일에 가려져있던 [공산당의 실권자] 까이손 폼위한(Kaisôn Phomvihān 혹은 Kaysone Phomvihane, ໄກສອນ ພົມວິຫານ: 1920~1992)이 전면에 나타나 총리를 맡고 라오스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됐다.
(사진) 라오스 공산정권의 실질적 지도자 까이손 폼위한.
선거나 정치적 자유에 관한 이야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비-공산주의 계열 신문사들은 문을 닫았고, 공무원과 군경에 대한 대규모 숙청도 시작됐다. "재교육"을 이유로 수천명이 오지로 보내져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죽었고, 그보다 많은 이들이 최대 10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러한 일은 새로운 탈출 행렬을 만들어냈다. 탈출자들은 많은 수의 전문가들과 지식인층으로서, 처음에는 새로운 정권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려던 마음을 먹었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떠나기로 결정했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 비해 라오스를 탈출하는 일은 훨씬 쉬운 것이었다. 1977년경, 라오스 인구의 10% 가량이 국외로 떠났고, 대부분은 사업가들과 교육받은 계층이었다.
라오 인민혁명당(Lao People's Revolutionary Party 혹은 Phak Paxāxon Lao: LPRP 혹은 LPP) 지도부는 당의 근간이었기 때문에 변화는 거의 불가능했고, 집권 후 10년 동안 의미 있는 변화도 없었다. 당의 실질적 권력은 4인이 보유했다. 그 4인은 당 서기장인 까이손 폼위한, 까이손이 신임했던 부서기장 겸 경제 수장인 누학 품사완(Nūhak Phumsavan 혹은 Nouhak Phoumsavanh, ໜູຮັກ ພູມສະຫວັນ: 1910~2008)[이들 두 사람은 모두 사완나켓(Savannakhēt 혹은 Savannakhet, 사반나켓)의 비천한 가문 출신이었음], 기획부장관 살리 웡캄사오(Sālī Vongkhamxao 혹은 Sali Vongkhamxao: 1991년 사망), 군 총사령관 겸 국방부문 수장이었던 캄따이 시판돈(Khamtai Siphandôn 혹은 Khamtai Siphandon, ຄຳໄຕ ສີພັນດອນ: 1924~ )이다. 공식석상에 더 많이 등장하면서 정치국 위원들을 맡인 이들은 수파노웡 대통령과 푸미 웡위칫(Phumi Vongvichit) 교육선전부 장관과 같은 프랑스 유학파 지식인들이었지만, 이들은 당의 내부 지도부에는 들지 못했다.
이들 지도자 모두는 라오-롬(Lao Loum 혹은 Lao-Lum: 계곡 평원의 라오족)이었다. 반면 '빠텟 라오' 군대의 주력은 소수민족들이었지만, 그 지도자들은 공식 조직에서 상징적인 역할에만 한정된 상태였고, 당 지도부의 핵심으로 들어가진 못했다. 1975년 '라오 인민혁명당' 당원은 전체 350만명의 총인구 중 고작 3만명 정도였다. 당원 중 상당수는 과거 '빠텟 라오'가 점령했던 지역 출신의 소수민족이었다. 소수민족 출신 당원들은 공산주의에 대한 참다운 이해보다는 실용적이거나 애국적 이유에서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당원들 중 라오스 인구의 주류인 라오롬 출신자들은 매우 소수였다.
당의 공식적인 정책은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로 한걸음 한걸음 전진"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정통적인 스탈린주의(Stalinism)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스탈린주의도 --- 시인은 안 하지만 --- 원래는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 1879~1940)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라오스 공산당도 자신들이 마치 독자적인 강령을 선택한 체 했다. 당시 라오스 인구의 90%는 생계형 농민들이었기 때문에, 라오스가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산업 노동자 계급 자체가 없는 국가에서 노동계급 혁명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정통파 맑시즘을 실행할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당 지도부는 권력 쟁취를 위해 30년 동안 싸웠지만, 라오스와 같은 나라에서 "사회주의"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한 질문에는 이제서야 봉착하게 됐다. 또한 대부분의 행정가들과 전문적 직업인들이 국외로 탈출한 상황에서, 빈곤과 고립의 환경에 놓인 가운데 그러한 목표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대답해야만 했다. 당의 정책은 대부분 공개석상을 벗어난 상태에서 베트남이 결정했다. 베트남의 정책은 라오스를 모든 이웃국가들과 단절시켜 경제적 고립을 초래했고, 그 결과 라오스는 더욱 더 베트남에 총체적인 의존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7.3. 농업적 집산주의
까이손이 보기에 사회주의로의 길은 먼저 베트남을 모방하는 데 있었고, 그 다음은 소련 모델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생산관계"가 도입돼야만 했고, 농업국가 라오스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주로 농업의 집산주의(collectivisation)였다. 모든 토지의 국유화가 선언됐고, 개인 농장들은 대규모 "협동농장들"로 통합됐다. 생산수단도 집단적으로 소유했는데, 라오스에서 '생산수단'이란 것은 물소들과 목재로 제작된 쟁기들을 의미했다. 1978년 말경에 이르면 저지대 쌀농사 농민 대부분이 집단화에 종속됐다.
집산주의 정책은 대단히 인기가 없었다. '빠텟 라오'는 이 지역들(=저지대 논농사 지역)에서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본 적이 전혀 없었고, 농민들 역시 공산주의자들이 자신들을 지주들로부터 해방시켜줬다는 감사를 느끼지도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라오스에는 소작농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가진 가축들을 도살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동적인 저항을 했고, 태국으로 이주한 이들도 많았다. 기나긴 라오스-태국 국경을 통제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은 농민들이 자신들이 수확한 작물을 태국의 자유 시장으로 손쉽게 내다팔 수 있음을 의미했다.
미국의 원조 중단, 베트남과 소련의 전후 원조 감축, 그리고 수입품이 사실상 사라진 상태에서, 국가 식량 조달량이 급격히 감소하자, 도시 지역들에서 생필품 부족과 실업, 그리고 경제적 고통이 발생했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이어서 [단기전이었던] 중국-베트남 전쟁(Sino-Vietnamese War)까지 발발하자 문제는 더욱 악화됐다. 베트남은 라오스에 대해 중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라고 명령했고, 그로 인해 또 하나의 외국 원조와 교역이 끝나고 말았다.
7.4. 경제상황의 악화
경제상황의 악화는 곧바로 공산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초래했다. 특히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파괴활동 사건들이 급증했고, 1940년대에 라오스 공산주의자들이 했던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라오 민족해방 전선'(Lao National Revolutionary Front)이란 비밀조직이 태국 영토를 기지로 삼아 게릴라 작전을 시작했다. 1976년 태국에서 또 다시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반공 성향의 태국 군부 정권은 라오스 재야세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라오스로의 모든 수출을 금지하자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얼마 안 있어서 태국의 지원을 받은 까이손 암살 계획이 폭로되기도 했다.
반정부 저항은 경제적 고통 외에도 도시 지역들의 분노 때문에도 촉진됐다. 정부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엄격한 검열을 시행하는 데다, 영화와 나이트클럽 같은 "퇴폐적인" 서구 문화를 금지한 일이 도시민들의 적대감을 낳았던 것이다. 라오스는 점차로 군부가 통치하는 교양 없고 문맹의 소작농 사회로 변해갔다. 교육받은 계층이 태국으로 탈출 행렬을 이루자, 라오스의 교육 체계는 부분적으로 붕괴해버렸다. 그에 따라 대규모의 청년 실업자들이 발생했고, 이들은 사회적 불만의 준비된 자원들로 변했다.
베트남, 소련, 동유럽의 기술자들과 고문들은 착취할 천연자원에만 관심이 있을 뿐 라오스의 개발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사회 간접자본과 기반시설들은 급속히 나빠졌다. 자금 및 숙련된 인력의 부족, 게다가 베트남의 지도를 받고 있던 반-중국 노선까지 겹쳐지면서, 전력과 같은 필수적 서비스들까지 중단되는 사태가 초래됐다.
중국 및 태국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면서, 라오스는 베트남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1977년 라오스-베트남 양국은 25년간 효력을 지닌 우호조약을 체결하여, 많은 수의 베트남 고문관들과 3만명의 베트남 군 병력이 라오스에 주둔하게 됐다. 양국 사이의 "단결"을 장려하는 선전활동이 대규모로 전개됐지만, 라오스 국민 대다수는 베트남인들을 싫어했다.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베트남으로 하여금 라오스를 장악하도록 허용했다는 믿음이 확산되면서 반정부 정서에 불을 지폈다.
1978~1979년 사이, 라오스 정부는 안보상황에 대해 점차 경각심을 갖게 됐다. 중국과 태국은 각각 다른 방향에서 반군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또한 태국과 미국에 망명 중이던 몽족 지도자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라오스 중부지방에 있던 몽족들의 저항도 부활했다. 정부의 대응 방식 중 하나는 노쇠한 시사왕 와타나 국왕과 캄푸이(Khamphoui, ພະນາງຄຳຜຸຍ: 1912~1982?) 왕후, 그리고 웡 사왕(Vong Savang, ເຈົ້າຟ້າຊາຍມົງກຸດລາຊະກຸມານວົງສະຫວ່າງ: 1931~1978) 왕세자를 체포해 베트남 접경 지역의 오지로 보낸 것이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진료도 받지 못한 채 사망했다. 라오스 왕족들의 운명은 여러 해 동안 알려지지 않았지만, 1990년대에 사실이 폭로돼 라오스에서 폭넓은 분노를 일으킨 바 있다.
7.5. 정통 맑스주의의 철회
1979년 중반, 라오스의 공산정권이 붕괴 직전이란 공포에 빠진 소련 고문관들의 재촉 때문에, 라오스 정부는 갑작스런 정책 역전을 발표했다. 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온 까이손 역시 많은 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유연한 지도자가 될 것임을 몸소 보여줬다. 까이손은 12월에 행한 주요 연설을 통해 라오스가 아직 사회주의를 할 준비가 돼 있지 못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정책은 경제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없으며, 그러한 정책을 실시하려 했던 모든 정파들이 파산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것은 자살행위에 다름아니다. |
그는 레닌(Lenin: 1870~1924)이 1920년대에 실시했던 '신(新) 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 NEP)을 언급하면서, 만일 라오스 경제의 후퇴가 지속불가능하고 "적들"로부터 착취 대상으로 전락할 것으로 보인다면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도 복원돼야만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까이손의 모델은 레닌의 것이 아니라 중국의 덩샤오핑(Deng Xiaoping, 鄧小平, 등소평: 1904~1997) 모델이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중국 경제성장의 토대가 될 자유시장 경제 개혁을 시작하던 중이었다. 집산주의는 폐기됐고, 농민들도 "협동" 농장을 자유롭게 떠날 수 있도록 했다. 농민들은 사실상 즉각적으로 그렇게 움직였고, 농민들이 생산한 잉여 생산물을 자유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밖의 자유화도 뒤따랐다. 거주 이전의 제한도 해제됐고, 문화 정책도 완화됐다. 하지만 중국과는 달리 당의 정치권력 장악은 전혀 완화돼지 않았다.
7.6. 국내의 반정부 세력
내전이 끝난 후에도 몽족 게릴라들과 '빠텟 라오' 군대 사이의 전투는 고립된 지역들에서 계속 이어졌다(참조: 라오스의 반정부 세력). 라오스 정부가 베트남 군대와 공조하여 몽족들을 학살했다는 고발이 제기됐고,(주1)(주2) 사망자 수는 몽족 인구 총 40만명 중 10만명에 달한다는 것이었다.(주3)(주4) 1975~1996년 사이 미국은 태국의 난민촌들에서 라오스 난민 약 25만명을 재이주시켰는데, 그 중 13만명은 몽족이었다.(주5)
1990년, 과학기술부 부장관이었던 통숙 사이상키(Thongsouk Saysangkhi 혹은 Thongsouk Saysangkhy)가 정치 경제 개혁을 촉구하면서 각료직을 사임했다. 그는 체포됐고, 1998년 옥사했다.(주6)
7.7. 베트남과의 관계
'라오 인민혁명당'(LPRP)은 완전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투쟁기에 베트남과 비밀리에 관계를 맺었고, 1975년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LPDR)을 수립할 수 있는 "갑작스런" 기회를 포착하면서, 베트남과의 "특별한 관계"를 지속하는 것 외에 외교 정책 전반에 관해 검토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혁명적 단계 속에서 자라나온 양국 관계는 라오스로 하여금 재건과 "사회주의 건설"의 국면에서도 '인도차이나 단결'에 속하도록 선제적인 조건을 부여했다. 이러한 일은 중국 및 태국과의 관계를 경계하고 잠재적으로는 비우호적으로 만들 것이 거의 분명했다. 더욱이 폴 포트(Pol Pot: 1928~1998)가 이끌던 캄보디아 공산당이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려 했던 것과는 달리, '라오 인민혁명당'은 베트남의 조언을 수용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는 점이다.
1975년 그때까지 비밀에 쌓여있던 '라오 인민혁명당'이 최종적인 권력을 장악하게 되자, 이전에는 감춰져 있던 라오스 공산당에 대한 베트남의 지령 및 베트남 공산당에 대한 '라오 인민혁명당'의 진정한 감사 표명이 공개적으로 인정됐다. 당 지도부가 직면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란 과제는 북-베트남과의 과거 협력이 자연스레 연장된 것으로 여겨졌다. 즉, 라오스 혁명은 1975년에 단순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일 뿐이었고, 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제국주의자들을 축출한 것을 자축하면서, 베트남의 자문과 경제 및 군사적 지원을 기대했다. 그러한 지원은 베트남 외에는 어떠한 이웃국가나 반동적인 국가들로부터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오 인민혁명당' 지도부는 베트남 정부와 이념적 검토는 물론이고 정책적 논의까지도 함께 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베트남] 멘토들과 정부 차원에서 만나는 절차도 정례화시켰다.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외무장관들이 함께 모이는 회담은 1980년부터 시작하여 격년제로 열렸다. 또한 매년 개최되는 '베트남-라오스 협력위원회'(Vietnam-Laos Cooperative Commission)를 통해 다양한 사업들의 진척 상황을 검토했다. 또한 양국간에는 여타 차원의 협력도 존재했다. 가령, 당 대 당 회담이나 지방 도들 사이의 교류, 대규모 청소년 및 여성 단체들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이 라오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된 통로는 '라오 인민혁명당'과 '라오스 인민군'(Lao People's Armed Forces: LPA)이었다. '라오 인민혁명당'의 경우 오랜 기간 이어져온 최고위급 협력과 컨설팅 관계는 불필요한 특별위원회들을 두고 있었었다. 반면 '라오스 인민군'의 경우, 베트남인 고문관, 교관, 병력들이 자신들이 설계한 군부대 지역에만 머무르면서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일을 세심하게 피하긴 했지만, 그들은 전초기지들까지 깊숙히 침투하여 광범위하고도 피할 수 없는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마도 야전에서의 군사적 협력이 가장 광범위했을 것이다. 베트남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병참, 교육(훈련), 통신 부문에서 대규모 지원을 했다(중화기와 항공기는 소련이 제공했다).
1976년 이후 양국 공산당은 "특별한 관계들"이란 문구를 일반적으로 사용했고, 1977년 6월에는 25년 기한의 '라오스-베트남 우호협력 조약'을 체결하여, 라오스에 적대적이거나 반혁명적인 이웃국가에 맞선다는 명분 하에 베트남 군 병력이 라오스에 주둔하는 일을 합법화시켰다. 양국 협력의 또 다른 사업들 중에는 베트남인 고문관들을 파견하는 것도 포함됐는데, 그들은 사실상 라오스 정부의 모든 부처들에 파견돼 자문을 했다. 또한 '라오 인민형명당'의 일꾼들과 기술자들은 베트남에 있는 맑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 연구소들이나 기술학교들에서 유학을 했다.
그러나 베트남은 전쟁으로 인해 물리적 파괴를 당했고 그 경제구조 및 정책들이 정통적 노선에서 먼 것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이 혁명 동지인 라오스에 해줄 수 있는 자원은 제한적이었다. 그렇지만 베트남은 라오스의 견습생들을 위해 소련에 좋은 말을 전해줄 수 있었고, 그러면 소련이 동유럽의 위성국가들에게 [라오스에 대한] 경제적 지원 사업들을 권고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에 대한 베트남의 영향력은 경제원조나 이념적인 차원에만 한정되지 않았고, 지정학 및 역사적 근접성에 의해서도 결정됐다. 양국 자도자들이 "이빨과 입술의 관계 같은"이라고 즐겨 말했던 바와 같이, 양국은 서로 잘 맞았다. 베트남은 내륙국가인 라오스에 [메콩강을 통해] 해상으로 나가는 길을 제공했다. 반면 라오스의 동부 산악지대는 베트남으로 하여금 메콩 계곡(Mekong Valley)에서 태국이 지닌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근거지를 제공했다.
베트남과 소련의 정치 군사적 동맹관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소련이 라오스에 대해 행사하는 영향력이 제한적인 상황에 머물러 있기를 바랬다. 1980년대 중반, 베트남 지도부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소련 서기장이 중국과 화해하려는 노력에 겁을 먹었다. 따라서 베트남은 설령 소련의 동맹자들과의 관계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라오스에 대한 장악력을 강화키로 결정했다.
1985년 5~6월 사이, 베트남의 쯔엉찐(Trường Chinh 혹은 Truong Chinh: 1907~1988) 국가주석은 '라오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및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에 대한 자신의 첫번째 공식 방문을 가졌다. 이 방문기간 중에 라오스가 태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량을 감소시키고 베트남의 다낭(Da Nang) 및 호찌민시(Ho Chi Minh City) 항구를 통하던 라오스의 해외 교역 물량을 더욱 늘린다는 결정이 이뤄졌다. 아마도 베트남의 압력 때문이었겠지만, 1985년 말 라오스 정부는 소련에 대해 소련인 민간인 고문관들의 철수를 요구했다. 그리고 베트남인 자문관들의 수는 그와 동시에 증가했다.(주7)
1980년대에 역내에서 베트남에 반대하는 이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인도차이나 연방"(Indochina Federation)을 수립하려는 베트남의 신-식민주의적 야망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도차이나 연방"이란 용어는 인도차이나 공산당(Indochinese Communist Party: ICP)이 프랑스의 식민지배에 대항해 싸우던 시기의 선언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의혹은 당시 상황 때문에 과정돼 있었고, 198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이어서 라오스에서도 철수하면서 비중이 떨어지게 됐다. 1975년 이후 베트남에 대한 라오스의 의존도는 베트남의 지배라기보다는 혁명기부터 존속했던 협력과 단결이 자연스레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건설 기술자들을 제외한 베트남 군대가 철수하고, 혁명 파트너들이었던 베트남 원로들 대부분이 사망하고 난 후, 양국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어주던 동력은 힘을 잃었다. 게다가 베트남은 라오스에서 대규모 경제원조 사업들을 시도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1975~1985년 사이에 베트남은 고작 200건의 원조 프로젝트들을 시행했을 뿐이었다. 반면 소련은 이 기간 중에 상당한 규모의 기여를 했다. 1992년 14년 동안이나 라오스에서 근무했던 베트남 대사는 쌍무관계가 "양국 사이의 우호와 다양한 협력"(d'amitié et de coopération multiforme entre les pays)으로 구성돼 있다고 특징지었다. 이러한 선언은 과거에 종종 언급되곤 하던 "객관적인 존재의 법칙과 발전"이라는 표현에 비해 훨씬 강도가 약해진 것이었다.
혁명기 지도부 및 그 군사력과 [양국간] 친연성에 관한 베트남의 역사적 기록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라오스는 베트남에 앞서 자국 경제에 시장경제 메카니즘을 도입하는 '신 경제 메카니즘'(New Economic Mechanism) 정책을 시행하면서 독자적인 태도를 보였다. 라오스는 이 과정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특별한 의존성을 일부 훼손하더라도 태국 및 러시아에 다시금 가까와질 수 있는 문을 열었다. 라오스가 그 과정을 통해 베트남이 경제 및 외교 부문에서 변화를 꾀한 후 성취했던 정상화의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도 존재했다. 하지만 태국 및 러시아의 움직임에 단호하게 다가서고 반응하면서, 라오스는 원조제공처들 및 교역 파트너들의 범위를 확장시켰고, 동일한 목표를 획득하기 위해 베트남이 시도하던 내용과는 독립성을 지닌 투자자들을 유치할 수 있었다. 그에 따라 베트남은 베일 속의 멘토 역할과 비상시의 동맹세력으로 남게 됐고, 라오스의 정책은 은행 및 해외 기업인들을 육성하려는 방향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이게 됐다.
8. 현재의 라오스
집산주의 및 기율의 완화는 라오스에 새로운 문제를 안겨줬다. 오랜 기간 일당독재를 하고 있던 공산당은 더욱 악화돼기만 했다. 이념적 의지가 약화되면서, 그들이 정권을 잡고 유지했던 주요한 명분은 사익의 관점이 대체했고, 부정부패와 정실주의(nepotism, 족벌주의)가 증가했다. 또한 경제 자유화를 통한 이익 역시 성과가 더뎠다.
농업 및 저임금 제조업을 통한 수출주도형 산업을 육성한 중국과는 달리, 라오스는 자유시장 경제를 통한 고도성장 잠재력을 갖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부분적으로 라오스가 규모가 작고 가난하며 내륙국가라는 점 때문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반면, 중국은 이미 수십년간 보다 고도의 생산성을 지닌 공산주의 체제를 발전시켜 두고 있었다. 따라서 라오스 농민들은 생계형 농업 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단계에서 살고 있었고, 설령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한다고 해도 잉여 생산물을 재배할 여력이 없었다. 중국의 경우, 덩샤오핑이 집단농장을 해제하자 중국 농민들은 잉여 생산물을 시장에 공급할 수 있었다.
1985년 라오스 공산정권 출범 10주년을 맞아, 라오스 정부는 자신들의 치세에 GDP가 2배로 증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75년 당시 라오스의 경제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기에, 라오스 정부의 이러한 주장은 비교대상 자체가 비현실적이란 점에서 오도된 것이다. 1984년부터 라오스의 GDP가 증가를 시작하긴 했지만, 유엔(UN)은 1980년 이후 라오스의 GDP가 거의 변화되지 않았다고 추정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라오스는 여전히 매우 가난하고 산업적 발전도 거의 없는 국가로 남아 있었다.
라오스 공산 정권은 최초 통치기 10년 동안 보건, 의료, 사회 개발 부문에서 약간의 진전을 이뤘다. 특히 소수민족들은 평화와 영토 재통합 상태 복원의 주된 수혜자가 됐다. 하지만 1975~1978년 사이의 엑소더스로 인해 교육받은 계층들의 대규모 탈출이 있었고 미국의 지원도 상실했기 때문에, 라오스 정권은 이들 분야들에서조차 숙련된 인적 자원의 상당한 부족에 시달렸다.
서방국가들에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끊어지자, 많은 수의 라오스 젊은이들은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베트남, 소련, 동유럽으로 갔다. 그러나 단기적인 교육과정을 통한다고 해도 교사, 기술자, 의사들의 양성에는 시간이 걸렸다. 어떤 경우에도 훈련에 적용되는 자격기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고, 라오스 학생들은 자신들이 배우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하기 위한 언어적 능력도 부족했다. 당시의 많은 젊은이들에 대해, 오늘날 라오스인들 스스로도 "잃어버린 세대"라고 부르고 있으며, 취업을 위해서는 서구적 자격기준을 얻기 위한 재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1985년, 까이손 폼위한 서기장은 당이 집권 10년간 얻어낸 결과에 실망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신 경제 메카니즘'을 도입했다. 몰론 사회주의적 어법을 사용하면서 정당성을 강조하긴 했지만, '신 경제 메카니즘' 정책은 국가의 경제 독점 및 통제를 사실상 포기하는 데 그 정점이 있었다. 경제에 대한 국가의 관료주의적 개입은 규모와 역할 면에서 축소됐고, 국유산업에 대한 보조금 제도도 폐지됐다. 또한 기업의 관리자들에겐 이익 창출을 요구했고(이는 불가피한 인원 감축을 의미했다), 소비자 물가 역시 통제를 없애버렸다.
이러한 개혁이 장기적으론 이익이 될 것이라 예상됐지만, 단기적으로는 물가상승 및 적자에 시달리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실업률 증가로 나타났다. 또한 도시 주민들 사이에서 반감과 불안이 증가하는 주요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그러므로 개혁 조치는 공산당 정권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특히 공산당이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데 필요한 주요한 이념적 적법성을 부여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그러했다. 하지만 공산 정권에는 다행스럽게도 공산당의 취약한 입장에서 정치적 이익을 취해야 할 야당 세력은 너무도 미약했고 조직적이지도 못했다.
라오스의 국제적 위상 역시 위태로왔다. 베트남과 정치 경제적으로 차별화하는 정책은 라오스의 고립을 초래했다. 그리고 또 다른 접경 국가들인 중국 및 태국과는 적대적이고 폐쇄적인 상태였다. 베트남은 유일한 동맹국이자 원조 제공처였기 때문에, 라오스 공산정권의 초창기 정책은 베트남에 대한 의존성을 초래했었다.
1979년에 라오스가 베트남을 지지한 데 대한 중국의 적개심이 점차 엷어지고, 라오스 내에서 베트남의 힘이 약화되면서, 1980년대 중반부터 라오스-중국 관계는 해빙되기 시작했다. 라오스-중국 관계는 아직 냉각된 상태긴 했지만, 1986년 양국은 외교관계를 복원했다. 또한 베트남이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 병력을 철수시킨 1988년 중국과 라오스는 대사도 교환했다(하지만 실제로는 라오스 내에 일부 베트남 군 병력이 남아 있었음). 같은 시기, 라오스는 미국과도 협력을 하면서 관계복원을 위한 첫발을 디뎠다. 미국은 라오스에서 인도차이나 전쟁기에 전사한 공군 병사들의 유해 발굴 사업을 추진했다.
이러한 외교관계의 복원은 미국의 원조와 투자 재개는 물론이고, 라오스 남부에서 여전히 불씨가 남아 있던 반공 반군들에 대한 미국의 은밀한 저강도 지원을 중단시키기 위한 필수적인 일로 여겨졌다. 라오스 정부는 또한 라오스에 대한 경제 정치적 압력을 완화토록 미국이 태국에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도 바랬다. 1984년 및 1987년에 태국과 라오스 군대는 사야부리(Sayaboury: 현 사이얀불리) 도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국경분쟁을 벌였고, 태국은 라오스에 대한 무역 금수조치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1989년에 시작된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과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라오스 공산당 지도부에 깊은 충격을 안겨줬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라오스 지도자들에게 사회주의 이념 그 자체에 근본적인 잘못이 없더라도 1979년부터 시행해온 경제정책의 보류가 지혜로운 일이 될 것이란 점은 시사해줬다. 또한 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면, 라오스에 대한 최대 원조 제공국이 소련인 상태에서, 미하엘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1989년에 까이손에게 원조가 급격히 감소할 것이라 말한 점도 영향을 주었다.
1990년 소련의 원조가 끊기자 새로운 경제 위기가 발생했다. 라오스는 프랑스와 일본에 긴급 원조를 요청하지 않으면 안 됐고, 월드뱅크(World Bank, 세계은행)와 '아시아개발은행'(ADB)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추가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국제기구들은 대규모 원조의 전제조건으로서 추가적인 경제 자유화와 개혁을 요구했다. 또한 라오스는 원조제공 의사가 있는 비-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한 장벽을 철폐하지 않으면 안 됐다. 1992년에 출범한 태국의 문민 정부와 관계를 복원한 일도 도움이 됐다. 태국의 문민 정부는 이전의 군사정권이 시행했던 대-라오스 적대 정책을 중단시켰다. 마지막으로, 까이손은 1989년 중국을 방문해 양국간 우호관계를 확인하고, 중국의 원조도 확보했다.
1990년대에 오랜 기간 라오스 공산주의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 퇴장했다. 대통령이었던 수파노웡 왕자가 1991년 퇴임한 후 1995년 사망했다. 대통령직은 까이손이 이어받았고, 캄따이 시판돈이 총리가 됐다. 하지만 까이손은 1992년 11월에 죽었다. 누학 품사완이 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 캄따이가 당서기장직을 물려받아 라오스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됐다. 1998년 누학이 대통령직에서 퇴임하자, 이어서 캄따이가 대통령직에 오른 후 81세인 2006년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캄따이는 권력 쟁취를 위한 라오스 공산당의 "30년 투쟁"에 참가했던 세대의 마지막 인물이었다. 1998년에는 시사왓 깨오분판(Sisavath Keobounphanh, ສີສະຫວາດ ແກ້ວບຸນພັນ: 1928~ ) 장군이 총리가 됐고, 2001년에는 본항 워라찟(Bounnhang Vorachith, ທ່ານ ບຸນຍັງ ວໍລະຈິດ: 1937~ )이 총리가 됐다.
(사진) 캄따이 시판돈.
1990년대부터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라오스 경제에 주요한 부문들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 특히 태국에선 더욱 더 그러했다. 1994년, 호주가 자금을 지원한 제1 태국-라오스 우호대교(1st Thai–Lao Friendship Bridge)가 완공돼 라오스 수도 위앙짠과 태국의 넝카이(Nong Khai)를 연결했다. 이 교량은 경제 호황을 누리던 태국과 라오스를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라오스에서 가장 중요한 기반시설이 됐다. 이후 태국 동부의 우본 라차타니(Ubon Ratchathani, 우본)와 라오스 남부의 빡세(Pākxē 혹은 Pakse)를 연결하는 또 다른 교량도 건설됐다. 2007년 1월 9일에 준공된 3번째 교량은 '제2 태국-라오스 우호대교'로 불리며, 라오스의 사완나켓과 태국의 묵다한(Mukdahan 혹은 Mukhdahan)을 연결했다. 2011년 11월 11일 준공된 '제3 태국-라오스 우호대교'는 라오스의 캄모완(Khammouane)과 태국의 나콘파놈(Nakhon Phanom)을 연결하며, 2013년 12월 11일 준공된 '제4 태국-라오스 우호대교'는 라오스 버께우(Bokeo, 보케오) 도의 반 후어이사이(Ban Houayxay)와 태국 치앙라이(Chiang Rai) 도의 치앙컹(Chiang Khong)을 연결한다.
라오스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외국인 교역 및 투자에 관한 사실상 거의 모든 규제들을 철폐했다. 그에 따라 태국을 비롯한 외국 기업들이 라오스에서 자유롭게 법인을 설립하고 거래를 할 수 있게 됐다. 공산정권 수립 전후로 라오스를 탈출했던 라오족 및 화교들의 귀국도 장려했고, 그들이 돈을 갖고 되돌아오길 바랬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되돌아왔다. 과거 라오스 왕실의 일원인 마닐라이(Manilai) 공주는 루앙프라방에 호텔과 리조트를 갖고 있고, 인타웡(Inthavongs) 가문 같은 과거의 상류층 가문들 일부도 라오스에 [거주를 안 하는 경우] 다시금 사업체를 운영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동남아시아의 관광산업이 급속히 팽창한 일 역시 라오스에 이익이 됐다. 물론 관광산업의 발전에서도 태국이 역내의 가장 선도적 국가였다. 라오스 정부는 1990년대부터 관광산업에서 소득을 창출할 가능성을 찾았지만, 관광산업을 위한 기반시설과 교통 시스템, 라오스 통화 환전의 불편함이 장애가 됐다. 또한 일부 공산당 관료들이 정치적 위험성 및 외국인들의 유입으로 "문화적 오염"이 발생할 것을 두려워한 점 역시 장벽으로 남았다. 미국 작가 브렛 다킨(Brett Dakin)은 '라오스 관광청'(Lao National Tourism Authority) 자문으로 일했던 인물이다. 그는 관광산업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라오스 관료조직이 씨름했던 과정을 재미있게 설명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킨이 참여했던 사업 중에는 1999~2000년 사이에 진행된 '라오스 방문의 해'(Visit Laos Year) 사업도 포함된다. 이 사업은 오늘날 라오스 관광 붐을 시작시킨 사업이었다. 이제 라오스는 인기 있는 관광지가 됐다. 특히 현재는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루앙프라방은 종교 문화적 영화를 고스란히 간직해 더욱 사랑받는 관광지이다. 관광 부문에서는 중소규모 사업체들이 성장하여 많은 근로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또한 외국(주로 태국) 항공사들과 버스 회사들, 그리고 호텔들이 들어와서, 자금 및 전문성 부족에 시달리던 라오스 정부를 대신해 기반시설의 간극을 메워나갔다.
1980년대에 개혁을 시작한 이후, 라오스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한국에선 'IMF 사태'로 불림)만 제외하고는 연평균 6%의 성장률을 보였다. 하지만 생계형 농업의 비율은 아직도 GDP의 절반과 전체 일자리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민간부문의 경우 태국과 중국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사실 라오스는 일정 정도는 태국의 경제 문화적 식민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이러한 점은 라오스인들 사이에서 [태국에 대한] 약간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되기도 한다.
라오스는 여전히 외국 원조에 깊이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태국의 지속적인 팽창은 라오스의 유일한 수출 품목인 목재와 수력발전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키고 있다. 최근 라오스는 미국과도 교역을 정상화했지만, 아직가지 주요한 실익은 거두지 못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라오스가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필요한 요구조건에 부합하도록 하는 사업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주요한 장애물은 라오스 화폐인 낍(kip, 킵)인데, 아직도 [해외에서의] 공식적인 환전이 되지 않는 통화이다.
라오스 공산당은 권력을 독점하고 있지만, 경제는 시장에 맡겨둔 채 라오스 국민들의 일상에는 개입하지 않고 있다. 그에 따라 국민들도 통치에는 도전하지 않는다. 비록 기독교 복음주의(Christian evangelism: 여기서는 전도 활동을 의미)는 공식적으로 금지했지만, 국민들의 종교, 문화, 경제, 성생활에 관한 경찰력의 감시는 대부분 사라졌다. 미디어는 국가가 통제하지만, 대부분의 라오스인들은 태국의 라디오 및 TV 방송을 시청할 수 있다(태국어와 라오어는 상호 의사소통이 되는 언어임). 따라서 라오스 국민들은 태국의 방송을 통해 외부세계 뉴스들을 접하고 있다. 인터넷의 경우 약간의 검열을 받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읍내들에서 이용 가능하다. 라오스인들은 태국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으며, 실제로 태국 내 불법 이주 라오스인들이 태국 정부의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사진) 현재 '라오 인민혁명당' 서기장 겸 라오스 정부 대통령을 맡고 있는 촘말리 사야손의 모습.
하지만 공산당 정권에 도전하는 이들은 가혹한 위협을 당한다. 앰네스티 인터네셔날(Amnesty International, 국제사면위원회)는 라오스의 정치범들이 불법적으로 구속당하거나 고문당한 사례를 지속적으로 기록해오고 있다. 태국과 미국에서는 다양한 재야 단체들이 활동하기도 하지만, 라오스 내에서 활동하는 재야 단체가 존재한다는 증거는 거의 없는 형편이다. 현재까지 대부분의 라오스 국민들은 자신들이 지난 10여년간 누려온 개인적 자유와 소박한 재산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06년 3월 캄따이 시판돈이 당서기장 및 대통령 직에서 퇴임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촘말리 사야손(Choummaly Sayasone, ຈູມມະລີ ໄຊຍະສອນ: 1936~ )이 두 자리 모두를 계승했다. 캄따이와 마찬가지로 촘말리 역시 군 장성 출신이다. 일반적으로 촘말리가 새로운 개혁에 나서리라 보는 이들은 별로 없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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