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역사 총론 (5) : 통일국가의 탄생과 현재
1945년 이후의 베트남 역사 (하편)
8. 통일국가 :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1976~현재)
북-베트남(DRVN: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최후의 작전인 1975년 춘계 대공세(1975 Spring Offensive)를 벌이면서, [부언메투엇(Buôn Mê Thuột)의 기습으로 인해 허를 찔린 남-베트남(RVN: 베트남 공화국)의 군의 '제2군단'은 주둔지인 플레이꾸(Pleiku)를 버리고 동쪽의 해안지방으로 퇴각하다 거의 전멸당했다.] 동쪽의 해안도시 뚜이호아(Tuy Hòa)에 이르는 길에서, ['2군단'을 따라 피난 중이던] 피난민 중 죽거나 납치당한 사람들이 최대 15만5천명에 달했다.(주15)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보면, [전쟁이 끝난 후] 남-베트남 사람들 중 재교육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은 100만~250만명 정도이고, 그 중 사망자는 16만5천명 정도로 추산된다.(주16)(주17) 또한 처형당한 사람도 5만~25만명 정도로 추산된다.(주16)(주18)(주19)(주20) ['하와이 대학'(University of Hawaii)의 정치학자] 루돌프 룸멜(Rudolph J. Rummel: 1932~2014)은 "신경제 구역"(New Economic Zones)에서 자행된 노예노동에 약 100만명 정도가 보내졌다고 보았고, 그 중 5만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주16)(주18) 선박을 타고 베트남을 탈출한 베트남인 보트 피플(Vietnamese boat people)은 250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그 중 20만~40만명이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주21) 또한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점령 이후 자살한 사람도 수십만명에 달했다.(주22) 1988년에는 베트남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다.(주23)
많은 수의 북-베트남 군인들과 당원들도 자신들이 세뇌당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동안 남-베트남 인민들이 극도로 가난하며, 제국주의자들과 외국 자본가들이 남-베트남 인민들을 노예로 삼아 족쇄를 채우고 개들을 이용해 괴롭힌다고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북-베트남 군인들과 당원들이 남-베트남에서 본 것은 자신들이 배웠던 바와는 모순됐다. 남-베트남에는 북-베트남에서 얻기 힘들었던 식품, 소비재, 화려한 옷, 서적, 음악들이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북-베트남 전사 출신인 즈엉 투 흐엉(Dương Thu Hương)은 전후에 민주화 운동가로 변신한 여류 작가로서, 북-베트남 전사들이 남-베트남에서 자각했던 사실들을 자신의 책 <장님들의 천국>(Paradise of the Blind: 발행-1988년)에 기록해두었다. 1976년,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통일됐고, 국호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SRVN)으로 바꿨다. 북-베트남 수도였던 하노이(Hà Nội)는 통일 국가의 수도가 됐다. '베트남 공산당'(Communist Party of Vietnam: CPV)은 이전에 사용하던 당명에서 "노동당"(Labor Party)이란 부분을 빼버렸고, 중국이 사용하던 "제1서기"(First Secretary)라는 명칭도 소련(USSR)에서 사용하는 명칭인 "서기장"(General Secretary, 총서기)이란 명칭으로 바꿨다. 서기장은 레주언(Lê Duẩn, 여순[黎筍]: 1907~1986)이었다. 베트콩(Việt Cộng)은 해산됐다. '베트남 공산당'은 중공업 발전과 농업 집산화를 강조했다. 이후 수년간 정부는 사기업들을 몰수했고, 그 소유주들이 "신경제 구역"으로 보내지는 경우도 잦았다. '신경제 구역'은 깊은 정글 속에서 토지 개간 작업을 하던 지역들로서, 공산당이 완곡한 표현으로 붙인 명칭이다. 농민들은 강제로 국영 집단농장에 편입됐다. 정부의 허가 없이 다른 지방으로 식품과 재화를 운반하는 일은 불법이었다. 짧은 기간 안에, 베트남은 식량 및 기초 생필품의 심각한 부족에 시달렸다. 한때 세계적인 쌀생산 지역이었던 메콩 삼각주(Mekong Delta) 지역에는 기근에 시달렸다. 1980년대 중반, 베트남의 물가인상률은 3배에 달했다. 외교적인 면에서 보면, 베트남은 '코메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경제상호원조회의: Comecon)에 가입하고, 소련과의 군사동맹 조약인 우호조약을 체결하면서 점차 친-소련 성향의 국가가 돼 갔다. 그러자 중국과 소련의 공산권 라이벌 관계가 격화되면서, 베트남과 중국 사이에도 긴장이 고조됐다. 더욱이 중국의 동맹국인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의 침공에 따른 분쟁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긴장은 더욱 고조됐다. 베트남은 또한 미국 및 그 동맹국들로부터 무역 금수조치도 당했다. 베트남 정부는 수복한 남쪽 지역에서, 이미 북쪽에서 시행 중이던 스탈린주의(Stalinism)에 기반한 플로레타리아 독재(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를 펼쳤다. 보안기구인 "공안"(Công An)의 네트워크가 인민들의 모든 삶의 영역을 통제했다. 검열은 엄격하고도 초-보수적이었고, 1975년 이전에 발표된 음악, 예술, 문학 작품들은 대부분 금지됐다. 종교들 역시 모두 국가가 통제하는 교단으로 재조직됐다. 공산당, 정부, 엉클 호(호 아저씨=호찌밍: 1890~1969), 혹은 공산주의와 관련된 그 어떤 것에도 부정적인 논평을 할 경우, 그에게는 "반동"(Phản Động)이란 딱지가 붙여져 경찰(=공안)의 박해, 학교나 직장에서의 퇴출, 교도소 수감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 정권은 암시장(black market) 단속에 실패했다. 암시장에서는 식품, 소비재, 금서(禁書) 등이 고가로 팔렸다. 또한 공안기구는 사람들을 해외로 도피시켜주는 전국적인 비밀 조직망을 저지하는 데도 실패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보안요원들이 뇌물을 받고 해외 도피에 연루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한 지역 보안요원 전체가 연루되기도 했으며, 그들이 직접 해외 도피자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러한 삶의 조건은 백만명 이상의 베트남인들로 하여금 바다 혹은 캄보디아를 경유한 육로를 통해 은밀히 베트남을 탈출하도록 만들었다. 해상으로 탈출한 사람들을 태운 목선들이 바다를 항해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그러한 배들은 마치 정어리를 가득 채워넣듯이 사람들을 태웠고, 식량과 물도 충분치 않은 상태였다. 베트남 해안경비대에 의해 사살당한 이들도 많았고, 폭풍우와 침몰, 기아와 갈증으로 인해 바다에서 죽어간 이들도 많았다. 태국만(Gulf of Thailand)에서 활동하던 해적들도 또 다른 위협이었다. 해적들은 보트 피플들을 대상으로 악랄하게 강도, 강간, 살인을 일삼았다. 보트에 탄 사람 모두를 학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부 경우, 여성들은 며칠 동안 강간을 당한 후 매춘굴로 팔려가기도 했다. 육로를 통해 캄보디아로 들어간 이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캄보디아에는 지뢰 지대도 있었고, 크메르루즈(Khmer Rouge) 군대와 크메르 세레이(Khmer Serei) 반군 게릴라 모두 베트남에서 탈출한 난민들을 대상으로 강도, 강간, 살인을 일삼았다. 일부는 성공적으로 역내를 벗어났고, 많은 이들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홍콩에 상륙하여 유엔(UN)이 운영하던 난민 캠프들로 들어갔다. 그러한 난민촌 가운데 유명말레이시아의 비동(Bidong), 인도네시아의 갈랑(Galang), 필리핀의 바탄(Bataan), 태국의 송클라(Songkla, 송카)가 유명했다. 일부는 지붕도 없는 보트에 초만원 상태로 탄 채 호주 북쪽까지 이동했다. 베트남은 모든 외국 선교단을 추방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이는 유고슬라비아(Yugoslavia: 현재의 슬로베니아[Slovenia]) 출신의 셀라지오회(Salesian) 소속 신부 안드렛 마즈센(Andrej Majcen: 1907~1999)이었다. 하지만 그는 남은 여생 내내 베트남인들의 좋은 친구로 남았다. 대부분의 난민들은 난민촌에 들어간지 5년 이내에 제3국으로 이주했지만, 일부는 10년 동안이나 난민촌에 머물러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에 망명 국가를 찾지 못한 난민들은 베트남으로 송환됐다. 베트남인 난민 공동체는 미국, 캐나다, 호주, 프랑스, 서독(=독일), 영국에 정착했다. 이러한 교민들이 의약품이나 위생용품 같은 생필품들을 담은 구호 보따리를 고국에 두고 온 친인척의 생존을 위해 보내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현금의 경우, 베트남 정부가 시세와는 너무 차이가 나는 환율로 교환해줬기 때문에, 현금을 보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남-베트남은 패망했지만, '북-베트남 인민군'(PAVN)은 동원령 해제를 그다지 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베트남 인민군은 100만명 이상의 병력을 지닌 아시아 최대의 군대 중 하나로 남았고, 전쟁이 조만간 끝날 것이라는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 군인들은 수십년간의 전쟁을 통해 고도로 풍부한 경험을 획득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 및 남-베트남 군대로부터 대규모의 장비도 노획했다. 얼마 안 있어 베트남은 캄보디아 분쟁에 휘말렸다. 캄보디아는 1975년부터 '크메르루주' 정권이 통치했다. 게다가 1976년 마오쩌뚱(Mao Zedong, 모택동[毛澤東]: 1893~1976)이 사망한 후, 중국과의 관계도 급격히 악화됐다. 베트남은 끊임없이 소련에 대한 충성심을 보였는데, 1970년대에 중국이 소련과 불화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78년 무렵, 베트남과 중국의 교역 대부분 및 물자 원조는 끊긴 상태였고, 베트남은 중국 선박들의 자국 항구 정박을 금지시켰다. 더구나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중국의 동맹 세력이었기 때문에 긴장은 더욱 고조됐고, 캄보디아-베트남 국경에서 일련의 국경분쟁들이 발생된 후, 1979년 새해 벽두에 베트남은 전면적인 캄보디아 침공을 단행했다(참조☞: 캄보디아-베트남 전쟁[Cambodian–Vietnamese War: 1977~1991]).
'크메르루주' 정권은 극도의 잔학함과 대규모 학살을 저질러, 2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처형과 굶주림 등으로 사망했다. 그에 따라 국제사회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을 긍정적인 상황 전개로만 인식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국과의 분쟁을 유발시켰고, 1979년 2월 미국을 방문 중이던 덩샤오핑(Deng Xiaoping, 등소평[鄧小平]: 1904~1997) 중국 주석은 "베트남에게 교훈을 가르쳐줄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그리고 중국 인민해방군(People's Liberation Army, 中國人民解放軍: PLA) 소속 수십만명의 병력이 베트남 국경을 침입했다(참조☞: 중월전쟁[Sino-Vietnamese War: 1979.2.17.~3.16]). 그러나 중국은 아직도 문화대혁명(Cultural Revolution, 文化大革命, 十年動亂: 1966~1976)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중국 인민해방군'은 훈련, 장비, 통신체계 등이 심각하게 결여된 상태였다.베트남의 주력군인 '베트남 인민군'은 당시 캄보디아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전투에 참가할 수 없었다. 따라서 베트남이 동원한 것은 주로 국경수비대와 민병대였지만, 중국 군은 3만명 이상의 전사자 및 다수의 부상자를 남기고 전투를 마쳤다. 이후 중국은 앞서 언급했던 "교훈"을 가르쳐줬다면서 철수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중국 국경 지역에 있던 베트남의 기반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안겨줬다.
캄보디아에는 헹 삼린(Heng Samrin)을 국가주석으로 하는 친-베트남 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이 수립됐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자행하던 학살을 중단시켰다.(주24) 폴 포트(Pol Pot)의 '크메르루주'는 프놈펜(Phnom Penh)에서 패퇴한 후, 베트남 침략군 및 새로 들어선 프놈펜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비-공산주의 계열 반군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다. 그 반군들은 망명 중이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이 이끌던 왕당파 '푼신펙당'(Funcinpec) 군대와 손 산(Son Sann)이 이끈 반공 공화파 반군 '크메르 민족해방전선'(KPNLF 혹은 KPNLAF)이었다. PRK가 비록 친-베트남 정권이긴 했지만, 1980년대 초 이 정권의 고위급 인사들 중 일부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저항하기도 했다. 이 정권의 총리 겸 '캄푸치아 인민혁명당'(KPRP) 서기장이었던 뻰 소완(Pen Sovan)은 숙청당해 권좌에서 제거된 베트남에서 10년간 가택연금을 당했다. 캄보디아-베트남 전쟁은 1989년까지 10년간 지속됐다.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면서 베트남 군대는 캄보디아에서 철수했고, 캄보디아의 행정권은 유엔(UN)의 임시기구인 '캄보디아 국제연합 과도행정기구'(UNTAC)로 넘어갔다.(주25) 1980년에 채택된 베트남의 제3차 헌법은 소련의 헌법에 토대를 둔 것이었다. 이 헌법은 '베트남 공산당'을 인민을 대표하고 국가를 영도할 유일한 정당으로 규정했다. 같은 시기인 1980년, 베트남 조종사 팜 뚜언(Phạm Tuân: 1947~ )은 소련 우주선 '소유즈 37호'(Soyuz 37)에 탑승해 '살류트 6호'(Salyut 6) 우주정거장에서 임무를 수행하여, 베트남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체에서 최초의 우주인이 됐다. 1980년대에는 무장투쟁을 통해 베트남 공산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해외에 수많은 베트남인 단체들이 조직됐다. 많은 단체들이 베트남 국내 잠입을 시도했지만, 결국에는 베트남 보안 당국과 군대에 의해 일망타진당하고 말았다. 전반적으로 볼 때, 통일 후 10년 동안은 베트남에게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다. 연속적인 전쟁은 베트남이 가진 자원을 대규모로 소모시켰다. 재정적으로도 손실이 컸지만, 젊은 노동력의 대규모 손실도 초래했다. 베트남은 국제적으로 고립돼 있었고, '코메콘' 회원국들 이외의 국가들과는 거의 접촉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북쪽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적성국을 접하고 있었다. 미국과는 계속해서 외교관계 복원을 위한 협상을 제안했지만, 베트남 전쟁 기간 중 실종된 미군 병사들 문제 및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재임] 1981~1989) 대통령이 베트남의 주된 후원국인 소련에 대해 공개적인 적대성 발언을 하는 일이 발목을 잡았다. 1981년, 베트남의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범문동[范文同]: 1906~2000, [재임] 1976~1987) 총리는 미국 언론인 스탠리 카노우(Stanley Karnow: 1925~2013)와 회견을 가지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1979년에 수립한 베트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완벽한 실패였다. 베트남은 1인당 GDP가 30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세계 최고의 빈곤국 중 하나였고, 오로지 소련의 원조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여, 1982년까지 소련이 베트남에 제공한 누적 원조액은 미화 30억 달러에 달하고 있었다. 소련의 <바르샤바 조약>(Warsaw Pact) 동맹국들은 소련 정부가 베트남에 대한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압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한 소련이 베트남의 경제개발에 자국의 참여 확대를 바랬고, 베트남 내 군사기지들에 대한 접근도 증가시키려 한다는 점도 양국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1982년, '베트남 공산당'은 제5차 당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레주언(Lê Duẩn, 여순[黎筍]: 1907~1986, [재임] 1960~1986) 서기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레주언은 또한 당 '중앙위원회'(Central Committee) 위원 중 60세 이하는 단 한명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당 지도부의 평균 연령에 관해 탄식에 찬 실망감을 드러냈다. 이 해에 당 조직에 대한 숙청이 시작되어, 노쇠한 당 간부들과 무능한 당원들이 사라졌고, 보다 젊은 당원들로 교체됐다. 당시 59세였던 보반끼엣(Võ Văn Kiệt: 1922~2008)이 '국가 기획위원회'(State Planning Commission) 위원장으로 승진했고, 62세였던 외무부장관 응우옌꺼탓(Nguyễn Cơ Thạch: 1921~1998)은 '정치국'(Politburo) 위원으로 승진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2차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국가적 영웅이 된 보응우옌잡(Võ Nguyên Giáp, 무원갑[武元甲]: 1911~2013) 장군이 정치국 위원에서 배제된 것이었다. (훗날 드러난 바로는 보응우옌잡의 정치적 라이벌들이 그를 제거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렇지만 국가의 3대 요인이었던 레주언 서기장, 팜반동 총리, 쯔엉 찐(Trường Chinh, 장정[長征]: 1907~1988, [정치국원 재임] 1951~1986) 주석이 3인 총합 226세의 나이와 명백한 건강 이상들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장래에 권좌에서 내려올 것이란 징후를 보여주지 않아서, 이러한 세대교체 작업의 효과는 반감했다. (3인 모두 1982년 무렵에는 모스바에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다.) 비록 그들이 개혁 및 부패와의 싸움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이 점에서 변화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1981년에 채택된 '제2차 5개년 계획'은 명확한 시장 개혁 움직임을 보여줬고, 1976~1980년 사이에 시행된 '제1차 5개년 계획'의 엄격한 중앙 통제식 계획에서 이탈한 것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변화는 1980년대 중반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986년 7월 레주언 서기장이 사망했고, 그 자리를 쯔엉 찐이 이어받았다. 그러나 쯔엉 찐은 겨우 5개월만에 밀려났고, 그보다 8세가 연하인 응우옌반린(Nguyễn Văn Linh, 완문영[阮文霊]: 1915~1998, [재임] 1986~1991)이 서기장 자리에 올랐다. 1987년에는 팜반동이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베트남의 새로운 지도부는 취임식에서, 자신들의 연로한 선임자들을 "인민의 삶을 질을 개선하고,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생활에 관한 보다 유연하고 비교조적 전망을 불어넣는 일에 극단적으로 실패했다"고 맹비난했다. 1980년대 말, 베트남은 중국이 채택한 모델을 차용하여 잠정적인 시장개혁에 착수했다. 이 정책적 실험은 북쪽 지역에 비해 보다 강고한 교역 및 상업 전통을 지닌 남쪽에서 시작됐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 ) 소련 서기장이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재건) 정책과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 정책도 베트남의 개혁 정책에 동기를 부여했다. 1989년에 동유럽의 공산 정권들이 붕괴했지만, 베트남은 이 사건들로부터 상대적인 고립성을 유지했다. 그것은 베트남의 빈곤과 지리적 거리감 때문이었다. 소수의 민주화 시위가 발생하긴 했지만 신속히 진압됐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중국-베트남 관계에도 해빙 무드가 찾아왔다. 양국은 이제 공산국가로서 살아남은 소수의 국가들이 됐기 때문에, 두 나라는 서로를 포용했다. 그러나 1991년 10월에 체결된 <파리평화협정>을 통해 캄보디아에서의 분쟁이 해결된 직후, 베트남은 서유럽 및 몇몇 아시아 국가들과 외교 및 경제 관계를 수립하거나 복원했다. 1994년 2월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경제제재를 해제했고, 1995년 6월 미국-베트남 관계가 정상화됐다. 2005년 6월, 팜반카이(Phan Văn Khải: 1933, [재임] 1997~2006) 총리가 이끄는 베트남 사절단이 미국을 방문하여,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1946~ , [재임] 2001~2009)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측 인사들과 만났다. 이러한 방문은 30년만의 일이었다. 이 방문은 대체로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당혹스러운 일도 약간 발생했다. 이들의 공식방문을 알리는 백악관 공식 웹사이트가 남-베트남 국기를 게시한 사고도 그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베트남 정부의 경악과 적대감이 담긴 성명 발표를 초래했고, 결국 백안관 측이 공식 사과하고 웹페이지를 수정했다. 게다가 팜반카이 총리와 부시 대통령이 회담을 하는 동안, 백악관 바깥에서는 반-베트남 시위대가 모여 '베트남 공산당'을 비난하고 남-베트남 국기를 흔들면서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005년 말 현재, 베트남을 통치하는 책임은 3인 집단지도 체제에 있었다. 이들은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 농득만(Nông Đức Mạnh: 1937~ , [재임] 2001~2011), 총리 팜반카이, 국가주석(=대통령) 쩐득르엉(Trần Đức Lương: 1937~ , [재임] 1997~2006)이었다. 농득만 서기장은 '베트남 공산당' 뿐만 아니라 '정치국'도 이끌었다. 쩐득르엉 주석은 국가수반이었고, 팜반카이 총리는 정부를 이끌었다. 이들 3인방은 "사회주의적 시장경제" 및 유럽연합(EU), 러시아, 미국과의 우호 관계를 주창했다. 3인 지도부는 급속한 경제성장기를 이끌었지만, 관리들의 부패와 도농간의 경제적 격차가 고질적인 문제로 남으면서 '베트남 공산당'의 권위를 잠식했다. 2006년, 베트남은 에이펙(APEC: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을 주최했고, 세계무역기구(WTO) 회원 자격을 얻기 위해 미국,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도미니카 공화국(Dominican Republic)과 각각 양자 협정들을 체결한 후, 2007년 1월 11일에 WTO의 150번째 회원국이 됐다.(주26) [2011년 1월 19일 '베트남 공산당'은 를 제11차 당대회를 개최하여 응우옌푸쫑(Nguyễn Phú Trọng, 완부중[阮富仲]: 1944~ )을 서기장으로 선출했다. 이에 따라 2015년 8월 현재, 쯔엉떤상(Trương Tấn Sang: 1949~ , [취임] 2011.7.25) 국가주석, 응우옌떤중(Nguyễn Tấn Dũng: 1949~ , [취임] 2006.6.27.) 총리를 포함한 3인이 베트남을 이끌고 있다.] 2011년, 하노이와 호찌밍시에서 자발적인 대규모 군중시위가 발생했다. 시위에 참가한 수천명의 베트남인들은 남중국해(South China Sea)에서 중국이 군사적 공세를 강화하고 베트남 수역과 영토를 잠식하는 일을 항의했다.(주27) [이 시위는 폭력사태로 변해 베트남에 체류 중이던 많은 중국인들이 캄보디아나 중국으로 탈출했다.] 하노이 주재 중국 대사관이 공식적인 항의를 하자, 베트남 당국은 반중시위들을 진압하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다. 1990년대 이후 '베트남 공산당'의 공식적인 정책은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고, 자국이 먼저 현상유지 상황을 부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주28) 2013년 응우옌티투이중(Nguyen Thi Thuy Dung)이라는 이름의 여아가 출생하여, 베트남의 9천만번째 시민으로 공식 등재됐다.(주29)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8.10 그래픽이 영 마음에 안 들지만,
이로써 베트남 역사의 개괄적 고찰이 끝났습니다..
이제 다음 번은 미얀마 역사 차례입니다. -
작성자개미 작성시간 15.08.11 공부가 되는 내용 잘 읽었습니다.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미얀마 역사도 기대됩니다!!! -
작성자하드 작성시간 15.08.11 감탄!~~..
주옥과 같은 자료..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울노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허의철학 작성시간 15.08.13 막연한 베트남에서
조금이마 이해할 수 있어 좋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울트라-노마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5.08.14 하기사 요즘 베트남이란 나라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놈의 사람만 많이 죽은 "식민지 해방 통일전쟁"을
뭐하러 했나 싶기도 합니다..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