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이유경 기자 블로그 2016-3-27
** 편집자(Lee Yu Kyung) 주 : 아래 기사는 <시사IN> 444호에 게재된 기사의 긴 버전입니다.
2013년 8월 초 어느 새벽 5시께였다. 버마 옛수도 랑군에 취재차 머물던 기자의 전화기 너머로 “랑군에 도착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며칠전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던 전 승려 우 감비라(U Gambira)였다.
감비라는 2007년 8-9월 기름값 인상으로 폭발된 민심을 휘감으며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규모 거리시위를 조직한 소위 ‘샤프란 혁명’ 지도자다. 혁명은 군정타도에 실패했고 감비라는 그해 11월 체포됐다. 실은 온가족이 잡혀갔다. 도망자가 된 아버지와 누이 한명 빼고, 후천성면역결핍증(HIV+) 환자인 남동생 윈 쬬까지 잡혀갔다. 감비라의 자수 유도용으로 체포된 동생은 옥사했고 감비라는 중노동이 포함된 68년형을 선고받았다. 2012년 1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4년 2개월간 그는 구타, 잠 안재우기, 화학주사 등 모진 고문을 당했다. 특히 머리를 많이 맞았다.
그날 새벽콜 이후 랑군에서 그를 두번에 걸쳐 인터뷰한 건 오로지 그가 기자와의 인터뷰 약속을 다른 약속과 거의 동시에 잡았기 때문이다. 감비라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심하게 앓고 있었다. 두통이 심했고 까먹는 일이 잦았다. 이른 새벽 도착전화를 준것도 그 신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국현안을 묻는 질문엔 언변이 살아났고 ‘고맙게도’ 기자가 듣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한때의 동지였던 샤프란 승려 다수가 이슬라모포비아 늪에 빠져 무슬림 혐오발언을 서슴치 않을때도 감비라는 ‘딴’ 소리를 했다. “누구 좋으라고 인종주의를 부추기는가”와 같은. 불교도와 무슬림교도간 화해를 바라던 그다. 그는 2007년 혁명의 기억을 더듬는 질문엔 날짜까지 기억했다. ‘기록’의 흔적을 남기지 말아야 했던 엄혹한 시절 모든 건 머릿속 ‘기억’으로만 붙들어 매야했다. 엄청난 고문과 강도높은 PTSD에도 그 기억은 용케 사라지지 않았다. 감비라뿐 아니라 버마 정치범들의 기억이 남다른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그를 다시 만난건 2015년 방콕에서다. 감비라가 독지가의 도움으로 타이북부 치앙마이에서 뇌수술을 받고 PTSD 전문치료도 받은 후였다. “머리는 더이상 아프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PTSD는 평생 안고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우 감비라 (본명 “니니르윈”). 전버마승려연합(ABMA) 의장. 2007년 샤프란 혁명을 주동했다. 거리 시위를 상상도 못했던 엄혹한 시절 혁명은 즉각적 군정타도를 보는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버마(미얀마)가 개방 노선을 걷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는 별 이의가 없다. 군사정권에 뿌리를 둔 현 버마정부는 그 혁명을 주동한 감비라의 과거를 잊지 않고 있다. 2012년 대통령 사면으로 석방된 이후로도 몇 차례 더 체포된 경험이 있는 감비라가 최근 다시 철장에 갇힌 이유다. 그는 혹독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고 있다. (© Lee Yu Kyung)
“PTSD 평생 안고 가야할 것 같다”
서슬퍼런 독재와 그 체제가 명령한 고문은 한 사람을 후유증 속에 반 영구적으로 가둬놨다. 2월 말 대한민국 정치사에 짙은 선을 새겼던 필리버스터때도 단상에 선 야당의원들은 자신의 과거사와 트라우마의 기억을 눈과 입 그리고 몸의 전율로 발산했다. 한국에 수많은 은수미가 있듯 버마에는 수많은 감비라가 있다. 전 학생운동가 짐미(46 Jimmy, 본명 쵸 민우Kyaw Min Yu)도 그중 한명이다.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보낸 짐미는 “인간취급 못받는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책을 읽을 수도 펜과 종이를 만져볼 수도 없었다. 음식은 입에 넣을 수 없는 수준이고 군정보국(MI)의 고문도 심했다. 구타는 그들의 무기였다”
짐미의 아내이자 소위 ‘88세대’ 동지로 감옥에서 사랑을 키운 닐라 테인(44, Ma Nilar Thein)은 출소한 남편 짐미와 함께 샤프란 혁명 전야 8월의 시위를 조직한 바 있다. 그 시위가 다시 두 사람을 감옥으로 몰아넣었다. 6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던 닐라테인 그리고 짐미 모두 2012년 1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됐다.
그런데 요즘, 이들의 구속 소식이 다시 귀를 어지럽히고 있다. 1월 19일 감비라가 다시 철장에 갇혔다. 지난 해 11월 NLD 총선승리 후 안도했던 감비라는 그동안 거부당해온 여권을 발급 받으러 버마에 돌아갔고 그게 화근이 됐다. 감비라는 호주인 아내 마리 시오차나와 함께 타이북부 메사이에서 버마쪽 타칠렉(Mae Sai-Tachileik)으로 이어진 육로 국경 이민성을 통과하여 버마에 입국했지만 구속사유는 ‘불법 입국’이었다. 식민시절 유산인 ‘1947이민법’ 13(a)항이 적용됐다. 감비라는 7번의 심리끝에 2월 10일 공식 기소됐다. 감비라의 PTSD를 치료했던 전문기관 더 캐빈(The Cabin)의 로리 마기 의사는 감비라 구속 소식에 크게 염려했다. “감비라가 PTSD치료에 놀라운 진전을 보여왔는데 그에게 PTSD를 야기한 공간으로 되돌려 보낸 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허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였다.
2월 24일, 이번엔 닐라테인 체포소식이 들려왔다. 지난 해 3월, 학생회 결성을 금지한 교육법 개정안에 반대하며 대규모 학생시위가 벌어졌을때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다. 짐미는 기자와의 전화 및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아내의 구속을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 곧 민주정부가 들어설 것이고 나라 상황이 좀 달라졌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닐라테인은 집시법(Peaceful Assembly and Peaceful Procession Law) ‘18조’ 위반에 걸렸다. “허가없는” 집회시 6개월의 징역형이나 30,000 쨧 (한화 3만원)의 벌금을 물린다는 조항이다. 벌금액수가 높지 않지만 닐라테인은 거부하고 있다.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겠다며 사보타쥬 중이다. 당국이 “도주우려가 있다”고 한 것이 이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줬다. “ ‘도주우려가 있다’니. 우리 존엄을 모욕하는 처사에 굴복하지 않겠다. 법적으로 대응하겠다” 짐미의 말이다.
2014년 12월 구속됐던 토지주권 운동가 틴 툰 웅(Tin Tun Aung) 역시 같은 이유로 10달러의 벌금대신 감옥을 선택한 적이 있다. 벌금을 내는 건 유죄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버마, 다시 정치범을 말하다
2010년 11월 13일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에서 석방된 후로 버마는 개방노선을 걸어왔다. 고무적인 진전은 두가지였다. 언론사전검열 폐지로 언론의 자유가 대폭 확대되었고, 정치범이 대거 석방되었다. 군사정부 시절 2천명을 웃돌던 정치범은 2월 18일 현재 복역중인 인원 87명에 재판중인 409명을 합해 총 500명 가량 된다. 그러나 정치범이 재생산되는 구조는 여전하다. 감비라가, 닐라테인이 다시 감옥으로 향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짐미는 작금의 정권교체기에 기성권력이 자신들이 건재함을 과시하는 방편으로 체포를 남발하고 있다고 봤다.
10일 아웅산 수치의 민족민주동맹(NLD)은 모두의 관심사였던 대통령 후보로 우 틴쬬 (U Htin Kyaw)를 지명했다. 그리고 3월 16일 우틴쬬는 NLD 다수 의회 투표를 거쳐 54년만에 처음으로 민간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대통령위에 군림하겠다”고 여러차례 공언해온 아웅산 수치의 ‘민주정부’ 출범은 이제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경찰력은 내무부 직속 관할이고 2008 버마 헌법에 따라 내무부는 대통령이 아니라 군참모총장의 명령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
또 다른 구조도 있다. 개방노선 후 정치범 구도에 변화가 왔다. 과거 정치범이 주로 학생, 지식인 등 사상의 자유를 중심에 두고 싸운 ‘양심수’ 들이 다수였다면, 개방 후 5년여간 버마의 감옥에는 농민과 빈민들이 정치범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00년 부터 타이에 베이스를 두고 버마 정치범을 지원해온 버마정치범지원연대(AAPP) 최근 자료에 따르면 현재 복역중인 정치범 87명 중 29명이 농민이다. 단일 직업군으로는 가장 많다. 개방정책에 따라 공격적 개발붐이 일었고 땅을 빼앗긴 농민, 빈민들의 반대 시위는 2012년 이래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그 시위에 참여한 농사꾼, 주민 그리고 이들과 연대해온 토지주권 운동가들이 대거 구속되면서 일종의 정치범 신세대가 형성됐다. ‘장미’를 쫓던 양심수들이 북적대던 감옥으로 ‘빵’을 사수하려는 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빵’과 ‘장미’들이 만개한 정치범 감옥
물론 ‘양심수’도 여전히 존재한다. 닐라테인이 잡혀갔듯 교육법 개정에 반대했던 학생운동 지도부는 죄다 감옥에 있다. 언론자유는 믿을 수 없을만치 확대됐지만 그렇다고 언론인 정치범이 사라진 건 아니다. 현재 10명의 언론인이 정치범 명단에 올라 있다.
특히 군의 화학무기공장 건설 의혹을 제기했던 ‘유나이티 위클리(Unity Weeky)’ 기자들은 편집장 포함 5명이 ‘국가기밀누설’죄로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감옥에 갇힌 기자중에는 감비라의 매제 루 모 나잉(Lu Maw Naing)도 있다. 이들에게는’1923 국가기밀법’(1923 State Secret Act)이 적용됐다. 이 법 역시 식민시대 유산이다.
또 다른 유형의 정치범도 생겨났다. 최근년간 불거진 종교분쟁은 칼럼니스트 틴 린 우(Htin Lin Oo)같은 인물을 양심수로 만들었다. 그는 지난 해 10월 문학축제에서 “인종과 종교로 특정 커뮤니티를 차별하는 건 불교교리에 어긋난다”고 말했을 뿐이다. 한때 NLD 정보국장을 역임했던 틴 린 우는 “의도적이고 악의적으로 종교갈등을 부추긴”죄로 구속 수감 중이다. 중노동을 포함한 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제 곧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테인세인 대통령은 감비라가 체포되고 3일 후인 1월 22일 52명의 정치범을 포함한 102명을 사면, 석방했다. 그러나 위에 기술한 누구도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유명했던 정치범 아웅산 수치가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는 시대가 왔다. 그러나 NLD 정부가 실질적으로 펼 수 있는 개혁은 그리 많지 않고 한계는 너무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실행할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대통령 사면권 발동이다. 정치범 전면석방, 그건 NLD 정부가 가장 신속하게 주도할 수 있는 첫번째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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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은 3월 16일 대통령 선출이전 작성된 “큰 이변이 없는한 우 틴쬬는 NLD 다수의 의회에서 투표를 거쳐 대통령으로 확정될 예정이다”를 선출 이후시점으로 업데이트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