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e-매가진 '신대승' 제4호 (2016년 10월)
<아시아의 전투적불교시리즈>
버마/미얀마편 1 : 반제식민저항에서 이슬람포비아 폭동까지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 전문기자)
- 민족과 불교의 이름으로 제국에 저항하다
26살 대위 트완 웨이(Captain. Twan Wai, 가명)는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맞댄 버마 서부아라칸주의 라까잉족 출신 반군이다. 라까잉족은 버마 전역으로 보면 소수민족이지만, 아라칸주에선 주류 종족이고 대부분 불교도들이다. 2007년 승려들의 반군정시위 ‘샤프란혁명’ 당시 트완 웨이는 아라칸주 시위에 참여했다. 그해 8월 24일 <라까잉청년승려연합>(Rakhina Young Monk Organization, 혹은 ‘Arakanese Young Monk Association 이라고도 한다)이 기름 값 상승에 항의하는 시위를 시작하면서 샤프란혁명의 동이 텄다.
트완 웨이를 만난 건 2013년 11월 차가운 공기가 적절한 온도로 스며드는 북부 카친주의 반군(KIA) 수도 라이자(Laiza)에서다. 라이자는 중국화폐가 통용되고, 중국 유심카드를 쓰며 하루를 여는 ‘아침국수집’부터 과일가게, 작은 구멍가게까지 거의 모두 중국인과 거래해야 하는 중국과 버마의 국경도시다. 그곳에 트완 웨이가 속한 아라칸군(Arakan Army) 임시본부가 있다.
* 버마-중국 국경도시이자 카친독립군(KIA)의 수도인 라이자에 자리잡은 아라칸 군(Arakan Army) 본부. "(사진 : 이유경)"
* 아라칸 군 대원들이 여가 시간에 전통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 "(사진 : 이유경)"
아라칸군은 2009년 4월 10일 창설됐다. 트완 웨이가 이 무장반군조직에 가담한 건 그로부터 7개월 후다. 랑군에서 출발하여 만달레이를 거쳐 다시 카친주정부 통치구역 수도인 미치나를 지나 반군 수도 라이자에 도착한 게 12월 15일이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입고 온 승복부터 벗었다. 그리고 잠시 민간복을 거쳐 반군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이런 ‘신분’ 변화의 신속성은 버마사회에서 승려가 갖는 ‘경계인’의 입지를 잘 반영한다. 즉, 승려와 시민 혹은 승려와 반군 간 경계는 구멍난 국경처럼 모호하고, 그래서 양쪽을 오고가는 일은 빈번하다. 따지고 보면 트완 웨이의 운명을 승려에서 반군으로 바꿔놓은 곳도 불교사원이었다. 2009년 7월 랑군 최대사원인 쉐다곤파고다에서 그는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났다. 친구도 그도 승복을 입은 채였다. 오랜만에 조우한 두 승려는 이후 쉐다곤에서 세 번 더 만났는데 그즈음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우리 민족(라까잉족)을 위해 싸우는 비밀무장조직이 카친주에 있다. 가담하지 않겠는가?”
친구는 아라칸군의 랑군 모집책으로 파견된 말하자면 ‘승복 입은’ 에이전트였다. 랑군 최대사원은 반군 리쿠르트 장소 중 하나였고 그곳에서의 모집대상은 주로 승려들이었다.
“나를 리쿠르트한 에이전트도, 라까잉청년승려연합 의장도 지금 이곳에 있다.”
트완 웨이가 털털하게 웃으며 말했다.
* 버마 옛수도 랑군에 자리잡은 최대사원 쉐다곤 파고다. 아라칸 군 대위 트완 웨이가 반군 모집책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사진 : 이유경)"
* 샨주의 한 사원에서 승려가 신도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버마사회에서 승려들은 사회의 가디언 역할을 하며 사원은 교육기관으로 기능해왔다. "(사진 : 이유경)"
도심의 승려들, 국경의 반군들
승려와 무장반군이 적극 교감하는 이 현상은 버마의 ‘전투적 불교(Militant Buddhism)’를 이해하는 한 단초가 된다. 불교는 여느 종교보다 비폭력과 평화의 사도 이미지가 강하게 배어있는 종교지만 아시아 일부국가들에서는 ‘전투적’ 모습을 보여 왔다.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버마는 19세기말 영국령 인도로 복속되던 시점부터 그 자취가 선명했다. 그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영국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불교로서 특히 승려들의 모습은 종종 전투적이었다. 둘째, 독립이후 이내 곧 장기화된 군부독재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반동으로서의 불교 모습이다. 셋째, 2010년말이후 군부 주도로 소위 개방정책이 시작되면서 거의 폭발적 양상을 보인 이슬람포비아 현상이다. 이 현상은 인종주의가 결합된 파시즘으로 발전하며 가장 논쟁적 방식의 전투적 불교를 구현하고 있다.
이 세 가지 흐름은 시대적 변수와 정치적 함의에 따라 다르게 발현돼 왔고, 시대적 정당성도 달랐다. 그러나 그 저변을 관통하는 이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불교와 민족주의가 극단적으로 결합하고 폭력에 대해 관용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미국의 도날드 스미스(Donald Eugene Smith)는 1965년 출간한 《버마의 종교와 정치(Religion and Politics in Burma)》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불교는 민족주의 발달과정에서 극도로 중요한 변수였다. 전통적인 민족 정체성 유지에 중요했고 민족주의자들의 의제로도 불교는 적극 채택되었다. 퐁지(Pongyi, 근대적 혹은 정치적 승려들)의 역할과 1930년대 반란 그리고 외국인을 반대하는 커뮤널리즘(Communalism)의 전개과정에서도 불교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정치폭력 흡수한 불교민족주의
18세기후반으로 거슬러가 보자. 버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복속되는 과정은 이시기부터 거의 100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1784년 12월 31일, 트완 웨이 대위가 진정한 ‘조국’으로 가슴에 품고 있는 아라칸왕국(당시 ‘므야욱왕국’Kingdom of Mrauk U, 1430∼1785)이 버마의 콘바웅왕조(Konbaung Dynasty)에 복속됐다. 방글라데시 영토 일부를 포함하여 아라칸주를 355년 통치해온 므야욱의 전성기는 오늘날 <아라칸군>이 부활을 꿈꾸는 독립국가의 모습이다.
그리고 1824∼25년에 제1차 버마-앵글로 전쟁이 발발했다. 인도대륙을 식민통치해온 영국이 버마영토까지 식민치하로 복속시키려는 무력전쟁이었다. 1852년 2차 버마-앵글로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이라와디강 이남 영토가 우선 영국령 인도로 복속됐다. 이미 버마의 일부가 된 아라칸주는 1차전쟁 후 바로 영국령으로 복속됐다. 식민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일부 승려들은 만달레이를 비롯하여 아직 복속되지 않은 중북부로 대거 이동했다. 오늘날 만달레이와 중북부지역에 불교민족주의 전통이 강하고 또 저항의 메타포가 강한 건 일면 이런 전통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 만달레이 야시장 헌책 노점상에서 한 승려가 책을 읽고 있다. 만달레이는 영국식민지에 최후로 복속된 도시다. 버마의 마지막 왕 띠보우가 영국식민군대에 의해 쫓겨나면서 버마는 전역이 영국령 인도로 복속되었다. 이 마지막 왕실의 폐지는 변방의 소농민들과 연대한 승려들의 게릴라 전투를 야기했다. "(사진 : 이유경)"
버마 전역이 온전히 영국령으로 넘어간 건 1885년 3차 버마-앵글로 전쟁으로 만달레이에 남아있던 버마의 마지막왕국이 무너지면서다. 그 해 11월 29일 영국군대는 버마의 마지막 왕 띠보우 민(Thibaw Min)의 만달레이궁전으로 침입했다. 군화를 신은 채였다. 그리고 티보왕과 두명의 아내, 네딸 등 왕실 일가를 만달레이에서 약 2,600km 떨어진 인도 남서부 마하슈트라의 작은 어촌 라트나기리(Ratnagiri)로 유배 보냈다. 이들의 유배살이를 8년간 연구하고 기록한 책 《왕의망명 : 버마왕실의 몰락(King in Exile : The fall of the Royal Family of Burma)》의 저자 수다샤(Shudha Sha)는 고립된 어촌마을 라트나기리가 왕의 유배지로 선정된 건 영국 식민제국이 매우 심사숙고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이 마을은 육로로 닿기 어려웠고 우기에는 길이 끊겨 외부 세계와 단절될 만큼 고립된 지역이었다. 영국은 버마의 왕이 준신격화된 통치자임을 알고 있다. 그를 멀리멀리 보내 잊힌 존재로 만들어야 했다.”
1967년 발행된 미 메사추세츠대학 연구보고서 <전투적 불교민족주의 : 버마사례, 구엔터르위(Guenter Lewy)저> 역시 불교의 수호자였던 왕실을 식민제국이 어떻게 훼손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버마는 왕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를 상상하지 못한다. 왕실의 종말은 이 나라에 종교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식민세력은) 왕과 왕통치의 모든 흔적을 파괴했는데 이는 민족성(nationality)을 말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식민이전 승가의 최고지도자인 승왕을 임명한 것도 왕이었다. 그러나 1885년 버마의 마지막 승왕 통도우자야도(Taungdaw Sayadaw)가 사망하자 후계자를 임명할 왕도 없고, 이를 대체할 선출제도도 없었다. 승가는 새로운 승왕을 선출하긴 했지만 영국식민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왕실의 보호로 승가질서를 유지해온 불교계 입장에서 볼 때 왕정주의를 폐지한 영국은 침략적 외세일 뿐만 아니라 종교적 헤게모니를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두 가지 모두 승려들이 저항에 나설 충분한 이유가 됐다. 구엔터르위는 “영국식민 세력이 국왕을 내쫓고 도심을 장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문제는 시골변방지역이었다.”고 말한다. 시골 소작농들과 연계한 승려들의 반란이 거셌기 때문이다. 이를 완전히 제압하기위해 약 5년간 10만에 가까운 영국군과 영국령 인도군이 동원됐다. 바로 이 시기 승려들이 변방에서 게릴라전투를 벌이면서 버마의 ‘전투적 불교’는 본격적 포문을 열었다. 게릴라 대장 노릇을 하는 승려도 적지 않았다는 게 여러 문서들의 전하는 바다.
이런 불교민족주의자들에게 또 다른 식민제국 일본은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됐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서구 열강에 대항하는 아시아 ‘불교’국가의 승리로 간주된 것이다. 이는 버마의 불교민족주의자들을 자극했음은 물론 인도에까지 민족주의 감정에 불을 지폈다는 분석이다. 버마의 첫 불교단체 ‘청년불교도협회’(YMBA, 이하“불교청년회”)가 설립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후 YMBA는 1920년대 식민정부 교육정책에 반발하는 학생운동의 파업으로 대영식민저항운동이 확산되면서 종교적 색채가 약화된 총버마연합회(GCBA)라는 조직으로 변모했다.
한편, 승가의 대영식민투쟁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라까잉 승려인 우오타마(U Ottama)다. 우오타마는 라까잉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이고 버마전역에서도 독립운동가의 대부로 남아 있다. 2014년 그의 130번째 탄생일은 버마는 물론 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바자르에서도 기념됐을 만큼 그는 국경을 넘어 라까잉족 커뮤니티에서 널리 추앙 받고 있다.
* 버마 아라칸 주 시뜨웨 시내에 자리잡은 쉐자디 사원(Shwezadi Monastery). 사원 승려들이 2013년 유엔버마 인권보고관 자격으로 현장 조사를 나온 토마스 퀸타나 아르헨티나 인권변호사를 만나고 있다. 쉐자디 사원은 라까잉 승려이자 영국식민정부에 저항했던 우 오타마 승려가 기거하던 사원으로 유명하다. 간디 추종자로 알려진 우 오타마의 대영 투쟁은 식민정부에 납세 거부운동과 같은 시민불복종운동을 주로 벌여왔다. 오늘날 쉐자디 사원은 라까잉족 불교극우민족주의가 응집된 가장 상징적 구역이다. 이 사원의 승려들은 로힝야 무슬림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며 “벵갈리 불법 이민자”를 쫓아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사진 : 이유경)"
인도에서 교육받은 우오타마는 간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납세거부운동과 같은 비폭력시민불복종운동을 주도했다. 1921년 그가 인도, 일본, 프랑스 등지에서 오랜 해외생활을 마치고 버마로 돌아왔을 때 랑군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이 불붙기 시작했다. 이 학생운동에 승려들도 동참했고 오타마는 곧 정치승려로 부상했다. 그는 1924년 자신이 주도한 납세거부운동이 폭력적으로 전개되면서 두 번째 옥살이를 해야 했는데 1927년 2월 그가 석방되면서 정치승려들의 활동도 재개될 만큼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오타마는 세속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코스모폴리탄 혁명가’로 불릴만큼 경험세계와 식민저항비전이 편협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를 추앙하는 식민시절 정치승려들이나 오늘날 그의 전설을 입에 올리는 라까잉 민족주의자들 사이에는 ‘민족주의’와 ‘불교’의 이름이 편협하고 배척적으로 박혀있다. 그의 이름이 시대를 가르며 왜곡 투영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오타마와 비슷한 시기 이름을 날린 또 다른 정치승려 중에는 우위싸라(U Wisara)라는 승려도 있다. 우위싸라는 1929년 166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다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는 감옥 안에서 샤프란 승복을 입을 권리를 위해 단식투쟁을 했다. 식민제국을 향한 승려들의 저항이 그들의 종교적 정체성과 얼마나 밀착된 것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정치승려들의 한계는 뚜렷했다. 미신적 루머를 확산하여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전술도 그런 한계를 잘 보여줬다. 예를들면 이런 거다. “곧 영국이 철수할 것이며 버마왕국이 부활하면 모든 세금제도를 폐지할 것이다.” 불교민족주의자들의 반제식민저항은 ‘왕국의 부활’을 노래했다. 마치 오늘날 <아라칸군>이 과거의 찬란한 아라칸왕국의 부활을 꿈꾸듯 말이다.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버마 / 미얀마2편>에서는 1930년대 사야산(Hsaya San)반란과 당대(Contemporary)의 전투적 불교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이유경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
이유경 기자는 태국 방콕에 베이스를 두고 아시아의 분쟁과 인권문제를 집중 취재하여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프리랜서 국제분쟁탐사전문기자이다. 한국에서는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활동한 바 있으며, 2004년 이래 아프칸, 버마, 인도, 라오스, 태국 등 아시아 분쟁지역에서 집중탐사취재를 했다. 그동안 <한겨레21>, 독일 등에 기사를 게재하였다. 2014년부터 KBS 라디오 방콕 통신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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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전투적 불교 시리즈] 버마/미얀마편 2 : 반제식민저항에서 이슬람포비아 폭동까지 (이유경/신대승 201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