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편집자 주 >> 퍼슨웹은 강산에의 인터뷰를 2001년 한 차례 진행했었다. 인터뷰를 진행했던 퍼슨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음주 인터뷰를 감행한 관계로 인터뷰어와 강산에 모두 만취상태에 이르렀고 결국 녹취도 못하고 숙취만 얻었다’고 했다. 당시 인터뷰 실패기를 교훈 삼아 2003년 봄, 강산에 인터뷰에 재도전했다. 오후 6시부터 시작 된 인터뷰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다시 ‘취중 인터뷰’로 진행되었고 새벽3시가 되어서 낼 수 있었다. 때문에 분량은 방대해졌고 녹취와 정리를 진행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누구 보다 오랫동안 이번 인터뷰를 궁금해 했을 독자여러분과 강산에(강영걸) 씨에게 죄송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퍼슨웹의 인터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굳은 사명감으로 이번 강산에 인터뷰를 세상 밖으로 내보인다. 본 인터뷰를 녹취, 정리하기위해 몇 날 밤을 고생한 라임즈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2주에 걸쳐 연속 개재하기로 하였으니 맺혔던 분을 조금이라도 푸시기 바란다. |
자유롭다는 것에 대하여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4시간, 다만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시작된다'라는 말은 중요하다. 알베르 까뮈, <시지프스의 신화> 중에서 ...........................................................
자유. 그것은 막연한 개념으로 인식되기 쉬운 단어들 중 하나다. 사전이라는 그 누구들의 정의에 힘을 빌려본다면, 꿈꾸며 산다는 말을 자주 듣는 나. 이제는 내 자신을 책임져야 할 나이라는 소리도 함께 듣게 되었다. 여기서, 점점 고개를 숙여만 가던 나에게 소설적 장치 하나가 등장한다. 그로기 상태였던 나의 촉수를 건드려 ‘의식이 활동을 개시’하도록 한 복선이 하나 깔렸으니 이는 강산에와 강산에의 노래, 강산에의 이야기였다.
데뷔 때부터 강산에는 자유인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풍겼다. 반항적인 락커, 아웃사이더.. 그러나 지금 강산에가 나에게 주고 있는 자유의 느낌은 분명 다르다. 자유롭자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 나는 이러이러한 자유를 찾아가고 있는데 너는 네 안의 자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말하고 있는 느낌. 점점 궁금해졌다.
번쩍거리는 신촌거리와는 시대부터 다르게 느껴지는 허술한 대합실에는 군인 아저씨들이(군인은 다 아저씨다) 꽤 눈에 띄었고 왠지 시골 기차역과 어울릴 법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었다. 뭔가 시골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즐거웠다. 그러나 표를 끊고 기차에 올라탔을 때, 그 기분은 다소 사그라졌다. 기차 꽁무니에 매달려 머리카락 바람에라도 날리는 낭만을 기대했던 우리를 맞이하는 경의선 기차 안은 전철처럼 매끈하게 이어진 좌석이 놓여있었고 생각보다 많이, 깨끗했다. 증기라도 뿜을 줄 알았던가. 그래도 창밖에 펼쳐진 들판은 넓고 시원했다. 그만큼 하늘 또한 넓어져 있었고 어수선했던 내 머리 속도 조금은 비워진 듯 했다. 백마에 도착해 택시를 탄 우리는 백마 카페촌에서 내렸다. 예전에 와봤다고는 하지만 밤에 왔던 터라 위치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길가에 서 있던 한 남자에게 예전 화사랑이 있던 자리를 물으니 대번에 위치를 가르쳐 준다. 화사랑. 오늘의 인터뷰이에게 특별한 공간이라고 하던데 오늘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겠지.
산장처럼 듬직하고 아늑하게 자리 잡고 있는 ‘뜰’은 정답게 꾸며진 작은 정원도 가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두울 때 왔던 예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강산에를 찾았지만 없다고 한다. 함께 있을 노정연 씨(노정연 씨는 퍼슨웹의 ‘퍼슨’ 중 한 명으로 평소에 강산에와 친분이 있어 이번 인터뷰를 연결해 주었다)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 앞에 있던 ‘오르또’라는 곳으로 오라고 한다. ‘오르또’라는 곳은 ‘뜰’과는 사뭇 다른 현대적인 느낌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수제피자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고 이곳도 ‘뜰’의 주인인 김원조 씨가 운영하는 곳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강산에가 보였다.
퍼슨웹(이하‘퍼’)> 많이 환해졌단 얘기 자주 들으시죠?
조금 전에 내 후배가 안부를 물으면서 이번 앨범에 대해서 질문하더라. 이번 앨범 많이 나갔냐.. 물론 나는 앨범이 많이 나가고 적게 나가고에 대한 부분에 데뷔 당시부터 사실 나한테 그렇게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햇수를 거듭하고 앨범을 내면 낼수록 음악시장에 수요자가 점점 떨어지고.. 앨범 그 장수로 따지자면 옛날에 비해서는 턱도 없는 수준이지. 그런 데 대해서 불안함, 금전적인 것에 있어서도 사실 영향 있는 부분이긴 하니까 그러면 정신적인 타격이랄까 부담이 와야 할 텐데. 근데 이상하게 전에 없던 마음이 뭐냐면 오히려 한시름 놓은 거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게, 어, 뭐 괜찮아. 아, 이 이상 안나가도 괜찮다는 생각. 그니까 장수는 이제 나한테 있어서 별로 의미가 없는 거 같애.
퍼> 저변이 따라줬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느낌, 상황들로 다가오시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직도 내 안에는 창작에 대한 열정도 많고 나름대로 아이디어라 그럴까. 내가 음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이런 것도 해보고 싶고 저런 것도 해보고 싶고 그런 것들이 계속 일어나니까 그런 거 자체가.. 빨리 내 집 마련하고 편하게 살고 잘 먹고 그런 거였다면 돈 버는 쪽을 생각하겠지. 업소도 다니고 지금 내 상태에서 해볼 수 있는 최대한은 해보겠지. 현실이라는 부분, 경제적 부분을 무시할 순 없으니까 나 역시도 배제할 수 없는 건데, 그렇다고 내 라이프 스타일을 변화시킬 만큼 내 창작욕이 그런 것들에 지배당하지 않고 있다는 거지.
퍼> 타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한 타성이나 관습, 먹고 살아가는 문제,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아마 구속으로 또는 가슴을 누르는 걸로 많이 작용하시는 거 같은데, 혹시 그런 게 유년의 기억들하고 관련이 있습니까. 답답함이나 우울, 타성에 젖는 것을 싫어한다거나 하는 것들. 강> 아마 그게 내 무의식 속에 아마 유년의 환경, 가정환경이라는 게 경제적으로 넉넉한 환경이 아니고 내성적이고 그런 성격이었다는 게, 어릴 때 아버지도 안 계셨고, 아이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프라이드를 느끼고 그러잖아. 근데 어릴 때부터 좀 그런 환경이다 보니까 잘 표현은 못하고, 지금 내가 생각해볼 때 아마 그게 내 성격적인 영향을 주긴 줬을 거라고 생각했지만은..
퍼> 기존 인터뷰에서 안 들려주셨던 가족사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해주실 수 있으세요. 이번 새 앨범에 대해서도 그런 기사가 많이 나왔더라구요. <명태>에 대해 아버지와의 소통을 시도했다, 강영걸이라는 본명을 내세웠을 때는 뿌리를 찾고 싶었다, 그런 식으로. <라구요> 할 때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 홀어머니, 이북에서 오셨다고 그러셨죠.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그런 것에 대해서 한 줄 정도의 기사로만 접했던 것들. 그리고 또 예전에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셨다든지. 음악을 하고 싶어서 뛰쳐나왔다 그런 얘기도 있고.
강> 이제 그냥 내가 살아온 얘기하면 되겠네, 쉽게 얘기해서. 그냥 지금까지 내가 그냥 살아온 방향이나 심리상태 그런 거 얘기하면 되겠네. 담배 한 대만 피우고.. 그는 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듯 잠시 흐름을 끊고 담배부터 한 대 피우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실 나는 대뜸 시작부터 그의 개인사를 들으려한다는 게 약간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것은 능숙하게 흐름을 조절하지 못하는 초보 인터뷰어의 소심한 조심스러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능숙한 인터뷰이는 차근차근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길게 이어지는 그의 이야기는 한동안 별다른 문답 없이 주욱 흘러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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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
강> 우리 가족을 이야기하려면 일단 우리 엄마부터 얘길 해야 돼. 우리 엄마가, 쉽게 얘기하자면 우리 한국 근대사예요. 엄마가 1926년생이시다 보니까 일제시대 때 유년시절을 보냈겠죠. 그리고 해방이 되자 시집을 갔어. 근데 우리 엄마가 충청도 분이시고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는데, 뭐라 그럴까, 외할머니가 성품이 좋으신 분이어서 딸을 모질게 안 했나봐. 딸이 멍하게 자랐는데, 함경도로 시집을 갔어. 거기서 첫아이를 출산했는데 뭐 뇌염으로 죽었다나봐.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49년도, 지금의 우리 형이야. 근데 낳자마자 한 1년 됐는데 한국전쟁이 터졌잖아. 그때 아버지, 내 아버진 아니야, 내 육친의 아버진 아니야. 지금 얘기가 확 건너뛰어 버렸는데.. 강산에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는 육친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전 남편이다. 어쨌든, 그때 전쟁이 났어. 근데 그때 아버지가 쉽게 얘기하면 인텔리였나봐. 학구파였고 계몽가였다고 그러나. 어쨌든 그땐 이데올로기의 시대이니까, 이념으로 양분되어 있던 시절이어서. 내가 아마 추측하기로는 사회주의자 뭐 그런 사람이었나봐. 맡은 역할이 있었고 뭐 당장에 아이와 부인은 지켜야 되니까. 그때 전부 다 피난민들이 그 유명한 흥남부두로 갔어. 배에 실어가지고 거제도로, 그때 피난민들은 전부 다 거제도로 피난을 갔거든. 그 이후로 생사를 몰라. 그 이후로 삼팔선이 그어졌잖아. 신탁통치 되어가지고 소련군과 미군, 남한 북한 딱 그어졌잖아. 그러니까 이 엄마는 보며는 한국의 현대사를 보는 듯한, 그건 뭐 엄마뿐만 아니라 그 엄마세대가 그랬지. 태어나서 남의 나라 문화권에, 지금도 일제시대 노래를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러던 중에 나를 낳은 아버지를 만나게 되지. 이제 나의 아버지 얘긴데, 이 아버지 역시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이야. 이 사람도 함경도 사람이야. 북청 분인데, 북청 물장수 있잖아.
근데 이 분은 젊었을 때 독학해가지고 의학 공부해서 한의사였었나봐. 혼자 일본 유학도 갔다 오고 그랬나봐. 근데 이 분이 난리통에, 나도 사정을 잘 몰라, 아버지 쪽이니까, 어떻게 난리통에 자기만 오게 됐나봐. 그 이후로 끊어졌으니까. 근데 이 아버지는 연세가 좀 됐다고. 1902년생이시니까 우리 엄마랑 24살 차이지. 그렇게 나이가 차이가 많이 났지.
퍼> 그럼 첫 번째 분은 전쟁통에 돌아가셨나 보죠? 퍼> 만약 살아 계시면 북쪽에서 높은 자리에 있으실 수도 있겠네요. 강산에의 부모님은 전쟁의 시대 속에 휘말려 정든 고향을 등지고 목적지도 모르는 피난의 길을 떠나야만 했던 실향민의 역사를 사신 분들이었다. 그 분들이 미처 자식들에게 내놓지 못하고 맺힌 말들을 강산에는 귀 기울여 보고 싶었던 것 같다. ...........................................................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보라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 부두 가보지는 못했지만 ........................................................... 강> 그러고 보면 우리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생에 대해 한이 되게 많으셨겠다 싶더라고. 안 그렇겠어, 자기들이 원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누구를 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쟁이란 걸로 인해 가지고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얼마나 그랬겠어. 근데 어찌됐든 그런 속에서 내가 나왔어. 우리 아버지가 예순 두 살 때 내가 나왔더라고, 나이로 따져보니까. 이 아버지는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셨지. 근데 아버지가 그렇게 술을 좋아하셨대.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독. 그건 아마 정신적인 부분이 있겠지. 나중엔 심한 의처증, 이렇게 병적으로 됐었나봐. 옛날 얘기 엄마한테 들으면.. 아, 진짜 막 어릴 때부터 그런 얘기 듣고 있으니까, 옛날 얘기.. 우리 형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얘기하는데, 평상시엔 괜찮으시다가 술만 먹으면 이 간나새끼, 함경도 사투리 나온대. 강> 그래서 나는 두 살 때부터 부산에서 살았는데 엄마는 늘 일하러 다녔고 형도 일하러 나가고. 우리 형도 보면, 하고 싶은 공부를 못했어. 시대를 그렇게 타고 나가지고. 형이랑 나랑 열 네 살인가 열 다섯 살인가 차이 나는데 형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어. 누나는 누나대로 딸이라고 찬밥신세고. 그니까 내가 제일 귀여움을 많이 받고 자랐지, 막내라고. 한편으로는 나에게 모든 기대감이 있게 됐고. 근데 우리 형 같은 경우는 또 월남전을 가게 돼. 하하.. 우리 형을 보며는 참, 불쌍한 사람이면서도 고마운 사람이지. 우리 형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거 같애. 버팀목이 딱 있으니까. 생각해봐. 자기 생명을 담보로 해놓고 월남전에 가는 거니까. 돈 때문에 가는 거잖아. 근데 형 같은 경우는 부상을 당해서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일종의 상이용사야. 큰 장애는 아닌데 하튼 부상당하고 왔으니까. 지금은 멀쩡하지만 국가 유공자지. 덕분에 형은 애들 교육비를 혜택을 받았지. 형은 그렇게 했던 사람이고.. 당시 전쟁의 포환을 피해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거제도로 왔던 많은 피난민들은 다시 바다를 건너 부산에 정착했다고 들었다. 부산의 자갈치 시장도 당시 월남한 피난민들이 생계의 방편으로 좌판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지금과 같이 큰 장터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두 명의 남편을 떠나보내고 가진 것 없이 아이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건너가야 했던 강산에의 어머니 또한 아무런 기반 없이 출발해 힘든 삶을 지탱해야 했던 피난민으로서의 시절을 보내셨다. 다른 가족들 또한 집안의 생계를 위해 많은 어려움을 함께 겪었을 텐데 그중 강산에가 들려주는 형은 월남전이라는 고단한 세대의 징표를 지니신 분이셨고 아마도 집안의 가장과도 같은 역할을 짊어져야 했을 것이다. 강산에 스스로도 버팀목이라고 말한 것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의미에서도 아버지의 몫을 감당했다는 뜻이겠다.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삶 일정부분을 포기해야 했던 것은 누나에게도 마찬가지로 부과되었고. 강산에는 그래도 막내라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고 하지만 삶의 어려움을 짐 진 가족들을 보며 일찍부터 자기 혼자만의 세상을 꾸려나가야 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강> 하튼 엄마하고 보낸 시간이라는 게, 어릴 때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애. 그리고 엄마가 처음에 보험회사를 쭉 다니다가 언제부턴가 공장 기숙사, 사감 선생님으로 취직했어. 또 생활 같이 못하잖아. 그니까 어릴 때부터 줄곧 엄마랑 생활을 못하는 거야. 중학교 3학년 되니까 엄마가 재혼을 하셨어. 재혼도 따지고 보면 내 학비 때문이야. 우리 형이 벌었지만, 형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땐가 결혼을 해서 당장에 또 결혼살림이라는 게 있잖아. 집안 살림은 살림대로, 교육비도 들어가고. 우리 누나 같은 경우는 그림을 굉장히 잘 그려서 계속 공부하고 싶어했는데 상업고등학교 가서 돈을 벌어야 된다, 이래 가지고 인문계를 못 간 거야. 그렇게 자기 꿈을 포기해야만 했지. 남은 게 난데 나는 공부를 계속 시켜야겠고 형은 그걸 꾸려 나가기 빠듯한 상황이었고. 그러다 엄마가 재혼하신 거지. 아마 우리 형이 리드를 했겠지. 환경이 비슷한 분이랑 결혼하셨어. 국민학교 교장선생님인데 두 분을 만나게 해드렸지. 그후로 나는 엄마로부터 학비를 받았고. 그니까 결국은 어릴 때부터 엄마랑 오래 살아보지를 못했지. 내 어릴 때 기억을 보면 엄마가 회사 다닐 땐데, 회사 갔다 오면 내가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가서 기다리고.. 그때 굉장히 행복했던 거 같애. 엄마 오는 시간에 내가 정류소 앞에서 기다리고 엄마 오고 이런 기억. 정류소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에는 아련한 끝맺음을 남겼던 것 같다. 때때로 어린 시절의 한 토막은 세세한 정황은 떠오르지 않더라도 따뜻함만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퍼> 어떤 결핍, 엄마든 아빠든 그런 품에 대한 어떤 그리움, 이런 것들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강산에는 반항하는 사춘기를 보낸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강산에의 세 번째 앨범 제목이 <나는 사춘기>인 것이 생각난다. 뒤늦은 사춘기를 그제서야 보냈던 것일까. 학교 · 교회 · 집 퍼> 어디서 읽어보니까 학교, 교회, 집밖에 몰랐다고 그러더라구요. 지금 보니까 정말 그러셨을 것 같아요. 이제 나는 어릴 때 내성적일 수밖에 없는 게 자기 안에서밖에 살 수 없었던 거 아냐. 꿈이나 자기 안의 소망이나 희망이나.. 왜냐면 엄마를 늘 보고 살아야 되는데 늘 엄마는 직장 갔다 오고.. 그리고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우리 집안이 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나는 자연스럽게 교회를 다녔었지. 그리고 그게 내 놀이터였어. 친구들 사귀는 장소. 그게 내 안에서 일종의 학교 아닌 또 다른 학교 같은 그런 곳이었지.
그리고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그나마 제일 많았었던 거 같애. 동네고 하니까 고추친구들이랑 같이 다니고 놀고. 노래자랑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그런 걸로 나를 표현을 하는 거지. 인정받고 그러니까.. 나를 유일하게 표현하는 곳이었지. 근데 학교 가면 뭐가 프레셔됐는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때는 그게 부담으로 왔는지 잘 몰랐는데.. 학교를 가게 됐는데 내가 아마 중학교 때까지 공부를 잘했던 거 같아. 그리고 특히 중학교 때까지 내가 회장, 반장, 부반장, 이런 거 했나봐. 했어. 하하. 어릴 때 놀 때도 보면 친구들 말이 내가 그랬대요. 보면 애들 사이에서도 움직이는 애가 있잖아. 내가 그런 식으로 했나봐. 그런 게 있다 보니까 국민학교 때 내가 꼭 반장 하고 부반장 하고 했었어. 공부도 잘하고 반장 부반장이었던 강산에라. 사실 의외인 부분일 수 있는데 본인도 쑥스러운지 말미를 ‘했나봐’ 라고 붙이며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근데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창피한 기억인데. 학교 다닐 때 보면 그 호구조사, 가정환경.. 그리고 그때 육성회비라 그랬는데, 육성회비가 면제도 있고 150원 있고 600원이면 비싼 등급이야. 왠지 그 600원 내는 애들이 부럽고 막 그랬을 때인 거야. 회장은 뭔가 많이 내야 될 거 같은데, 그때 일본말인데 뒷돈, 그때 와이료라 그랬거든? 엄마가 찾아가고 그런 거. 근데 그나마 그래도 내가 앞에서 이렇게 반장도 하고 그럴 수 있었던 건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내 끼를 발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어. 근데 그것도 중학교 고등학교 갈수록 바뀐 게 또 전혀 모르는 아이들하고 섞이잖아. 늘 동네에서 놀던 아이들이 아닌 애들이 섞이는 그런 환경 속에서, 또 학교 제도적인 거나 이런 게 점점 내 말문을 막더라고. 완전히 내성적이 되어 가지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얼마 전에 홈커밍데이라고 20년만에 갔거든. 물론 인제 연예인이니까 (웃음) 관심의 대상은 되는데. 담임선생님도 놀래니까. 그렇게 조용하던 아이가, 학교에 있는 줄도 없는 줄도 모르던 아이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하하. 퍼> 교회는 경제적인 거나 이런 거 따지지 않는데. 학교에서는 남들이 보면 막 뒷돈 갖다 주고, 엄마들 자주 학교 와야 되고.. 퍼> 교회라는 곳이 자기를 표현하고 끼를 드러내고 자기를 긍정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인 거 같은데.. 그러면 교회는 언제 안 다니게 됐습니까. 퍼> 아버지는 사람마다 다양한 의미로 다가올 텐데 그러면 아버지를 떠올리실 때 그리움의 대상으로만 남아있습니까. 혹시 아버지 하면 어떤 대상으로 떠오르십니까. 퍼> <강영걸>이라는 자신의 본명을 내건 앨범을 내셨잖아요. 어느 기사에서 본 게 “아버지가 내게 물려준 건 몸뚱아리 외에 유일하게 이름이란 게 있다.” 결국 그 이름을 되찾는다고 하는 것이 아버지를 추억하는 건데, 그러면 그때의 그 아버지가 지금 어떤 의미인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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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제가 처음에 뭔가 구속받지 않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구가 느껴진다고 했었는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얘기하자면 가난에 대한 것 또는 충족되지 못한 사랑으로 인해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건지. 근데 거기서 억압이라든지 속박 이런 건 느껴지지 않거든요. 쉽게 얘기해서 내가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가면서 굳이 서울로 환경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그 테두리가 싫었거든. 그 부산에 형 밑에서. 그니깐 형이 싫었다기보다는 그 환경이. 뭐 어릴 때부터 집에 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엄마가 있고 야단을 맞더라도 그런 아버지가 있고 그게 아니었고. 형이 좀 무섭지. 무서운데다가 또 한참 사춘기고 이럴 땐데.
내가 굳이 한의대를 선택한 이유가 부산에 부산대학교, 동아대학교 있었지만 그때 거기에 한의대가 없었어. (웃음) 근데 그게 아주 절묘했던 게, 어느 날 인제 내가 입시생 땐데, 그때 교회 어른들에게 내가 공부 잘하는 아이의 이미지가 있으니까 교회 권사님 한 분이 우리 집에 와 가지고 영걸이를 어디로 보낼 건가. 그 분이 미래에 전망이 좋은, 뭐 이런 기사를 신문에서 오려왔는데 한의과에 대해서 나와 있었어. 형이랑 같이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그때 나 혼자 생각한 거야. 퍼>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지 않습니까. 저는 그런 걸 꼭 믿는 건 아니지만 어느 순간 저도 그랬거든요. 아버지를 싫어하는데도 어느 순간 어떤 모습이 닮아있더라. 저는 또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한의대 하셨다길래 그런 계기가 있었나 했죠. 한의대를 선택한 것이 그때 부산을 벗어나기 위해 구멍을 엿보다가 빠져 나온 거라고 한다. 가족 안에서의 흐름에 조용히 따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드러내지 않은 속내에는 일탈의 순간을 엿보는 눈치작전이 뜨겁게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그때 자신의 선택이 현재의 자신으로까지 이어지리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퍼> 그때 그 대학에 다니다가 후에 자퇴를 하셨지요? 그때 음악이라는 길을 자기 길로 하고자 하신 건가요? 한의대라는 길이 아닌. 재미있게도 한의대를 선택했을 때에도 비장한 각오 같은 건 없었던 것처럼 음악을 하게 된 것 또한 그리 거창하게 시작하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저 어떤 환경에 놓여지면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고 해야 할까. 다니던 학교(그것도 소위 명문대라고들 하는)도 때려치우고 인생을 걸어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인간극장식으로 말하기에는 좀 밍밍한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식의. 근데 사실 그게 더 무서운 것이다. 그저 그렇게 졸졸 흘러가는 듯 보이는 시냇물도 결국은 바다로 향하고야 마는 필연의 매커니즘이 몇 가지 키워드를 찍어가며 흥미롭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어느 날 대학을 왔죠. 오긴 왔지만 보니까 이 현실을 지탱해야 되잖아. 대학등록금은 아버지한테 받았지. 근데 또 하숙이나 자취를 해야 되잖아. 2인 기준 하숙비가 15만원 할 때거든? 자취라는 건 나한테는 엄두도 안 나고. 근데 그때 교회 감리교 재단에서 만든 기숙사가 있어요. 지금도 있을지 모르겠는데 ‘민우학사’라고 북아현동에 있어요. 부산에서 다니던 교회가 감리교 재단이었는데 지방 감리교재단의 목사님들이 추천을 해 가지고, 내가 거길 들어갔지. 거기가 그때 오만 칠천 원이었거든? 그 돈에 먹여주고 재워주고 도시락까지 싸주고 딱이었지. 그리고 용돈이라고는 그때 기숙사비 하고 한 오천 원 남았나. 한 달 회수권 하면 땡이었지. 대학교 다닐 때도 스트레스 똑같이 받더라고. 어릴 때는 소풍가방 내지는 회비 이런 수준에서의 경제적 고민들이었지만 대학교 오니까 또 다른 게 뭐냐며는 하다못해 레포트 용지도 다 돈이야. 진짜 돈이야. 모든 게 돈이고, 그담에 친구들. 그때만 해도 난 술 담배 안 했거든. 그때 내 사고가 술 담배 하면 나쁜 사람인줄 알았어. (웃음) 애들 다 막 고삐 풀렸잖아. 특히 애들 보니까 공부만 했던 애들 같애. 어디서 담배 하나씩 꺼내 가지고 담배 피우러 가고 그렇게 친해져 가지고 방과후에 다방 같은 데 들어가고. 친하곤 싶은데 다 돈이잖아. 그러니까 자꾸 그런 거 스트레스 받더라고. 만나고 싶고 놀고는 싶은데. 점심 먹으러 가자, 해서 다들 나가고. 애들 대부분 도시락 안 싸오더라고. (웃음)
퍼> 그러면 어떤 기사 보면 음악을 하기 위해서 자퇴했다, 그건 완전히 뻥이네요. 퍼> 어떤 기사에서는 음악을 하고 싶어서 자퇴했고, 돈이 없어서란 데도 있고.. 학비가 없고 그 정도로 어려웠구나, 그렇게 생각했죠. 퍼> 그러면 자퇴하기 전에 음악과도 연결이 있었던 건가요.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서 겪는 문화적 충격은 꽤 컸으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라면 워낙 혼란스러웠던 시대였고. 익숙한 테두리를 벗어나 처음 맛보는 세상은 그리 유쾌하지 않은 소풍이었을 것이다. 백마 화사랑 강> 그런 식으로 있다가 거기서 우연히 알게 된 재수생이 있어. 그림 그리는 재수생이 있었는데 걔는 제주도 아이야. 이 아이가 나랑 좀 친했거든. 정서가 맞는 거야. 정치적인 이런 건 정서에 안 맞고. 이 아이는 맨날 시 쓰고 그림 그리고 또 통기타로 노래하고 이러니까. 이 아이랑 노는 게 재밌어. 근데 이 아이가 어느 날 기숙사를 나갔어. 자기 작업실을 시골에 구해 나간다고. 난 혼자 학교는 안가고 점점 계속 쌓이는데 학교 앞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네. 중간고사를 보고 나서 얘를 학교에서 딱 봤는데 미술재료를 구하려고 왔대. 자기가 지금 경기도 백마라는 데, 지금 일산인, 거기서 뭐 방이 싸니까 작업실을 얻어놓고 있다고. 그래서 연락처 주고받고. 난 학교를 안 가게 되고 보니 할 일이 없잖아. 어느 날 있다가 갑자기 그 아이 생각이 나는 거야. 그 애를 한번 찾아가 봐야겠다. 갔지. 얘를 만났지. 근데 얘가 나를 데려간 곳이 아까 얘기한 옛날 백마 화사랑. 지금은 없어졌어. 그때 백마엔 아무 것도 없었어. 기차를 타고.. 아까 기차 타고 왔다 그랬지? <예럴랄라>가 거기서 나온 거야. 어떤 그 정서들이. 진짜 숨이 확 트이잖아. 특히 여름에 벌판이 쫘악 열려 있는데 화물칸 문 열어놓고.. 그 완행열차 같이 생긴.. 기분 진짜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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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럴랄라> 예럴랄라 햇살이 부서져 예럴랄라 하늘이 높으다 ........................................................... 백마역에 딱 내렸는데 백마강 이런 생각나고. (웃음) 진짜 썰렁하게 간이역이고 아무 것도 없고. 철길 따라 주욱 와보니까 조그만 데가 있어. 그때 또 쇼크 받은 게 보니까 목재 테이블에 전원적인 분위기, 바닥에 촛농도 막 이렇게 쌓여있고 천장은 지푸라기에.. 내가 처음 보는 풍경인 거야. 지금은 돈을 들여서 인공적으로라도 전원적인 거를 꾸미잖아. 근데 그곳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세월이 흘러서 이래 돼 가지고 자연스럽게 목가적인 그 분위기가 딱 연출되어 있으니까.. 안에 들어가니까 뭔가 편안한 거야. 퍼> 가고 싶었던 대학이네요. 하하. 옛 화사랑을 떠올리는 그의 표정이 평화로워 보였다.
퍼> 그럼 기숙사 나오고 학교 그만두고 이 카페 와서 친구 작업실에 가 있고 그러면서 음악을 하게 된 거예요? 근데 어느 날 친구 작업실에서 자고 있는데 카페 주인, 이 형이 나를 찾아 왔어. “산에야.” 여기서 잠깐 강산에라는 이름이 탄생하게 된 일화가 소개된다. 강> 아, 근데 그때도 내가 산에란 이름을 쓰고 있었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 이 그림 그리는 친구가 그냥 이야기를 해도 될걸 항상 학원에 학생들 공부 가르치러 나갈 때 꼭 머리맡에 편지를 놔두고 가요. 시 쓰고 이런 걸 좋아하니까. 그런데 어느 날 편지를 딱 뜯어보니까 사랑하는 친구 강산에 군에게, 딱 이렇게 썼더라고. 분명히 나한테 쓴 건데. 어우, 좋더라구. 하하. 알았다, 이게 인제 내 이름이다. 그래서 내가 그 강산에란 이름을 가졌거든. 강산에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었을까 궁금했는데 그것도 화사랑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강산애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가끔 있는데 강산‘에’라서 더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래서 “산에야, 카페로 누가 찾아왔다.” 처음에 난 우리 집에서 온 줄 알고 어, 누가 찾아왔느냐고. 뭐 가족들은 아닌 거 같고 가보니까 전에 한번 놀았던 젊은이들이 나를 기억하고 찾았던 거야. 같이 놀았지. 그 당시 놀 수 있었던 도구가 노래, 같이 노래하는 거. 통기타가 있으니까. 수준이라는 게 뭐 책 펴놓고 코드 치면서 노래하고 이런 식이었는데. 점점 사람들이 나를 두고 그 노래하는 사람 어디 갔냐고, 노래하던 가수 어디 갔냐고, (웃음) 이런 식으로 되어버린 거야. 그러니까 이 형이 점점 나를 데리러 오는 횟수가 많아지는 거야. 맨날 “산에야, 누가 찾아왔다.” 또 가고. 그러니까 매일 출근하게 되더라고. 그 가게랑 친구 작업실이랑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기 때문에 철길 따라서. 맨날 오토바이 타고 가야 되는 거리인데도 매일 갔지. 이 형이랑 인제 같이 놀고 얻어먹고 뭐 그러던 차인데 그 주인 누나가 나보고 “산에야, 너 지금 학교는 어떻게 돼있냐.” 그때는 내가 일부러 안 나가고 있었지만은, 휴학중입니다. “아, 그러면 우리 집 좀 도와주지 않을래.” 나는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지. (웃음) 예, 해 가지고. 식구처럼. 내가 이 형이랑 이렇게 오랫동안 지낼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내가 아르바이트 개념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먹여주고 재워주고, 내가 서울 올라간다 그러면 용돈 주고 그런 개념이었거든. 그렇게 좋아했었어. 나도 좋았고. 근데 어느 날 보니 난 인제 거기 노래하는 사람으로 변해 있는 거야. 오면 내가 일종의 분위기 담당하는 거지. 오늘은 손님들 오면 서빙도 했다가 내가 몸이 근질근질하면 노래하고 판도 틀고. “아, 아저씨 노래해주세요.” 그게 점점 노하우가 생겨 가지고 어느 날 보니까 내가 화사랑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되어있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끔 신촌에 나가잖아? 나가면 그때 이대 학생들이 많이 왔거든? 연대생들도 많이 왔고. 신촌이 가까우니까. 이대생들이 알아볼 정도였으니까. “아, 아저씨,” 이러고. 그때도 인기 있었어, (웃음) 아마추어였는데도.
강> 그 생활이 나는 너무 좋지. 학교는 뭐 이미. 근데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지 싶더라고.. 이제 여길 통해서 연극하는 사람, 그림 하는 사람, 인생의 선배들을 많이 만나게 됐는데. 나한테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들은 “공부를 계속해라. 임마, 그래도 공부해라.” 어떤 사람은, “니 하고 싶은 거 해.” (웃음) 그렇게 고민하던 중에 여름방학이라고 집엘 내려갔어. 내려가야 되잖아. 휴학했다는 걸 알리면 안되니까. 그때는 금의환향인 거지. (웃음) 근데 집에 있는 그 시간이 난 미치겠는거야. 그래서 집을 나와버렸어. 무작정 나와버린 거야. 인제 무전여행을 하게 됐지. 돈이 없으니까. 그때 처음 가출이란 걸 하고 결국 내가 집에 돌아온 게 인제 한 달 반 정도 됐더라구. 그때의 강산에는 이미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환경 속에 놓여 부대끼게 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다르게 뜨게 된 시기였을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이제 생각해보는데 내가 잠시 냉정을 잃었단 생각이 들더라고. 현실에서 지금 내가 직시해야 할 부분, 어머님에 대한 생각을. 그래 갖고 시간을 좀 보내고 “복학하겠습니다.” 다시 가면 공부를 해야 되겠다,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올라갔지. 복학을 했어. 열심히 다녔어. 중간고사를 또 쳤지. 근데 인제는 학교생활이 재미가 없더라고. 시험을 딱 쳐놓고 답답하니까 가는 곳은 화사랑. 여기 오니까 또 가기 싫지. 고민을 또 하다가 하다가 어느 날 마음먹었어. 아, 나 학교 그만 다녀야겠다. (웃음) 근데 처음엔 학교 그만 두는 거 자체가 좀 겁이 나더라고. 혹시 내가 또 나중에 맘이 변할지 모르니까. 휴학계를 내자. 내가 언제든 복학할 수 있으니까. 휴학계 내놓고 아르바이트를 해보자. 집에는 얘기 안하고 화사랑 와서 본격적으로 시작했지. 근데 이게 뭐 너무 시간가는 줄 모르는 거야. 재밌는 거지. 이게 내 체질에 딱 맞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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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내 인생에 대해서 고민을 또 한 거지. 뭘 해야 될까. 학교는 취미가 없는데 그렇다고 기술 배운 것도 없고. 남들이 다 잘한다, 잘한다 하고 관심을 가져주고 그러니까 노래 한번 해봐, 해볼까, 이런 식이었지. 근데 나를 검증 받을 수 있는 데가 없잖아. 이 우물 안에서는 알아주는데. 그러니까 선배들이 아마추어 콘테스트가 있다는 거야. ‘쉘부르’라고 이종환 씨가 운영했던 거기서. 그래서 난 거기 문을 두드렸지. 합격을 했지, 또. (웃음) 난 되게 좋아했지. 그렇게 되면 가수가 되는 건 줄 알았거든. 근데 그건 가수가 되는 게 아니라 영업의 한 형태였지. 물론 재능 있는 가수들, 최성수나 그런 옛날 통기타 가수들이 그 쪽에서 컸던 배경이 있었으니까 가수가 되는 줄 알았는데. 뭐 워낙 자리가 빈틈이 없어 가지고 내가 설 자리도 없고. 서울 나왔으면 일단 먹고 사는 건 해결해야 되는데. 그래서 오디션을 보고 한 이삼 개월 간 업소에서 일을 했어. 왜냐면 내가 화사랑을 나와야 되니까. 화사랑은 나의 둥지였던 건데 내가 뭘 하기 위해서는 이곳을 벗어나야 되는 거야.
근데 이게, 그때는 알레르기성 비염이라는 병으로 시작을 했는데, 내가 업소를 못하게 되더라구. 감기가 계속 진행돼 가지고 콧물이 계속 흐르고 노래하다보면 막 재채기하고. 그니까 미안해서 도저히 노래를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내가 쉬겠다고 했는데 그게 쉬는 게 너무 오래 가더라고. 미안해서 못 가게 되고. 병원을 가보니 나보고 알레르기성 비염이래. 그럼 이런 건 어떻게 낫게 하느냐고. 물리 치료를 해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그쪽은 인제 학문적으로 하는 거지. 좀 지혜롭게 나한테 얘길 해줬으면 내가 그렇게 쇼크를 안 받았을텐데. (웃음) 난 아, 그래요? 그런 병이에요? 물리치료 보니까 장난이 아니야. 그럼 이런 건 수술로 안돼요, 하니까 수술은 되는데 완치는 안 된다고 그러는 거야. 난 또 큰 병인 줄 알았지. 아, 난 하나님이 노래하라는 게 아닌가보다. 그때 내 마음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기타를 뿌개버리고. 하하하. 세상에, 알레르기성 비염 때문에 노래를 못 하게 되었다고 비관하며 기타까지 부수다니. 이 엉뚱한 일화에 우리는 모두 한바탕 웃었다. 그래서 노래 그만뒀잖아. 그만 두니까 뭐 할 게 없어지잖아. 근데 자존심은 있고. 내가 여기서 성공하고 화사랑에 돌아간다고 했는데.. 가족들 같았으니까. 여기서 내가 정신적으로 고아가 되어버린 거야. 그때부터 뭘 해야 될지 난감한 거야. 그때 인제 막말로 노숙자 같은 환경에 있었지. 짧았지만. 한 한 달 정도. 갈 데 아무 데도 없으니까. 그냥 아무 데서나 대충대충 개기고. 계속 노숙자 생활을 하다가 내가 다시 백마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게, 어느 날 너무너무 아픈 거야. 그때 뭐 감기쯤이었는데 걸음을 못 걸을 정도로 너무 아팠어. 아플 때 제일 생각나는 게 집이더라구. 엄마고 가족인데 차마 집에는 못 가고. 결국 아프니까 자존심이고 뭐고 간에 백마로 들어가게 되더라고. 근데 아파도 낮에 가면 사람들이 알아본다고 밤에 몰래 밤차 타고 와 가지고 몰래 철길 따라 오고 있었어. 철길에서 친구를 만났던 이야기를 하면서 강산에는 인생이라는 게 스토리가 정해져 있는 건지 몰라도, 라는 말을 덧붙이며 신기해했다. 강산에의 인생역전 스토리보드에는 각자 나름대로 극적인 역할을 해내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직 반도 다 펼쳐지지 않은 이 인터뷰에는 소설적인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다가 인제 내가 생각을 하는 게, 여기 화사랑에 다시 들어가면 내 일을 못하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뭔가 나만의 독립적인 공간이 있어야 내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 내가 앞으로 배우가 되겠다 했는데 여기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아, 그러면 내 공간을 마련할 돈이 필요하구나. 부산으로 내려갔어. 돈을 벌어야겠다. 그래서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내가 이렇게 된 걸 알았지. 어떻게 보면 참 집에 고맙지. 나는 인제 거의 무언의 항변이었는데 우리 집안 사람들이 내가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뒀었지. 고향에 내려가서 음악 DJ, 다방 DJ를 해요. 한 6개월 기간을 형님 집에 머물면서 돈 꼬박꼬박 열심히 모았어. 생전 처음으로. 엄마한테 얘기해서 어느 정도 보조금을 받아가지고 독립 공간을 여기 백마에다 마련했지. 싸니까. 자, 근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때 품바하는 형, 그 형한테 계속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 내가 응시는 많이 해봤지. 뭐 합격을 해요. 근데 얘들이 재능이 있어서 합격시키는 게 아니라 학원생 모집하는 그런 거였지. 난 그게 아닌데. 그때 마침 품바 형이 그때 당시 ‘돈내지 맙시다’ 라는 공연을 하고 있었는데 그게 대단히 히트가 됐어. 지금 인사동 공간사랑에서. 근데 뭐 벌이가 있어야지. 그러고 있는데 운명이라는 게 웃기는 게, 나는 배우가 되겠다고 거길 간 건데 자꾸 음악하고 연관이 되는 거야. 나는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했었잖아. 비염 때문에. 뭐 나중엔 원래 다 많이들 있는 거고 뭐 알았는데. 지금은 만성이 되어 가지고 별로 느끼지도 못하고 생활하는 데 지장도 없는데. 그땐 굉장히 쇼크였지. 콧물이 나고 그래서 당장 노래를 할 수 없었으니까. 비염 때문에 가수 강산에 못 만날 뻔했다. 하여튼 그랬는데 그때 품바 기획 중 하나가 전국 투어였어. 근데 이 공연을 야외무대에서 하기로 했어. 실내에서 하던 걸 야외에서 해야 하니까 조명이나 음악이 문제인데 조명은 조명 파트가 하겠고 이 음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된 거야. 거기 음향이 나름대로 주제곡도 있어. 막이 전환될 때 음악도 있고. 근데 그때 그 사람들이 고민하더니 나를 부르더라구. 내가 노래 좀 하는 거 아니까. “산에 너 일렉트릭 기타 칠 줄 아니,” 난 “쳐본 적은 없는데 기타가 통기타나 일렉트릭 기타나 똑같은 거 아닌가, 치겠죠 뭐,” 그랬거든. “그러면 네가 이번에 이것 좀 맡아줘야겠다.” 막 전환될 때 효과 넣는 거 있잖아. 또 주제곡을 부르게 하더라구. 노가다는 노가다대로 하면서 음향효과맨이 되어 가지고 자꾸 그런 음악 쪽으로 맡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우연한 자린데 그때 그 선배 중 한 분이 후배들 앉혀놓고 니네들 왜 배우가 되겠냐, 물어보는데 뭐 이렇고 저렇고.. 조언을 해주는데. “배우가 되는 게 쉬운 게 아니다. 뭐 무슨 일이든 다 어렵지만은 뭔가 하길 위해서는 최소한 10년을 열과 성의를 다해 투자해야 된다.” 나야 이미 각오가 되어 있었지. 배우 이외의 길은 나한테 필요가 없었지, 그땐. 근데 날 보고 자기가 보기에는 내가 그 동안 쌓아놓은 것도 있고 현실적으로 봤을 때 내가 앞으로 10년을 배우로 투자하느니 음악을 하래. 그때 함께 했던 이들 중에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가수 서우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전에 화사랑에서 노래했던 그 분 아니세요?” 아, 콧소리 나고 그래도 별 상관 안 하는구나. 할 수 있구나. 그때 자신감을 가지더라구. 다시 내가 음악을 해야 되겠다. 마음을 먹게 되는 계기가 오고 그러면서 인제 음악에 대한 어렴풋한, 막연하지만 이제 결심이라고 그럴까, 그런 게 생겼어. 좋다, 음악이다. 근데 당장 나의 생활이라는 건 아무 것도 없잖아. 근데 업소 같은 데 나가고 그런 게 싫더라고. 옛날에 해봤으니까. 뭘 해야 될까. 음악에 대한 생각만 있고. 그때 내가 백수였을 때. 꿈만 가지고 있고. 그 꿈을 위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도 없지만 업소는 싫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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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그때 내가 내 처를 알게 되는데 그때가 1987년이거든. 그땐 내 처와 친구관계였는데 “일본에 한번 놀러 가지 않겠니.”그랬지. 나야 좋지, 다른 세계를 가자는데. 난 그때 뭐 가진 게 없으니까 겁이 없었거든. 내가 늘 자신만만했을 때였지. 구경 시켜준다니까 그래 가자, 가는데 그게 진짜 내 인생에 있어서 큰 전환인 게, 가치관이 확 완전히 변하게 되더라고. 내가 결정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계기가 내가 처했던 환경을 바꾸어 가면서. 물론 내가 원해서 바꾼 건 아니야, 어느 날 그런 환경이 와 가지고 가게 된 건데.. 사실 그 환경이라는 게 내가 사는 환경이거든. 거기서 사람들이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부분들인데, 사람이 그 환경이 바뀌는 것에 따라서 가치관이 그렇게 바뀔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강산에는 줄곧 덧붙이기를, 자신이 원해서 환경을 바꾸려고 했다기보다는 그러한 환경이 자신에게 “왔다”고 표현했다. 또한 그로 인해서 많은 것이 바뀌었고 결국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했다.
퍼> 거기서 주로 뭘 보셨나요. 처음에는 얘가 놀러오라고 해서 같이 놀러간 거였어. 비자가 보름 비자니까 이것저것 구경하고 왔지. 근데 여기가 재밌는 거지.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얘가 일본에 있다가 나랑 같이 있고 싶으니까 또 부르는 거야. 난 또 갔지. 그러다 얘가 생각할 때는 이렇게 왔다 갔다 할 바에야 한 일년 정도라도 있어보면 어떨까 했나봐. 그러고 보면 내 와이프에게 참 감사한 부분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딱 데려가 가지고 발전의 많은 계기를 마련해줬지. 내가 배우기도 정말 많이 배웠으니까. 지금도 느끼고 있고. 강산에의 아내 다카하시 미에꼬. 후에 더 언급되겠지만 이 분을 빼놓고 강산에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작년 이상은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의 한 코너에 게스트로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초대자인 찐빵 안정혜 씨는 미에꼬를 이렇게 소개했다. (안정혜 씨는 <강영걸> 앨범 재킷을 디자인한 강산에의 친구이다.) 가수 강산에 씨의 하우스 매니저
하튼 그러고 있는데 감성이 좀 예민했던 건지 내가 잘 배우더라구. 흔히 발전이라는 부분 있잖아. 최근에 발전이라는 부분을 생각해보는데 내가 거기서 참 발전을 많이 했더라구, 지금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내가 만약 화를 못 참아서 욱하고 지나가다 쓰레기통 찬다거나 부순다거나 그런 게 없어졌어. 그 것만 해도 발전인 거지. 나이의 문제가 아니잖아. 나이 들어도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이 많잖아.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의식의 확장이라면 확장이고 발전이라면 발전이고.. 하여튼 의식이나 가치관이 다른 환경 속에서 내가 살아온 문화와 많이 비교도 하면서 서로 갭도 많이 느꼈지. 그렇게 거기 있으면서 많이 바뀌더라고. 그리고 음악에 대한 직접적인 것도 많이 바뀐 게 그전에 한국에 있을 때는 아, 내가 무엇을 해야 되지, 이것도 해보고 또 안되면 저것도 해보고 그래서 음악인가, 아, 그래 음악이다. 막연하게 구체적인 방법도 모르지만 가수가 돼야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던 아이가. 여기 와보니까 음악을 할 수 있는 채널이 너무 다양한 거야. 가수라는 직업을 갖지 않고도 음악을 즐기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은 거야. 직장생활 하면서도 밴드 만들어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아마추어 밴드도 너무 많은 거야. 다 기타들고 다니고. 지금 우리도 홍대 앞에 가보면 기타 메고 다니는 아이들 많이 볼 수 있지. 옛날에는 한국 안 그랬거든. 그때 내가 일본 가서 살던 곳이 그런 거야. 일단 패션부터가 막 가죽잠바에 너무 다양하고 또 그런 걸 사람들이 그냥 바라보고 그러려니 하고. 한국에서는 그냥 난리가 나지. 모든 사람의 시선의 대상이 될 사람들인데. 그런 것들이 나한테 얼마나 쇼크겠냐. 나중에 한국에 돌아오니까 스톱이 되어 있더라구. 마치 내가 화사랑에서 학교를 갔을 때처럼. 심리적으로 내가 꼭 일본에서 20여 년을 살다온 것처럼. 1년 살았는데. 딱 돌아보니까 내가 변해 있더라구. 늘 놀던 친구들이랑도 달라졌고. 사고에 유연성이 생겼다고 할까.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 어쨌든 내가 여러 가지로 다각도로 생각을 하게 되었더라구. 예를 들어서 음악을 직업적으로 갖지 않고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많더란 거. 직업이란 프레셔를 안 갖고. 그러니까 내가 꼭 가수가 되어야겠다는 부담을 비어버린 거야. 인제 일본이라는 곳에서 이 아이가 얘기하기를 내가 거기 오래 있으려면 비자 문제가 있으니까 유학비자를 받아가지고 머물라는 거야. 그리고 학비를 마련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를 했어. 요리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했지. 그리고 주말마다 우리는 공연을 보러갔어. 나는 인생에 대한 계획을 못하는 사람이야. 근데 이 친구가 그런 걸 잘해요. 뭘 해야겠다, 뭘 보여줘야겠다, 맨날 데려가는 거지. 내가 가자마자 U2 공연을 봤었어.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막 뛰어. U2, 폴 매카트니, 음악하는 사람들로선 우와 하는 동경의 대상인 사람들의 라이브를 직접 보니까. 팔자도 완전히 변한 거 아니냐. 동시대에 살고는 있었지만 그 현장에 가서 공감하고 있다는 게 참, 그런 게 나에게는 굉장한 자유를 주더라구. 그때 음악을 생각하고 접하는 게 조금 더 전문적이라 그럴까, 좀 더 집중하게 되었지. 그래서 일본에서 만들었던 곡들이 <할아버지와 수박>, <예럴랄라>, <라구요>... 곡을 만들 때는 아무래도 가사 생각하게 되었는데 <라구요> 같은 건 어느 날 내 앞길만 막 생각하다가 갑자기 한번씩 그럴 때가 있잖아, 문득 내가 너무 우리 엄마 생각을 안 하고 살았구나. 약간의 향수병도 있고. 어머니 생각 하니까 막 엄마에게 참 감사하단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죄책감도 있고. 이번에 들어가면 엄마한테 선물을 해드리고 싶은데,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 말이지. 나 딴에는 아, 곡을 만들어서 테잎으로 녹음해가지고 엄마한테 드려야겠다. 엄마를 위한 곡을 만들어야지 딱 마음을 먹고 썼는데 엄마 생각하다보니까 뭐 엄마 역사가 생각이 나고 그러다가 이 가사가 나온 거야. <라구요> 곡이 나오게 된 거지.
그리고 아까 가수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고 거기서 내가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랬잖아. 독특한 문화 속에 있다보니까 여러 채널들이 많았어. 거기서 우연히 TV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어떤 블루스 할아버지였어. 우리로 치면 인간문화재 같은 사람이었는데. 난 거기 가서 살아야 된다, 저 할아버지한테 가서 하모니카 배우고 싶고 기타 배우고 싶고 그냥 저기서 내 인생을 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 옆에 여자친구가 있는데도 얘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내 꿈을 얘기했어. 그 정도로 내가 가수에 대한 미련 자체가 없어져 버리고 더 넓은 세상 보고 싶고 그랬었지.
근데 그러던 차에 한국에서 전화가 왔어. 그 동안 알고 지냈던 사람들 중 한 사람인데 내가 노래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던 선배였어. 그 사람이 레코드사랑 인연이 돼 가지고 주변에 신인을 찾던 중이었나봐. 스카우터가 돼 있었던 거야. 이 형이 딱 내가 생각나서 일본까지 전화를 걸어가지고 너 앨범 내지 않겠냐. 난 이미 꿈이 딴 데 가 있었는데. 아뇨, 전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뭐 한국 나오면 한번 보자. 그리고 91년도에 한국 왔어. 이 형이 만나자 해서 만나가지고, 이런 가수 될 길이 있는데 해보지 않을래. 너 혹시 만든 곡 없냐. 있긴 있는데. 한번 해보래. 그냥 해봤지. 그니까 데모 테잎 만들래. 이 형이 잔말 말고 만들자고. 만들고 된 게 결국 내가 오늘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거지. 옛날에 내가 정말 무언가 되고 싶었을 때는 길이 안 보이다가 거기에 대한 미련이 없어지고 나니까 그 길이 딱 열리고 보이는데 그걸 가지고 내가 고민을 하더라구.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고민을 한참 했었어. 이 형은 계속 하자하자. 고민하고 의논도 많이 하고. 결정적으로 내가 선택을 하게 된 게, 난 나한테 물어봤지. 네가 지금 바깥에 나가서 하고자 하는 게 뭐냐. 뭣 때문인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늘 이게 세상이구나 알았다가 우연찮게 다른 세상에서 엇, 이런 세상도 있었네. 내 세상과도 비교가 되는 거야. 그니까 거기에 대한 어떤 호기심도 있고, 재밌었으니까. 그래서 나한테는 그 재미를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는, 재미라는 차원에서 생각한 거지. 니가 더 재밌고 그런 것을 하고 싶냐, 근데 지금 앨범 내는 건 어떠냐. 앨범 내는 것도 재밌긴 재밌겠는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여기는 답답해 보이는 거야. 다큐멘터리 속 블루스 할아버지를 찾아가 하모니카도 배우고 그러면서 인생을 살고 싶었다던 강산에는 재미없는 나라에 재미를 줄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앨범을 내게 된 것이다. 과연 당시 강산에는 그 몫을 톡톡히 하게 된다. 근데 쉬운 건 아니었지. 답답하니까. 벌써 코드가 안 맞고. 처음에 계약하고 녹음 다 해놓고 인제 이걸 앨범으로 노래 제목을 내야 되는데 내가 낸 제목을 보더니 이건 안되겠대. 왜요. <예럴랄라>가 무슨 뜻이냐고. 그냥, 기분 좋은 느낌에서 만든 말이라고. 사전에 있는 거냐고. 아니 그냥 내가 만든 말이라고. 어떻게 말을 만들어?
초반에는 매니저가 라디오에 홍보를 하러 갔는데, 힘들었대요. 어느 날 나한테 아, 산에 씨, 제목 좀 바꿔봐요. 자기가 PR해야되는데 어떤 PD한테는 모욕감을 받으면서 해야 된다고 제목 좀 바꿔보라고. 그러면서 들려주는 얘기가 앨범 들고 갔는데 PD가 딱 보고 에이, <할아버지와 수박>? 그때 마침 또 수박이 완전 풍년이 돼 가지고 수박값이 완전 똥값이 됐었거든. (웃음) PD가 그러더래요. 뭐야 이거. 수박값 똥값인데. 아, 그래요? 그럼 안 할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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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근데 여러 사람들이 대중적인 것에 대해 항상 얘기하니까 내가 그렇게 말했었어. 대중성이란 걸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대중이라는 게 지금 우리들의 대중은 들려주는 대로 보여주는 대로, 나쁘게 얘기하면 길들이기 나름이다. 만약에 <라구요> 길들여봐라, 그렇게 알고 들을 겁니다. 그때 내가 좀 건방지게 얘길 했어. 그땐 무슨 얘긴지도 잘 모르고. 시간이 지나니까 아무 것도 아니잖아.
강산에가 대학을 들어갔던 80년대 초와 가수가 되어가던 90년대이후는 상당히 많이 변화해 있다. 80년대란 일상의 의식과 행위마저 정치에 저당잡혀 있는 시절이리라. 경찰이 여자들의 스커트길이까지 재던 시절. 자유, 벗어나고 싶고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싶은데 그것을 찾지 못하게 하는 강산에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퍼> 그렇다면 그게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으로도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이나 그런 소명감 같은 것은 없었나요? 강> 당연히, 당연히 있었던 것 같은데. 그니까 내 <삐따기> 앨범에 <차라리>란 노래가 있는데. 지들끼리 모여서 한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생각도 마음도 삐딱 삐딱하고 말겠어. 차라리 삐딱하고 말겠어. 그니까 뭔가 내가 삐딱하다면, 물에 기름 같은 존재라면 차라리 기름으로 자유롭고 싶다 한 거죠. 내 바램은 전체의식을 당연히 의식하고 한 거죠. 퍼> 그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차원의 운동으로서는? ...........................................................
나의 앞을 항상 가로막고 서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며는 깨어나 일어나 힘을 원해 힘을 원해 보인다고 그게 다 보는 게 아니야 들린다고 듣는 게 아니야 ...........................................................
강산에라는 이름을 듣고 쉽게 떠오르는 단어는 저항과 자유. 태극기를 휘날리며 삼풍(三風)은 또 불지 않았으면, 태우(太雨)는 또 오지 않았으면 하고 노래했던 락커를 떠올리기 쉽다. 긴 머리를 분방하게 휘날리던 한 청바지 광고에서도 알 수 있듯 저항하는 락커, 자유인의 이미지가 주는 에너지는 강렬했다. 또한 그의 음악세계는 한국적인 정서를 담아내는 포크 락으로 대변되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굳어져버린 이미지가 새로운 에너지로 노래하는 지금의 강산에에게 지나친 꼬리표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퍼> 그럼 이때까지 인식해왔던 게 본인도 지겨우실 수도 있겠지만 한국적인 락커, 또는 반항적인 락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본인의 생각에 대해 좀 말씀해주신다면. 처음 데뷔 당시에는 내가 락이라는 부분을 부르짖고 다녔어요. 재미가 없는 나라니까. 이런 것도 있어요. 흔히 사람들은 그 락이라는 걸 개념적으로 받아들이더라고. 뭔가 세상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락이란 건 구태의연한 가치관이나 사고에 종속된 것을 좀더 평등하게 하자라든가 그 안에 인간의 존엄성, 평등, 그게 결국 love일 수도 있고 peace일 수도 있고. 한국적이다 저항적이다 그거는 그냥 껍데기일 뿐이고 궁극적으로는 내가 아까도 내가 마음속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부분이, 사람다움. 내가 저항하고 삐딱하게 된 건 어느 날 보니까 왜 나를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게 했는지. 왜 우리 엄마가 그런 역사를 살게 했는지.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는데. 뭣 때문에. 도대체 느그는 누구를 위한다고는 하는데. 웃기지마. 누구를 위한다고 말하지 마. 누구를 위해서 하는데 이거야. 그래서 남북으로 이렇게 된 거야, 하는 그런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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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건가 누구가 그 누구를 위한 건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을까 예 더 이상 더 이상 더는 ...........................................................
그니까 락의 의미란 게, 내가 지금 갭이라는 부분 얘기하잖아요. 친구가 많다는 건 참 좋은 일인 거 같은데. 그게 남자든 여자든 그리고 나이가 어리든. 내가 진짜 사람다움을 나눌 수 있는 그런 걸 느끼고 싶은데. 내 의식은 그걸 느끼고 싶단 말이지. 근데 내가 살고있는 현실과의 갭이 있다는 거야. 현실은 문화적인 제도나 습관이나 여러 가지 배경으로 인해서 그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지. 나하고 갭이 있잖아. 아까 일본에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내가 갭을 느꼈다 그랬잖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제도나 습관 속에서 느끼는 괴리감, 거기에 대한 나의 고민일 수도 있고 저항일 수도 있고 그게 시대적으로 변하겠지. 예전에는 와그라노, 왜 삼풍이 무너지냐. 근데 이제 중요한 게. 인제 차츰차츰. 그럼 나는? 하면서. 니가 그렇게 의식으로만 계속 갔던 거랑 너는? 아, 내가 아직 내 의식과 나와의 갭도 많더란 말이지. 지금 단계는 내 의식과 행위하는 나 사이의 발란스를 맞춰가는 중인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내 의식과 나의 발란스가 제대로 맞을 때. 아마 내가 진짜 자유를 살게 될 거 같애. 내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거. 점점 초점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분명 그의 내부에서 어떤 중요한 변화가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다면 차츰 눈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자기 안에 존재하는 것들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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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나비가 되고 싶다고요? 퍼> 강산에가 예전에 소리를 내지르는 그런 이미지에서 뭔가 좀 바뀌었다고들 하는데, 그런 맥락하고도 관련이 있나요. 퍼> 락이라고 하면 내지르는 소리, 뭔가 거칠고 반항하는 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락 가수들도 있잖아요. 특히 젊을 때는. 퍼> 본인은 늦게 늦게 간다고 생각하세요? 퍼> 그 이번 앨범 노래 속 거북이가 그 의미인가요. 퍼> 그거 성적인 느낌도 들던데. 남성 성기를 거북이라고, 귀두라고 하잖아요, 거북이 대가리. 사막에서 발가벗고 달렸다 했을 때 성적이라고는 했지만 그때 느낌은 아기들이 고추를 내놓고 달리는, 그런 의미일 수 있죠. 사막이란 곳이 드러난 곳이잖아요. 벌거벗은 곳이고. 퍼> 그럼 어떤 의미예요? 그냥 만났다? 퍼> 그게 뭐든 간에 단초가 된 거죠. 뭔가 깨닫는.
퍼> 근데 왜 하필 사막을 찾아가셨어요. 산도 있고 바다도 강도 있는데. 퍼> 그러면 백마에 오게 된 것도 그렇고 사막도, 일본도 그렇고. 사람을 통해서 공간을 만나게 되네요. 사막에서 뭘 봤습니까. 퍼> 얘기를 하다보니까 내가 가수랑 만난 게 아니라 구도자, 이런 이미지가 있어요. 시인 같기도 하고. 사실 제가 뭐 뭘 봤다는 걸 듣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라 선문답처럼 해야 뭔가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퍼> 그런 얘길 들었어요. 산에 형이 보면 종교성이 다분한 사람이다,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퍼> 아, 좋아요.
퍼> <강영걸> 앨범을 여권 형식으로 꾸미셨는데 그전까지는 본명을 안 쓰다가 강영걸이라고 쓴 셀프 타이틀이라고 하면서 자기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누가 해석했던데 그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퍼> 왜 하필이면 본명을 찾는 것부터 시작했어요? 퍼> 앨범 보면 이게 여권이잖아요. 어떤 사람이 평하기를 이 여권을 강산에라고 하는 나라로 오세요, 강산에의 세계로 들어오라, 그런 의미로 해석하더라고요. 퍼> 본인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퍼> 지금 느끼는 건데 굉장히 의미 있는 것 같네요. 퍼> 그럼, 이번 앨범부터 많이 달라졌다 그러더라고요. 뭐가 달라진 거예요? 퍼> 이때까지도 발전했잖아요. 발전하고 싶다. 강산에는 또다시 발전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한 앨범에서 다른 앨범으로 넘어가면서 보여주는 변화의 의미를 넘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놓고 사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미 그 앨범은 한 발자국 딛고 넘어간 과정으로서 지나왔을 뿐 더 이상 지금의 그에게는 화두가 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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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왔다가 레스토랑에 갔는데 트여있는 데야. 거기서 둘이 얘기를 하고 있었어. 그 사람은 지금 나이가 50에 가까운 아저씬데 애니메이션 하는 사람이야. 이름이 Bob인데. 둘이 오래간만에 사적인 얘기를 나눴어. 얘기하다가 우리 엄만 어떻고 아버진 어떻고 그러는데, 얘기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어디서 나비 한 마리가 여기 어디서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았어. 처음엔 뭐 나비란 게 그냥 있는 거라 생각했지. 그때 엄마 얘기하고 있을 때였는데 이 나비가 휘익 와 가지고 Bob의 입술에 딱 앉는 거야. 엇. 그 입술에 앉아있는 시간이 한 10초 정도, 인간 시간 감각으로 10초면 얼마나 길어. Bob도 놀랬지. 10초 동안 앉아 있다가 얘가 날아가. 날아가다가 또 똑같은 자리에서 맴도는 거야. 난 나비를 봤지만 설마 하고 별 생각 안하고 아, 재밌네, 나 딴에는 조크한다고 Bob, 보라고. 그때 Bob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하고 있었거든? Bob의 엄마가 Bob한테 지금 뽀뽀하는 거라고. 그렇게 내가 의미를 부여했다고.
아하하 웃으면서 그렇다 그렇다고 하고 있었는데. 아 진짜 나는 설마 했었어. 근데 이 나비가 똑같은 데 있다가 휘이 와 가지고 내 입에 딱 앉는 거야. 읍, 놀랬어. 나는 벌레 그 촉감을 무서워하거든. 아무리 예쁜 나비지만 그 느낌이.. 입술에 앉으니까 예민하잖니. 난 무섭잖아. 근데 그 상황이 너무 절묘해가지고 좀 참았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한 6초 동안 견뎠어. 그러다 무서워서 훅 불어버렸다고. 그 이후로 이 나비가 어디론가 없어졌어. 근데 이 나비가 내 입술에 앉는 순간 Bob도 나도 너무 절묘하고 웃기니까 막 웃었어. 또 주변을 봤어. 혹시 나비가 여러 마리가 있어 가지고 이 한 마리가 길 잃어 왔나 싶어서. 근데 나비가 있을만한 데도 없고 나비들이 없어. 근데 나비가 왜 갑자기 어디서 나타나가지고 그 얘기하는 타이밍에 딱 앉고 그러니까 짜릿하잖아. 마치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잖아. 그리고는 그때부터 내가 나비, 이게 왜. 나비에 꽂힌 거야. 그 나비가 뭘 의미할까. 왜 하필 그렇게.. 근데 Bob이 나한테 그러는 거야. 그때가 내 연어 앨범 나오기 전이었거든? 삐따기 앨범 내고 여행 갔다가 돌아올 때였는데. “산에, 아이디어가 있다. 다음 앨범 제목을 ‘나비의 입맞춤’으로 해라.” 아, 좋은 아이디어다, 적어놨어. 결국 앨범을 만들었는데 막상 앨범 제목을 ‘나비의 입맞춤’ 하려니까 내 선입견에 못하겠는 거야. 왜냐면 ‘나비의 입맞춤’ 그러니까 무슨 오페라 제목 같고 재미가 없고 영어로 ‘butterfly's kiss’ 하기도 어색하고. 그래서 포기를 했어. 앨범 제목은 ‘연어’라고 했지. 근데 이 나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거야. 그래 갖고 내가 마침 그때 내 녹음실 스튜디오를 만들 때였는데 그 연습실 이름을 나비라고 지었고, 팬클럽이 자연발생적으로 있긴 있었는데 그때 팬클럽 이름이 ‘산에랑’이었어. 그래서 내가 얘길 했지. 이름 바꿔라. (웃음) 나비라고 해라. 나중에 얘기해줬고. 노래도 미련이 많아가지고 그 앨범에 10곡이 다 끝났는데 나비의 입맞춤이라 해서 즉흥 어쿠스틱으로 통기타만 해가지고 나비의 입맞춤 노래를 내가 기어코 넣었고. 그 다음에 그 연어 앨범 잘 보면 NAVI 해서 옆에 로고 같은 걸 넣었어. 그게 앉아있는 나비 옆모양이야. ...........................................................
<나비의 입맞춤>
한참동안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 갑자기 예쁜 나비 한 마리 어디에선가 사막으로 떠난 여행길 맑은 샘물 같은 너였네 아직 내겐 너무나도 소중한 ...........................................................
퍼> 나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변태한다는 건가. 여러 가지 통하겠네요. 지금까지 얘기했던 것도 통하고 어머니 얘기도 통하고. 밤은 깊어지고 나비로 한 템포 마무리한 우리는 취중의 담소를 더욱 즐기기 위해 ‘뜰’로 자리를 옮겼다. ‘뜰’은 어둑어둑한 불빛과 둥지 속에 들어 와 있는 듯 포근한 나무 장식들이 아늑하게 느껴지는 곳이다. 우리의 여행을 돕는 데 일조한 것은 물론이다. 꿈과 여행 강> 아, 아까 내가 오줌 누면서 생각했는데 (웃음) 오늘 이 자리가 나를 참 꿈속으로 여행하게 만들어. 퍼> 저도 사실 꿈을 많이 꾸는 사람입니다. (웃음)
근데 이제 조금씩. 하나씩 여유라 그럴까? 편안함이 오는 부분들이. 이제 하나씩 알아가는 부분인데. 내가 오늘 아침 문득 잠자리에 일어났을 때 내 안의 고마움이라든지, 내가 평생 갚아도. 내 형, 내 인연, 엮여있는 친구들 그들한테 이 인연들에게 관심 가져주고 나누고 싶고 이런 부분들. 그전에는 그런 걸 그래야 되지 않을까 하는 거지 감동하는 차원까지는 아니었거든. 벌써 생각 자체만으로도 그 시작이겠지만. 그런 것들이 이제 점점 직접적으로 오고하는 부분들이, 감사함이. 내가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아까 꿈속 여행 시켜준다 그랬는데, 난 도리어 고마운 부분들이 있어요. 오늘 아침 잠자리에 일어났을 때의 이거 오늘 여러분들이 확인시켜주는 거야. 말하게 함으로써 기분 좋지.
퍼슨웹이 강산에를 만나러 왔지만 강산에도 강산에를 만나는 시간이 된 듯 했다. 어느 순간이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누구를 만나고 어디를 가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사막을 가도 나비를 만나도 결국엔 그것들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오늘도 우리에게 꿈속을 여행하게 해줘서 고맙다고 했지만 꿈길을 찾아 걸어간 것은 결국 강산에 자신이다.
퍼> 남의 나라까지 와서 이렇게 노래하는 사람 보면 어때요. 이런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건데 전 가난하게 생활하는 뮤지션을 보면 마음이 좀 이상하거든요. 물론 내가 더 나아진 환경 없다 하더라도 난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있고. 그런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아까 얘기했을 때 앨범 많이 나갔냐. 지금은 전혀 미련이 없어. 지금 나한테는 백만 장이든 천만 장이든 의미 없어. 물론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장수가 많이 나가는 게 나한테 영향을 많이 주는 건 사실이지만은 나한테 그리 큰 의미는 없는 것 같아. 왜냐면 지금의 내가 공연을 하고 싶다거나 당장 하는 행위에 대한 저변이라 그럴까, 내 속에서 계속 끊이지 않고 만들고 싶어 하는 창작에 대한 이런 것들이 계속 일어나고 있으니까. 별로 거기에 대한 미련은 없어지는 거 같아.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발전하고 싶어요. 그게 많이 팔리고 기록 남기고 그게 나하고는 별로 아닌 거 같아. 물론 내가 발전하고 그게 또 sale도 되고 두루두루, 아까 얘기한 power 생기면 참 좋겠죠.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 내가 더 해야 될 부분이 많은 거 같아. 내가 내 스스로 깨어나야 할 부분들이, 선행되어야 할 부분들이. 지금은 그래도 내가 다음을 또 할 수 있는 거니까. That's OK. 내가, 진짜 찼어요. 퍼> 뮤지션 얘기 하다보니까 언뜻 드는 생각이 지금 다음기획 안에 여러 가수들이 있잖아요. 함께 해서 아까 그 power, 사회적 발언 이런 걸 좀 콘서트로 꾸밀 생각은 혹시.
퍼> 근데 아까 얘기했던 그 블루스 할아버지는 찾아가 보셨어요? 퍼> 자기중심적인데요. 퍼> 저도 못 가본 나라인데 쿠바, 예전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란 영화에 보면 칠십 넘어서 음악 하는 할아버지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강산에 씨가 그런 할아버지가 될 거 같은. 그니까 블루스 할아버지를 찾아가려고 했으나 이제는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어느 순간 보니까 자기가 블루스 할아버지가 된.
퍼> 그럼 아까 그 질문에 대해서 부정하는 건 아니죠. 블루스 할아버지가 될 자신. 퍼> 제가 구도자니 뭐 이렇게 오버하면서 말한 게 사실이지만 본인 스스로가 그런 뉘앙스를 많이 풍기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원초적인 게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라든지 아버지에 대한, 아무리 기억이 안 나도. 아님 이 교회라고 하는.. 아주 기본적인 정서, 소년의 예민한 정서 속에 종교적인 뭔가가 있었을 거라 느껴지는데. 그 부분은 어떻습니까. 기독교뿐만 아니라 종교가 내 음악 또는 내 생에 부정할 순 없을 텐데. 뭔가가 있다면 그건 어떤 지점인 거 같습니까. 생각해 보신 적 있으세요. ...........................................................
<영걸이의 꿈> 누군가에 쫓겨 잡히지 않으려고 갑자기 저 낭떠러지 밑으로 꿈이란 걸 알고 나서 겨우겨우 그 소리가 알람 소리라는 걸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던 날 ...........................................................
퍼> 이것도 또 언젠가 깨야 할 꿈이 아닐까요. 그니까 꿈속에서 꿈을 깼을 때 그럼 이건 뭐야. 이건 또 다른 꿈속의, 또 꿈속의 꿈이 아닐까 생각하니까 갑자기 그때부터 혼돈이 되기 시작했었어. 어쨌든 그래서 노래를 만들었어. <영걸이의 꿈>이라고. 그리고 내가 고민을 하고 있었어. 그래서 내가 형한테 전화를 딱 걸어서 형, 나 요즘 힘들다. 왜. 내가 꿈속에서 꿈을 꿨는데 이래 이래 가지고 이랬는데, 도대체 이건 뭐야. 내가 그 안에 여러 가지 의문이나 두려움이나 여러 가지 있겠지. 그런 것 때문에 내가 물어봤겠지. 근데 돌아온 대답이, 어차피 지금 꿈속인데 뭐 그렇게 생각에 사로잡혀 있니. 어차피 꿈인데.
아, 이왕 꿈속인데 좋은 꿈꾸고 좋은 생각하고 좋은 뜻 이루고. 꿈은 이루어진다 그러잖아. 아까 얘기했지만 진정으로 원할 때라고 믿고도 싶고. 믿는다면 이왕이면 좋은 뜻을 세워서 좋은 꿈을 꾸고. 꿈꾸다가 또 깰지언정 내가 악몽에 시달리기보다는, 나를 번잡하고 복잡하게 만든 꿈보다는 내가 내 친구들이랑.. 어느 날 인생을 보니까 딱 찰나일지언정, 좋은 꿈은 일찍 깬다 그러잖아. 그런 찰나적인 꿈이라도 좋은 꿈을 꾸고 싶은 거지. 그래서 지금 내가.. 존 레논이 얘기했잖아.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 당신이 나를 몽상가라고 말한다 해도, 그렇지만 나 혼자가 아니다.(John Lennon의 “Imagine”) .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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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 소재를 주로 어디서 택하세요.
강> 내가 살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과 내 안의 내 의식세계와의 차이에서 오는 저항일 수도 있고 바람일 수도 있고 희망일 수도 있고 소원일 수도 있고.. 이건 왜 이렇게 안 될까 이거는 도대체 왜 이래야만 되지, 의문일 수도 있고. 그런 것들. 생활에서 느끼는 것들.. 만약에 나는 이런데 이 사람은 왜 저러지 하는 의문.“와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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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니 또 와그라노
와그라노 워~ 와 워~ 와 그랬쌌노
뭐라캤쌌노 뭐라캤쌌노 니
(니 또 와그라노)
우짜라고요 내 우짜라고 내는
(내는 우짜란 말이고)
우짤라꼬 니 우짤라꼬 그라노
(니 단디해라)
마 고마해라 니 고마해라 니
(니 그라다 나친데이)
와그라노 니 또 와그랬쌌노
와그랬쌌노
와그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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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뭐 특별한 게 아니라 참 친구가 많다는 건 좋다, 라고 느끼는 부분들. 어느날 친구들이랑 남녀노소 구분 없이 발가벗고 온천에서 같이 목욕해 보니까 야, 옛날에 내가 살던 한국이란 나라 보면 감히 상상도 못하잖아. 근데 어느날 내가 자연 속에서.. 평상시 한국문화였다면 시선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상황이지. 노소, 남녀노소 상관없이. 내가 옷 입고 거길 도착했을 때는 내가 이방인이 된 거지. 내가 더 못 있겠더라구. 내가 거기 있으려면 나도 벗어야 되는 거지. 그래서 벗고 같이 있는데 나중에는 내가 거기 동화되고.
퍼> 그게 일본에서?
강> 아니 미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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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 TRIBE>
전봇대가 춤추던 파티가 끝날 무렵 그 아침이 생각나
몸 속에서 그 뭔가 필요 없는 모든 것 쌱-하고 빠져나가 버린 듯한
물을 나눠 마셨네 언덕 위에 앉아
친구가 많다는 건 참 정말 좋은 일이야 여자든 남자든
우리들은 다같이 따뜻한 물이 솟는 그 강가로 향했어
아이처럼 웃으며 물 속으로 하나둘 첨벙 뛰어 들어갔었지요
물을 나눠 마셨네 언덕 위에 앉아
친구가 많다는 건 참 정말 좋은 일이야 여자든 남자든
I'm gonna be your friend I'm gonna be your friend I'm gonna be your friend
I'm gonna be your friend be your friend be your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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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내가 그런 경험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우리 목욕탕이라고 생각해봤어.
우리가 사회 나오면 그런 거 있잖아. 몇 달 전에 내가 무슨 이벤트 노래하러 갔는데 그 기획직원이 나를 보고 아, 안녕하세요, 뭐 박 대리입니다, 이런 거야. 아 예... 내가 만난 사람 많으니까 기억을 못하는 거야. 전에 그거 있었잖아요, 만났잖아요, 어쩌고저쩌고. 제가 원래 이름을 잘 못 외워요, 얼굴은 기억하는데. 아, 제가 박 대리로 통하잖아요. 아, 그러세요. 근데 속으로 혼자 생각한 거야. 왜 하필 대리지, 이름이 없나. (웃음) 그럼 앞으로 박 대리라고 불러야 되나 싶더라구. 실례지만 이름이 무엇입니까. 아.. 박 아무개입니다. 그게 그 사람한테 낯선 거야. 사회 나가도 사장님, 이사님, 무슨 님, 많잖아.
근데 내가 어느 날 사우나에 갔는데 전부 다 발가벗고 있잖아. 서로 모르잖아. 한번씩 보잖아. (웃음) 바깥에서는 사장님 뭐 하지만 전부 까놓고 보면 똑같아. 사장도 없고. 가죽만 좀 늙어지고 머리만 좀 벗겨지고. 그래서 내가 노래로는 안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 natural born dancer and singer, <나> 그 노래를 사실 ‘목욕탕’이라고 하려고 했어. 사장님 무슨 님 해가지고 발가벗고 목욕탕에서 봅시다.
내가 좀 뭔가 굳이 얘기하고 싶었던 거는 너무.. 결국에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사람 안에 사람 있어야지 그 사람 옆에 사람이 있다. 내가 <코메디>란 노래를 만들었어. 보니까 사람이 많아. 근데 보니까 대부분이 그 사람 위에 사람이 있더라고. 계급으로 나누고 나이로 나누고. 종속적으로. 사람 밑에 사람이 많더라고. 우리가 공허함을 느끼고 소외감을 느끼는 게 뭐야.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 옆에 사람이 없어. 왜냐면 그 사람 안에 사람이 없으니까. 사람 옆에 사람이 없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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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디>
사람이 없네
사람이 없어
그 사람 옆에
그 사람 안에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리고 리고 리고
사람이 있네
사람이 있어
그 사람 위에
그 사람 밑에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울리고 웃기고 또 울리고
리고 리고 리고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또 울다가
가 가 가
...........................................................
강> 내 위에는 사람이 많아. 내 위에서 나를 누르는 사람, 내가 밟고 싶은 사람이 많아. 얼마든지 내 마음먹기 따라서는. 내가 진정 사람일 때는 내 옆에 사람들이 많아. 그게 평등이고 peace. 근데 지금은 우리 사회가 그 사람 안에 사람을 없게 만들고 내 위에 사람을 만들고 내 밑에 사람을 만들죠. 그 사람 안에 사람 없으니까 그게 코메디 같다는 얘기를 노래로.. 그니까 울다가 웃다가 울리고 웃기고..
몰라, 나도 내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나는, 내가 맞추고 싶은 거는, 그런 내 의식의 세계와 내 현실적인 갭을 빨리 줄이고 싶어요. 그니까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고 싶다는 거지. 내가 아직 발란스가 부족하거든.

내가 나를 보는 것
퍼> 말씀하시는 게, 그 화법이 중요한 게 있어요. 내가 ‘그러더라고’. 내가 그렇게 ‘했어’, 가 아니라 ‘하더라’. 마치 남의 얘기처럼 하거든요. <라구요>도 보면 자기 얘기이기도 한데 그렇게 말하고.
강> 이야..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웃음)
퍼> 자기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한다는 걸 의식하는지, 의식한다면 왜 그렇게 하는지.
강> 지금 이 얘기 들으니까 생각난 건데, 내가 나를 본다는 거야.
퍼> 자꾸 자기를 객관화시킨다는 거죠. 평소에도 의식하셨어요?
강> 아니, 전혀.
내가 발전이라고 얘기했잖아. 내가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은 내가 나를 자주 보는 거, 나를 객관적으로 자주 보는 거.
퍼> 자기를 보는 경험들이 많습니까?
강> 난 늘 보고 있지. 내가 가장 고민하는 부분이 뭐냐며는. 늘 생활하면서 내가 좁쌀만한 나를 볼 때.
퍼> 아까 사막의 모래알처럼..
강> 나한테는 욕망이 있잖아. 될 수 있으면 마음이 좀 크고 싶고 많이 담고 싶고. 근데 현실적으로 내가 생활하는 걸 보니까 막 경계하는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그런 걸 볼 때마다 아이씨, 내가 그러면 그럴수록,, 미치지.
그게 그렇게 된 계기가 있어요. 아까 날 사막으로 인도해준 형 있잖아. 나는 그 형을 만나기 전까지는 솔직히 두려움이 없었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걱정도 없었고, 내가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나는 자신도 만만했었고 원래 강한 줄 알았었고.

근데 어느 날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내가 진짜 아무 것도 아닌, 미약하고 겁도 많고 좁쌀만한 인간이란 걸 알았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내 무의식 속에 내가 강함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했었나봐. 어느 날 내가 “니가 원하는 게 뭐냐, 한 가지 소원이 지금 너한테 있다면 그게 뭐냐”라고 질문을 받았는데, 내가 한 가지 소원을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이 되는 거야. 그래서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근데 돌아오는 대답이 “강하고 아름다운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일까?” 이왕이면 강하고 아름답고 싶은데 그런 얘기 들으니까, 아..
근데 내가 어쨌든 내 안에, 너무나, 그니까 각자가 살면서 보면은 자기 안에 영웅이 있잖아요, 영웅이. 모델이 있고. 내가 어느날 내 안의 모델을 만난 거야.
퍼> 이를테면.
강> 강하고 부드러운 사람을 만난 거지.
내가 91년도에 미국 처음 갔을 때 그 형이랑 또 한 사람 미국친구가 있는데 이 사람들이랑 룸메이트를 해서 1년을 살다 왔어. 그때 사람들은 내가 좀 이상하게, 이렇게 된 줄 알았을 거야. 돌아와서 내 한국 친구들이 뭐라 했냐면, 만나는 친구들마다 그랬어. 내가 너무 변해 있으니까. 형, 왜 그래요. (웃음) 내가 농담이 아니라 진짜 그랬어, 진지하게. 야, 나는 부처랑 예수랑 놀다왔다. 내가 만난 그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예수 같았고 한 사람은 부처 같았어. 그냥 내 안에 상식적인 개념에서. 아, 그건 내 생각이지. 누가 부처를 봐, 모르잖아. 근데 그냥 내 안에서 부처는 이럴 것이다, 예수는 이럴 것이다, 라는 개념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났는데 평상시 만나는 사람들이랑 너무 차이가 나니까. 너무 쇼크 받은 것도 많고.

두 사람을 두고 내가 내 나름대로 어떻게 정했냐며는 한 사람은 보니까 내가 추구하고 싶은 강한 쪽의 모델이고, 한 사람은 추구하고 싶은 아름다움 쪽이야. 한 사람은 너무너무 강한 사람이야. 그 강함이 어떤 거냐면.. 내가 늘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정말 좁쌀 같고 미약하다고 느꼈던 게 그때 사막에 그 광활한 대지에 딱 떨어뜨려 놓으니까 애걔걔,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구. 근데 이 형이 너무너무너무 부드럽고 자세하고 섬세하고 배려있고.. 진짜 냇가에 내놓은 애기를 인도하듯이. 나는 그 안에서 그 형이나 아무도 없으면 나 혼자 그냥 깨갱인데. 나는 내가 강하다고 알았는데.. 그때 그 형이, 나 힘있다, 그런 게 아냐. 그냥 나한테는 부드러운 형인데, 지혜라는 거야, 지혜. 아, 지금 때가 이러니까 자리를 옮겨야 되고 해가 왔으니까 너무 뜨거우니까 옮겨야 되고 우리가 지금 물을 마셔야 되고..
또 한 친구는 마크라는 미국인 친구인데, 나는 세상에 살면서 이런 사람을 처음 만나봤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할 정도로. 일대일로 만나잖아? 왜 자기보다 남이 기준이야? 처음에 나는 그게 나한테만 그런 줄 알았어. 이 사람이 내가 맘에 드니까 나를 배려해주나 보다 그렇게 알았는데. 이 사람은 생활이 그래요. 내가 볼 때는 야, 저 사람 너무 피곤하겠다 할 정도로 항상 남을 배려해. 그게 생활 습관이야. 그냥 보통 사람이야, 보통 사람인데 그렇게 남을 배려한다? 내가 너무 감성에 젖어 가지고 “마크, 내가 너의 친구가 될 수 있어? 근데 내가 만약에 어디 돌아가서 마크 보고 싶을 때는 어떡하지?” 그때 마크가 하는 얘기가 “산에, 난 너의 친구니까 니가 어디서든지 내가 필요할 때 내가 달려갈게.” 감동이잖아아! 근데 말로서만 오는 게 아니란 말야. 그런 주파수가 아니란 말야. 그 친구가 평상시 하는 모든 행동이, 모든 게 중점이 자기보다도 상대.. “산에, Don't worry, I'm your friend. 나는 네 친구야. 니가 원하면 언제든지 난 니가 원하면 내가 달려갈게.” 이게 친구구나 이게 우정이구나 배우잖아..
사막에서 아까 뭘 보냐 그랬지. 나를 본다는 거야. 많은 걸 봐. 그니까 내 요만한 것들을 보지. 갑자기 죄책감이 들고 막 아이씨.. 그래서 “마크, 용서해줘,” 저절로 그런 거야. “내가 진짜, 난 너무, 아이씨.. 나는 친구 될 자격 없는 거 같애. 난 너무 애가 안 된 거 같애.” 이러니까 웃으면서, “산에, Don't say that. 그런 말하지마.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게 아니야. 난 너를 용서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 여기서는 니가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난, 울었지.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랑 놀다가 오니까 누구는 미쳤다고 하는데.. 내가 와 가지고 맨날 부처랑 예수랑 놀다 왔다 그랬거든? 그니까 나한테는 삶에 있어서 강하고 아름다운 모델들을 만난 거야. 내가 무의식중에 추구했던 강함과 아름다움의 모델들을. 나 혼자 추측이야, 이거는. 개인적인 느낌이야. 근데 그때 내가 알았지. 아름다움이란 뭐냐, 이제 정의도 내릴 수 있어. 강함은 뭐냐. 예전에 난 강함이라는 것은 그저 힘, power, 이런 건 줄만 알았는데, 한없이 부드럽더라구. 아름다움? 역시. 남을 배려하고..
근데 이 얘기가 왜 나왔지?
퍼> 자기를 본다는..
강> 응. 매일 봐. 내 좁쌀 같은 걸 늘 보지. 근데 잘 안되지. 열도 받지 그럴 때마다. 아는 친구가 해준 얘기 중 하나가 부처의 얘기를 예로 들어주면서 분노의 절정에서 명상하라 그러더라구. 난 그 얘기가 무슨 뜻인지 몰랐어. 분노를 삼키라는 거지. 자기를 다스릴 수 있는 부분들.. 그니까 난 내가 나를 보는 거야..
퍼> 아까 제가 사막에서 뭘 봤냐고 물었을 때도 뻔할 수 있는 어리석은 질문이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해주실 거 같았는데 아까 듣고 싶었던 얘기를 이제야 하신 거예요.
강> 아마 이럴 때를 기다렸나보지. (웃음)

퍼> 근데 그 마크라는 친구는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라고 혹시 알고 있었어요?
강> 지금은 알고 있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거기 가서 살면서 알게 됐지.
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예요? 반응이 틀려지거나 그런 건 없었나요.
강> 그런 건 없어. 그냥 그는 나의 영원한 친구고. 나한테는 훌륭한 형이야.
근데 나 이런 거 있어. 누구에게나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야. 그 마크란 사람이. 그 친구 여기 있으면 아마 나보다 느그들이 더 좋아할 걸? 그렇게 너무너무. 이건 내가 너무너무너무.. 제곱을 해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할 정도로 너무 귀엽고 너무 안고 싶고. 상상만 해도..!
퍼> 강산에에게만이 아닌 어디에도?
강> 어디에도.
퍼> 근데 그 사람은 항상 남만 생각하잖아요. 그러다가 딜레마 같은 거에 빠지지 않을까요?
강> 자기도 딜레마가 있겠지. 근데 내 느낌에는 이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이런 부분들로써 굉장히 채워지나 봐. 너무너무 아름다워. 그니까 영어로, 난 영어 못해, 내 아는 영어만 하는 거야. He is so beautiful. 근데 만약에 한국말로 하면 ‘그는 너무 아름다워’ 뭔가 어색하잖아. 그게 뭐냐면, 내가 그것도 생각해봤어. 아까 인터넷 문화도 얘기했잖아. 이게 왜 어색할까. 그게 익숙하지가 않은 거야.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그가, 아름다운 그가 많이 없었단 얘기야. 우리 문화 속에서. 근데 거기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벌써 사람까지 갔어. 성별구분하지 않고 사람한테까지 간 거야. He is so beautiful. 나이 구분하지 않고 He is so beautiful. 인간에게도 beautiful이라는 게 갔어. 일반화됐어. 지금 우리한텐 엽기적이란 말이 일반화됐잖아. 문화란 게 뭐야, 일반화돼 있는 거 아냐. 근데 우리한테, 야 저 남자 참 아름다워. 아직 뭔가 덜 익숙해져 있잖아. 아직은 남자가 아름다운 사람이 없었나 보지. 그리고 아저씨 그러면 벌써 선입견이 안 좋잖아. 아저씨도 아름다운 사람이 나와야지. 나이에 연연해 있으면 벌써 아름답지 않잖아. 그니까 우리 때부터라도 다음 세대를 생각해서라도 애들이랑 교류하고 인간으로서 통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You have A choice!
강> 난 진짜 영어 못해요. 나는 정식으로 배운 영어도 아니고 문법 맞는 것도 아니고 나는 내 느낌을 표현하는 영어예요. 난 문법 몰라요. 문법 무시해요. 영어 할 줄 안다고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것도 아니에요. 내가 영어에서 이런 걸 배운 적이 있어요. 영어권 문화에서.
내가 외국 여자를 사귀고 있을 때였어요. 어느 날 약속을 했는데, 내가 어겼어.
‘너 왜 그랬어?’ ‘어쩔 수 없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I have no choice.’
이 친구가 강력하게 반박을 딱 하는 게, ‘You have A choice!’
그것도 a를 강조하더라구. 보통 어 하는데 에이라고. You can have A choice! 넌 선택할 수 있었어. 따져보니까 그래, 내가 만약 조금만 더 부지런했으면, 조금 뭐 했으면..
선택은 자유예요. natural born killer가 되든 natural born dancer가 되든. 내가 내 안에 있는 걸 내가 choice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natural born 어떤 행위자가 될 수 있잖아. 그건 내 선택이잖아.

강산에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느껴지는 고리가 있다. 하나하나 들려주는 이야기가 결국은 모두 한 고리로 묶여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그때 주어지는 질문에 따라 대답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어긋나기도 하고 맥을 달리하게 되기도 하지만 그의 삶과 노래와 말은 돌고 돌아 꼬리를 무는 일관된 흐름을 만드는 것 같았다. 내가 강산에를 만나면서 느꼈던 자유는 다른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내 안에서 나를 찾고 사람을 만나 진심을 나눌 수 있다는 것.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I have A choice. 강산에는 그것을 찾은 사람이 아닐까.
인터뷰 : 하시진 (hasijin@dreamwiz.com)
녹취 정리 : 라임즈 (myoneandonly@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