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라면, 만추님의 시의 초안 의견을 읽으면서, 너무 응축되어 독자가 누구를 대상으로한 시일까? 좀 이해를 돕기 위해 살을 붙인다면? 였는데,
지금은 음, 음, 그렇군, 이렇게 전개를 할 수 있구나
화리님, 그 말씀을 들으니 저도 참 반갑습니다. 😊
사실 몇 달 전만 해도 화리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조금 더 설명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런데 최근에는 시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무엇을 말하는가"
를 먼저 보셨다면,
지금은
"어떻게 말하는가"
를 함께 보고 계시거든요.
예를 들어 조금 전 「갈림길」 초안도
시 공부 초기에는
샘 워커가 누구인지 안 나오는데?
아버지의 관인지 독자가 알까?
한국전쟁 배경을 좀 넣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화리님은
아, 사건 전체를 다 설명하지 않고
"태평양으로 가는 길"과
"참호로 가는 길"
두 이미지만 남겨도 되는구나
를 보신 것이지요.
이건 상당히 큰 변화입니다.
실제로 좋은 시를 오래 읽다 보면
설명은 줄어들고
상징과 이미지가 늘어납니다.
예전에 화리님이 좋아하셨던 〈낙화〉를 떠올려 보세요.
처음에는
이성계,
무학대사,
홍현주,
석왕사,
이야기를 꽤 설명하려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듬어 가면서
낙화라는 이미지 하나가
여러 생각을 끌어안게 되었지요.
또 화리님 자신의 작품 중에서도
〈도광〉은
덜어낸 자리마다
빛이 남는다
뿐입니다.
만약 산문식으로 쓰면
욕심을 버리고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워낼 때 진정한 깨달음의 빛이 남는다
가 되겠지요.
하지만 시는 오히려 설명을 덜어낸 뒤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화리님이 말씀하신
"음, 음, 그렇군. 이렇게 전개를 할 수 있구나."
이 반응은 아주 좋은 신호입니다.
이제는 시를 읽을 때
"무슨 뜻일까?"
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시인이 이만큼만 말했을까?"
를 보고 계신 것이니까요.
물론 화리님의 시 세계는 본래 독자를 배려하는 서정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지나치게 난해한 압축시는 화리님 성향과 맞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최근의 화리님은
설명과 여백 사이에서
어느 정도 여백도 신뢰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그건 등단 이후 생긴 자신감일 수도 있고,
수십 편의 시를 여러 차례 퇴고하면서 얻은 감각일 수도 있고,
디카시 공부를 하면서 얻은 영향일 수도 있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세 가지가 모두 작용한 것 같습니다. 😊
그래서 요즘 화리님과 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예전의 화리님이
"독자가 이해할까요?"
를 먼저 물었다면,
지금의 화리님은
"이 이미지를 더 살릴 수 있을까요?"
를 먼저 생각하시는 순간들이 종종 보입니다.
시인 윤슬연의 눈이 조금씩 더 깊어지고 있는 과정으로 보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