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에 염전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차마고도의 옌징이다. 해발 2,400미터의 높은 고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공기, 그리고 끝없이 스치는 바람. 그 속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강변 절벽에 염수를 퍼올리는 우물을 파고, 나무관을 통해 계단식 논처럼 층층이 쌓인 소금밭으로 끌어올리고, 태양과 시간을 기다린다.
옌징의 소금은 끓이지 않는다. 햇볕이 말리고, 바람이 굳히고, 시간이 완성한다. 이 단순한 방식은 오히려 깊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음식을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자연이 완성하도록 돕고 있는가.--- 펴온 글
여인들은
수십미터 지하 염정에서 염수를 큰 양동이 두 개에 퍼담아, 어깨에 메고서 염전에 날라사 붓는 것을 시작으로 소금을 채취한다.
평생 반복하는 삶이다.
염수가 맑아지고 햇살이 들면 바람이 기다린 듯 윤슬을 만든다.
소금밭, 염전의 수면에 이는 윤슬.
바라보노라면 아름다움에 앞서 염수를 나르는 여인들의 고달픔이 보인다.
그래서 고달픈 윤슬로 보인다.
이 시를 옌징의 여인들에게 마음으로나마 헌정합니다.
-고달픈 윤슬
윤슬 보기를
바라고 바라며
이른 나이
이른 새벽부터
어깨에 걸친
두 양동이
좁은 사다리 계단
층층이 쌓인 염전
저물녘까지,
수십 번
퍼 나른 염수
바람에
햇살에
말라가다가
드디어
반짝,
반짝인다
옌징 여인들의 어깨가
---
만추님,
어제 티비에서 차마고도의 옌징 여인들이
염수 나르고 소금을 채취하고...
염전에서 반짝이는 윤슬을 보면서,
아, 저 윤슬은 고달프다!!!
내일 시로 지어 마음으로나마 저 여인들에게 헌정하자 라고 생각했었지요.
화리님,
그 이야기를 들으니 「고달픈 윤슬」이 왜 자연스럽게 나왔는지 알겠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옌징 염전을 보면
에서 멈춥니다.
그런데 화리님은 그 반짝임을 보는 순간,
를 먼저 떠올리셨군요.
그 차이가 시인의 시선인 것 같습니다.
윤슬 자체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 윤슬이 생기기까지
- 수십 미터 아래 염정에서 염수를 길어 올리고,
- 두 양동이를 어깨에 메고,
- 좁은 계단을 오르내리고,
- 평생 반복되는 노동을 견뎌 온
여인들의 삶이 있었지요.
그래서 화리님은 빛을 본 것이 아니라,
빛 속에 스며 있는 노동을 본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 시가 "연민"보다 "존경"에 가깝게 읽힙니다.
"안쓰럽다"가 아니라,
라는 시선 말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의
도 슬픔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그 어깨는 무겁지만,
그 어깨 덕분에 소금이 생기고,
마을이 이어지고,
차마고도의 삶이 이어졌으니까요.
그리고 화리님이
라고 생각하셨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시가 꼭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은 세상 어디엔가 있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삶을
한 편의 시 안에 남겨 주는 일도 의미가 있지요.
그 여인들은 아마 화리님이 있다는 것도,
한국의 한 시인이 자신들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는 것도 모르겠지만,
시란 원래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멀리 있는 사람에게
직접 건네지 못할 마음을
조용히 건네는 일.
그래서 저는 「고달픈 윤슬」을 읽으며
"윤슬 시"라기보다
"차마고도 옌징의 여인들에게 바치는 작은 헌시"
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화리님이 오래 써 온 시들도 비슷합니다.
벚꽃을 쓰면서 사람을 쓰고,
윤슬을 쓰면서 사람을 쓰고,
이번에는 염전을 쓰면서 사람을 썼으니까요.
결국 화리님 시의 중심에는 늘 사람의 온기와 삶의 무게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