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金德齡(1567선조~1596선조, 의병장, 초승장군超乘將軍, 충용장군忠勇將軍, 좌찬성 추증, 부조특명)
춘산곡 春山曲
ㅡ김덕령
'춘산에 불이 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난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 업슨 불이 나니
끌 물 없서 하노라'
무고로 충용장군 김덕령이 20여 일간의 혹독한 고문을 받던 중 후유증으로 죽기 전에 지었으며, 여기서 '불'은 임진왜란과 종장의 '연기 없는불'은 자신의 억울한 분노이다.
권석주(권필)가 꿈에 책 한 권을 얻었는데 충용장군 김덕령의 시집이었다. 그 시집의 첫편은 「醉詩歌취시가」였는데 그 시는
'취했을 때 노래하니
이 곡 듣는 사람 없구나
나는 달과 꽃에 취하기를
원치 않으며
공훈을 세우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 구름이요
공훈을 세우는 것도
뜬 구름이로다
취할 때 노래하니
내 마음 알아주는 이 없지만
다만 긴 칼 차고 名君 命 받들고저'
라고 씌여 있었다. 석주는 얼마 있다가 꿈에서 깨어 창연히 이를 슬퍼하였다.그리하여 그를 위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지난날 장군은
금창을 쥐었는데
충성과 장렬함 도중에
꺾이니 어찌하랴
지하에 묻힌
영령의 끝없는 한
분명 한 곡조
취시가로구나'
김덕령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모친이 위중함에도 26세에 형을 따라 동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 의병장과 연합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라는 형 김덕홍의 권유에 따라 귀향했다.
1차 금산전투에서 형은 전사하였으나 생환한 동생 김덕보와 동생의 친구 안방준 등을 휘하로 의병을 다시 일으켜 모친상 중임에도 대활약, 1594년 전주에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호익護翼將軍의 군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남원에 머물다가 진주로 옮겼는데 조정에서 의병을 통합 충용군忠勇軍으로 편제했다.
절충장군 곽재우와 함께 권율의 휘하에서 영남 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에는 고성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1596년 민폐를 크게 끼치는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종들의 무리) 수 명을 장살(杖殺)하여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명나라가 주선하는 화의가 지지부진되자, 의병들은 생활터로 귀향했는데, 포상은 커녕 폭탄 세금을 맡게 된다.
이에 불만이 고조되고 의병을 모집한다는 명목으로 그해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치기 위해, 진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토벌하러 가다가 진압되었다는 소식에 진주로 돌아갔다.
이때 보고를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을 트집잡아,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곽재우, 고언백, 홍계남과 함께 서울에 압송되었다.
다른 의병장들은 곧 풀려났으나 김덕령만은 20여일 동안의 가혹한 고문 끝에 29세에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김덕령은 병조 참의, 병조판서, 좌찬성에 추증되고 시호 충장忠壯을 받았으며(광주시 충장로), 부조특명(不祧特命: 국가에 공훈이 있는 인물의 神主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던 특전)이 내려졌고 의열사義烈祠 편액을 하사받았다.
왜군에게 지목되어 추적당해 죽은 부인은 정경부인에 추증, 큰 형 김덕홍은 지평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