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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촌기행 답사기(4) -- 옛 진명여고 터의 단상(斷想)

작성자김경식|작성시간11.03.06|조회수608 목록 댓글 0

옛 진명여고 터의 단상(斷想)

 

                                                        글/ 사진       김경식

 

예전에 청와대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가 있었다. 진명여고이다.

청와대 지척에 있던 이 학교는 1989년에 목동으로 이전했다. 학교가 이전하면 그 장소에

표지석이라도 세우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표지석 조차 없다.

오히려 이곳을 얼쩡거리면 사복 경호원들이 다가와 온 목적을 묻는다.

 

                                옛 진명여고 터   < 진명여고 출신 박은정 간사)

 

진명여고는 1906년 엄순헌 귀비와 엄준원 선생이 설립했다. 당시 실세였던 엄순헌 귀비는 창성궁터 1300평을 학교 부지를 하사한다. 당시 일제는 재실재산정리국을 신설하여 궁실 소유의 재산을 국유화하려고 하던 때였다. 친 남매간인 엄순헌과 엄준원은 여성 교육에 큰 뜻을 가지고 있었다. 進明 이란 “나가서 밝힌다”는 뜻으로 교명을 정한다.

진명학교터를 기부한 엄순헌(1854~1911)은 고종의 계비이다. 또한 영친왕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서울 서소문에서 엄진상의 장녀로 태어나 8세에 경복궁의 명성황후 민씨의 몸종으로 들어간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제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자 고종의 총애를 받는다. 아관파천 때에는 고종을 모시며 후궁이 된다.

 

1897년에 영친왕 이은(李垠)은 태어난다. 당시 고종의 큰 아들 순종은 성불구자였다.

이은이 태어나자 그녀는 귀인이 되고 1903년에는 황비에 책봉된다.

명성황후의 죽음으로 출세한 여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서울의 명문학교 3곳을 세웠다. 진명여고, 양정고보, 숙명여고이다.그러나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준다. 아들을 만나지 못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영친왕은 1897년에 태어나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된다.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그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계획한 인질이었다.

1911년 자신의 아들인 영친왕이 일본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을 활동사진으로 본 엄황비는 떡을 먹다가

충격으로 급체하여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옛 진명여고 터를 서성거리면,

영친왕을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 했던 엄순헌이란 여인이 생각난다.

지금 이 터는 청와대를 수호하는 기동경찰대 건물이 들어서 그 경계가 사뭇 비장하다.

옛 진명여고 터라는 표지석 조차 없는 이곳에서 나는 진명여고 출신들의 무관심을 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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