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타델과 케네스 그리핀
1987년, 하버드 대학의 기숙사 방에서 그의 전공인 경제학 공부와 더불어 열심히 전환사채 트레이딩을 하던 18세의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작성한 전환사채 가격을 모델링 하는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어머니와 할머니 등에게 겨우 빌린 26만 5000달러로 트레이딩을 하고, 시세정보 회선을 놓을 형편이 안되어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까운 증권사로 달려가곤 했던 이 학생은 현재 12조원의 자산을 운영하는 헤지펀드 시타델(Citadel Investment Group LLC)의 성주가 되어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케네스 그리핀(Kenneth Griffin)입니다.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의 제임스 시몬스가 비교적 늦게 투자를 시작해서 성공했다면, 그리핀은 대학교 1학년 때 투자를 시작하여 22세에 헤지펀드 시타델을 설립하고 32세에 이미 6조원을 굴리는 헤지펀드 매니저가 되었으니 대단히 빠르게 성공한 케이스입니다. 38세의 나이가 된 지금, 크리핀의 헤지펀드 시타델의 자산은 12조원으로 2배 가량 불어났으며, 그리핀 개인으로서도 1.5조원의 자산을 가지게 되어 포브스 부자 랭킹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핀은 매우 복잡한 컴퓨터 코드와 수학공식을 쉽게 다룰 수 있으며 조용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세잔느와 드가의 작품을 사들여 시카고 미술관에 익명으로 기증하고,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등 투자 외적인 일로도 뉴스헤드라인을 장식한 바 있습니다.
시타델의 트레이딩 영역은 매우 광범위하고 거래량 또한 많습니다. 평균적으로 뉴욕과 도쿄 거래소 일일 거래량의 2% 정도를 시타델이 차지한다고 하니 엄청난 거래량입니다. 시타델은 20개 정도의 트레이딩 전략을 사용하는데, 대부분의 수익은 그리핀이 대학생 때부터 해왔던 전환사채 차익거래 및 리스크 차익거래, 이벤트 드리븐 전략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전략들은 70명이 넘는 수학 및 물리학 박사 등으로 구성된 리서치 그룹에 의해 개발된 정교한 수학적 모델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집니다.
시타델의 사무실 곳곳에는 수학공식으로 가득찬 화이트 보드들이 즐비하여 마치 수학 연구소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시타델의 명물인 이 화이트보드는 CEO인 그리핀의 사무실에도 존재하는데 역시 수학공식으로 가득차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시타델에는 베테랑 기상학자들로 이루어진 팀도 존재합니다. 이 팀이 하는 작업은 위성사진을 가지고 미국 북부의 빙하와 수증기량을 정밀 분석하는 일입니다. 이를 분석함으로써 수력발전소의 발전량을 예측하여 수력발전이 다른 에너지원의 수요를 얼마나 잠식할 것인지를 예상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시타델이 에너지 기업 엔론이 무너질 때를 기점으로 에너지 트레이딩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위성사진으로 분석된 수력발전량의 예측치는 하나의 변수로써 다른 많은 변수들과 함께 에너지 가격 모델에 입력됩니다. 그리고 시타델의 에너지 트레이더들은 이를 사용하여 트레이딩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타델의 모든 거래는 컴퓨터에 의한 복잡한 계산에 의해서 뒷받침됩니다. 실제로 시타델에는 트레이더보다 IT 전문인력이 더 많습니다. 시타델의 컴퓨터 시스템은 너무나도 중요하므로 정전에 대비한 발전기와 연료탱크는 물론 화재에 대비한 산소흡입 시스템까지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것도 모자라 시타델 본사에서 30마일 떨어진 비밀장소에 200대의 워크스테이션으로 이루어진 예비 컴퓨터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고 하니 시타델이 컴퓨터 시스템에 쏟는 정성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타델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트레이딩 전략을 자동화하여 컴퓨터가 스스로 모든 트레이딩을 수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아직까지 요원한 목표로 보이지만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시타델은 보스턴 컨설팅 그룹에 의뢰하여 투자 프로세스를 요소 별로 분석하는 작업을 끝냈습니다. 또한 자연어 처리 기술을 이용하여 브로커들이 보내는 이메일에서 증권가격을 추출하는 기술도 테스트 중입니다.
이러한 첨단 기술의 도입과 R&D 노력은 시타델을 관료적인 금융기관들은 물론 다른 헤지펀드들과도 차별화시키고 있습니다. 시타델은 1990년 설립이래 현재까지 6조원의 누적순익과 12조원의 자산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타델이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자산운용사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첨단 과학 기술을 이용한 정보획득과 정교한 데이터 처리 및 모델링,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IT 기술의 조화는 미국의 몇몇 헤지펀드를 중심으로 시도되고 있고 이에 성공한 헤지펀드는 안정적이고 높은 수익률을 바탕으로 자산이 급팽창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시타델과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방식으로 성공한 예가 없지만 국내 운용사들의 자산 규모가 커짐에 따라 이러한 방식을 시도하는 운용사도 조만간 나타날 것으로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