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4] :
“DJ가 지방에 내려가서 ‘외환위기는 다 끝났다’고 선언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책의 고삐를 너무 빨리 놓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노동계도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는데 그 분위기를 그대로 끌고 가 구조조정을 더 심화시켜야 했다. 특히 정부 부문 구조조정이 미뤄진 게 너무 아쉽다.” (
외환위기 당시 외채협상을 주도한
혹시라도 말을 놓칠까 주요 답변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가며 인터뷰에 응한 그는 “DJ가 Pro Labor Leader(노동계급지도자)지만 집권 초기(외환위기 당시)에는 시장친화적 경제정책을 펼쳐 다른 국가에 비해 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외채협상에서 現 경제상황으로 화제가 옮겨가자 “그 때처럼 추운 겨울이 다시 오지 않아야 하는데 現 상황이 녹록치 않다”고 걱정하던 그는 참여정부에 대해 “現 정권의 반 시장적 경제정책이 계속되는 한 경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DJ와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김 前 위원장은 “
외채협상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원금 탕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재경원과 비대위 간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그것이 어려운 점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이자는 탕감을 받더라도 원금은 기한연장을 할지언정 전액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에 돈을 빌려줘도 최소한 원금은 떼일 염려가 없다.’ 그런 기록을 남겨야 국제시장의 신뢰를 얻는다. ‘한국에 돈 빌려줬다 잘못되면 원금까지 날린다.’ 이런 말이 돌아서야 어떻게 협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내 정책 당국자는 물론이고 DJ측(
미국 등 국제금융사회에서 새로운 정부(DJ)에 대해 우려가 많았다는데.
미국은 DJ정권이 앞으로 한국경제를 어떻게 움직여 나갈 것인지를 깊이 있게 관찰했다. DJ의 정치적 칼라 때문이었다. ‘프로 레이버(친노동자) 리더’ 아니냐는 의심이었다. 미국에서 DJ의 성향을 파악하려고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이 DJ를 면담할 때 내가 옆에 배석한 적이 많았는데, DJ의 말을 듣다 보면 그가 확실히 ‘프로 레이버 리더’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러나 DJ는 미국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 때 가장 입에 오르내리던 화두가 구조조정이었다. DJ는 자신이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노동계급을 중요시하고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경제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 한계는 어디까지나 시장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또 이런 말도 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외자에 대해서는 완전개방하겠다. 우리 기업이 미국에서 공장을 짓고 활동하면 미국 기업이지 우리 기업이 아니듯이 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 공장을 세우면 우리 기업이 아니겠느냐.” 미국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신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따져 보면 DJ가 ‘프로 레이버 리더’인 것은 확실하다는 느낌이다. 또 그가 現
외국자본이 IMF를 통해 한국을 길들이려고 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 무렵 그러니까
외채협상을 진행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다시는 외환위기를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면 바로 그것이 교훈이겠지. 우리가 너무 몰랐던 국제금융계의 생리를 깨달았다면 그것 역시 교훈이고, 우리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약점을 악용하려는 마수가 반드시 접근해 온단 말이야. 우리의 약점을 노리는 국게 고리대금업자들이 활개를 친다 이거야. 이들은 교포사회의 연줄을 통해 접촉해 오거나 국제적으로 알려진 왕족, 왕실의 후예를 통해 거액의 차관을 알선하겠다는 유혹으로 접근해 오지. ‘차관을 얼마 조달해 주겠으니 정부나 중앙은행이 지급보증을 서 달라’ 이런 식이야. 이들은 보증서 또는 위임장을 받으면 그 사본을 국제금융시장에 내놓고 그 때부터 지하에 은폐되어 있는 불법자금을 끌어 모으는 거야. 이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곤욕을 치를 것이 뻔하지 않겠나. 국제무대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얘기지.
1999년 있는 DJ의 외환위기 극복 선을 놓고 말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정책의 고삐를 너무 빨리 놓았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좀 더 우리가 구조조정을 심화시키고, 기업의 회계질서의 투명성을 더 분명하게 하는 그런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노동계 측에서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다. 왜 (외환위기 극복을) 서둘러 선언했는지, 결과적으로 우리 국민들을 너무 빨리 안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느냐. 특히 정부 구조조정을 못했다. 이 부분이 제일 아쉽다.
70~80년대 고도성장을 이끈 경제관료로 現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1974년 1차 오일 쇼크로 촉발된 외환위기 때 한국은 진짜 부도가 났다. 국민들이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넘어갔을 뿐이다. 1974년 외환위기는 1997년과는 다르다. 그 때는 산업구조 자체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했었다.’
당시 원유 값은 배럴당 3달러에서 1973년 12월 11.7달러로 4배 가까이 폭등했습니다. 이에 따라 무역적자는 1973년 10억 달러에서 1974년에는 24억 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합판과 가발을 팔고, 일부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 조금씩 외환보유액을 쌓아가던 정부 곳간이 바닥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습니다.
그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정인용 씨는 훗날 “1차 오일쇼크 당시 외환보유액은 1,000만 달러 전후로 떨어졌다. 국가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다. 가방 하나 들고 외국에 나가 매일 이 은행 저 은행을 구걸하다시피 찾아 다니면서 간신히 국가 부도를 면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974년 오일쇼크로 촉발된 외환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돈 빌리기에 나섰던 주역은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김 前 위원장은 “1974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은 한마디로 ‘처절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면서 “그 때는 유동성 위기 뿐 아니라 제조업이 전체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1997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