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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이슈 분석

[Personnel]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4] : 김용환 前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작성자kibiss|작성시간07.10.28|조회수129 목록 댓글 0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4] : 김용환 前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

 

“DJ가 지방에 내려가서 외환위기는 다 끝났다고 선언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책의 고삐를 너무 빨리 놓은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노동계도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는데 그 분위기를 그대로 끌고 가 구조조정을 더 심화시켜야 했다. 특히 정부 부문 구조조정이 미뤄진 게 너무 아쉽다.” (1999년 11월 19 김대중 前 대통령은 경남 창원에서 열린 바르게살기중앙협의회 전국대회에서 외환위기 극복선언. 2000 4월에 진행된 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5개월 여 남겨 놓은 시점)

 

외환위기 당시 외채협상을 주도한 김용환(75) 前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외채협상 과정에서 DJYS에 대한 평가, 그리고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까지 거침없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습니다. 박정희 시대를 풍미한 경제관료이자 1997년 12월 18 대선 때에는 자민련 부총재로 그 당시 국민회의 측과 후보를 단일화하며 DJ정권 탄생에 공을 세운 그는 1992년 12월 22부터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채권국가를 돌며 단기채무의 장기전환 등 외채협상을 이끌었습니다.

 

혹시라도 말을 놓칠까 주요 답변 내용을 메모지에 적어가며 인터뷰에 응한 그는 “DJ Pro Labor Leader(노동계급지도자)지만 집권 초기(외환위기 당시)에는 시장친화적 경제정책을 펼쳐 다른 국가에 비해 위기를 빨리 극복할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한다고 평가했습니다.

 

외채협상에서 現 경제상황으로 화제가 옮겨가자 그 때처럼 추운 겨울이 다시 오지 않아야 하는데 現 상황이 녹록치 않다고 걱정하던 그는 참여정부에 대해 現 정권의 반 시장적 경제정책이 계속되는 한 경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DJ와의 인연을 묻는 질문에 김 前 위원장은 이헌재이규성, 진념, 허남훈(비대위 자민련 측 대표) 4명을 김대중 前 대통령께 천거했는데 한 사람(허남훈)만 입각을 못했다는 내용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외채협상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은, 원금 탕감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재경원과 비대위 간의 의견을 조율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그것이 어려운 점이 하나였고, 다른 하나는 이자는 탕감을 받더라도 원금은 기한연장을 할지언정 전액 우리가 갚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한국에 돈을 빌려줘도 최소한 원금은 떼일 염려가 없다.’ 그런 기록을 남겨야 국제시장의 신뢰를 얻는다. ‘한국에 돈 빌려줬다 잘못되면 원금까지 날린다.’ 이런 말이 돌아서야 어떻게 협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내 정책 당국자는 물론이고 DJ(유종근 당시 대통령 당선자 경제고문)에서도 원금의 일부는 탕감받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주장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내가 워낙 강하게 드라이브 거니까 승복하고 넘어갔다.

 

미국 등 국제금융사회에서 새로운 정부(DJ)에 대해 우려가 많았다는데.

 

미국은 DJ정권이 앞으로 한국경제를 어떻게 움직여 나갈 것인지를 깊이 있게 관찰했다. DJ의 정치적 칼라 때문이었다. ‘프로 레이버(친노동자) 리더아니냐는 의심이었다. 미국에서 DJ의 성향을 파악하려고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그들이 DJ를 면담할 때 내가 옆에 배석한 적이 많았는데, DJ의 말을 듣다 보면 그가 확실히 프로 레이버 리더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러나 DJ는 미국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 때 가장 입에 오르내리던 화두가 구조조정이었다. DJ는 자신이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노동계급을 중요시하고 그 사람들을 도와줘야 경제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 한계는 어디까지나 시장의 힘에 의존해야 한다.” 또 이런 말도 하는 것을 옆에서 들었다. “외자에 대해서는 완전개방하겠다. 우리 기업이 미국에서 공장을 짓고 활동하면 미국 기업이지 우리 기업이 아니듯이 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 공장을 세우면 우리 기업이 아니겠느냐.” 미국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고 안심하고 신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대로 따져 보면 DJ프로 레이버 리더인 것은 확실하다는 느낌이다. 또 그가 現 노무현 좌파정권의 단초를 열어 준 것도 사실아니냐. 그런 점에서 DJ가 입각을 여러 차례 요청했을 때 응하지 않는 것을 지금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現 좌파정권(참여정부0의 단초를 열게 한 김대중 정부에 몸담지 않은 내 처신에 대해 후회는 없다. 그러나 DJ가 경제정책에 관해, 특히 초기에는 시장친화적 경제정책을 전개, 다른 나라에 비해 효과적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점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

 

외국자본이 IMF를 통해 한국을 길들이려고 했다는 지적도 있는데.

 

그 무렵 그러니까 노태우 정권 후기부터 YS정권 초∙중기까지 한국경제의 성장속도는 무척 빨랐다. 그 뒤 잘못된 경우도 있지만 현대, 대우 등 이런 거대 기업들이 소위 세계경영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무서운 속도로 커 나가자 선진국들이 한국기업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다국적 기업들과 국제금융계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저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을 것이고, 견제도 많았을 것이다. 물론 내가 무슨 증거를 갖고 하는 말은 아니다.

 

외채협상을 진행하면서 얻은 교훈이 있다면.

 

다시는 외환위기를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면 바로 그것이 교훈이겠지. 우리가 너무 몰랐던 국제금융계의 생리를 깨달았다면 그것 역시 교훈이고, 우리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 약점을 악용하려는 마수가 반드시 접근해 온단 말이야. 우리의 약점을 노리는 국게 고리대금업자들이 활개를 친다 이거야. 이들은 교포사회의 연줄을 통해 접촉해 오거나 국제적으로 알려진 왕족, 왕실의 후예를 통해 거액의 차관을 알선하겠다는 유혹으로 접근해 오지. ‘차관을 얼마 조달해 주겠으니 정부나 중앙은행이 지급보증을 서 달라이런 식이야. 이들은 보증서 또는 위임장을 받으면 그 사본을 국제금융시장에 내놓고 그 때부터 지하에 은폐되어 있는 불법자금을 끌어 모으는 거야. 이렇게 되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곤욕을 치를 것이 뻔하지 않겠나. 국제무대에서도 그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는 얘기지.

 

1999년 있는 DJ의 외환위기 극복 선을 놓고 말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다.

 

나 역시 정책의 고삐를 너무 빨리 놓았다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다.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좀 더 우리가 구조조정을 심화시키고, 기업의 회계질서의 투명성을 더 분명하게 하는 그런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그 때만 해도 노동계 측에서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다. (외환위기 극복을) 서둘러 선언했는지, 결과적으로 우리 국민들을 너무 빨리 안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느냐. 특히 정부 구조조정을 못했다. 이 부분이 제일 아쉽다. 노무현 정부 들어와서 정부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다. 국가의 가용자원을 민간이 쓰느냐, 공공부문이 많이 쓰느냐에 따라 경제체질이 완전히 달라진다. 재원을 공공부문이 자꾸 쓰면 민간부문이 밀려 나간다. 모험과 창의성, 그리고 생산적 능률을 주된 수단으로 하는 민간부문이 줄면 미래 추동력이 약화될 수 밖에 없지 않겠나.

 

70~80년대 고도성장을 이끈 경제관료로 現 경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정부가 개입하고 뒷받침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깊이 관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의 경제철학은 경제는 기업이 하는 것이다였다. 지금 노 정권과 같은 일은 하지 않았다. 지금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는 첫째 이유는 (참여정부의) 반 기업적 규제, 반 기업정서 또 나아가서는 반 시장적 경제정책에 있다. 두 번째로는 경제를 정치적 관점에서 다루려고 하는 좌파적 태도가 문제이다. 경제는 기업의 투자와 국민의 자신감에서 이뤄는 것이지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본질적으로 생산성이 낮다. 일자리를 정부가 만든다는 착각, 이것이 경제가 안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도 정말 문제이다. 우리가 외환위기를 당한 것도 정부, 국민이 선진국 수준의 소비수준을 구가하려는 욕구 때문 아니었나.

 

 

“1974 1차 오일 쇼크로 촉발된 외환위기 때 한국은 진짜 부도가 났다. 국민들이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넘어갔을 뿐이다. 1974년 외환위기는 1997년과는 다르다. 그 때는 산업구조 자체가 총체적 위기에 봉착했었다.’

 

김용환 前 비대위 위원장은 재무부장관(1974~1978) 때 겪었던 1974 1차 석유파동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1973년 10월 64차 중동전쟁으로 촉발된 오일 쇼크는 물가상승은 물론 무역적자 확대와 외환보유고 감소로 이어지면서 국가부도 경고음이 요란했습니다.

 

당시 원유 값은 배럴당 3달러에서 1973 12 11.7달러로 4배 가까이 폭등했습니다. 이에 따라 무역적자는 1973 10억 달러에서 1974년에는 24억 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합판과 가발을 팔고, 일부는 외국에서 돈을 빌려 조금씩 외환보유액을 쌓아가던 정부 곳간이 바닥나는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습니다.

 

그 당시 재무부 차관이었던 정인용 씨는 훗날 “1차 오일쇼크 당시 외환보유액은 1,000만 달러 전후로 떨어졌다. 국가 부도 직전의 상황이었다. 가방 하나 들고 외국에 나가 매일 이 은행 저 은행을 구걸하다시피 찾아 다니면서 간신히 국가 부도를 면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974년 오일쇼크로 촉발된 외환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돈 빌리기에 나섰던 주역은 당시 재무부장관이었던 김용환, 차관인 정인용, 그리고 금융정책과장인 이헌재 씨 등 3인이었습니다.

 

김 前 위원장은 “1974년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은 한마디로 처절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면서 그 때는 유동성 위기 뿐 아니라 제조업이 전체적으로 붕괴 직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로부터 23년이 흐른 1997 12. 김용환 당시 자민련 부총재는 DJ의 요청을 승락, 비대위 위원장을 맡고 외채 협상을 주도하게 됩니다. 1974 1차 외환위기를 한 중심에서 겪은 그는 1997년에 다시 환란 극복 최일선에 나서게 되는 기이한 인연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김용환 前 위원장은 비대위를 꾸리면서 산하에 실무기획단을 두었는데 고문에 정인용, 단장에 이헌재(당시 조세연구원 고문) 씨를 선임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때의 경험과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1974년에 뭉쳤던 3인방이 1997년에도 다시 활동하게 된 셈입니다.

 

김용환 前 위원장. 그는 이렇게 12차 외환위기를 한꺼번에 경험하게 됩니다. 그는 또 진념, 이규성, 이헌재 등으로 이어지는 재경부 재무라인의 맨 꼭대기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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