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神論(무신론)과 有神論(유신론)
불교는 무신론의 종교요, 기독교는 유신론의 종교다.
이것이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적 차이점이다.
이 차이점의 당연한 결론으로서
불교는 自力主義(자력주의)의 종교요,
기독교는 他力主義(타력주의)의 종교라는 명제가 생긴다.
먼저 불교부터 생각해 보기로 한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무신론 위에 서는 종교다.
불교는 불타의 가르침인 동시에 사람은 누구나
다 佛陀(불타)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神(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불타는 신도 아니요,
또 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은 사람도 아니다.
그는 한 인간이었다.
6년의 修道(수도) 끝에
인생의 대진리를 깊이 깨달은 자가 된 것이다.
불타는 완전한 覺者(각자)다.
사람은 누구든지 진지한 수도를 하면
불타, 즉 완전한 각자가 될 수 있다.
神(신)의 은총이나 聖靈(성령)의 힘이 필요치 않다.
불타는 하나의 理想的 人間像(이상적 인간상)이다.
그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완전한 智慧(지혜)와 慈悲(자비)의 인격을 이루었다.
그가 깨달은 진리의 내용이 불교이거니와,
그 진리의 내용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진리다.
'佛法(불법)에 不可思議(불가사의)가 없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불교에 의하면 우리가 믿고 의지할 것은
自己(자기)와 진리밖에 없다.
신을 믿을 필요도 없고 신의 힘을 의지할 필요도 없다.
나는 自力(자력)으로 나를 구원할 수 있고
나는 佛性(불성)을 지니기 때문에
解脫(해탈)과 涅槃(열반)의 自由自在境(자유자재경)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마음이 곧 부처다.
心卽佛(심즉불)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믿고 의지할 것이 무엇이냐.
우리는 무엇을 인생의 등불로 삼고 살아갈 것이냐.
安心立命(안심입명)의 발판을 어디서 구할 것이냐.
여기에 대해서 석가는
자기 자신과 진리 이외에
믿고 의지할 것이 없다고 단언하였다.
'내가 나의 등불이요,[自燈明(자등명)]
진리가 나의 등불이다.[法燈明(법등명)]
내가 나의 의지처요[自歸依(자귀의)],
진리가 나의 의지처다.[法歸依(법귀의)]'라는
이 유명한 명제는 불교가 얼마나 자력주의의
종교인가를 웅변으로 실증한다.
석가는 운명하면서 제자들에게 최후의 말을 이렇게 말했다.
'게으르지 말고 노력하라.'
그는 인생의 부단한 정진을 강조했다.
오직 자기와 진리를 믿고 쉬임없이
노력하라는 것이 석가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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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요, 하느님이 우리의
등불'이라고 믿는 기독교의 타력주의적 신앙과
불교의 자력주의적 신앙은 종교적 자세에
있어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다.
기독교는 유신론과 他力主義(타력주의)의 종교다.
기독교의 신은 어떠한 신인가.
파스칼은 그의 유명한 종교적 回心(회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라함의 神(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
철학자 및 識者(식자)의 신이 아니다.'
자기가 믿는 성서의 신은 옛날 아브라함이 믿었고
이삭이 믿었고 또 야곱이 믿었던 신이다.
철학자나 과학자들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는
第一原因(제일원인)으로서의 신이나
형이상학적인 抽象神(추상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가 믿는 신은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인격신이다.
인간은 불타가 될 수는 있어도 신이 될 수는 없다.
불교에서는 스스로의 修道(수도)에 의한
구원과 해탈이 가능하지만
기독교에서는 자력주의에 의한 자기 구원은 불가능하다.
내가 나를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통해야 한다.
빛은 내 속에 있다.
이것은 불교적인 인간관이다.
빛은 나의 밖에 있고 나의 위에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빛에 의해서 비로소
빛에 참여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적 인간관이다.
이상에서 나는 기독교와 불교의 기본적
차이를 대비해 보았다.
불교는 苦(고)의 원리와 자각의 방법과
무신론의 입장과 자력주의를
토대로 하는 理性(이성)의 종교요,
기독교는 罪(죄)의 원리와 신앙의 방법과
유신론의 입장과 타력주의를 토대로
하는 超理性(초이성)의 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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