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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스님의 일화

작성자청해[김광열]|작성시간18.03.04|조회수39 목록 댓글 0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 스님의 제자

◈실화=春城 스님의 일화

(春城 1891~1977) 춘성 스님 종교의 참 뜻을 깨우친 선승으로 속명은 이창림(李昌林),

1891년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서 태어나 1901년 13세 때 백담사에 출가하여

10여년간 만해 한용운을 모시며 수학하였다.

1919년 설악산 신흥사의 주지가 되었고 1929년 만공의 법을 이어받았다.

1950년 6.25 전쟁 때에는 북한산의 망월사를 떠나지 않았다.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써서 욕쟁이 스님으로도 통했으나 평생을

옷 한벌 바리때 하나만으로 살다간 무소유의 실천가였다.

50여년을 망월사에서 보냈는데 80 노구에도 잠을 주무시지 않고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과 망월사 선원 큰방에서 대중들과 같이 수행에 전념하는 모습은

이제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1977년 불국사에서 나이87세, 법랍 74세로 입적하였다.

유언에 따라 사리와 재는 서해에 뿌려졌다.

춘성스님의일화 제 1 화 하루는 제자 하나가 스님에게 질문하였다.

"스님!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 발 내디디면 그 다음 경계는 어떤 것입니까?"

"야! 이 새끼야. 내가 떨어져봤어야 알지.

" 제 2 화 통행 금지가 있을 때....

하루는 통행 금지 시간을 지나서 스님이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순찰하던 방범대원과 마주치자 방범대원이 물었다.

"거기 누구요?" "나? 중대장이야." "아니 스님 아닙니까?"

"그렇지, 내가 바로 중의 대장이지."


제 3 화 스님은 생전 서랍이든 문이든 잠그지 않았다.

걱정이 된 제자 하나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그래도 잠가야죠."

"야 이눔아! 내가 아비 어미 다 버리고 중이 되었는데 무엇이 그리 중요한 게

있다고 잠그겠냐?" 제 4 화 하루는 스님이 서울역에서 전철을 탔다.

잠시 후 "예수 천국, 불신자 지옥" 피켓을 든 기독교인들이 스님이 있는 칸에

우르르 몰려 오다가 스님을 발견하곤 스님 앞에 다가와 점잖게 말했다.

"죽은 부처를 믿지 말고 부활하신 예수를 믿으시오.

그래야 천국에 갑니다."

순간 전철 안 사람들의 눈이 휘둥굴해졌고 스님의 기골이 장대한지라

분명 싸움이 나겠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스님이 그 말을 건넨 사람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부활이 뭔데?" "부활은 죽었다 살아나는 것이오.

부처는 죽었다가 살아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셨오.

그러니 죽은 부처보다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이 휠씬 위대하지 않소?

예수님을 믿으시오"

"죽었다가 살아나는 게 부활이라고?" "그렇소."

스님은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너는 내 거시기를 믿어라.

내가 여태 살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거시기밖에 보질 못했다.

내 거시기는 매일 아침 예수같이 부활하니 너는 이제부터 내 거시기를 믿거라.

" 피켓을 든 기독교인들은 혼비백산 사라졌고

이를 지켜보던 전철 승객들은 박장대소했다고 한다.

제 5 화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스님은 육영수 여사 생일에 초대되었다.

그 자리에서 불자인 박 대통령과 육 여사가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마이크 앞에서 아무런 말도 않고 잠자코 있었다.

침묵이 길어져 참가자들의 기다림이 한계점에 이르게 되자 스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육영수 보살이,

지 애미 보지에서 응아하고 나온 날입니다.

듣고 있던 대중들은 영부인의 생일에 한 이 법문에 놀라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어쩔 줄 몰라했다.

하지만 스님은 아무 표정없이 할 말을 했을 뿐이란 표정이었고

육여사 또한 스님의 법력을 아는 지라 미소만 지으셨다.

6 화 또 한번은 육 여사가 춘성 스님이 큰 스님임을 깨닫고 뵙기를 청했더니....

"나와 연애 한 번 하자."고 하여 육여사가

"몸과 마음을 바쳐 불사에 힘쓰겠다." 고 대답하고는

이 사실을 박대통령에게 알리니 박대통령이 "불교계에 큰 스님이 나셨다.

" 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고 한다.

역시 도(道)란 평등심에서 나온다.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천한 사람이라 해서 도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이 세상은 공평해서 50이 넘어서 흰머리 안 나는 사람이 없고,

태어날 때 울지 않는 자가 없으며 똑같이 이 세상을 한 번 왔다가는 것이다.

이만하면, 그 콧대 높은 부인네들에게 좋은 무상 법문을 해준 것 아닌가....

제 7 화 스님이 금강산 유점사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

스님은 정진 중에 사정없이 몰려오는 졸음을 물리치기 위해 법당 뒤 빈터에

구덩이를 파고 큰 항아리를 묻은 다음,

그 항아리에 냉수를 가득 채웠다.

엄동설한, 자칫하면 항아리가 얼어 터질 지경이었는데 스님은 참선

수행을 하다가 졸음이 밀려오면 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찬물이 담긴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머리만 내밀고 앉아 큰 소리로 외쳤다.

“허허! 이제야 졸음한테 항복을 받았다!” 

  제 8 화 수행자로서 춘성 스님은 참으로 무서운 분이셨고 서릿발 같은 분이셨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참선 수행을 할 적에 젊은 수좌들이

담요를 덮고 자다가 스님에게 들키면 그 자리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고 한다.

“어떻게 수행자가 편하게 따뜻한 잠을 잘 수 있느냐? 이 씨부랄 놈아....

  그 담요 당장 이리 내놓지 못하겠느냐!”

스님은 기어이 젊은 수좌로부터 담요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그토록 수행에 철저했던 스님이 서울 근교 어느 비구니 사찰

중창 불사를 위한 법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법문을 남기기도 했다.

“시집 장가 가는데는 보지와 자지가 제일이듯.

중창 불사 하는데는 돈이 제일이니 오늘 이 법회에 온 년들아,

돈 많이 시주하고 가거라!”

제 9 화 만해가 독립 운동 관련으로 옥살이를 할 때

그 뒷바라지를 수제자인 춘성이 맡아 하였는데 옥중에 계신 스승을 생각하며

한겨울에도 장작을 쌓아놓고도 불을 지피지 않고

냉방에서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설같이 남아있다.

하루는 두툼한 솜옷을 마련하여 만해를 면회 갔는데 만해가 이 솜옷의 출처를 물었다.

스님은 솔직하게 절의 땅을 팔아 마련했다고 하니 만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놈아, 절의 땅을 네 마음대로 팔아 옷을 장만해!

나는 너같은 놈을 제자로 둔 일없으니 다시는 스승이라 부르지 말라." 고 했다.

스님은 땅이야 절이 나중에 도로 사면 되지만

스승의 옥체는 상하면 회복되기 어려우니 그리하였다고 변명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 후 춘성은 스승이 누구냐고 물으면

"저에게는 은사가 안계십니다." 고 답했다고 한다.

제 10 화 스님이 입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학이 물었다.

  "스님께서 열반에 들어 다비를 하고 난 후,

스님의 사리가 안 나오면 신도들이 실망할 텐데요?"

그러자 스님이 큰소리로 말했다.

"야, 이 시발 놈의 자슥아! 내가 신도 위해 사냐?"

스님은 입적 후, 절대로 사리를 찾지 말고 비석과 부도도 세우지 말 것이며,

오직 수행에만 힘쓰라고 당부했다.

이토록 투철한 수행과 특이한 기행으로 한 평생을 살다 가신 스님을 보내는 날 밤,

후배 선승들은 다비식장에서

스님이 생전에 즐겨 부르시던 <나그네 설움>을 부르며 춘성 스님을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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