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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와 요석공주

작성자청해[김광열]|작성시간18.09.16|조회수26 목록 댓글 0



◈고전=원효대사와 요석공주◈

      아리따운 여인 원효가 소요산 암자에서 혼자 수도할 때의 일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낯선 젊은 여자가 찾아와 하룻밤을 묵고 갈 것을 청했다. 원효는 비내리는 밤이므로 그 여인을 되돌려보낼 수가 없어 하룻밤 묵어 가도록 허락했다. 침침한 등불에 비친 그 여인은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수도승인 원효는 괜히 여자를 맞아들였다고 뉘우쳤지만 이미 허락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눈을 감아도 이 여인의 모습이 떠올라 원효는 정진(精進)을 할 수 없었다. 원효는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일어나는 법이다. 내가 色心이 없다면 이 여인은 목석이나 다름없다. 나의 오랜 수도(修道)를 이 여인으로 인하여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없다." 고 되뇌면서 비에 젖은 여인을 따뜻한 곳으로 눕히고 손으로 차가운 몸을 주물러 녹여주었다. 원효는 묘한 느낌이 일어나지만 마음속으로 염불(念佛)을 하면서 유혹을 물리쳤다. 얼마 후 몸이 풀린 여인은 자리에 일어나 앉아 원효에게 요염한 눈길을 보내고 접근해왔다. 원효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벽녘에 원효는 간밤에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계곡에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맑은 물에 몸을 담구어 간밤에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서 유혹을 물리친 불심(佛心)으로 기쁨에 젖어 있었다. 마침 그때 우연히 앞을 바라보니 아침 햇살에 비친 그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이 갑자기 보여 원효 는 가까이 오지 말도록 나무랐다. 그때 그 여인은 "제가 스님을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님이 저를 색안(色眼)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대꾸하였다. 원효는 이 말을 듣고 난 뒤 눈이 캄캄해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 자신을 되돌아보니 광명을 찾은 듯 그의 눈에는 주위 사물이 밝게 보였다. 원효는 "나는 이제 깨달았다." 하면서 물 속에서 나와 옷을 벗은 채로 여인 앞으로 지나갔다. 그때 그 여인은 더 이상 요염한 여자가 아니라 금빛 찬란한 후광(後光)을 띈 관음보살(觀音菩薩) 이 되어 폭포 위로 사라졌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원효의 佛心을 시험하기 위해 잠시 인간으로 現身한 것이다. 이 절 이름을 자재암(自在庵)이라고 고쳐 불렀던 이유는 아무거리낌 없이 마음과 뜻을 다스릴 수 있었다는 원효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2] 깨달음 원효대사((617-686))는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 지방인 압량군 불지촌(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으로 추측)에서 태어났으며, 세속에서의 성은 설(薛)씨였다, 그는 특별히 한 스승을 정하지 않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널리 배움을 구하였고 한다. 그러던 중에 앞서가는 불교를 배우려고 그 무렵에 문화의 중심지로 불교가 융성하던 당 나라로 떠나기로 하고 일곱살 아래인 의상 대사와 동행하였는데, 고구려 국경을 넘다가 그곳을 지키는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타오르는 구도심을 잠재울 수 없었던 원효 대사는 의상 대사와 함께 다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는데 처음과는 달리 바닷길로 가기로 하고 가다가 어느 날 원효와 의상은 날이 저물어 인적이 없는 산 속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두 스님은 바람과 한기를 피하여 무덤 사이에 잠자리를 구하고 잠을 청하였는데 잠을 자던 원효가 몹시 심한 갈증을 느껴 눈을 떠보니 캄캄한 밤중이었다. 물을 찾아 주위를 살펴보니 어둠 속에 바가지 같은 것이 있어 다가가 보니 물이 고여 있었다. 물맛을 보니 굉장히 달콤하였다. 스님은 단숨에 그 물을 들이키고 안락한 기분으로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스님은 간밤에 자신이 마신 바가지를 찾으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무덤 주위에는 바가지는 보이지 않고 해골만 뒹굴고 있었다. 스님이 바가지라고 여겼던 것은 바로 해골이었으며, 달콤했던 물은 그 해골 안에 고여 썩어 있던 빗물이었다. 스님은 갑자기 뱃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원효는 문득 깨달았다. '간밤에 아무 것도 모르고 마실 때에는 그렇게도 물맛이 달콤하 고 감미로웠는데,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자 온갖 추한 생각과 함께 구역질이 일어나다 니!' 그리하여 원효 대사는 한순간에 깨달음을 얻고 그 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는 곧 진리이다. 당나라에 진리가 있다면 그것이 왜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는 이처럼 인간의 내면 속에 간직되어 있는 마음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또한 신라인으로서 주체적인 자각을 이루고 있다.) 밤사이에 원효의 곁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의상은 다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가 아무런 채비를 하지 않고 있는 원효에게 물었다. "아니 스님. 왜 길을 떠날 준비를 하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당 나라에 유학 길을 떠난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 "그야 물론 도를 구하기 위해서지요." "이미 도를 구했다면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지요." 원효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의상대사와 헤어졌다. 그 길로 신라로 되돌아와, 무덤에서 깨달은 법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였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스님의 높은 덕은 신라 땅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으며, 요석공주와의 인연으로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이두(吏讀) 문자를 집대성한 대학자 설총이었다. 대사는 그때부터 머리를 기르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 또는 복성거사(卜性居士)라 칭하며,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가지고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라는 말에서 무애를 따다가 무애무(無碍舞)라는 춤을 추고 무애가를 지어 노래하며 다녔다. 이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과 무식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려는 뜻에서 행한 것이었다. 이렇게 행함으로서 귀족사회와 상류층에서만 신앙되던 신라의 불교를 널리 대중화시켜 누구 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3] 요석공주 원효대사는 신라의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큰 소리로 "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라고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태종무열왕은 누가 귀부인을 원효대사와 맺어주면 국가에 큰 일을 할 사람을 낳겠다는 의미라고 간파하였다. 마침 문무왕 의 딸인 요석공주(무열왕의 둘째 누이)가 백제와의 싸움으로 인해 남편을 잃은 후라 원효대사를 그녀와 맺어줄 것을 결심하고 그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요석공주 또한 이미 원효대사의 명성을 들어왔던 터라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원효대사가 경주에 있는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난다는 것을 미리 조사한 궁리들이 이 사실을 요석공주에게 알리자 그녀는 어떻게 해서라도 궁내로 모시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나졸들은 문천교 밑에 숨어 있다가 원효대사가 오는 것을 보고 일제히 길을 막은후 요석궁 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원효대사가 껄껄 웃으며 못 가겠다고 하자 나졸 중의 대표 한 사람 이 자신과 무술을 겨루어 대사가 지면 요석궁으로 가고 반대로 이기면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제안을 하였다. 이 말에 대사는 족히 승낙을 하고 무술을 겨루었는데 출가하기 전 낭도로서 무예가 특출했던 원효대사와 나졸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요석궁으로 꼭 모시고 오라는 지엄한 명을 받은 나졸들이 이번에는 일제 히 원효대사에게 달려 들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졸들이 덤비는대로 원효대사 는 가볍게 들어 문천교 밑으로 떨어뜨리니 다리 밑에는 허위적 거리는 나졸들이 점점 늘게 되었다. 마지막 나졸 한 명과 함께 원효대사가 문천교 밑으로 일부러 빠지니 나졸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모르고 자연스럽게 요석궁으로 모시고 갈 수 있었다. 젖은 옷을 말려드린다는 구실을 삼아 요석궁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이 때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을 낳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원효대사는 파계하였다고 속복으로 바뀌어 입고 소성거사라고 자칭하면서 우연히 광대들이 놀리는 큰 박을 보고 도구를 만들어 무애라 이름 짓고, 촌락으로 다니면서 많은 사람을 교화하기 시작하여 후일 삼국통일의 원천이 될 수 있도록 하였던 것이다. 원효대사는 대략 30∼40세 정도 되었을 때 소요산에 머무르며 지금의 원효대에서 공부를 하며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요석공주도 설총을 데리고 소요산에 들어와 조그마한 별궁을 짓고 매일 아침 저녁 으로 원효대사가 공부하는 원효대를 향하여 삼배를 드렸다고 전 해오고 있으며, 그 때의 별궁 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 요석궁지라 불리고 있다. *참고문헌 양주군지 편집위원회편, 양주군지, 양주군, 1978. (언제 요석공주와 설총이 북쪽 멀리 소요산까지 오게되었는지 기록은 전해오지 않는다. 다만 원효대사가 수도한 자재암 가까이 거처를 정하고 母子가 머물렀고 이들이 머문 집이 요석궁터로 전해오고 있다.)

      출처:아름다운 황혼열차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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