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지게를 진 최인규
권사 (1881-1942)
우상숭배 반대 외치다 결국 옥중 순교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현재 동해시) 천곡(泉谷)교회에 최인규(崔仁圭) 권사가 있었습니다. 평범한 농부로 40세가 넘어 신앙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 소유 땅 1천여 평을 교회 자립 기금으로 내놓았으며 목사가 없는 교회 강단을 지키며 실질적인 목회자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단순하면서도 철저하였습니다. 신사참배는 물론 동방요배도 거부하였으며 교인들에게도 신사참배가 죄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1938년에 이미 감리교회 총리원에서는 감독 명의로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종교 의식이 아닌고로 신사에 참배하는 것이 신앙에 위배되는 것은 아니다”는 내용의 공문이 내려왔으나 최 권사는 성경과 신앙 양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최인규 권사가 일본 경챨에 체포된 것은 1940년 6월이었습니다. 경찰 당국은 처음에 “너보다 많이 배운 교회 지도자들도 모두 신사에 참배하는데 너 같은 시골교회 권사가 왜 말썽을 피우느냐?”며 구슬렀습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혹독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래도 안되자 경찰은 최인규 권사를 끌어내 똥지게를 지우고 “나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요!”라고 외치며 동네를 돌게 했습니다. 경찰은 채찍으로 치면서 그의 뒤를 따랐습니다. 교회와 마을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그에게 모욕을 주어서라도 신사참배를 하게 만들고 마을 사람들에게도 경고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최 권사는 오히려 ‘이렇게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신 것에 감사한다’고 하면서 기쁜 낯으로 똥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누구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일본 경찰서장마저 교인들에게, “믿으려면 최인규처럼 믿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최인규 권사는 ‘불경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2년 선고를 받고 함흥과 대전 형무소에서 복역했습니다. 감옥 안에서도 그의 투쟁은 계속되었습니다. ‘정신병자’로 몰려 독방에 갇히기도 여러 차례,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결국 건강이 급속히 나빠져 빈사상태에 이르러서야 대전 형무소 병감으로 옮겨졌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1942년 12월 16일 오후 2시, 그의 나이 예순 둘이었습니다.
최인규 권사 순교기념비: 최인규 권사의 유해는 해방 후 1946년에야 대전 형무소에서 찾아다 삼척읍교회 뜰에 묻고 순교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리고 후에 유골은 그가 다녔던 천곡교회로 이장되었고 거기에도 순교기념비를 건립했다. 천곡교회에는 그가 사용했던 강대상이 보관되어 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옥중 순교한 감리교인으로는 최인규 권사 외에 철원읍교회의 강종근 목사, 회양읍교회의 권원호 전도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