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미시령에
사랑하는 여자
원수 같은 여자가
붉은 치마를 입고 그네를 뛴다
죄 없는 짐승
노루새끼가 놀라 달아나고
파도 한 줄기가 그네를 할퀴고 지나가자
내가 사랑하는 여자
원수 같은 여자
그넷줄을 놓고
동해로 풍덩 빠진다
미시령 / 정호승
새삼나무 싹이 튼 담우에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엣 새는 파랑 치마 입고,
산엣 새는 빨강모자 쓰고.
눈에 아름 아름 보고 지고.
발 벗고 간 누이보고 지고.
따순 봄날 이른 아침부터
산에서 온 새가 울음 운다.
산에서 온 새 / 정지용
수만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온 하늘에,
하나, 둘, 셋, 별이 흐른다.
할아버지도
아이도
다 지나갔으나
한 청년이 있어, 시를 쓰다가 잠든 밤에……
어두운 밤에 / 천상병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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