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section-009000000/2001/12/009000000200112210126001.html
한국 근대사 숨은풍경들-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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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한말 동대문-종로구간 전차 개통식을 당시 동대문 옆 전차고에서 열고있는 모습이다. 멀리 낙산의 완만한 구릉을 배경으로 구경꾼들이 동대문 전각과 그 주변을 빽빽히 메웠다. 조악한 지붕아래 장난감 열차처럼 들어앉은 옛 전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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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숨은풍경들
I. 뒤틀린 근대성의 상징들
5. 탈것 ① 전차
“…차장은 다시 그의 옆으로 왔다. 어디를 가십니까. 구보는 전차가 향하여 가는 곳을 바라보며 문득 창경원에라도 갈까,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싸인도 하지 않았다. 갈 곳을 갖지 않은 사람이, 한 번 차에 몸을 의탁하였을 때, 그는 어디서든 섣불리 내릴 수 없다…”
식민지시대 탁월한 세태소설가 박태원은 소설 <구보씨의 일일>에서 당시 지식인들의 내면을 휘감았던 모더니즘의 의식세계를 전차 공간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경성 시내를 방황하던 주인공 구보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부대끼며 사람 사이의 인연을 강제하는 근대 도시생활의 공허함과 혼란상을 전차 속에서 절절이 느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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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대 경성 남대문통 1정목의 출근길 러시아워 모습. 동일은행(현 조흥은행의 전신)앞에 전차들이 연이어 서 있다.(위) 평양 중심부 대화정을 달리는 전차의 주행장면.(가운데) 경성 남대문통에서 찍은 전차의 주행모습. 자전거·자동차·수레 등과 나란히 달리고 있다. |
1899년 5월 서울의 서대문~청량리간 구간에 처음 개설된 전차는 당시 조선을 찾았던 외국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도입시기가 빨랐다. 일본의 교토와 도쿄 다음으로 도입된 전차의 역사는 중국보다도 앞서는 셈이다. 일설에는 고종이 미국 장사꾼 콜브란의 농간에 넘어가 덜컥 전차 설치를 허용했다는 뒷말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 초창기 기묘한 괴물로 취급되어 기피당했던 전차는 한일병합 뒤 도시가로개발과 마포선·왕십리선 등의 신설로 급속히 탑승객이 늘어난다. 1909년 경성의 하루 평균이용객이 7000여 명에 그쳤지만 39년에는 35만명에 이를 정도로 급증한다. 그러나 경성 전차를 운영했던 경성전기회사는 노선신설 등은 외면하고, 운행횟수만 늘리는 얄팍한 상혼으로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일제 36년간 경성 전차노선은 7km정도밖에 늘어나지 않았지만 수입총계는 100배 이상 격증한 것이 그렇다. 게다가 30년대초까지 마포, 청량리 등 조선인이 밀집한 변두리는 구간별 요금을 별도로 더 내게하고 일본인이 밀집한 용산은 시내구간으로 계산하는 차등제를 적용해 반일의식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전차공영제 논의가 20~30년대 여론의 쟁점이 되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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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0년대 경성부 전차-버스 노선도. 도심을 생선가시 모양으로 훑고 지나가는 전찻길과 그 사이 빈틈을 메우는 버스길이 서로 다른 색깔의 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
전차는 러시아워와 교통규칙 등 도심교통문화의 새 양상들을 낳았으나 어두운 그늘도 드리웠다. 그 하나가 교통사고였다. 개통 1주일만에 탑골공원 앞에서 어린이를 치어죽인 사고를 낸 것을 시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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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30년대 뚝섬과 광장동, 당인리 등 서울 외곽에서는 전차대신 `기동차'라고 불렸던 소형열차가 유력한 교통수단 구실을 했다. 당시 용산-당인리간을 운행했던 기동차가 당인리역에 서있다. |
중일전쟁 발발 뒤엔 수송난에 따른 만원전차 문제가 쟁점으로 떠올라 `사바세계의 아수라', `돈가지고 탈 수 없는 도심전차' 등의 제목이 연일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전차는 도시화의 부작용과 민족감정, 모더니즘 따위의 복잡한 근대화 부산물이 엉킨 도가니였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