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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두려움 상징 연개소문(펌)

작성자선무기천|작성시간06.10.29|조회수623 목록 댓글 0
"조선 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다"
中 경극과 지명 속에 등장하는 '두려움의 상징' 연개소문(淵蓋蘇文)
 
 
 
연개소문 초상화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연개소문에 대하여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을 한 바 있다. <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해 구 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 인물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연개소문을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열전> '연개소문' 편에는 포악하고 잔인하여 사람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였으며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워서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국사를 전횡, 당태종이 이를 정벌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7세기 중반에 동아시아의 패권에 대해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아닌 고구려의 막리지 연개소문과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격돌의 현장을 통하여 알아보자.

중국 경극 속의 연개소문

중국의 경극에서는 당태종이 고구려 동정에 나섰다가 연개소문의 병사에 쫓기게 되어 어니하(泥河, 진흙뻘강, 중국의 여러 곳에 있음)에 빠져 연개소문에게 붙잡혔는데, 연개소문이 항복하면 큰상을 내리겠다고 하며 항복을 종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연개소문이 중국 사람들에게 각인된 형상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존재인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물론, 경극 속에서는 그런 위기에 처한 당태종을 설인귀가 나타나서 연개소문을 무찌르고 당태종을 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경극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 중국 경극 속의 연개소문     ©브레이크뉴스

 

중국 대륙을 휩쓴 연개소문

중국의 장성이남에서 연개소문이 당태종 당나라 군사와 싸운 기록들을 보자.

산동성 봉래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현의 성 남쪽 묘산의 아래의 개울에 몸을 숨겼다가 날이 밝아 가마를 정비하고 서남쪽의 강을 건너다가 물에 빠진 후 투구와 갑옷을 말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이 전투에서 당태종의 형이 전사하였다.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했던 고성, 당태종 형의 사당인 대왕묘, 식수가 모자라 판 우물인 일검천, 당태종이 패하고 숨은 왕구촌, 당태종의 가마가 빠진 락가하, 투구와 갑옷을 말린 쇄갑하 등의 유적과 지명 등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어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산동성 즉묵시 마산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마산대전이 있었는데, 당나라 장수 김걸이 사망하고 당태종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갔는데, 이는 청대의 초영제본 '마산지(馬山志)'와 '즉묵향토지'에 실려 있으며 마산에는 지금도 연개소문이 주둔하던 대왕구와 김걸장군의 사당인 대왕묘가 남아 있다.

강소성 염성에서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의 전투에서 당태종이 연개소문에게 쫓기다 우물에 숨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살아났는데 목숨을 건진 것에 감격하여 그 우물터에 몽롱보탑과 정혜사를 세웠으며 그것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강소성 태주에 호국사가 있는데 당태종이 역시 연개소문에게 패하고 칠성장에 숨어 있다 살아나서 나중에 세운 절 이름이다.

강소성 숙천에는 고구려 연개소문 부대가 당나라 설인귀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던 유적이 남아 있는데 설인귀가 숨어 있었다는 장군동, 망을 보던 장대와 찬밥을 먹던 냉반대, 과광산, 오자산 등의 유적이 있으며, 고구려 군사가 주둔하던 청량원이 있다. 인근의 묘에서는 1996년에 투구와 철검 등이 출토되었다 한다. 강소성 비주에도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전투유적이 있다.

이 밖에도 북경 유역과 다른 지역에도 많은 기록들이 있지만, 위의 기록들은 필자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밝혀 낸 연개소문의 대륙에서의 활약을 발췌해서 요약한 것으로 기존의 학계에 전혀 나타나지 않은 것들이다.

이는 중국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황제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당태종이 그들의 사서에서 ‘정관의 치’라고 불릴 정도로 위업을 달성하고 당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를 하고 있지만 중국 현지 밑바닥에서 나타나는 기록과 유물들은 당태종이 그렇게 영명하고 위대한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연개소문과의 전투에서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 도망다니는 초라한 몰골의 당태종의 모습은 기존 사서의 그것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군기가 빠진 오합지졸을 흔히 ‘당나라 군대’라고 하는데 바로 위의 모습을 보면 그러하다.

당태종의 항복

또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안시성에서의 양만춘 장군과 당태종의 싸움에서 당태종이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 양만춘이 쏜 화살에 눈을 맞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고 고려시대의 이색은 “당태종은 고구려를 주머니 속의 물건 정도로 여겼으나 어찌 알았으랴 자기의 눈이 화살에 맞아 떨어질 줄을. 천추의 역사 속에 대담했던 양만춘이 화살로 용의 수염을 쏘아 눈동자를 떨어뜨렸도다”라고 노래하였다.

한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이때에 이세민(당태종)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하게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장을 갖추고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선도하게 하여 장안(長安)에 입성하여 이세민과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江左, 양자강 유역) 모두 고구려에 속한다고 약속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645년 5월 당태종은 유언으로 “다시는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고 당부하고 생을 마감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연개소문은 7세기 중반 당태종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고 실질적인 대륙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연개소문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한단고기에 인용된 것처럼 9살에 조의선인이 되었고 병사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였으며 항상 솔선수범했고, 법을 집행함에 엄정했으며,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전해져 올 정도로 병법과 지략에 뛰어났으며 고구려의 여러 부족과 백성을 총화단결할 수 있는 통치력과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지닌 진정한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연개소문 같은 우리의 위인에 대한 정확한 평가작업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흉악하고 잔인한 독재자 정도로만 알고 있는 연개소문은 7세기 동아시아의 진정한 패자였으며 고구려 역시 중원대륙을 섭렵하고 통치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다.    nambooktong1@korea.com
 

 

<연개소문과 칼 다섯 자루의 비밀>

흔히,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끈 사람하면 연개소문을 꼽는다. 게다가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극악무도한 포악한 독재자라 알고 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닌 것을 가지고, 그를 독재자라 몰아부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과연 그가 포악한 독재자였을까? 그것에 대해 필자는 단호히 NO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고구려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을 시해한 사람이 여러 있었기 때문이다. 계루부의 사주로 5대 모본왕을 죽인 두로, 포악한 봉상왕을 제거하고 미천왕을 옹립시킨 국상 창조리, 그리고 당에 굴종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고구려인들의 분노를 산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 등이다. 그런데 역사서에는 두로, 창조리를 포악한 독재자라 그리지 않고, 유독 연개소문만 포악한 독재자로 그리고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삼국사기가 중국의 역사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최고 영웅이라 생각하는 당 태종이 연개소문에게 무참히 깨져 거지꼴로 돌아온 것에 참을 수 없어,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리고 신라 역시 이것에 한 몫 단단히 했다.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왜 영류왕을 죽였을까? 앞서 말했듯이 영류왕의 당에 대한 정책 차이 때문일 것이다. 영류왕 앞서 영양왕 때 고구려는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치고 사기가 충전해 있었다. 하지만 영양왕 다음 왕으로 즉위한 영류왕은 신생국 당에 굴종적인 태도(경관 파괴, 세자 환권을 보내 조공을 바침, 당에 고구려 지도인 봉역도를 건넴)를 보여줌으로써 장수들과 백성들의 분노를 샀고, 이에 대당강경파의 거수인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인 것이다.

 

연개소문은 정권을 잡은 이후 당에 대한 전쟁을 대비하여, 당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더불어 당을 공격하여 당의 영토인 요서지방을 차지하였다. 당의 야욕을 저지함으로써 연개소문은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를 당의 마수에서 구했으며, 게다가 고구려가 동방의 천자국임을 실력으로 입증하였다. 이런 그에게 포악무도한 난신적자라 하는 건 재고해보아야 한다.

 

 

 

 

1. 다섯 자루의 칼은 고구려의 생활 풍습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님으로써 독재자의 위엄을 과시하였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차고 다닌 칼 다섯 자루는 독재자의 위엄이 아니다. 이것이 과연 독재자의 증거가 될까? 많은 사람들은 연개소문의 독재만 생각했지, 왜 연개소문이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는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면 왜 연개소문은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그 답은 『한원』이라는 사료에 있다. 한원 고려조를 보면 남자들이 허리에 은띠를 차는데, 왼쪽에는 숫돌을, 오른쪽에는 칼 다섯 자루를 달고 다닌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통해 칼 다섯 자루는 고구려 남성들의 일상 풍습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 남성들은 왜 칼을 다섯 자루나 차고 다녔을까? 아마 생활상의 필요(사냥)와 함께 각종 무술 연마를 하기 위해 차고 다니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구려는 주변국과의 투쟁을 통해 성장한 나라였고, 상무정신이 고구려의 기본 정신이었기 때문에, 무술연마, 사냥을 위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 볼 수 있다. 결국 연개소문이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닌 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대로 독재자의 위엄이 아닌 고구려 남성의 평범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가지고 독재자의 증거로 본다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 비도와 연개소문의 칼 다섯 자루

 

① 중국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등 확인된 종류만해도 네 종류나 된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대강의 줄거리가 비슷하다. 당 태종 이세민이 연개소문에게 쫓겨 위기에 처하자 설인귀(薛仁貴)가 구해준다는 이야기로 연개소문과 설인귀가 주연이고, 당 태종이 조연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봉황산(鳳凰山)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간다.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백포(白袍)를 입은 설인귀가 등장한다. 연개소문은 특유의 비도(飛刀)를 사용해 대항하지만, 설인귀에게 패해 죽는다. 당태종은 위지공(尉遲公)에게 설인귀를 찾게 하는데, 설인귀를 시기하는 상관 장사귀(張士貴)는 그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설인귀는 산신묘(山神廟)에서 달을 보며 신세 한탄을 하다가 위지공이 몰래와 끌어안자 놀라서 도망가다가 병을 얻고 만다. 당(唐)나라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들로부터 독목관을 빼앗으려 공격했으나, 오히려 고구려 장군 안전보(安殿寶)에게 장사귀의 아들과 사위가 포로로 잡힌다. 장사귀는 할 수없이 설인귀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는데, 먼저 설인귀의 부하 주청(周靑) 등이 안전보와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자, 설인귀가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전해 안전보를 죽이고 독목관을 탈환한다."

 

 경극에 비춰진 연개소문은 용맹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를 하였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고 한다. 푸른 빛의 얼굴 화장은 위엄이 있는 그의 모습과 아울러, 동방 즉 고구려의 장군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경극을 보면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에 대해 두려워 하며, 무술이 뛰어난 인물로 보면서 잔인하고, 사납고, 포악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는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일본군에게 있어 진주성 대첩은 치욕스러운 전투이고, 그런 진주성 대첩을 승리로 이끈 김시민 장군을 좋게 볼리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나, 설인귀가 죽이지도 않은 연개소문을 죽였다는 것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한 중국인들의 심리를 잘 다룬다 하겠다. 연개소문을 두려워 한 그들의 심리가 연개소문으로 하여금 전설의 영웅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경극에 등장하는 연개소문이 사용했다는 날아다니는 칼 ‘비도(飛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② 연개소문의 비도(飛刀)와 설인귀의 신전(神箭)

 

 앞에서 연개소문의 상징 다섯자루의 칼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은 고구려 남자들의 일상생활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다섯자루 칼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으니 바로 ‘비도(飛刀)’이다. 송원 때의 『사략』에는 연개소문이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생전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자,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장에서의 실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경극 <독목관>에 등장하는 ‘날아다니는 칼’을 사용하는 연개소문과 맞붙는 설인귀의 무기는 신통력 있는 화살, 신전(神箭)으로 이는 무기를 통해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립구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연개소문의 ‘비도’는 권위용이 아닌 실전용이었다. 사략은 연개소문에 대해 “키는 열 척인데, 진홍색 사복(獅服)을 입고 적규마(赤虯馬)를 타고, 허리에는 두 개의 활집을 매고, 등에 다섯 자루의 비도를 둘러맸으니, 바로 고려장군 갈소문(曷蘇文)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실전에 나섰을 때 모습으로 여차하면 목숨을 잃는 전장에 나서면서 거추장스런 권위용 칼을 다섯 자루씩 지고 나갈 장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다섯 자루 칼이 실전용이라는 것은 이 칼이 ‘비도’라는데서 알 수 있다. 경극에서는 날아다는 칼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칼이라면 한 자루면 충분하지 다섯 자루일 이유가 없다. 비도는 고구려 고유의 ‘비도술(飛刀術)’, 또는 ‘비검술(飛劍術)’을 위한 무기인 것이다.

 

③ 공포의 고구려 비도술

 

『신간전상당 설인귀 과해정료 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이하 『고사』로 약칭)는 명(明) 성화(成化) 7~14년(1471~1478) 사이에 북경에서 간행된 사회이다. 『고사』에 실려있는 <막리지 비도대전(莫利支 飛刀對箭)>이란 그림은 연개소문이 사용했던 비도술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측 위쪽에 ‘천자’라고 쓴 당 태종이 있고, 아래측 좌측에 신전을 든 설인귀, 우측에 비도를 든 막리지 연개소문이 잇다. 연개소문은 설인귀의 화살에 맞서 칼을 던지고 있다. 이것이 일부 전통무예 연구가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하던 검이나 도를 던지는 고구려 특유의 비도술(또는 비검술)의 실상이다. 그림에서 연개소문이 던지는 칼은 신통력으로 날아다니는게 아닌 그의 무술 실력 때문이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 · 당군은 고구려 장수들의 ‘비도술’에 혼이 빠졌을 것이다. 옛 싸움에서 장수들의 무예 실력은 중요했다. 왜냐하면 장수들의 무예가 그 군대의 승패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창이나 칼을 가지고 덤빈 중국 장수들은 열이면 열 고구려 장수들에게 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창이나 칼이 닿기도 전에 묵직한 칼이 번개처럼 목을 관통했거나 갑옷을 뚫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경극에 묘사된 것처럼 연개소문의 비도술에 혼쭐이 났으며, 그 어느 장수도 그에게 맞설 수 없었다. 비도술은 연개소문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고구려 장수나 전사들의 검술이었고, 연개소문은 비도술에 가장 정통한 무장이었을 것이다.

 

비도가 일어나 공중에서 춤을 추네

화살과 비도가 먼지를 일으키며 대적하네

비도가 화살을 대적하니 노을빛이 찬란하네

화살이 비도를 대적하니 화염이 일어나네

공중에서 두 보배가 대적하니

두 장수 모두 신통력으로 겨루네           -『고사』에 묘사된 연개소문의 비도술-

 

④ 청룡의 화신 연개소문

 

 경극을 보면 연개소문의 복장을 홍포(紅袍)로 묘사한다. 『사략』에서 연개소문의 복장을 ‘진홍색 사복(獅服)’으로 묘사한 것이나, 『설인귀과해정동백포기(薛仁貴跨海征東白袍記)』에서 연개소문을 ‘문무에 능한 홍포장군’이라고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중국인에게 있어 붉은색은 각별하다. 그들은 광적으로 붉은 색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경극에서도 붉은 색은 긍정적인 인물을 가리키고, 검은색은 지혜로운 인물, 푸른색과 녹색은 민간의 영웅호걸, 금색과 은색은 신이나 귀신을 나타내는데, 연개소문이 홍포로 묘사되었다는 것은 설인귀가 백포를 입고 있기 때문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다. 

 

 경극 <분하만> 서두를 보면 연개소문이 영혼으로 등장해 "나는 본래 청룡으로서 세상에 내려온 것이다"라며 자신을 청룡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 설인귀는 백호(白虎)로 등장한다. 청룡과 백호는 풍수나 고대 천문학의 사상(四象)에서 동쪽과 서쪽을 의미한다. 고구려가 중국의 동쪽에 있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을 동쪽을 지키는 사방신으로 승화시켰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당시 중원의 서쪽과 동쪽이 당과 고구려에 의해 분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고사』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온 군영에서 두 장군(연개소문과 설인귀)을 환호하니, 온 세상이 두 사람을 강하게 하네/ 당조(唐朝)가 이 두 장군을 얻는다면 천하가 태평지 않은들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이는 중국인들이 연개소문의 신과 같은 무예에 경탄한 나머지, 그를 중국의 장수로 회유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런 마음이 동쪽을 지키는 청룡으로 형상화된 것이다.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하고, 경멸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연개소문에 대한 경외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청룡의 화신이라 평한 것이다.

 

↑당 태종에게 비도 4자루를 날리는 연개소문과 그 비도를 막기 위해 화살을 쏘려고 하는 설인귀↑

칼 한자루를 쥐고 말 탄 장수가 연개소문이고, 화살을 겨누는 장수는 설인귀, 칼 4자루가 날아가는 곳에 있는 말탄 자는 당 태종 이세민이다.

 
2005/04/04 [04:09] ⓒ브레이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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