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화요일, 68년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홀로 세월을 견뎌야 했던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의 일부분, 1.1km를 올랐다.
하루에 400명의 발걸음만을 허용한다는 그 곳은 약 40년 간 인적이 끊긴 덕분에
비무장지대와 비슷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하니 발 닫기 전부터 기대가 컸다.
그 전 주말에 서울을 엄습했던 황사는 말끔히 씻겼고,
날씨도 좋았으며 하늘도 맑았고 기온 또한 완연한 봄이었다.
4호선 한성대 역 2번 출구에서 성북동 명수학교로 가는 버스를 탔더니,
곧 성북동 종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옛날부터 부자 동네로 알려진 성북동... 그곳엔 으리으리한 대저택들이 즐비하였다.
그 곳을 오르니 고등학교 1학년 때 짝꿍이 떠올랐다.
하얀 얼굴에 예쁘고 귀티나게 생긴 그녀는 언제나 바이올린을 들고 다녔다.
중학교 때 바이올린이 배우고 싶어 바이올린 부에 들어갔으나
바이올린을 살 수 없어 포기해야 했던 나는 그녀의 바이올린이 참으로 부러웠다.
그뿐 아니었다. 그녀는 미국에 사는 친척 얘기에, 뭐에... 부유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느날 그녀가 자신의 집에 가자고 해서 수업이 끝난 뒤 좋아라 하며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녀가 내린 곳은 당시 85번 버스 종점인 성북동이었다. 지금처럼 거대한 집들이 즐비한
조용한 동네를 오르며 난 연신 찬탄을 발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집들을 별 것 아닌 양 비웃으며 계속 위로 위로 올라갔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대저택의 끝에는 반드시 산동네가 있었고
아랫동네와는 비할 수 없는 그들만의 비참하고 구질구질한 삶이 펼쳐진다.
성북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대저택이 끝나고 그녀가 오른 곳은 산동네였다. 감춤없이 온갖 것들이 다 드러난 동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오르고 오르다가 더 이상 갈 곳 없는 가장 꼭대기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집에 낡은 비닐이 걸쳐진 집이 바로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는 그 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동안 그녀가 펼쳐놓았던 미국 이야기는
그녀의 상상 속에 존재하고 있던 세계였다.
난 그녀의 삶에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난 가난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난 가난했어도 함께 버둥거리고 껴안을 가족이 있었으나 그녀에겐 그마저도 없었기에...
그렇게 미국을 꿈꾸던 그녀는 결국 미국으로 갔고, 그곳에서 신문기자가 되었다.
숙정문에 오르려고 문화재청에 사전 예약을 한 후 시간이 맞추어 홍련사 앞에 사람들...
그 유명한 삼청각 담장...^^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전 여권 검사를 하는 것처럼 한 명씩 앞으로 나가
주민등록증을 제출한 뒤 자신임을 확인하고 패찰을 받은 후 발을 디딜 수 있는 북악산 초입.
안내원의 간단한 설명을 듣는 시간.
군사보호구역이라 일정한 장소 외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숙정문을 지나 마지막 코스인 촛대바위로 오르는 길....
1.1km의 끝인 촛대바위 옆. 그늘진 그곳에도 봄은 피어오르고 있었다.
촛대바위에서 내려다본 서울 시내. 하늘이 맑아서 서울 안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촛대바위. 1.1km는 너무 아쉬운 거리였다.
앞으로 서울 사대문을 잇는 7km가 넘는 등산로가 조성될 계획이란다.
숙정문 뒤에 꾸며진 아담한 쉽터. 내려오는 걸음이 쉴 수 있는 곳이었다.
숙정문이다.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 중 하나로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과 더불어 사대문 중 하나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라 불렀다고 한다.
북문에 해당하는 숙청문은 동서의 봉우리는 정궁인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닫아 두어야 한다는
풍수지리에 의해 축조한 지 18년만에 닫히고 말았다.
하지만 음 기운이 강한 탓에 가뭄이 심하면 숙정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으며
장마가 심하면 닫아두었다고 한다.
특히 여인네들이 이 곳에 오게 되면 바람이 난다는 속설이 있다는데, 그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그러지 않아도 들뜨고 설렌다는 봄에, 바람이 난다는 숙정문을 밟았으니, 이 봄은 기대해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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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정문과 이어진 긴 담벼락... 하늘이 너무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