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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수레바퀴 (650페이지 전체)

작성자길창원|작성시간12.05.20|조회수349 목록 댓글 0

 

바퀴 (창세기)

신앙의 출발 / 창 1:1-5

신앙심이 깊은 유명한 천문학자 케플러가 있었습니다. 케플러에게는 아주 친한 친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 친구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어느 날 이 친구가 케플러의 연구실에서 천체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케플러는 이 친구에게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 소개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케플러의 말에 즉각 반박하여 아름다운 우주는 원자들의 충돌과 대폭발로 인해 저절로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한 논쟁이 있은 후 케플러는 자기 연구실에 태양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멋진 태양계의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친구를 불렀습니다. 초대를 받고 온 친구는 너무나도 정밀하게 만들어진 태양계의 모형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야, 참 아름다운데! 도대체 누가 만들었지?" 그러자 케플러는 시치미를 떼며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안 만들었어 스스로 생겨난 거지" 무신론자인 친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것이 저절로 만들어 질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얘기해 봐. 누가 만들었지?" 케플러는 그때서야 확신에 찬 미소를 띠며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이 조그만 모형을 보고 감탄하면서 이모형을 누가 만들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자네가 어찌 이 거대하고 오묘한 우주의 창조주가 있음은 믿지 못하는가?"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고 모든 물건은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우주만물의 생성도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과 우주만물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살아계시며 능력을 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믿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유일무이하신 신이시며 창조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자세하고도 분명하게 그리고 매우 과학적으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증거 하였듯이 창세기에서 증거 하는 말씀은 정확하고 분명한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세상의 기원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경을 펴면,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제일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온 우주, 그리고 모든 만물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을 진리로 믿는 신앙을 '창조신앙'이라고 합니다.

+ 창조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요, 출발입니다. 이 기초가 정립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을 통해 창조신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입니다.

성경의 첫 장 첫 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말씀이 나온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가 있고 바르게 해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앙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는다면 세상도 없을 것이고 우리들도 없을 것이며 역사도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의 원인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실제적인 과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창 1장을 통해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천지의 창조가 6일 동안에 걸쳐 창조되었다는 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라도 세상을 창조 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시지 않고 6일간에 걸쳐 천지창조의 사역을 행하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무계획적인 하나님이 아니시라 조화와 질서의 하나님임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창조의 과정을 통하여 모든 일에 질서와 조화가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첫째 날 빛의 창조로부터, 여섯째 날의 짐승과 사람의 창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창조의 과정이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과 프로그램에 의하여 질서 있게 차례로 진행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처음 3일은 환경과 터전을 설정하셨고, 다음 3일은 그 환경과 터전 속에서 운행하고 살아갈 내용물들을 완성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는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 이었다는 것을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주 공간이 있어야만 해와 달과 별들이 제 자리를 잡고 빛을 비추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있어야 온갖 새들이 날아다니고, 바다가 있어야 각종 물고기들이 뛰놀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땅과 식물이 먼저 있어야만,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과정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세밀하신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1.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입니다.

창 1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란 말이 30번이나 반복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창조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임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조 사역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천지창조가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행하신 후, 창조물에 매번 이름을 부여하셨다는 점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칭하시니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주권과 소유권을 주장하는 행위입니다. 이처럼 천지 만물은 아무것도 없었던 무의 상태에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창조로 말미암아 유의 상태가 되었고, 거기에다가 하나님께로부터 이름까지 부여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 만물의 모든 생명의 참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토록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찬양하면서,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말씀의 창조입니다.

6일 동안의 천지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란 말이 10번이나 나타납니다.

이것은 천지창조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음을 가르쳐줍니다. "빛이 있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매 빛이 있었고, 또한 "궁창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매 궁창이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사람들의 말과는 본질상 달라서 일점일획의 헛됨이나 식언이 결단코 없습니다.

말씀하시매 그대로 성취된 천지창조의 사역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은 말씀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 없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태초의 천지창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그 능력의 말씀으로 계시하시고 약속하시며 인도의 천지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굳게 믿고 따르며 의지할 때,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힘입어서 실패를 성공으로, 좌절을 소망으로 변화시키는 놀라운 기적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3.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창조입니다.

6일 동안의 창조 기사에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이 7번이나 반복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흡족하게 여기실 만큼 좋고 아름답고 완벽한 창조였습니다.

이 좋은 세상 만물들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에 맡기시고 이들을 잘 관리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 옛날 뿐 아니라 오늘날 역시, 사람들은 자연만물을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생태계 위기가 그 점을 잘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른 창조신앙을 가진 교회는 이제부터라도 사람들이 마음껏 파괴하고 착취해온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으로 잘 가꾸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4. 사람 중심의 창조입니다.

우주 만물과 자연계를 다 만드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창조 사역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마침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의 창조는 6일간의 창조사역을 마무리 짓는 창조의 절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다 지으신 후에, 천지 만물의 대표인 사람을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는 큰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이처럼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람의 역할과 가치가 중요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특별히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는 의논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삼위 하나님께서 깊이 상의하고 숙의할 만큼 사람의 창조는 제일 중요한 일임을 가르쳐줍니다. *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의 창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람의 창조와 더불어 최종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첫 부분에 나타나는 천지창조의 기사는 결코 먼 옛날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한 신앙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초석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창조신앙이 있어야 우리의 모든 신앙이 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기사를 통하여 오늘도 무에서 유를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의 손길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 말씀중심의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들 자신 각자가 하나님의 창조의 결정체임을 깨닫고, 큰 감사와 기쁨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 날 , 을 창조하심 / 창1:3~5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조의 시작은 "빛이 있으라"는 말씀부터 시작됩니다. 이 빛은 해와 달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해와 달은 4일째에 창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 빛은 무엇일까요? 이 빛은 바로 "창조의 시작"을 알리는 "빛"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시작하셨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1.빛의 창조

하나님께서 빛을 제일먼저 창조하신 이유는 생명을 존재하게 하시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생물은 빛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지요. 광합성작용을 못하기 때문에 꽃은 시들고 나무는 죽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로 빛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빛은 만물의 생존, 성장, 활동을 하도록 합니다. 빛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빛을 창조하신 것은 생명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과 같은 것입니다.

빛의 창조는 낮과 밤을 구분하신 것입니다.

사람은 나중에 여섯 번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인간의 생체리듬이 낮과 밤에 적절하게 적응 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도록 설계된 것이지요. 이 순리를 역행하면 신체에 문제가 발생을 합니다. 몸의 균형을 잃고 이상증후가 나타납니다. 즉 병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창조의 질서만 잘 지켜도 기본적인 건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낮과 밤을 구분하신 것도 사람을 위해서 하신 일입니다.

2.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빛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생명체에게 유익을 줍니다. 요란한 소리도 없이 생명의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빛의 영향력은 그 어떤 것보다도 크고 대단합니다. 그리고 빛은 창조의 목적대로 그 기능을 나타내기 때문에 선한 것이며 선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으신 것입니다.

3.빛의 영적인 의미

빛은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빛이 생명이라면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일1:5 엡5:8~9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십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세상의 빛, 생명의 빛"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곧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요1:1-4)

주님은 태초부터 계신 말씀으로, 또한 하나님으로, 생명으로, 빛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 "하나님", "생명", "빛", 이 모든 것은 "창조"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주님은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한 생명"이신데, 그 안에 "빛"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우리는 창조가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에서 시작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때에 우리는 요한복음 1장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부각되어야 할 사실은 "새로운 창조"에 관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님이 오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1절에서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9:30에 보면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습니다. 세상의 빛, 생명의 빛으로 오셔서 새로운 창조사역, 즉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시고 완성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빛을 창조하신 후에 6일 동안에 걸쳐 세상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셨지만 인간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범죄 하여 하나님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밤은 상징적으로 악한 세력, 즉 사탄의 세력을 말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본디 빛을 창조하시고 낮과 밤을 구분하셨지만 영적인 의미로는 빛은 하나님이시며 어두움은 구원 얻지 못한 세상과 사탄의 세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요3:19~21)

세상이 어두움과 사탄의 권세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이 될 수는 없지만 빛의 근원이신 예수님의 빛을 받아 세상에 전하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본래 빛을 창조하셨던 선한 창조의 목적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의 빛 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일까요?

마5:16, 이같이 너희 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엡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이라 자녀들처럼 행하라열매는 모든 착함과 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인간의 죄로 인하여 파괴된 질서를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오늘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마치 예수님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칭찬받는 삶을 사는 것이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삶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삶을 실천하여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회복시키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1)

둘째 날 하늘을 만드심 / 창1:6~8

본문에서 궁창이라고 되어있는 단어는 하늘을 뜻합니다. 8절,“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여기 궁창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라키아’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넓게 펼치다’라는 뜻입니다.

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하늘아래의 물들(아직 바다는 창조되지 않은 상태)과 하늘위의 물(구름)로 나누고 그 가운데를 궁창 즉, 하늘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제한 된 부분은 아닙니다.

창1장 14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해와 달과 별은 하늘위에 있는 것들 아닙니까?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우주를 말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하늘과 하늘에 있는 광명들, 즉 별들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상 별들의 세계는 얼마나 광대한지 오늘날 까지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신비롭기만 한 세계입니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우주의 생성과정에 대해 이론을 정립하고 끊임없이 기원을 연구하고 발표하고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과 지식에 불과할 뿐이지 사람의 지식으로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솜씨에 감복할 뿐입니다. 우주의 끝도 모르는 인간이 대우주에 대하여 무슨 결론을 내릴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하늘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1)하늘은 인간들에게 영적인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우수함에 대하여 어떻게 표현합니까? ‘고귀한 가치’‘고상한 목적’‘높은 견해’‘높은 뜻’...

높은 고개(고령)... 이러한 말들은 모두 위를 향한 ,하늘을 목표한 말들입니다.

사람은 짐승과는 다르게 직립보행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늘을 쉽게 바라보면 살도록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그렇게 신체구조를 만드신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높이 솟아오르고자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위에 집을 지어도 땅굴을 파들어 가면서 아래로 짓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늘위로 높이높이 짓습니다.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 대만의 타이베이에 있는 509m에 101층 건물인데 509미터면 엄청난 높이입니다. 이에 버금가는 건물들이 세계에는 많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 높은 건물은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프르에 있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로 452미터 88충인데 쌍둥이 빌딩으로 하나는 일본이 하나는 한국의 삼성에서 건설했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이 솟아오르는 빌딩들을 보면서 인간은 높은 것을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높은 계급, 높은 자리, 높은 위치, 높은 집...

교회 첨탑도 위로 향하여 높이 솟아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위로 향하려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분이라고 생각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를 종교적 성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하늘에 계신분이라고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지만 거기서 말하는 하늘은 저 공중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일컫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 만에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실 때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렇다면 저 우주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육신의 공간적인 나라가 아니고 영적인 나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중으로 구름을 타고 다시 세상에 오시는 것이야 상상이 가지만 그렇다고 저 우주공간에 천국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단 하늘은 상징적으로 인간의 높은 뜻을 실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중요한 푯대의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2)하늘은 하나님의 완전성과 무한성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늘의 끝을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을 보면 역시 인간은 불완전하며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신비로운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가서 하늘에 손을 대어보려고 노력해도 하늘은 여전히 높기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올라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무한하게 여겨진다면 그것을 지으신 하나님은 얼마나 무한한 분이겠습니까?

무한하다는 것은 영원한 것을 말합니다. 사실 시간 속에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영원하신 그분을 잘 알 수 없습니다. 영원은 그 끝이 없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많이 살아도 100세를 살기 쉽지 않은 인간으로서는 영원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모래 알 하나가 태평양 바다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어거스틴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꿈에서 한 소년이 자신이 파놓은 작은 모래 웅덩이에 작은 그릇으로 바다의 물을 퍼서 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아니, 뭐하는 거니?""바다의 물을 모두 퍼서 여기에 담으려고요?""아니, 저 많은 바다의 물을 어떻게 다 퍼서 그 작은 곳에 담으려고 하니?"

"선생님도 그렇게 하려고 하잖아요?"

여기서 어거스틴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분과 같습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 속에 그 영원하신 하나님을 담을 수 없습니다.

3)하늘은 하나님이 최고의 권위자이심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끝없이 펼쳐진 우주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인간은 상상과 지식으로만 추측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지금도 우주의 운행자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136:26,“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단2:37하,“하늘의 하나님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왕에게 주셨고”단2:44상,“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여기서‘하늘의 하나님’은 모든 나라와 왕을 다스리시는 최고의 통치자 즉, 지존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셨듯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십니다. 이 때 하늘에 계시다는 말은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전지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하신 절대지존 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입니까?

우리가 무엇인데... 한 줌의 흙이며 먼지와 같은 피조물인데, 하늘에 계신 존귀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니... 이 복이야 말로 그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귀한 복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둘째 날에 물 가운데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아래에 물이 있게 하시고 궁창위에 물이 있게 하셨습니다. 이 궁창을 하늘이라 하셨는데 하늘은 지구를 둘러싼 저 높은 공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우주공간까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하늘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높은 보좌와 하나님의 권세 하나님의 영원하심, 완전하심, 존귀하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꼭 잊지 말도록 합시다. 오늘도 능력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께 담대히 간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셋째 날, 땅과 바다 식물을 창조하심 / 창1:9~13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날 이니라 (창1:9~13)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땅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 땅은 사람이 지음을 받는 재료도 있었고(흙) 후에 창조할 동물이나 식물들이 살아 갈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땅은 그 자체로는 생명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생명을 가진 동식물들에게 무한한 생명력을 제공해 줍니다.

특히 나무나 풀, 꽃과 같은 식물들은 땅이 없다면 생존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물론 동물이나 사람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나님이 땅을 지으시고 거기에 식물이 자라게 하시고 그 식물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어 사람과 동물들이 그것을 먹고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존의 법칙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물을 모으시고 바다라고 하셨습니다. 바다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지구에서 바다가 차지하는 면적이 지구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지구상에서는 바다의 면적이 이렇게 커야만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육지의 면적이 좀 더 크면 인류가 오늘날과 같은 식량의 부족이라는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텐데….’ 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바다(물)가 없는 달은 밤과 낮의 기온 차이가 수백 도나 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70% 이상인 이 거대한 바다에 태양에서 전달되는 많은 태양열을 흡수 저장하여 지구의 체온을 적절하게 조절함으로써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그 생명을 보존하도록 도와 왔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댐을 건설해서 홍수나 가뭄을 조절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지구에 있는 물은 바다에 94%, 남극에 얼음으로서 2%, 나머지 4%는 육지의 강이나 지하수 또는 여러 가지 화합물의 결정수로서 존재한다.(필요에 의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인체에도 수분의 함량이 70퍼센트라고 하는 것입니다 - 인간은 또 하나의 세상)

남극에 있는 얼음의 평균 두께는 약 2200미터에 이른다. 만약 이 얼음이 완전히 녹는다면 전 세계의 수면이 60미터나 증가하는데, 이렇게 되면 높은 산을 제외한 모든 육지가 물속에 잠기게 된다. 여기에 달의 인력을 작용시키면 지역적으로는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물속에 잠기게 된다.

하나님께서 일찍이 대홍수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고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살아남게 하셨던 노아의 방주(창 7장)는, 그 많은 물의 행방 때문에 믿을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한낱 신화라고 전해져 왔었다. 그러나,“저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곡간에 두시도다” (시 33:7)라고 한 시편의 말씀이 이러한 의문을 말끔히 씻어 줍니다.

바닷물 속에는 소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질소나 산소, 이산화탄소 등의 기체도 녹아 있고, 플랑크톤의 먹이가 되는 인산염, 질산염, 규산염 등과 같은 영양 염류도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다 속에 많은 생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소금 외에도 온갖 다양하고 필요한 성분들이 들어 있는 바다는 완벽한 것으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로마서1:20상반)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렇게 땅과 바다가 나뉘고 땅에 식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밝혀진 것에 의하면 식물은 빛을 사용하여 산소와 당류를 만드는 광합성을 통해 에너지생산과 호흡을 합니다. 광합성은 수많은 반응이 연속적으로 한 치의 오차 없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하여 성장하여 꽃과 열매를 만들어 냅니다.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개나리, 진달래, 동백꽃, 벗 꽃, 산수유, 매화 등 다양한 꽃과 식물들이 봄철 입맛 돋우는 냉이, 쑥, 두릅 등 채소들과 함께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합니다.

이 식물들은 모두 종류대로 이며 나비, 벌, 새, 바람에 의해 번식이 이루어질 때, 각종의 꽃과 식물들은 인공적으로 교배하지 않는 한 각 기 종류대로 반응하여 개나리는 개나리, 진달래는 진달래를 낳습니다.

그리고 교배를 하더라도 전체 집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종(種)은 개체 간에 그대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모든 식물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다른 이론)

하나님은 식물을 만드실 때에 씨부터 만드신 것이 아니라 식물 그 자체를 만드셨습니다. 11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그것은 동물도 마찬가지 /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식물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뿌리는 생명의 근본입니다. 뿌리는 땅속에 깊이 자리를 잡고 식물을 지탱해줍니다.

마치 건축물의 기초와 같은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리고 땅으로부터 물과 양분을 흡수해서 줄기와 잎으로 공급합니다.

잎은 햇빛과 비를 맞으며 영양분을 공급받고 줄기를 통해 식물전체에 골고루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 알아서 생명작용을 일으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생명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때가되면 꽃이 피도록 하십니다. 꽃은 곧 열매를 맺는 일을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꽃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자태뿐만 아니라 그 속에 암술과 수술이 있습니다.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 식물도 있고 따로 있는 식물도 있는 것은 사람과 다르지만 사람이 생명을 잉태하여 생산을 하는 것과 식물이 번식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생명을 출산하는 것과 같이 식물은 그 나름대로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는 사람과 동물을 위한 것이며 열매에는 다음 세대를 위한 씨가 들어있어서 계속 번식을 하게 됩니다.

이런 생명의 역사가 우연히 또는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모든 생명의 역사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일정하게 만들어 놓으신 법칙을 따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식물들이 살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만들어 주십니다. 즉 공기, 햇빛, 비, 바람 등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식물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만일 식물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한 환경재앙 때문일 것입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더더욱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감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봄이 되면 겨울동안에 얼어붙었던 모든 대지가 풀리면서 새싹이 돋아나오고 꽃이 피고 여름에는 식물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고 다시 겨울에는 휴식기가 찾아오는 자연의 섭리는 우리 인생의 삶과도 같은 원리라고 보여 집니다. 봄은 출생의 시기요 청소년의 시기이며, 여름은 청년의 시절이요 가을은 장년의 때, 겨울은 인생의 노년기를 말하여줍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 모든 삶의 지혜를 깨달았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하면서 그것이 인생의 본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놀랍고 신비한 것이며 우리에게도 기쁨과 행복을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해 계획하시고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대자연을 믿음으로 품고 감사함으로 누리며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도 자연의 조화처럼 균형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 자연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인생의 창조주이십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한 것처럼 모든 나라도 민족도 가정도 교회도 개인도 모두 하나님께 속하여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며,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2) 창1:14~25

넷째 날, 해와달과 별을 창조하심 / 창1:14~19

천지 창조의 넷째 날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궁창에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하늘의 궁창'은 땅에서 볼 때 높은 우주 공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과 별들로 말미암아 "징조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또 해와 달과 별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셨는데 큰 광명인 해는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인 달은 밤을 주관하게 하셨고 그것들로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은 참으로 신기한 창조물들입니다. 해, 즉 태양은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 같은 가스 덩어리로서 수소 75%와 헬륨 25%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태양은 지구보다 약 109배나 큽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태양은, TNT 1메가톤 즉 100만 톤급의 원자탄을 1초에 1,000만개씩 계속 터뜨리는 것과 같은 가스 폭발을 하여 그 열과 빛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표면 온도는 섭씨 약 5,500도, 그 중심 온도는 섭씨 약 1,500만도라고 합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태양 빛을 받아 반사하는 큰 물체입니다.

달은 지구의 4분의 1 정도이며 지구로부터 평균 약 38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타원을 그리며 지구를 돌고 있다. 달에는 공기도, 바람도, 물도 없다고 합니다.

태양을 중심으로 원형을 그리며 돌고 있는 9개의 거대한 물체들이 있는데 이것을 행성(planets)이라고 부릅니다.

태양에 가까운 순서대로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이 있습니다.(9개)

지구도 그 행성 중의 하나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별들을 태양계(solar system)라고 부르지요.

별들은 하늘에 멀리 떨어져 있는 빛을 발하는 거대한 공 같은 가스 덩어리들이다. 태양도 하나의 별입니다.

그러나 태양 외의 별들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천문학자들에 의하면,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도 지구에서 40조 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곳에 가는데 가장 빠른 제트기로도 약 100만년이 걸리는 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맑은 날 밤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별들은 약 3천개이지만, 과학자들은 하늘에 약 2천경[2천억 X 10억]개 이상의 별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별들은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태양과 같은 별 천 억 개 이상으로 구성된 은하수(the Milky Way)가 그것이지요. 이 우주에는 은하수 같은 은하(galaxy)들이 약 천 억 개가 있다고 추정합니다. 우리가 사는 우주의 크기와 그 별들의 수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크고 광대한 것입니다.

1)우리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넷째 날 사역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바로 이 거대한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그것들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몇 번 해와 달을 비상하게 운행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 아홉 번째 재앙으로 애굽 땅에 3일 동안 캄캄한 흑암이 임하게 하셨고(출 10:21-22), 여호수아가 아모리 다섯 왕들과 전쟁할 때, 그는 여호수아의 부르짖는 목소리에 응답하셔서 태양과 달을 얼마 동안 멈추어 머물게 하셨고(수 10:13), 유다 왕 히스기야가 죽을병에 걸려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심히 통곡하며 기도했을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3일 만에 병을 낫게 하셔서 성전에 올라가게 하셨고 그 징조로 해 그림자 시계가 10도를 물러가게, 즉 해를 뒤로 물러가게 하셨습니다(왕하 20:11).

또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정오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기이하게 태양을 운행하신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자요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무지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21:3에 보면, 유다의 므낫세 왕과 백성들도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하였었습니다(왕하 21:3).

이것은 바로 10계명의 제1, 2계명을 범하는 우상숭배이었고 하나님을 대단히 노엽게 하는 죄악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해와 달과 별들을 숭배해서는 안 되고, 그것들을 만드신 하나님, 그것들의 소유주이신 하나님, 그것들을 홀로 운행하시는 하나님,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땅히 섬기며 그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주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우주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어둡고 광막한 우주 속에 던져져 방황하는 고아와 같은 존재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보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시 90:1).

우리는 우주의 규칙성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연 만물은 창조 때로부터 지금까지 오차가 없이 운행되고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들의 움직임은 매우 자연스러우며 규칙적이며, 그것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얼마나 변화무쌍하한 존재인지! 하나님의 법은 불변적이며 자연 만물은 그 법을 지키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배반하고 저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우주의 규칙성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돌아와 그의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주 예수께 죽도록 충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엡 6:24; 계 2:10).

다섯 째날 물고기와 새를 창조하심 / 창1:20~23

창세기 1장에 증거 된 창조 사역 다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물들에 큰 물고기들(큰 바다 동물들, 핫탄니님 학게돌림)과 물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하늘의 궁창에 나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것들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물고기의 종류들은 참으로 다양하였다. 과학자들은 물고기(fish) 종류가 약 2만 천 7백 가지가 된다고 한다. 물고기 종류는 다양해서 작은 망둑어는 길이가 1.3센티미터밖에 안 되지만, 고래상어는 길이가 12미터, 무게가 14톤(코끼리의 두 배)이나 되고, 청색 고래 같은 동물은 길이가 30미터, 무게가 무려 200톤이 된다. 물고기의 수명도 다양해서 숭어는 4년, 철갑상어는 50년, 악어는 56년, 메기는 60년 이상, 그리고 거북은 최고 123년 된 것도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의 종류도 다양하다. 과학자들은 새의 종류가 약 8,600가지 가 된다고 한다. 크기가 5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벌새 같은 작은 새도 있고, 키가 2.4미터, 무게가 140킬로그램이나 되는 타조 같은 큰 새도 있다. 또한 7,600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는 기러기 같은 새도 있고, 먹이를 잡으려고 내려올 때 시속 320킬로미터 이상으로 빠르게 내려오는 송골매 같은 새도 있다. 또 수명이 긴 새도 있는데, 타조는 수명이 50년이고 까마귀는 수명이 69년이라고 한다.

여섯 째날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심 / 창1:24~25

[24-25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여섯째 날 하나님께서는 땅 위의 생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본문은 땅 위의 생물들을 세 부류로 나눈다. 첫째는 가축(베헤마)이고, 둘째는 기는 것(레메스)이고, 셋째는 땅의 짐승입니다.

첫째 부류인 가축은 소, 양, 말, 나귀, 낙타, 돼지, 개, 고양이, 토끼 등 집에서 기르는 동물을 가리킵니다. 둘째 부류인 기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됩니다. 과학자들은 기는 동물, 소위 파충류 동물을 약 6,000종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에는 악어나 거북처럼 물에서 사는 것들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제외해도 도마뱀이나 뱀 종류만 거의 3,000종에 이르며 그 중에는 비단뱀같이 길이가 9미터나 되는 것도 있고 어떤 도마뱀같이 길이가 5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것도 있지요. 또한 거기에 더하여, 개구리나 두꺼비 종류가 약 2,700가지나 됩니다.

뿐만 아니라, 벌이나 나비나 나방이나 파리를 포함하여 메뚜기, 개미, 바퀴벌레, 거미 등 곤충(insects) 혹은 발이 여섯 개 달린 벌레들은 무려 80만종 이상이나 된다고 합니다.

셋째 부류인 땅의 짐승은 소위 포유동물 중 집에서 기르지 않는 것들입니다.

포유동물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우고 새끼를 보호하며 훈련시키고 또 머리털이 있고 체온이 있고 뇌가 발달한 특징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동물들이 약 4,000종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의 대부분은 땅의 짐승이라는 부류에 속하며 사자, 호랑이, 곰, 코끼리, 원숭이, 여우, 노루, 사슴, 너구리 등 야생동물들이 다 여기에 속합니다.

땅의 짐승 중에는 생쥐같이 조그만 짐승도 있고 코끼리같이 키가 7.5미터, 무게가 7.5톤이나 되는 짐승도 있고 또 치타같이 시속 110킬로미터로 달릴 수 있는 짐승도 있습니다. 또 짐승의 수명도 다양해서 쥐같이 1년도 못 사는 것도 있고 코끼리같이 60년이나 사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에 물고기들과 새들과 짐승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역에서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참으로 놀랍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것도 놀랍고, 온갖 식물들을 만드신 것도 놀랍고, 또 각종 바다짐승들과 수많은 종류의 물고기들과 물에 사는 온갖 생명체들을 만드시고 공중에 나는 각종 새들을 만드시고 가축들과 땅에 기는 각종 생명체들과 땅의 짐승들을 만드신 것이 놀랍습니다.

이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 줍니다. 창조주 우리 하나님의 크신 지혜와 능력은 피조 세계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들은 마땅히 창조주 하나님께 찬양하며 영광을 돌려야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을 진리인 양 믿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부정합니다. 진화론은 세상에는 처음부터 물질이 있었고 어쩌다가 물질에서 생명체가 발생했고 가장 단순한 생명체로부터 점차 복잡한 생물체가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진화론은 식물세계를 포함하여 물고기들과 새들과 짐승들은 다 한 생명체에서 진화된 것들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쉬운 말로, 사람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들의 근본적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사역을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화론에 대한 객관적 과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단지 가설들이 있을 뿐입니다. 더욱이, 진화론은 무신론적 사상이요 허무하고 비도덕적인 사상입니다. 거기에는 사람과 짐승 간의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님 없는 세계에 사람의 가치나 도덕적 선과 의의 근거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진화론은 그것들을 다 부정하는 허무하고 비도덕적인 사상입니다.

창세기 1장은 '각기 종류대로' 혹은 '[그] 종류대로'라는 말을 열 번이나 반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식물들과 모든 동물들 곧 새들과 물고기들과 땅의 짐승들을 각기 종류대로 만드셨음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각 생물들은 각각 다르게, 즉 각각 그 존재의 목적과 방식이 다르게 창조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진화론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십니다. 그의 창조 사역은 존재 세계의 시작이요 하나님은 존재 세계의 모든 문제의 대답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음미하며 확신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합당한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본문에는 창조된 세상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이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21, 25)

창세기 1장 전체에는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4, 10, 12, 18, 21, 25, 31절).

식물세계에 가시와 엉겅퀴가 난 것은 사람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습니다. 아담이 범죄 한 후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창 3:18).

사람의 범죄로 동물 세계도 악화되었습니다.

물질세계 자체가 악하거나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사람의 죄가 나쁜 것이었지요.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본래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였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사역의 놀라움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거대한 우주와 만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십니다. 그는 우주만물을 운영하시는 뛰어난 경영자이신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지키시고 기르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여 염려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 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셨습니다(마 6:26, 28-30).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만물을 섭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합시다.

그는 위대하신 경영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에만 순복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에게 순응하여 사는 것처럼 사람들도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이 되는 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창1:26~31)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여섯째 날, 가축들과 땅의 모든 짐승들과 땅의 기는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이기 마련입니다. 연극이나 영화에서 보면 마지막을 장식하는 하이라이트가 있습니다. 세상 우주만물의 창조를 완성하는 하이라이트는 인간의 창조였습니다. 사실 이제까지의 창조는 모두 조연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주연은 창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람이었습니다.

[2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사람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창조하신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왜 만드셨을까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만드셨습니다.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말씀은 이 육체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사람을 영적인 존재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존재란 하나님처럼 신령하고 영원히 살 수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릴 수 있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 바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즉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교제를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에는 너무나 중요하고 심오한 비밀이 담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자녀를 낳으면 자기 자녀가 자기들을 닮았다고 하면 기분 좋아합니다.

‘아빠를 꼭 닮았다.’‘엄마를 꼭 닮았다.’고 하면 부모는 참 기뻐합니다. 만일 아기더러 ‘너는 저 옆집 아저씨 닮았다’고 하면 큰일 납니다. 부모가 ‘나는 못생겼으니까 나 닮으면 안 되는데…. 옆집 아저씨가 잘 생겼으니까 옆집 아저씨를 닮아야 되는데…’라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자기 닮았다고 하면‘나닮았구나’하면서 대단히 좋아합니다. 자기를 닮은 자식에게 부모는 모든 것을 다 줍니다.  

사람은 혹 자기 자녀에게 주고 싶어도 줄 것이 없으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하나님은 사람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다 주실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리며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이, 고작 육신이 이 세상에 몇 십 년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하고 육신에 매여 산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 하시리로다. ……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편 49:15, 20).

사람이 존귀에 처한다는 말은 지극히 귀하다는 말인데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위해서 지으신 영혼이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같이 영원히 살아서 영광을 누리게 하기 위한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육신만을 위해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짐승으로 나는 것이 좋을 뻔했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라고 할 때 한문으로 신령 영(靈)자에 길 장(長)자를 씁니다. 곧 사람에게는 영이 있어서 길게 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이 있어서 영원히 살 수 있기 때문에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거울을 보아야 자기의 얼굴을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을 알아야만 비로소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의 가치도 모르고 인간의 가치를 모르면 인간으로 살아가는 목적도 모르고 소망 없이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인생이 별 것 있냐. 그럭저럭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생각과 방법대로 아무렇게나 살게 됩니다. 인간은 결코 그렇게 허무한 존재가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6절 말씀을 주목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씀은‘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단지 명령을 함으로써 창조되었지만,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의논하심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존귀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사람이 영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그것을‘지식과 의’라고 가르쳐줍니다.

골로새서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에베소서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이 영적인 특성은 사람이 범죄함으로 상실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통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2.하나님께서는 또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27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창조하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창조하신 대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의 창조에 대해서는 2장에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간에는 역할의 차이가 있지만, 남자나 여자나 모두 하나님이 만드신 존귀한 존재이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녀가 하나님께 받아 누리는 복과 영광은 동등한 것입니다.

남녀는 다 하나님의 귀한 형상이므로 서로 귀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은 유교적 영향을 받아 남존여비사상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 남녀차별의 편견이 잔재해 있습니다.

사실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없습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완성시켜나가게 됩니다.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신 일차적 목적은 출산에 있었습니다.

출산은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속 사회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결혼을 중히 여기며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나가야 하며 출산을 복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땅의 생물들 곧 가축들과 땅의 짐승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다른 생물들이 이 땅에 충만해야 한다면 인간은 더욱 땅에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홍수심판 이후에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도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9:1).

시편 127:3-5,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箭筒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3.신비로운 인체 

                              

- 눈의 근육은 24시간 동안 약 100,000번(십만 번) 움직인다. 다리가 이 정도의 운동을 하려면 적어도 80Km(200리)는 걸어야 한다. 

- 두개의 콧구멍은 3~4시간마다 그 활동을 교대한다. 즉 한쪽 콧구멍이 냄새를 맡는 동안 다른 하나는 쉰다. 

- 성인이 가진 근육의 수는 650개이고 관절은 100개 이상이며 혈관의 길이는 120,000Km나 된다.(지구를 세 바퀴 감는다) 또 뼈의 숫자는 206개인데 그중 절반이 손과 발에 있다. 

- 인간의 뼈는 화강암보다 강해서 성냥갑 만한 크기로 10톤을 지탱할 수 있다. 이는 콘크리트보다 4배 강한 것이다. 

- 자동차를 만드는 데에 13000개의 부품이, 747제트 여객기를 만드는데에 3,000,000개의 부속품이,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데에는 5,000,000개의 부속품을 필요로 하지만 우리 인간의 몸에는 100조개의 세포 조직이 있고, 25조개의 적혈구와 250억 개의 백혈구가 있다. 심장은 1분에 4.7리터의 피를 퍼내고 혀에는 9,000개 이상의 미각세포가 있다. 이 얼마나 정교한 기계인가? 

- 인간의 눈은 이상 조건에서 100,000가지의 색을 구분할 수 있지만 보통은 150가지를 구별해 낸다. 

- 눈 깜빡임은 눈을 보호하고 각막을 매끄럽게 하는데, 한번 눈을 깜빡거릴 때 1/40초의 시간이 소요 된다. 1분에 평균 15번, 한 시간에 900번, 평생 동안 300,000,000(3억)번 정도 깜박거린다. 

- 인체의 뇌는 어떤 상태일 때 가장 편안할까?  어떠한 환경이 뇌를 편안하게 할까?  풍경으로 말하자면, 대지와 나무가 있고, 아름다운 공간에 미풍이 초목을 살랑살랑 흔드는 그러한 환경이다.  게다가 졸졸 흐르는 물소리까지 더해지면 뇌는 더욱 편안해질 것이다.  이것은 인류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살았다는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환경과 같다.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에덴동산 같은 기쁨의 동산을 꿈꾸며 그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에서라면 영원히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현대의학은 인간의 질병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정확히 깨닫고 결과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무공해 천연 자연을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인체의 면역계가 그러한 환경에서 왕성히 활동할 것이다

- 사람은 36,5도의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정온 동물이다. 

- 인체의 좌뇌는 언어, 계산, 논리, 오른쪽 신체기능 전부를 담당하고, 는 감정이나 직감, 왼쪽 신체 기능 전부를 담당한다.

- 인간의 두뇌는 배우도록 즉 공부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두뇌는 공짜이지만, 배움은 공짜가 아니다. 

이렇게 신비롭기만 인간의 몸과 마음은 하나님의 가장 귀한 작품인 것입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4.사람은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성경 다른 곳들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지만(롬 11:36; 사 43:21),

그 일차적 목적은 본문에 증거 된 대로 사람으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모든 생물들을 다스려야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범죄 함으로 영적으로 어두워져서 그 목적에서 떠나며 그 임무를 포기하였고 오히려 피조물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의 악을 행하였습니다.

생물을 다스리는 권한 속에는 노아 시대의 홍수 후에 허락된 대로 생물을 먹을 수 있는 권한도 포함되는 것입니다(창 9:3). 생물은 어떤 이들의 생각처럼 윤회(輪廻)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생명체를 죽이는 살생(殺生)을 금지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축이나 물고기를 감사함으로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특히,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은 개혁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문화 명령'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화라는 영역 속에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부분들이 다 포함되는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영역을 보면 농업을 비롯하여, 상공업, 건축, 교통, 예술, 정치, 교육 같은 영역이 계속 발달해 왔고, 현대 사회는 훨씬 복잡해져서 컴퓨터, 휴대폰, 인터넷 등과 같은 고도의 기술 문명이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영역이 땅을 정복하는 일들입니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의에 일치하고 인류의 유익을 위해 발전하도록 연구되어져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인류가운데서도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으로 세상을 정복해야 할까요? 앞에서 말한 모든 첨단 과학은 물론이거니와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세상을 정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은 물질문명이 아닌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이며 물질문명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똑똑하고 능력이 있어서 많은 일들을 이루어 나가고 있지만 제일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바로 영적인 일입니다.

하나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을 잊고 삽니다. 결국 하나님 없는 문화, 하나님 없는 첨단 과학은 또 하나의 바벨탑을 쌓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백성들인 성도들은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외치며 전하여야 합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돌아와 창조의 목적대로 살도록 말입니다.

[29-31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食物)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사람에게 먹을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는 또 새들과 동물들에게는 푸른 풀을 먹이로 주셨습니다. '푸른 풀'이라는 원어(예레크 에세브)는 '푸른 채소'라는 뜻이며 이것은 풀과 씨 맺는 채소(창 1:11- 12)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식물들은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양식입니다.

창조된 만물은 하나님의 보시기에 매우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오는데, 그 중에,

31절은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조된 세상은 아주 다양하고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색깔과 조화와 균형의 아름다움이 있었고, 하늘과 바다, 산과 들은 모두 아름다웠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과 들에 있는 식물들, 땅에 움직이는 모든 동물들과 물속의 고기들은 다양하고, 해와 달과 별들과 그 규칙적 운행, 자연 법칙들과 인간의 신체 구조 등은 신비하고 놀랍기만 합니다.

사람을 보면 사람이 지니고 있는 마음의 지혜와 사랑은 신비하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놀랍고 아름답게 만드셨으며, 그중 사람은 더욱 뛰어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인간 창조에 대한 진리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로, 우리는 사람의 존귀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만, 범죄함으로 그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하나님의 형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식과 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뜻을 알고 그것을 행하는 데 사람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믿고 그 교훈대로 힘써 살아야 합니다. 죄는 사람을 무가치하게 만들었으나, 구원은 사람의 존귀함과 가치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인간본연의 모습을 회복한 성도들은 삶을 아름답고 멋지게 살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살지 말고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지요.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신의 삶까지도 수준 있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둘째로, 우리는 남녀의 동등성과 역할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녀는 다 하나님의 귀한 형상이므로 서로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남녀의 역할이 있다. 특히 출산이 하나님의 뜻이며 복인 줄 바로 깨닫고 우리는 출산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세속 사회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결혼을 소중히 여기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동등하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은 유교적 영향을 받아 남존여비사상이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와서 지금까지도 사회 곳곳에 남녀차별의 편견이 잔재해 있습니다.

남자 없이 여자 없고 여자 없이 남자도 없습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각기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완성시켜나가게 됩니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힘써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피조물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오히려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고 또 땅을 정복해야 합니다. 땅을 정복한다는 것은 문화적 활동을 말하는데 문화적 활동이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삶의 모든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영성을 깨우고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영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창조의 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우리들은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유익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다운 사람, 그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며 하나님 품안에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창조의 주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진정한 안식[창세기2:1~3]

학문의 분야 중에 [정신위생학]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정신적인 건강을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향상을 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옛날에는 건강의 개념이 매우 협소했습니다. 그래서 몸에 병이 없으면 건강한 것으로 인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연구하면 할수록 병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단순한 것이 아니요. 그 속에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있고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고 건강해도 그의 정신 상태가 온전하지 못하면 그는 결코 건강하다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하는 면에서 오늘날 정신 건강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정신 위생학자인 데이빗 핑크라고 하는 사람은 "우리 인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그리고 안전하게 살아가려면 네 가지가 꼭 필요하다" 는 주장을 했습니다.

첫째는 일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할 일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는 일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스트레스를 주고 능률도 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일하면 일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정신적인 비타민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첫 번째 요소로 꼽았습니다.

 

둘째는 쉬는 것과 여가생활입니다. 사람은 결코 일만 하고 살 수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일과 쉼, 그리고 쉬는 것에서도 여가를 즐기는 것, 이러한 것들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문명이 발달하고 많은 인간의 수고를 첨단기계가 대신 해 주면서 인간에게는 쉴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점점 더 많아지는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이냐 하는 것이 현대인들의 고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놀이문화라는 것이 발달을 하게 되었고 이제는 쉰다는 의미보다는 일하지 않는 시간은 놀이를 통해서 즐긴다는 의미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랑입니다. 인간은 본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므로 사랑을 주고받으며 실천하며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사랑을 주지도 못하고 받지도 못하면서 사니 세상이 삭막해지고 삶의 보람도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을 주고받으며, 사랑하기 때문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그 수고를 통해서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교제야 말로 인간 삶의 질을 높여주는 가장 큰 에너지원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이렇게 사람에게는 일도 필요하고, 쉬는 것과 즐기는 것도 필요하고, 사랑의 수고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다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허무라고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행복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네 번째 요소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이며 하나님 아버지께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되고 영생을 얻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 이것이 정신위생학의 결론입니다.

일과, 쉼, 사랑과 예배, 이러한 삶의 요소들이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 특별히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상고를 해 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인격이 존재하고 영성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여섯째 날 ,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심으로 창조의 대단원을 종결시키게 됩니다. 그것이 1절의 말씀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육일동안의 위대한  모든 창조가 다 끝나고 이제 제 칠일되는 날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가?

2절에 답변합니다.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安息)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히브리말로 샤밧트, "중단했다" 는 뜻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손을 놓고 편안히 쉬셨다 하는 말입니다. 피곤하여 쉬신 것이 아니라 일을 마쳤음으로 안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 일하시고 하루를 쉬시면서 당신의 걸작품인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한 원칙을 따라 살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종합하면 하나님의 쉼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피곤해서 쉬신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만물을 지으시고 그것을 기뻐 바라보면서 즐거워하셨고, 당신의 본을 따라 그 피조물인 인간이 일하고 쉬며 살라는 권면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절 말씀,“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안식의 목적이 오늘 본문에 세 가지가 나옵니다.

1.첫째는 휴식입니다.

피곤하게 수고하며 일하는 인생에게 있어서 휴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복입니다. 그리고 휴식을 통하여 얻어지는 모든 결과도 또한 그에게는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생에게 복된 삶을 주시려고 휴식을 선물로 줍니다. 그래서 서양 격언에는 "휴식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개인이나 사회는 결코 건강 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주일에 하루 쉬는 것은 국가가 제정한 것이라거나, 사회가 나에게 제공하는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신 바 삶의 원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쉼을 위하여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2.둘째는 교제를 위함입니다.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거룩이란 말은 구별이란 말입니다. 무엇을 구별하느냐, 시간과 장소를 구별하여 하나님께 나와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교제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일보다 더 소중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자기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 인생이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속에 사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기서 인간의 무거운 짐은 벗겨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교제에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그 중에 최고의 방법은 바로 예배를 통한 교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바로 예배란 말입니다.

이 날 우리는 쉬면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존재가치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3.안식일을 주신 세 번째 이유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3절 끝에 말씀하시죠,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 하셨음이더라

그래서 지으신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시고 그 지으신바 된 것들의 미래를 계획하시며 지내시는 날입니다.

이날을 가리켜 창조 세계 끝에 있을 영원한 안식의 예표라고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4장 9절-10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 일을 쉬느니라”

다시 말하면 [엿새 동안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이 쉬신 날 하나님과 함께 쉬는 자, 그에게 영원한 안식이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천국 가는 연습을 하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이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쉬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으로 충만해 있는 시간이어요. 구원을 기다리고 확증 받는 날입니다. 내가 발을 이 땅에 딛고 살지만 여기 속한 자가 아닌 영원한 미래 그 안식의 세계에 속한 자임을  확인하는 날, 그날이 바로 그 구원의 날이 바로 안식일이라는 말입니다.

이제 아주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안식일과 주일에 대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안식일과 주일의 차이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구약의 율법적 전통을 따라서 이스라엘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처럼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고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신 그 날은 안식일 바로 다음날 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안식일 다음날을 주님의 날이라 하였고 오늘까지 주일로 지켜지고 있는 날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안식일도 지키고 주일도 지켰습니다. 그러면서 안식일과 주일, 이 두 날을 다 지켜야 되나하는 문제는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안식일 문제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율법을 이스라엘백성이 아닌 이방인들도 모두 지켜야 구원을 받느냐 하는 문제로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격론을 벌였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격론이 벌어지고 결론으로 얻은 내용은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가? 유대인처럼 될 필요가 없다. 가령 남자들은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하다는 문제 때문에 시끄러웠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던 안식일을 포함한 유대인의 절기를 지켜야 할 의무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골2:16~17]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모든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함으로써 구원을 받으며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초대교회의 교리를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제도로 다시 들어가면 기독교와 유대교가 구분이 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날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인 주일을 지키게 됩니다. 그리고 보니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과연 이것은 성경적으로 어긋나지 않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많이 고민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더 깊은 의미의 "질적인 창조"였다, 보이는 물질의 창조는 제일의 창조요, 주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라는 것입니다.

즉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의 세계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으로 새로운 창조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엿새째 창조된 인간에게 있어서 그날은 바로 첫날이었다고 그래서 진정한 창조의 첫날인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세계의 달력을 보세요. 모두 주일이 맨 앞에 있어요. 주일날이 날에 첫날이기 때문이지요.

일찍이 예수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안식일에 대한 개념과 예수님의 생각과는 차이가 났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대하여 너무나 지나칠 정도로 확대해석을 함으로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로 확대해석을 했느냐 하면, 심지어는 바늘 하나를 꽂고 길을 걸어가도 노동에 해당되므로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안식일이 쉼이 아닌 고통과 긴장을 가져다는 주는 두려운 날이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버젓이 안식일에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하셨으니 유대인들이 볼 때는 아주 문제가 많아보였던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율법주의적인 안식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안식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의 개념이 깨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안식의 의미와 여기에 더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축하하는 기쁨을 결합하여 주일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율법적인 안식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쉼과 하나님과의 교제, 그리고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주일을 지킴에 있어서 정말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과 정성을 다하여야 할 것이며 그로 인해 행복한 삶이 주어지게 될 줄을 믿습니다.

휴식의 복을 주시고 거룩한 교제의 기쁨을 주시고 영원한 안식의 소망, 부활의 새 소망으로 충만케 하시는 이날의 목적을 잘 알고 은혜롭게 잘 지키셔서 이날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은혜를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에덴의 행복[창세기2:4-25]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합니다. 아무리 못된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를 소원하리라 생각합니다. 부모들의 마음은 모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적인 부모이신 하나님께서는 나보다도 육신의 부모님보다도 더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탄식하고 괴로워하며 울며 슬퍼하면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살전 5:16-17)

오늘,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사람을 거기에 두시며 또한 남자를 통하여 여자를 창조하신 기사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은 에덴의 행복에 대해 함께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에덴을 창설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2장에서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 평화, 즐거움, 다른 말로  말하면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한 세계를 우리에게 창설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 인간을 위해서 세워주신 또 하나의 행복한 세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행복하게 살아라'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한 에덴동산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2.에덴동산은 선악과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16-17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각종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안락함과 기쁨과 건강을 위해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셔서 "임의로 먹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아담과 하와는 모든 실과는 육신의 식물로 먹을 수가 있었는데,

이는 정말로 축복 받은 일이었습니다.

육신의 필요한 것을 어디서나 취할 수 있었으니 그 이상 큰 축복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런 축복은 동산의 모든 식물을 재배하고 키우고 보호하는 청지기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선한 청지기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선악과나무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 곳입니다. 중앙에 선악과가 있음으로 에덴입니다.

선악과가 사라지는 날 그 동산은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곳이 에덴입니다.

내 가정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  에덴의 가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키며 살면 그곳이 에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할 때 에덴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시니라" 우리가 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행복해 지는 비결입니다. 신명기 10장13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하여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살인하지 말라' 왜 살인하지 말라고 말합니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왜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까?  부모에게  효도해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3.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하나님께서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음으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부부가 무엇을 도와야 합니까? 서로가 행복하도록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예1)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교훈집인 "랍비문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거지가 하루는 랍비의 집 담 벽에 등을 부비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는 그를 불쌍히 여겨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입히고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다른 거지 부부가 그 이튿날 역시 같은 장소에 가서 담에 등을 부비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본 랍비는 그들에게 욕설을 퍼붓고 쫓아버렸습니다. 거지 부부는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변했습니다. 어째서 사람차별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때 랍비는 말하기를 "지난번 거지는 혼자였으니까 담에 등을 부빌 수밖에 없었지만 너희들은 둘이 아니냐? 그것도 가장 가까운 부부가 아니냐? 너희들끼리 등이 가려우면 서로 긁어줄 것이지 남의 집 담에 등을 부비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이야기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첫째는 부부관계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어도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교훈 하나와 둘째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점이 있으면 서로 돕고 협조하는 가운데 이해와 사랑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2) 만년설로 뒤덮인 에베레스트 산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옵니다. 그 중에서 에베레스트 산 중턱의 어느 작은 마을에 전해지는 감명 깊은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 산간 마을에 어느 날 젊은 처녀가 찾아왔습니다. 등산객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말없이 마을 앞에 냇가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입니다.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밤 먹고 잠자는 시간 말고는 언제나 냇가에 앉아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마을 사람이 궁금해서 물어보았지만 그녀의 굳게 다문 입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30년이 지났습니다. 그 젊은 여인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화사한 봄날 냇가에 앉아 있던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습니다.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냇물에 어떤 물체가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냇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그 물체를 끌어올렸습니다. 그것은 한 젊은 남자의 시신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는 젊은 청년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청년은 그녀의 약혼자였습니다. 30년 전 에베레스트 산에 올랐다가 발이 미끄러져 그만 눈 속에 묻히고 만 것입니다. 그녀는 믿었습니다. 언젠가는 눈은 녹을 것이고 눈이 녹으면 시체라도 떠내려 올 것이라고, 그리고 마침내 긴긴 세월의 여울을 건너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하여 한번 만난 그 만남을 언제까지나 간직하고 지켜나간 사랑,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부의 관계입니다.부부란 본질적으로 한 몸입니다.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부부의 모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이 되라고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동산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살았던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한 가정, 한 부부의 모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은 23절의 감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아담은 여자를 처음 본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예쁘게 생겼는데 자기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아담은 여자를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아담은 저 여자는 또 다른 나라고 느꼈습니다. 하와는 자신의 갈비뼈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자와 여자는 본질적으로 한 몸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나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부부의 신비이며 오묘함입니다.

아담이 여자를 보고 처음 한 말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뼈와 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여자는 존경을 받아 마땅하고 사랑을 받아 마땅하고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남자의 뼈 중에 시시한 뼈가 아니라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13절에 보면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와가 그 후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코 아담과 하와가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만드셔서 준비를 시키신 다음에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돕는 배필이라는 것은 완성을 시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자가 없는 남자는 불완전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한 몸입니다.부부가 싸우고 갈등하는 이유는 성경의 창조의 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철학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자기의 것을 찾아야만 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하나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의도하신 행복한 부부의 삶을 무엇일까요?1)부모를 떠나 독립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결혼을 위한 첫 번째 단계는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합하는 것입니다. 여기 떠나라는 것은 부모를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가정은 독립하라는 것입니다. 결혼이란 부모의 연속된 삶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종족 보호 본능 때문에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혼을 해도 계속 부모의 영향력이 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젊은 남녀가 사랑해서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은 부모와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결혼은 새로운 출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와 자식이 담을 쌓고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결혼을 하여도 부모에 대한 효도나 자식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독립적인 가정을 꾸미며 한 가정을 꾸며나가야 하는 것이 자녀들이 결혼 후에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말씀 또한 부모님과 따로 살라는 말로만 이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같이 살던 따로 살던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2)서로 합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그 아내와 연합하여"라는 말이 있습니다.

연합한다는 말은 접착제로 두 물체를 붙인다는 말입니다. 이는 두 사람이 모든 면에서 영원히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부란 떨어 질 수 없는 관계란 말입니다. 진정한 결혼은 부부가 접착제로 붙여 놓은 것처럼 하나 되어 어떤 누구도 들어올 수 없도록 밀착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남녀가 결혼을 해서 연합할 때 세 가지를 명심해야합니다.

첫째는 문화의 차이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다고 해서 갑자기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문화라는 것이 그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가정, 학교,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부모에게서 길들여진 습관, 가풍, 물질관계, 대인 관계 등 모두가 다 다릅니다.

둘이 만나서 사랑하지만 문화가 맞지 않기 때문에 매일매일 부부는 문화적으로 충돌을 합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살아온 배경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인식하고 부부는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을 하여야합니다. 서로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서로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를 포기해야합니다. 그래야 문화적인 차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서로 상처와 잘못된 부분을 깨끗이 치유해야합니다.

A 라는 물체와 B라는 물체를 붙이려면 그 접촉 부분을 깨끗이 닦아야합니다. 그 곳에 물기가 있다거나 녹이 슬었다거나 먼지가 있다면 아무리 좋은 접착제로 붙였다고 할지라도 곧 떨어지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가 잘 연합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상처와 잘못된 부분을 깨끗이 치유해야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용서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에 대한 잘못을 사랑으로 감싸야합니다. 서로를 세워 주어야합니다. 서로를 깎아 내리면 안 됩니다. 과거의 상처를 알고 있습니까? 그러면 덮어 주어야합니다.

상처 난 부분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하여야합니다. 그리고 잘못된 부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용서가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용서와 치유와 사랑은 갑자기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해야합니다. 셋째는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부부 생활에 행복은 서로를 칭찬해주고 격려하고 서로 사랑을 고백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행복한 부부생활에 참 중요한 요소입니다. 어느 책에 보니까 남편의 기를 살리는 말과 아내의 기를 살리는 말에 대해서 나와 있었습니다. 여기에 소개를 합니다.

남편의 기를 살리는 말* 여보 아이가 당신을 닮아서 저렇게 똑똑한가 봐요.* 내가 결혼 하나는 잘했지.* 내가 당신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알아요.* 역시 당신 밖에 없어요.* 제가 시어머니 복은 있나 봐요.* 당신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당신 덕분에 이렇게 잘 살게 되었잖아요.* 여보! 당신 곁에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것 아시죠?* 당신 없인 난 하루도 못 살거야.* 당신은 언제 봐도 멋있어요.*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당신은 다른 남자들과는 질적으로 달라요.* 당신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따뜻해져요.* 당신과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당신은 특별한 사람이에요.아내의 기를 살리는 말입니다.* 당신 음식 솜씨는 일품이야.* 역사 나는 아내 복이 있어.* 역시 장모님밖에 없어.* 당신 살림엔 타고난 소질이 있나봐.* 당신은 멀리서도 한눈에 띠어.* 당신은 뭘 입어도 폼이 난다니까.* 당신 웃을 때 보면 꼭 사춘기 여고생 같아.* 난 아직도 연애할 때 생각하면 마음이 막 떨려.* 아마 당신 같은 사람 찾아내기는 쉽지 않을 걸?* 당신 마음 씀씀이를 보면 내가 부끄러워질 정도야.* 당신 기억력이 보통이 아닌데.* 당신은 나한테 너무나 과분해* 당신 그럴 땐 너무 예뻐. 당신은 안 꾸며도 예뻐.서로 칭찬하시고 서로 아껴주세요. 서로 격려해주세요. 서로 사랑을 고백하세요. 이것이 서로 하나가 되는 가장 아름다운 비결입니다. 예3) 토마스 칼라일은 위대한 문필가요 문호입니다. 그의 아내는 결혼 생활 내내 단 한순간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사랑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결국 삶의 희망을 포기하고 그의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토마스 칼라일은 좋지 못한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죽은 후 토머스 칼라일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무도 내 속을 모른다. 단 5분만이라도 좋다. 아니 2분만이라도 좋다. 아내가 다시 살아난다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은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아내는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죽었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가 이 마음을 알아줄까? 나는 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토마스 칼라일이 진작 고백을 했더라면 아내가 자살을 했을까? 여러분 행복한 부부는 서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칭찬과 용서와 사랑을 고백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로소 연합이 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사랑을 고백하십시오. 칭찬을 하십시오. 격려를 해주십시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부부는 인생길을 언제까지든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부부의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부부는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언제까지든지 함께 인생길을 간다는 의미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한 몸 의식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안 계시다구요?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신랑 되신 주님을 영원토록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창2:15을 보세요."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우리는 에덴을 다스리며 지켜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에덴을 지키시기를 바랍니다. 에덴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면 에덴의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모든 삶의 현장, 가정이나 일터나 교회나 어디든지 행복한 에덴동산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1~10)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보여주는 아름다운 창조이야기는 인간에게 더없이 행복한 하나님의 사랑의 속삭임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내가 너를 축복하노라”“행복하여라”,“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며 모든 것을 누리라”...

인간은 행복하기위해서 지음을 받았고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랑의 교제를 누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동일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은 이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안타깝고 애석한 역사의 기록이 담겨져 있습니다. 불행해진 인간의 역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불행한 과거나 우울한 일들은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는 덮어버리고 오늘에 충실하여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이 세상이 우리를 온전히 행복하게 해주지 도 못하고, 오히려 원치 않는 우환질고(憂患疾苦)에 시달리며 살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모든 인생의 원인이 되었던 인간 타락의 역사를 되짚어 볼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저주와 불행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는 길이 열렸고 행복의 문이 있는데 엉뚱한 곳에서 방황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우선 지난 시간 말씀을 상고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서 에덴을 창설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2장에서는  에덴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기쁨][평화][즐거움], 다른 말로  말하면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행복한 세계를 우리에게 창설해 주셨습니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 인간을 위해서 세워주신 또 하나의 행복한 세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행복하게 살아라'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어느 곳이든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한 에덴동산으로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에덴동산은 선악과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2장 16절~17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각종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16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대로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안락함과 기쁨과 건강을 위해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셔서 "임의로 먹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따라 아담과 하와는 모든 실과는 육신의 식물로 먹을 수가 있었는데, 이는 정말로 축복 받은 일이었습니다. 육신의 필요한 것을 어디서나 취할 수 있었으니 그 이상 큰 축복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이런 축복은 동산의 모든 식물을 재배하고 키우고 보호하는 청지기에게 내려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선한 청지기는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선악과나무는 하나님의 주권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있는 곳입니다. 중앙에 선악과가 있음으로 에덴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사는 그곳이 바로 에덴동산입니다.

내 가정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면  에덴의 가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말씀을 중심으로 사는 곳이 에덴동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계명을 지키며 살면 그곳이 에덴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10장 13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행복해 지는 비결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을 때, 선악과가 없어질 때 인간은 에덴동산 에서 쫓겨나고 맙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하시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욕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였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은 거짓된 것이 진리인줄로 착각한 인생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단의 유혹에 빠짐으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래적인 행복을 모두 잃어버리고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비극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성경주석가인 [메튜헨리]는 창세기 3장을 "성경의 모든 이야기 중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창세기 3장에 나타난 기록은 단순히 아담의 범죄 기록이기보다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전 인류에게 미친 죄의 기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아담과 하와는 결국 저주와 함께 낙원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과 죽음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게 됩니다.오늘 본문에는 뱀이 인간을 유혹하였다는 기록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하나인 실제적 뱀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뱀은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였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요.

간교함은 사탄의 특징입니다. 간교함은 이중적이고 교활하며 거짓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에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진실하십니다. 하나님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 된 우리들에게도 진실함과 순전함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사탄은 거짓되어 거짓의 아비라고 요한복음 8장 44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뱀은 사탄이 사용한 도구였습니다.

뱀은 혼자 있는 약한 여자에게 다가가 의심을 불러 일으켜 하와의 마음을 혼란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사단은 하나님을 마치 동산의 모든 실과를 하나도 먹지 못하게 하시는 분처럼 매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못된 생각을 부추기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에게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속삭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주일을 지킨다는 낡은 전통 때문에 화려한 세상을 즐기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라고 비아냥거립니다.하나님은 너의 모든 즐거움을 빼앗아 가고, 너의 물질을 빼앗아 가는 분이라고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에,“각양 좋은 은사온전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러나 사탄은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오늘 하와가 잘못한 것은 자기에게 접근한 뱀하고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소리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하셨지만 사탄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3장 4절) 말함으로 거짓된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하였습니다.이처럼 사단의 소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반대합니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는 파멸의 늪으로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은 읽어드린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말씀을 받을 때 우리의 연약함을 발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힘입어 사탄원수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1.이 부름은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본문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아담과 하와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은 선악과를 따먹고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8절). 선악과를 먹은 후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벗은 것이 부끄러워졌으며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수치심과 두려움은 죄인들이 갖는 특성입니다.

죄를 지은 자는 자꾸 도망가려고 합니다. 어디든지 피해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길을 가다가 경찰만 만나도 다 죽은 사람처럼 굳어버리고 맙니다. 흔히‘죄짓고는 못산다.’라는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결국 불안과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이 죄인의 심정이며 죄인의 생활입니다.

뱀이 하는 말에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절)고, 하나님의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말씀에 자신의 말을 첨가하고 의심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하와를 사단은 그냥 둘 리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정면으로 공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4절) 또한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속삭였습니다.(5절)

이미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단의 말을 듣고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보암 직도 하고(안목의 정욕),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이생의 자랑) 나무로 보였습니다(6절). 육신의 정욕 = 탐욕스러운 인간의 욕망 더 가지려고 끝없이 추구함

안목의 정욕 = 견물생심 /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 롯이 눈을..

이생의 자랑 = 교만 / 자랑하고 싶은... / 겸손함이 없음.

결국 하와는 그 실과를 자신이 따먹고 남편에게도 주어 아담도 먹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먹은 결과 사단의 말과는 달랐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죄로 인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즉각적으로 수치심이 엄습했습니다.죄를 짓고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들은 자기들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패배자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사단의 올무에 걸려 사망의 굴레를 뒤집어 쓴 아담에게 하나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절망과 사망의 늪에 빠진 인생은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지도 못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말로 표현한다면 전적인 타락, 혹은 전적인 부패라고 합니다.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주시며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백성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인 베드로를 찾으러 갈릴리 바다로 가셨고(눅5:8-11), 삭개오를 찾아 여리고로 가셨습니다(눅19장). 버림받은 땅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버림받은 여인을 찾아가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며 죄인을 찾아오십니다.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났다 할지라도 잃은 양을 찾는 목자같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과 같이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며 찾으십니다(눅 15:3­10).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도 바로 범죄한 인간을 찾아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를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눅 5: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2.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본문 11절에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에 숨어있는지 알지 못해 아담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한 물음이었습니다."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오지 아니하나니"(요3:20)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한 저들은 도피의 수단을 사용하였지만(8,10절)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할 아담은 시종일관 책임을 회피하려하고, 책임전가에 급급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뿐만 아니라 자기의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도 떠넘기고 있습니다. 여자를 주지 않았다면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므로 내가 먹었나이다”(12절)

우리 속담처럼 ‘잘되면 제 탓이고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과 흡사합니다. 하와도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와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라고 물었습니다.이때 하와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개하기보다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게 되었다고 책임전가를 합니다.

죄인은 모든 일에 책임을 회피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이 죄인들의 특징입니다. 핑계대고 남의 탓하고 구실을 붙이려고 합니다. 변명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잘못, 그리고 좌절과 실패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모습에서 인간의 추한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재판했던 본디오 빌라도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27:24)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요나를 보십시오!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니느웨로 가서 멸망을 선포해야 되는데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은 이때 대풍(大風)을 보내어 배가 깨어질 지경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때 선장이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한 것인지 제비를 뽑자고 했는데 요나에게 제비가 뽑혔습니다. 이때 요나는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욘1:12)고 자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을 피하는 것은 죄의 본성이지만, 그 앞으로 나오는 것은 회개의 특성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를 용납하여 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 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3. 구속의 은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창세기 3장 15절에 '여자의 후손'이라는 말과 21절에 '가죽옷'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범죄 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각자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더해지며 남편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얻게 되었고(16절), 남자에게는 종신토록 수고하며 얼굴에 땀을 흘려야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는 사망의 존재가 되었습니다(17,19절)

뱀은 배로 다니고 흙을 먹게 되는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뱀은 실제로 흙을 먹지 않는데 이것은 곧 저주와 굴욕의 상징으로 극히 낮아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17-18절).

철저하게 타락한 인생! 인간의 역사는 여기에서 끝날 수가 없습니다. 사망선고를 받은 죄인에게 하나님의 구속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는 범죄 한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主)로 보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이를 '최초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키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고,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신체의 일부분인 발꿈치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무화과나무 잎으로 옷을 지어 입은 저들에게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이 입히신 ‘가죽옷’은 장차 일어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죄로 얼룩진 인생은 이제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합니다.“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므로 전적 타락의 길로 떨어졌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인생에게는 한 가닥의 소망의 빛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러 동산에 오셨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씀하시므로 지금도 죄인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이 아니고는 사망의 늪에서 나올 수가 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는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의 굴레를 벗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는 우리들은 사단의 말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순종할 때에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에 아담처럼 두려워서 피하고 숨는 것이 아니라‘아버지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당당하게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의 앞에서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창 4:1-15)

성경 속에는 두 갈래 갈림길이 많이 나옵니다. 신30:19절「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위하여 생명을 택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생명과 복된 삶의 길로 나아간 사람들과 사망과 저주의 길로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과 사망 그리고 복과 저주의 갈림길의 첫 번째가 바로 예배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가,.. 나의 예배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가 하는 것을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바로 예배를 통한 갈림길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간사의 첫 사건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시작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에게는 예배가 가장 우선적이요 가장 중요한 행위이며 예배의 승패는 바로 인생의 승패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살아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부강했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형식적이고 아예 잊어버렸을 때는 나라는 흔들렸고 백성들은 패역하며 결국 이방에 포로가 되며 나라가 멸망했습니다. 이것은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족장의 가계 본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에서가 왜 장자에서 밀려났습니까? 바로 예배의 실패입니다.

창25:27절에 보면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인 고로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종용한 사람인고로 장막에 거하니」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의역하면 에서는 사업가로서 바빠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못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축복에 눈이 뜨여지지 못해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버릴 정도로 경솔한 사람이 됮 않습니까?

이스라엘의 첫째 왕 사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물로 보아서는 사울 왕이 다윗보다 훨씬 남자답고 월등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 된 이후 교만하여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지내다가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책망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한 것입니다. 예배생활의 실패자였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의 가인과 아벨 역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예배가 그들 인생의 갈림길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저들에게 가정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자손을 출산하도록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와가 첫째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가인」이라 지었습니다. 「가인」이라는 말 우리에게는 별 호감이 가지 않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의 뜻은 <내가 얻었다 즉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에 보니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고 하지요. 그리고 둘째를 낳고는「아벨」이라 이름을 지었는데 그 뜻은 <허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가인과 아벨 이름으로 보아서는 가인이 더 잘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탈락된 인생이 되고 아벨은 하나님의 구속사에 주인공이 된 인생입니다. 그 갈림길이 무엇이냐? 바로 제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왜 가인의 제사를 반기지 않으셨는가? 창 4장은 인류 최초의 살인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가인이 동생을 왜 죽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직접적인 동기는 제사에 있었습니다.

두 형제가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기쁘게 받으셨지만 형인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셨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두 형제가 드린 제사의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럴듯한 이론인 것 같지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 중에 하나인 '소제'라는 제사가 있었는데 이는 땅에서 난 양식을 드리는 제사였습니다(레 2: 1-16; 6: 14-23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짐승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곡식 제사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동물 제사만 열납하시고 식물 제사는 배척하신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본문 말씀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대답이 명확치 않습니다.

단 한 가지 희미한 단서가 있다면 3-5절의 말씀을 주목해 보는 것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아벨과 그 제물'이라는 부분과 '가인과 그 제물'이라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것은 아벨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벨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아니, 순서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보다도 아벨이라는 사람을 먼저 열납하셨습니다.

가인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서 물리치신 것은 가인의 제물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인이라는 사람도 물리치셨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배척하시기 전에 가인이라는 사람부터 먼저 배척하셨습니다. 가인 아벨, 두 형제 사이의 뚜렷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한 쪽의 제사는 받으시고 다른 쪽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2.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무엇인가?⑴ 두 형제는 인격과 삶이 서로 달랐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제사의 종류가 아닙니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무엇을 제물로 해서 바치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아벨은 제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이 드린 제물보다 먼저 그의 신앙 인격을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인의 경우에는 제물이 문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 즉 가인의 인격이 문제였습니다. 이미 제사를 드리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가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가인의 마음속에는 동생과의 묘한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마음이 잠재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드린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은 하나님의 의에 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요1서 3:12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그렇습니다. 가인의 신앙 인격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은 본문에 너무나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동생의 제사는 열납되었지만 자신의 제사는 열납되지 않자 제일 먼저 안색이 변했습니다. 질투심과 분노가 마음 가득 차올랐던 것입니다. 결국 시기심과 증오심을 이기지 못한 가인은 들판에서 동생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제사를 기뻐 받으십니까?

우리의 인격과 신앙과 삶이 함께 접목된 예배를 기뻐 받으십니다.

사 1:11-17절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무리 좋은 제물을 무수히 많이 바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그 제사를 받지 않으신다고 경고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와 삶이 서로 따로 떨어져 놀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힐책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5:23-2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가인의 제사가 왜 열납되지 않았습니까? 자기 동생에 대한 경쟁심과 시기심, 증오심을 품은 채 제물만 드렸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아벨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 23: 3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이 말씀에서 아벨을 분명히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왜 반기셨습니까? 그의 마음이 정직했고 그의 삶이 경건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드린 제물 이전에 그의 인격과 삶이 온전했기 때문에 먼저 아벨이라는 의인을 받으셨고 제물은 저절로 열납하셨던 것입니다! 호 6: 6은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또한 시 51: 17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마음이 떠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의로운 삶이 뒷받침되지 않은 예배는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예물보다 여러분의 마음과 삶이 먼저 열납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요 4: 23-24 참조)가 되게 하십시오!   ⑵ 두 형제는 신앙이 서로 달랐습니다. 본문에는 가인과 아벨의 신앙이 서로 어떻게 달랐는지 자세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막연히 추측할 뿐입니다. 그러나 히 11: 4절은 두 사람의 차이는 신앙의 차이였음을 매우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하나님께서 왜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신 것은 그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히 1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오늘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가 열납되기를 원하십니까? 신실한 믿음으로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⑶ 두 형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반응이 서로 달랐습니다.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면 아벨에 대해서는 겨우 몇 줄 정도 밖에 설명하지 않지만 가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인이 드린 제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했을 때 가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초점을 가인에게 모아 생각해 보면 가인은 세 가지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가인은 대번에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에 대하여 불만이 있었습니다.

사실 가인은 왜 자기의 제사가 열납되지 않았는지를 반성해야 옳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가인은 하나님에 대하여 원망하는 마음부터 먼저 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의 친동생인 아벨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품었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살의(殺意)를 품게 된 것입니다. 이미 얼굴에서부터 아벨을 미워하는 마음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로, 아벨을 죽였습니다.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충고를 주십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에 죄가 가인의 마음속에 들어왔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 즉 정복하라고 충고하십니다.

하지만 가인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충고를 무시했고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8절에 보면 들판에서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인류 최초의 살인자요 친형제 살해범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두 가지 죄를 저질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외면했습니다. 그 다음에 자기의 친동생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분노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 15: 19에서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가 모두 마음에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은 질투심과 분노 때문에 자기 형제를 살해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자신의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인 다음에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얼마나 뻔뻔스러운 태도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모습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지키듯이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나는 내 동생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잡아떼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여기에서 철저하게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을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책임!(Irresponsibility).. 이것이야말로 아담과 가인을 거쳐 오늘 우리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는 원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인 것입니다!자기의 범죄 사실을 부인하는 가인에게 하나님은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대십니다. 10절에 보면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죄에 대한 징벌을 주시는데 12절을 보십시오.

장차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아니하며 가인은 땅에서 피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저주를 듣고서야 가인이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싶습니다.

13-14절을 보세요.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하나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에 떠는 가인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절에 보면 가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을 일곱 갑절이나 받게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서 죽임을 면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긍휼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3. 가인 편에 설 것인가? 아벨 편에 설 것인가?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그 이후 전개될 인류 역사를 요약해줍니다.

이 세상에는 가인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공로와 행위를 높이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심과 시기심과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 찬 불신앙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신앙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반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아벨 편에 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자신들의 마음과 삶 전체를 향기로운 제물로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의를 사모하며 하나님과 사람들을 정성껏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십니다.오늘 우리는 아벨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날마다 예배생활의 기쁨이 더해가고 은혜가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더욱 더 온전한 믿음으로 계속해서 저 천성에 이르는 날까지 생명과 축복의 길을 걸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 창세기 4:16-26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두 종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자손과 셋의 자손들입니다.  아담은 930세까지 살았는데 그 동안에 굉장히 많은 아들딸을 낳았습니다.  그 중에서 성경에는 세 아들의 이름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가인과 아벨이 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온전함으로 경외한 자이었고, 가인은 그러한 동생을 쳐 죽인 첫 번 살인자였습니다.  경건한 백성인 아벨이 죽고 나자 하나님은 그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될 아들을 다시 주셨는데 그의 이름이 셋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이 셋의 후손을 통해 이루시려고 계획하시고 이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똑 같은 아담의 아들이었지만 가인의 삶과 셋의 삶은 전혀 달랐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달랐던 것처럼 역시 가인과 셋도 달랐습니다.  이제 앞으로 성경은 셋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앞서 가인의 후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 (창4:16-24)

16절,‘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절,‘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이 가인의 후손들은 보니까 그들의 특징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앞을 떠나’ 이 말씀은 영적 상태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말입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을 떠나 끝없는 방랑의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항상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고 그 증표도 주셨지만 그의 삶은 항상 쫓기는 삶이었고, 안정을 찾지 못하는 삶이었습니다.  가인은 그렇게 도망 다니는 생활 가운데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했습니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16절에 보니까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라고 합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을 떠났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몰랐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고,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앞을 떠나 에덴 동편으로 나갔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나가게 된 것은 그가 지은 죄악 때문이었고, 그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을 떠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며 저주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4장 13절에서 가인은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하소연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자가 하나님 앞을 떠난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을 때는 그것이 힘들고 거추장스러워서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 앞을 떠나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을 떠난 다음 얼마 있지 않아서 그것이 얼마나 저주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 앞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살았습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금방이라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아들을 낳고 다른 자녀들을 낳게 되면서 놋이라고 하는 곳에 머물러 살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불안과 공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집 주위에 성을 쌓았습니다.  아무도 침범하지 못하게 성을 쌓고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 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아님

이 에녹 성은 가인의 왕국이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인은 그곳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왕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합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지 죄가 되는 일이든지 자기가 원하면 다합니다.  하나님을 믿던 사람이 믿음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주인이 되고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한번 살아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려면 하지 말라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어찌나 많은지 항상 그것에 얽매여 끌려 다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등지고 나가 마음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삶,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삶, 그래서 자기만을 의지하는 삶의 모습이며 세상 속에서 고립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가인이 성을 쌓았다고 했는데, 성은 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도시 문화 를 건설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땅을 기초로 해서 살지 않고 도시를 건설하고 사람이 만든 것을 교환 하며는 상업이 시작되었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살아갑니다. 항상 따지고 계산하고, 상대방을 경계합니다. 자기머리를 의지합니다. 이 도시에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대신 권력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인이 성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의 삶이 자기 아들 중심, 즉. 사람중심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보호벽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18:1,2)“...여호와는 내 요새시요 반석이요 나의 산성이요...”

18절,‘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절,‘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절,‘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절,‘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절,‘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본격적인 도시 문명, 인간 문명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19절의 [라멕]을 주목해 봅시다. * 노아의 아버지도 라멕

‘라멕’(강한 자, 힘센 자) : 두 아내(아다와 씰라)를 취함(한 남자 한 여자의 창조법이 깨짐), 권위적이고 남성위주의 삶이 시작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아내는 참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가정 창조의 목적은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다(기쁨)야발유발을 낳았다. 야발(시내,강,여행자,생산자)은 물과 목초지를 좇아 끊임없이 여행하는 유목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유발(수양의 뿔)은 수금,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음악, 향락, 즐거움의 길을 터놓았다.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악기를 해야 하는데, 이때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으니까, 어두움의 노래, 슬픔의 노래, 향락적인 노래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씰라(그늘)는 두발가인을 낳았습니다.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였고, 농기구를 비롯하여 각양 전쟁의 도구들을 발명하였습니다. 먹고 살기 힘드니까 땅이 저주를 받아서 소출이 어려우니 농사를 잘해보려고 농기구를 만들었는데, 그러다가 부족한 식량 때문에 서로 빼앗다 보니까 무기를 만들고 전쟁을 하느라 많은 문명이 발달하게 된 것입니다.

23절,‘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절,‘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의 노래’- 칼의 노래

라멕(강한 자, 힘센 자)는 타락의 입술로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창상을 인하여, 상함을 인하여 복수한다고 했다. 복수는 항상 더 큰 복수를 낳기 마련입니다. 라멕의 교만과 복수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잔인성이 드러나 있고, 하나님도 없고 죄의식도 없습니다. 법보다 폭력을 앞세우며 힘이 있다고 큰 소리치고 있습니다.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 이리로다’ 가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를 임의로 끌어들여 스스로 법을 세웁니다.

최고 판단 자가 하나님이신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니 자기가 법이 되는 것이지요. 인간이 인간을 다스리는, 스스로 통치하는 법을 세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라멕은 양심의 가책도 없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미 죄가 만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해 주고 가죽 옷을 입혀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상처 입힌 사람의 문제를 보복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이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최초의 살인 이후 이것이 끝이지 않을까 하지만 더 심해졌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이 나아지지 않고 점점 더 나빠지고 있지 않습니까? 죄의 세력만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셋의 후손 (창4:25~26)

25절,‘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절,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담은 셋을 낳고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25)?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라’

여호와 앞을 떠난 가인의 후예와는 달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셋의 후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역사는 계속 이어진다는 진리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남겨두신 자가 반드시 있고, 남겨두신 자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26절,“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셋의 후손들은 무슨 업적을 이루어 놓았는지에 대해 아무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특출난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농사 기술을 개발하거나 예술을 발전시킨 사람도 없었습니다.  각종 기계를 만들어 사람들을 편리하게 해 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너무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개발한 것을 이용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는데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씀합니다.(공적인 예배생활이 시작됨) 

지금까지도 아담을 포함하여 셋과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경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에노스가 태어난 그때부터 사람들은 함께 모여 예배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임을 증거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하나님은 노아를 보내시고, 아브라함을 보내시고, 다윗을 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십니다.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그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요, 축복된 백성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우리에게 비교해서 보여줍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아주 특출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복스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말씀합니다.  더 큰 고통과 불안이 있었다고 가르쳐 줍니다.  

반대로 셋의 후손들은 뛰어난 능력이 없었습니다.  누구도 업적을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매우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들이 바로 복된 자손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축복된 자손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인간의 업적을 자랑하고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가지고 힘과 위로를 삼았지만 셋의 후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전능하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세상을 보시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잘 살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 모습인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은 사업도 잘 되고, 자녀들도 훌륭하게 잘 되고, 사회적으로 많은 업적들을 세우는데 하나님 안에 사는 우리 집은 왜 그렇게 일들이 잘 안 되고, 뛰어난 자녀도 없고, 이렇게 어렵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생각을 하실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오늘 말씀은 출세보다 중요한 것이 있고, 업적을 세우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예배하는 삶을 사는 그 사람은 비록 출세하지 못하고, 비록, 큰 업적을 세우지 못하고,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우신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의 후예가 아닌 셋의 후손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능력보다 중요하고, 업적보다 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셋의 후손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언제까지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더욱 복되게 하실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이 아닌 셋의 후손임을 기억하시고 영원토록 주안에서만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의 족보와 에녹의 믿음(창5:21~24, 히11:5~6)

창세기 5장에서는 아담의 계보가 나타납니다.그런데 우리 상식으로는 아담의 계보는 가인으로 이어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아벨 대신에 하나님께서 주신 셋으로 이어져 간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이미 3장에서 인류시조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세상에 사망이 들어왔고, 4장에서 가인이 동생을 쳐 죽이는 인간의 무서운 자범죄가 나타났고, 가인의 후손들의 불경건하고 불의한 삶의 모습들이 기록하였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 깨어져 버린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약속도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은혜와 사랑이 무한하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의 후손 중에 나실 메시아를 보내어주셔서 인생을 구속하시는 일을 하실 것을 일찍이 약속하셨는데 이 약속을 이루시는 데는 인간 역사의 악함이나 거역함에 방해받지 않으시고 오늘도 당신의 뜻대로 그대로 이루시고 계심을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5:1-2에는 본래 에덴동산에서 인생을 지으실 때 인간의 본질이 어떠하며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어떠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여러분 진정한 인생의 가치는 어디 있습니까?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행복하도록 만들어진 하나님의 가장 귀한 피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과 에덴동산을 잃어버리고 죄인이 되었으며,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인간을 구속하시려는 계획을 세우시므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오늘 다 읽지는 않았지만 창5장 6절 이하에 셋의 후손들을 기록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인의 이름은 없고 셋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이는 셋의 후손 중에서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셋의 족보는 구속사의 족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창5장 6절 이하의 셋의 족보들을 보면 반복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낳았고 ~ 죽었더라.”는 말입니다. 낳고 죽는 것, 이것이 인생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히9:27,‘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셋의 후손 가운데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났었고, 자녀 낳고 살다가 죽었음을 보게 됩니다. 범죄 한 인생은 이렇게 죽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당시에 1000년 가까이 살았다 할지라도 이 땅위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했습니다. 가인의 후손도 죽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셋의 후손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1000년을 살았다면 얼마나 많이 살았습니까? 그러나 결국은 죽었습니다.

이 세상이 영원하리라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범죄 한 인생은 죽으리라 흙에서 나온 인생 흙으로 돌아간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생은 죽습니다. 그러나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에서 번쩍 거리며 살았던 가인과 그 후손도 죽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겼던 아벨도 또 셋의 후손들도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후에 영원한 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원한데 영원한 인생인 줄 모르고 살았다면 잘 못 산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하리라 하고 살았다면 그것도 잘 못 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육신의 죽음을 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인의 후손도 셋의 후손들도 다 죽음을 보았으나, 에녹이라는 사람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어떻게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있느냐 의문이 생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에녹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곳에서 쫓겨남을 당한 이후로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셋의 후손인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들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을 떠난 가인에 대하여는 많은 말씀들을 기록했는데 비해서 믿음의 사람인 에녹에 대하여는 너무 짧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뿐입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에 보면 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히11:5하,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그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히브리서 11장 6절,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경주석가인 [이상근 박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은 어떤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중심에 간직하고 보이지 않는 믿음이었다.”라고 해석합니다.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산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신뢰하며 그분께 기도하며 의지하며 살아야 하고, 나아가서는 믿는 자의 본이 되는 행실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 믿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에녹의 믿음을 살펴보도록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1)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예) 김영길박사,(한동대 총장 창조 과학자)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증거를 찾는 것보다 계시다는 증거를 찾는 것이 훨씬 쉬웠다.”라고 말합니다.

요6장 28절~29절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현대어성경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2)하나님이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상 받는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것과 천국을 보장받았으면 됐다는 것이지요. 다른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천국을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고차원적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상주시기를 기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향하여 상 주실 분이심을 믿고 열심을 낼 때 주님 앞에 기쁨이 됩니다.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에녹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상주시는 자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실패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소홀해지고 떠나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 속에 가두어 두고 내 방식대로 믿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머리 숙이며 또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반드시 내 방식대로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말 말씀을 잘 배우시기 바랍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창세기본문을 통해 에녹의 믿음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5:22-24,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에녹의 믿음에 대한 중요한 증거가 되는 단어 등장하고 있다.동행이란 단어입니다. “동행”이란 말은‘길을 같이 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는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였습니다.그렇다면 그 동행이란 표현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현대어성경 - 하나님의 뜻을 따랐다. / 현대인의 성경 -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 공동번역 -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영어번역본 - 함께 걸었다.

나는야 친구 되신 하나님과 푸른 초장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단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손을 잡고 기쁨을 나누면서 둘이서 한없이 거니네

지나간 일들 내게 말씀하며 앞날에 될 일 내가들을 때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같애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 믿으니 이 세상 천국같애

나는야 친구 되신 하나님과 영원히 다정하게 지내리

천지는 모두 없어진다 해도 우린 영원히 지내게 되리

천지는 모두 없어진다 해도 린 영원히 지내게 되리

1)뜻의 일치, 조화암3:3, “두 사람이 의합하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내 뜻에 맞추려고 한다면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내 뜻대로 해 주세요’라고 말하지 말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2)교통 - 대화, 커뮤니케이션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상호 의사교환이 잘 이뤄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에녹은 항상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었고, 그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였습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잘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대단히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에녹이 우연한 기회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동기가 있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창5:22-23,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므두셀라를 낳은 후”라고 그 시작점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에녹이 65세 되던 해 므두셀라를 낳았는데, 그를 낳고 난 후 분명한 하나님의 부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에녹은 아들의 이름은 “므두셀라”라고 지었다.“므두셀라”-“무기의 사람”,“창을 던지는 사람.”름은 이렇게 지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여 집니다.

에녹은 무드셀라를 낳을 때 장차 올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심판이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임할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가 언제인가? 므두셀라가 죽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므두셀라라 지었는데, 므두셀라는‘창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창을 던지는 자’란 옛날 고대 부족끼리 서로 싸울 때면 그 마을에서 창던지는 사람들이 마을 입구에 서 있다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행해 창을 던져 물리쳤다 합니다.

그래서 창을 던지는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그 마을은 곧 함락되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결국 므두셀라라는 이름에는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의미가 따라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무드셀라가 969세로 죽던 해에 노아의 홍수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에녹은 미리 알고 두려운 심정으로 죄를 멀리하며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유1:14-15,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에녹의 예언자적 사역은 사람들이 타락한길을 가던 그 시대에 300년 동안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활동을 하는 것이었습니다.에녹의 선지자 사역은 그 아들 므두셀라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므두셀라는 라멕을 낳고 라멕은 노아를 낳았는데, 므두셀라가 죽던 해(969세) 노아의 나이가 600세 였고, 바로 그 해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에녹이 65세 때 므두셀라를 낳은 후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의 삶이 확실하게 변화 되었습니다. 극도로 타락한 현실 세계에 눈이 열렸고,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버는 “현대인들의 부패한 생활은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하였습니다.마24:38-39,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에녹은 방탕하고 혼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300년 동안 한결 같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을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실히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였고, 선지자적인 삶을 살다가 이 땅의 죽음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승천함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노아시대 홍수가 나기 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혼란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에녹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분명히 배울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지요. 필요하면 찾아가고, 불필요하면 떠나버리지 않았습니까? 지나온 날들을 돌아봅시다.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살아왔습니까? 일시적으로만 동행하며, 들쑥날쑥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됨은 특별한 은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 된 입장에서 적극적인 응답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피하지 마십시오. 이제는 적극적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어드리는 삶, 최선을 다하여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 앞에 부름 받는 그날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 창6:1-7

모든 일에는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가정에는 가정을 이루는 원칙이 있고, 나라에는 국민들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을 위해 지켜야 할 원리와 원칙이 있습니다. 사업이나 투자에도 원칙이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국가나 원리와 원칙에 충실할 때 건전한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원칙을 무시하고 빗나가 버린다면 거기에는 항상 혼란이 따르게 됩니다. ※기준을 벗어나면‘죄’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을 정해 주셨습니다. 많은 법칙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우리 사람과 관련된 것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정해 주셨습니다. 사람으로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고 다스리고 또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것을 섬기는 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라 다스리고 지배하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도무지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심판을 받게 되는 원칙을 세우셨습니다.

또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게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만드신 후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서 그와 온 삶을 같이 할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은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서로 마음과 뜻을 합하여 살아갈 때 인간은 더 아름답고 복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서로의 발전과 아름다운 삶을 위해 서로 돕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망하고 함께 죽음으로 달려가는 일을 위해 힘을 쏟는 관계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혼의 원칙이 무시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주고, 서로 돕고 사랑하는 관계도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원칙에 따른 생각과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에 따라 행동을 하고 필요와 욕구에 의하여 모든 일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은 이런 원칙을 무시한 행동이 죄를 불러왔고, 그 죄가 급격히 퍼지면서 온 세상을 물로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 대해 인내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담이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긍휼을 보이셨습니다. 가인이 동생을 죽였을 때도 하나님은 그에게 표를 주시기까지 하면서 참아주셨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인간의 죄악은 포악해졌고, 나날이 흉포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이제는 더 이상 참고 보실 수 없는 상황이 이르고 만 것입니다. 땅 위에 있는 모든 인간의 행위를 보면 다 같이 심판 받고, 다 같이 망하자는 꼴이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무엇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셋의 후손들은 소망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서 여자의 후손이 나와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셋의 후손들만큼은 가인의 후손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니까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 사이에 전혀 구별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본문 창6장 1절,2절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 '사람의 딸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은 셋의 후손들, 즉 믿음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 사람의 딸들이란 가인의 후손들로서 하나님을 떠나 사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사회상을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좋아해서 아내를 삼았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 즉 셋의 후손들의 특징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람의 딸들, 즉 가인의 후손들의 특징은 물질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고, 육체적인 매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신앙의 계보를 잇는 셋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가인의 후손들은 커다란 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습니다. 날카로운 각종 기계들을(두발가인) 만들어 땅을 갈아 저주받은 땅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더 많은 것을 거두어들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 각종 무기를 만들어 다른 사람의 땅을 정복했습니다. 그렇게 산 결과 그들은 풍요로운 물질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셋의 후손인 하나님의 아들들과 가인의 후손인 사람의 딸들의 삶은 이런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 사느냐, 하나님 없이 사느냐,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사느냐,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사느냐 하는 근원적인 구별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었습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과 철저히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둘 중 어느 한쪽이 그 생활을 포기할 때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 섬기기를 포기하든지, 사람의 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든지 둘 중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삶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6장 2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던 셋의 후손들이 가인의 후손을 삶을 보았더니 너무 좋아 보였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것이 부러웠습니다.

또 저들에게서 난 딸들을 보니까 얼마나 그 미모가 뛰어난지 모릅니다. 저들은 아내를 하나가 아니라 둘씩 셋씩을 데리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만 믿지 않는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수도 있고 명예와 권세를 얻어 출세를 할 수도 있을 텐데 하나님 때문에 그럴 수도 없습니다. 가인의 후손들처럼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 발로 밟고, 때로는 그들을 죽이면서라도 내 욕구를 채우고, 야망을 이룰 수 있을 것인데 항상 하나님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눈만 돌리면 아름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서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것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뭔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됨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들의 아내를 삼는 기준은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를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람의 내면을 무시하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 추구하는 지극히 육신적인 삶이지요.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아내를 삼았습니다. 그들의 수가 몇 명이든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 누구의 충고나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사는 모습의 전형입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고 귀를 틀어막아 버렸습니다.

그 결과 6장 3절을 보십시오.

6장 3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이 육체가 되었다고 합니다. 육체가 되었다는 말은 영적인 삶을 포기하고, 믿음을 포기하고, 성령을 무시하고 육신의 욕망만을 추구하며 사는 불신자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굳이 물로 그들을 쓸어버리는 심판을 하지 않으셔도 하나님의 신이 떠나간 것 그 자체가 저주요 심판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 중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한 자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앞으로 120년이 지나면 세상을 심판하는데 그때까지 유예기간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들은 더욱 강포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4절에 그들을 가리켜 네피림이라고 했는데 네피림이란 무서울 것이 없는 용사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좋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타락한 심성의 나쁜 유전자를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거인이었고 막강한 힘을 가지고 그 힘으로 모든 사람을 지배했던 악명 높기로 유명한 사람들입니다.

창6장 4절을 보십시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이것은 폭력숭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피림]을 용사라 했고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유명한 사람들이라 했습니다.

네피림이란 히브리어 [나팔]이란 말의 복수형입니다. 나팔이란 말은 "쓰러뜨리다, 넘어 뜨리다." 라는 말인데 문자적으로는 "많은 사람을 쓰러뜨린 사람들"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들"그런 말이지요.

도덕적으로 말하면 "무법자들"이란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을 짓누르고 무력으로 제압하고 무법한 행동으로 남들을 굴복시키는 네피림들을 사람들은 용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네피림이  그 당시 사람들의 우상과 같은 존재며 이상형이었단 말입니다.

힘을 숭배하고 폭력을 미화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가 11절에도 보충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창6장 11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폭력이 난무하고 포악한 힘이 숭배되고 힘이 있어야만 산다는 가치관으로 완전히 무장된 시대였다는 것이지요.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말이 5절에도 나오고 있습니다.

 창6장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렇게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한탄하셨습니다.

6장 5절~6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은 하나님으로 근심하게 하였고, 한탄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시는 것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6장 7절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라"고 하시며 온 세상의 사람을 깨끗이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짐승들과 공중의 새까지도 사람의 죄 때문에 다 멸망시키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 대로 120년이 지난 후 온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생물들이 파괴되고 멸망당했습니다.

여러분, 노아 시대 하나님의 이 무서운 심판이 무엇 때문에 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셨습니까? 가인의 후손들 때문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너무나 악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것도 큰 원인이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가인의 후손의 타락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의 죄악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이 믿는 자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지위를 포기했을 때 거기에서부터 심판이 왔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심판을 미루고 기다리시는 이유는, 이런 세상을 바라보며 탄식과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진실한 성도의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 성의 멸망을 선포하시는 하나님 앞에 눈물로 호소하며 열 사람의 의인을 위하여 그 성을 용서해 달라고 외쳤던 아브라함처럼 오늘도 소돔성과 같은 이 타락한 세대를 바라보며 눈물로 부르짖는 진실한 성도의 기도가 있기에,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다가 죽음에 이르렀던 아벨과 같이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임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원칙들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내 마음의 욕망과 욕구대로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세상의 심판을 막고, 세상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책임과 사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근심케 하거나 탄식케 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 다 누리지 못하고, 그들이 즐기는 것 다 즐기지 못하고, 그들이 이룩하는 것 우리는 다 이루지 못하며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더 크게 여기시고 더 귀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가장 귀한 것으로 알아 진실한 모습의 예배를 드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늘 기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라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히 살아 주께는 영광이요, 우리 자신에게는 은혜와 축복이요,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주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방주를 짓는 믿음 / 창6:13-22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최악으로 타락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홍수의 심판을 당하고야 마는 사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구절이 창세기 6장 5절과 11절입니다. 창6장 11절,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폭력이 난무하고 포악한 힘이 숭배되고 힘이 있어야만 산다는 가치관으로 완전히 무장된 시대였다는 것이지요.

창6장 5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 당시 사람들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홍수로 진멸하시고자 할 때에 믿음을 지키는 오직 한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고 방주를 예비하도록 지시하시고 그 모든 가족을 구원하시었습니다. 노아라는 뜻은 "위로"라는 뜻입니다.(창5:29) 홍수는 40일간 내렸고, 지상의 모든 산이 넘쳐 방주밖에 있는 모든 생물이 모든 멸절되었습니다.

그 후 150일간 물이 창일하였고, 홍수 후 약 7개월 뒤에 완전히 물이 빠지고 1년 10일 만에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 하나님께서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기로 약속하신 증표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노아는 그 뒤에 350년을 인류의 조상으로 살다 950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홍수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노아의 부부와 아들 셋, 자부 셋 도합 8식구였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하여 인류의 모는 조상이 새롭게 시작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오늘은 죄악이 관영한 세계에서 홍수심판이 임할 때 구원을 받은 노아의 믿음에 대해서 노아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극도의 죄가 성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이 같은 행동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동과 도덕적 무질서의 상태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극도의 타락과 도덕적 문란함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창6:3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타락한 인생은 동물적인 근성과 욕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과 더 이상 교제할 수 없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도 노아는 홀로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고 그들과 교제하지 않으면서 신실한 신앙을 지켜 갔던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짓고 사는데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너무나 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동화되어 함께 죄를 짓게 되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데 여기에 노아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 살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노아의 위대한 점입니다.

시편 1편에 노래 한 것과 같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노아의 때와 같고, 롯의 때와 같다고 하는데 우리도 노아와 같이 신앙의 변질이 되지 아니하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

6장 9절에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하십니다. 즉 흠 없고, 무죄한 것이 아니라 경건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8절,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중요합니다.

히11:7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고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형통하게 되는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나그네로 다닐 때에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사도바울이 선교 여행을 할 때에 믿음으로 행함으로 성령님이 동행해 주셔서 성공적인 선교 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대 홍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하신 것은 이 노아의 경건한 신앙 즉, 하나님과 동행한 신앙 때문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배운 것처럼 선지자 에녹도 하나님과 300년을 동행하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신 일이 있었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다윗이나 히스기야 같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과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같은 위대한 선지자도 모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오늘 노아의 신앙을 통해서 마음 깊이 새겨 넣어야 할 것입니다. 3. 노아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노아의 방주의 크기를 창세기 6장 15절에서 길이가 300 규빗, 폭은 50규빗, 높이는 30규빗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40~45cm입니다. 규빗을 45cm로 정하였을 때, 노아의 방주는 길이는 135m, 폭은 22.5m, 높이는 13.5m 정도 됩니다. 축구장 크기가 보통 길이가 100m정도이고 폭이 64m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축구장 보다는 조금 길고 폭은 3분 1정도 되는데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정도면 일반적으로 4층짜리 아파트가 한 블록을 점령하고 있는 크기라고 말합니다. 이 엄청난 사역을 감당하는데, 문제는 100년이 넘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홍수가 없었습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이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하면서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의심하거나 좀 따져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자신의 판단대신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사실 그대로 ‘믿음으로’ 받고 묵묵히 인내하며 120년간이나 방주를 지었습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인내심을 가지므로 오는 유익은 매우 큽니다. 참고 견디며 전진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면 복됩니다. 그러나 인내심의 결여로 말미암아 오는 삶의 부작용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어떤 이들은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여 더 이상 물러설 때가 없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하기가 어렵다고 투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고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다가도 인내심이 부족하여 참지 못하고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조금만 더 인내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약5:9~11,“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러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노아는 방주에 들어가서 1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 살았습니다. 한정된 공간 안에서의 생활이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러나 노아는 끝까지 인내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치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참고 기다리듯이 우리의 신앙도 기다리고 인내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기다리고, 봉사하고 기다리고, 씨를 뿌려 놓고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열매를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노아는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4. 노아는 무조건 순종한 자입니다.

창6:22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방주를 지어라."라고 하실 때에 그대로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그 방주에 짐승들을 암수 종류대로 집어넣는 것도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먹어야 하는 양식을 골고루 싣는 것도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방주를 지으면서 이웃들로부터 받는 조롱을 감수하는 것은 매우 참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노아는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이 같은 노아의 순종이야말로 신앙생활의 근본이며, 축복의 시작이며, 성공적인 신앙의 초석이 되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히11:7에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노아는 순종함으로 그와 온 집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순종함으로 인류의 새로운 세대의 주인공이며, 시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순종함으로 온 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삼상15:22-23에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아무리 제사를 잘 드리고 제물을 많이 드린다고 해도 순종함이 없는 제사와 제물은 다 무가치하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는 것은 우상 숭배의 죄와 같다고 했으니 우리 성도들은 노아와 같이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여 믿음의 반열에 세움 받기를 바랍니다.

5. 노아는 의를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노아가 한 일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악 된 생활을 지적하고 종말이 가까웠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히11:7하 …세상을 정죄하고 = “그는 믿음으로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쉬운성경).

벧후2:5 에 보면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20동안의 노아를 가리켜서 성경은 그를 ‘의의 선포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노아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성경은 한 마디로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라고 말합니다(눅17:27).

그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경고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도 않고, 먹고 마시고 자기들 좋을 대로 마음껏 하고 살았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마른하늘에 던지는 노아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그들이 들을 리 없습니다. 심지어 홍수가 시작되기 일주일 전까지 방주를 닫지 않고 기다렸지만 노아의 말을 듣고 방주에 들어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7:4). 그들은 하나같이 노아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가운데서도 노아가 ‘의를 전파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끝까지 외쳤습니다.

가끔 뉴스에 나오는데, 미국 시카고 대학에 설치되어 있는‘종말의 날의 시계’가 있습니다. 1947년에 핵과학자들이 시간의 처음을 자정 7분전, 그러니까 11시 53분 상태로 만들어 놓은 시계입니다.

핵전쟁 위협에 따라서 시간이 조정되는데, 몇년전에 ‘종말 5분전’(11시 55분)으로 변경됐습니다. 각국의 핵실험과 지구 온난화가 시간이 변경된 이유라고 합니다.(12시면 종친다)

세상은 지금 계속해서 사실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종말의 날 시계가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1992년에 다미선교회의 이장림이라는 사람이 1992년 10월 28일 밤12시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해서 전국이 한바탕 난리가 났었던 적이 있었죠. 엉터리 이단들이 그런 말 했지만, 사실 그때 한국교회 안에 종말에 대한 긴장감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 그런 종말론적인 분위기는 전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이 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지나칠 정도로 종말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것도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종말에 대한 영적인 긴장감이 지나칠 정도로 헤이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의 관심사가 온통 웰빙 아니면 부흥입니다. 종말을 말하면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아마 노아 때도 그랬나 봅니다.

종말은 두 가지 아닙니까? 개인의 종말, 세상의 종말. 이 종말이 오기 전에 예수 믿고 구원받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전도하시다가 아무도 여러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마세요. 노아는 종말을 앞두고 120년 동안 전도했는데 자기 가족 외에는 한명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를 ‘의의 선포자’ 즉, ‘의의 전도자’ 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방주에 여덟 식구만 탔지만 하나님의 새 역사는 그 여덟 사람 가지고 다시 시작됐습니다.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실망할 필요 없습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자기 식구 구원시키는 것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6. 믿음의 가장, 노아

성경에서 노아를 다룰 때는 거의 매번, 노아와 함께 그 가족들을 같이 묶어서 다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6:8,9에 보면 노아가 얼마나 귀한 믿음의 사람인가 소개한 다음, 10절에는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가족 소개를 덧붙입니다.

7:1에 보면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7:13에 보면 “그날에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자부가 다 방주로 들어갔고,”23절에는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고 하면서 또 가족들을 같이 묶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8: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로 더불어 방주에서 나오고,” 18절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8절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한 아들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18절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 노아 외에 그의 아내나 세 아들, 세 며느리에 대해서는 그들의 믿음이 어떤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노아를 이야기할 때는 반드시 노아와 그 가족이나 아들들을 이렇게 한 세트로 묶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히11:7절도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했고, 벧전3:20에는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고 했고,

벧후2:5에서는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하면서 역시 노아와 가족들을 묶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가정에서 한 사람 때문에 모든 가족들이 도매금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 안의 한 사람의 신앙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며, 아버지이며, 시아버지인 노아 한 사람에 대해서 나머지 일곱 식구들의 반응은 순종이었습니다. 120년 동안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방주 짓는 일에 대해서 이 일곱 식구들 누구 하나 반대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삼형제 아들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일이 당연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세 며느리도 이 집에서 하는 일을 보고 동의해서 시집왔겠죠. 결혼조건은 방주 짓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었을 겁니다. 노아 가족의 모든 일상은 노아의 방주 스케줄이 우선이었을 것입니다. 방주 짓는 일이 끝났을 때 여덟 식구 모두 함께 방주로 들어갔고, 함께 나왔습니다.

노아가 있는 곳에 그들 일곱 식구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노아의 좋은 가족이었고 좋은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노아였습니다. 노아가 자기 가정을 얼마나 잘 다스렸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입니다. 노아는 자기만 별나게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이 아니라, 가족 모두 자기의 신앙 노선에서 빗겨가지 않도록 믿음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낸 걸로 판단됩니다.

방주 짓는 기간이 짧은 세월이 아니었기 때문에 남편, 혹은 아버지 혹은 시아버지의 신앙에 동조할 수 없거나 신뢰가 가지 않았다면 누구라도 빗겨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탈된 가족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노아는 가족들의 서로 서로 믿어주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 짓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범한 죄악들로 인한 결과들이 점점 노아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선택해서 홍수 심판을 준비시켰고 새로운 세상을 노아에게 맡기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고, 다가올 심판을 경고한 의의 선포자였고, 믿음의 가장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은 우리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모두 오늘 이시대의 믿음의 사람 노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방주와 바벨탑의 차이(창 11:1-9)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이 세상을 다스릴 권세가 있습니다. 인간은 창세 이후 모든 것을 발굴하고 노력해서 자연을 정복하고 많은 과학과 문화가 발달해서 꿈처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거의 다 실현시켰습니다. 인간은 과학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과학을 발달시키는 것이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과학의 발달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의학, 첨단 컴퓨터에 관련된 것들, 우주의 신비가 밝혀짐.....) 오늘은 창세기 6장에서 방주를 만드는 사건과,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대조하여 생각해 보려 합니다. 창세기 6장에서[노아와 7식구가 열심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이 바벨탑을 세우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벨탑 또한 그 당시로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최고의 건축문화이며 훌륭한 기술과 인력이 투입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는 세우시고 영광을 받으셨으나 바벨탑은 무너뜨리셨습니다. 인류는 그 탑을 쌓다가 흩어지게 되었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건물이요, 사람에 의해 세워진 것인데 하나는 세우시고 하나는 무너뜨리고 심판하셨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의 모형입니다. 바벨탑사건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경영과 계획과 힘이 결국은 망하고 만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물적인 교훈입니다.

이 세상 역사의 전 과정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면 하나의 바벨탑을 쌓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힘을 총동원하여 허사를 경영하고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이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인간의 모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세상 역사의 흐름입니다.

허사를 경영하는 인간 역사의 모형적인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바벨탑 사건은 목적도 잘못되었고 성격도 잘못되었습니다.

오늘은 노아의 방주와 바벨탑의 성격과 차이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생각해 봄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방주와 바벨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1. 방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 바벨탑은 인간의 계획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매일 햇빛이 나고 비도 내리지 않던 중동지대 높은 산에 무슨 배가 필요합니까? 노아도 많은 의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만들어야 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방주를 세워 노아와 노아 식구가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창11장의 바벨탑.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자기들 끼리 모였습니다.

11:4, “또 말하되 자, 를 쌓아 꼭대기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이 탑을 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의 뜻대로 세웠습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인간의 힘에 의해서 세웠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져야 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세워져야 합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세운 사회와 나라는 다 무너집니다.

(예)소련이 왜 무너졌습니까? 세계 군사대국이었습니다. 과학이 최고로 발달한 나라였고 한 때 믿음 가운데 세운 나라였으나 레닌이 공산주의를 세우자고 했습니다. 볼세비키 혁명이후 자기들의 힘만으로 세우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몰라는 것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70년 만에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마7:24∼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우리 인생이 무너집니까? 왜 가정이 무너집니까? 왜 사회가, 나라가 붕괴됩니까? 주님의 설계도대로 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서 그려 주신 설계도를 "아멘"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어져야 됩니다. 미국은 최첨단 과학이 발달했습니다. 풍요롭습니다.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점점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잘 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점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이 ���ǀ榬주셔야 합니다. (예) 2001.9.11 사태는 국방, 경제⺲ ⠀ࠀ은 무너진다는 상징/비유(metaphor)이다. 2. 탆쓅는 믿음⺲행위요  ⠀ࠀ은 불신앙⺲행위입니다. ㈀ 이 다릅니다. 노아⺲당시를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산 위에까지 온다고 생각할⺲ က없습니다. 그⺲당시 비가 범람하지 못하던 시대에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비가 와서 방주에 들어가야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느 한 사람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이 물에 잠긴다고 아무리 외쳐도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방주를 준비할 수 없습니다. 방주를 만들 도구와 장비가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인력 동원이 제대로 되었겠습니까? 노아의 식구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노아를 미쳤다고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틀림없는 하나님의 진실과 신실하심을 믿었습니다. 노아는 절대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노아야 앞으로 절대로 물로는 심판하지 않겠다. 그 약속으로 무지개를 보여 주겠다." 그래서 비가 올 때 사람들이 물이 범람할까 걱정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무지개를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계속해서 전해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인간들은 이렇게 의논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 언제 물로 다시 심판하실지 모른다. 높은 탑을 우리의 힘으로 쌓아놓고 대비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바벨탑은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인간의 본성 깊이에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성이 뿌리 박혀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의 대 홍수 심판을 경험한 인간은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복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다시 번성했을 때 하나님을 거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인류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과는 다르게 흩어짐을 면하자고 하면서 자기이름을 내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에 도전하는 그릇된 야망에서 비롯된 교만과 허영의 소산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 속 뿌리 깊이 박혀있는 죄악의 본성, 변하지 않는 죄성을 볼 수 있습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교만과 명예욕,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인본주의 사상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추악한 죄악의 결정체입니다. 성도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들은 하늘까지 쌓겠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 말씀을 멀리하고 불신하는 바벨탑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늘에 까지 결코 오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자리가 안전지대입니다. 믿음으로 쌓은 방주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날이 저물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하늘 꼭대기까지 사다리가 닿았습니다.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걱정말아라 네가 있는 곳이 안전한 곳이다. 도와주겠다. 너를 보호해 주겠다"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가정과 후손이 높이 세워지길 바랍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위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입니다.

3. 방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바벨탑은 인간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방주는 순전히 노아를 통해 예비하고 만들었습니다. 기도로 만들었습니다. 찬송하며 만들었습니다. 노아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모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설계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방주 뒤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노아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은 인간이 주인입니다. 자기들이 설계하고 자기들의 힘으로 만들었습니다. 인간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만천하에 선포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입니다.바벨탑은 인간의 헛된 욕망의 상징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야망, 인간의 욕심의 열매가 바로 바벨탑이었습니다. 인간은 야망의 존재입니다. 야망 때문에 발전도 하고 성공도 하지만 헛된 야망, 지나친 야망 때문에 망하고, 실패를 합니다. 육신적 야망은 늘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들은 성과 대를 쌓기를 원했습니다. 인간 힘의 승리, 인간 기술의 승리를 예찬하는 성과 대를 쌓으려 했습니다. 인간은 자기 성 즉 아성을 쌓고 싶어 합니다. 권력의 아성, 재물의 아성, 명예의 아성, 안전의 아성, 명성의 아성을 쌓고 싶어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복종하고 살면 충분하고,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의 성을 쌓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욕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욕심은 매우 위험합니다.

롬10:3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여기시고 영광스럽게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의 삶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방주를 짓는 삶, 또는 바벨탑을 세우는 삶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믿음의 방주를 세우시기 바랍니다. 기도 위에, 말씀 위에, 찬송 위에 세우시길 바랍니다. 창수가 나고 거센 비바람이 집에 부딪쳐도 무너지지 않는 방주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인생길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방주와 바벨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1. 방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것이고 바벨탑은 인간의 계획에 의해 세워 진 것입니다.

2. 방주는 믿음의 행위요 바벨탑은 불신앙의 행위입니다.

3. 방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요, 바벨탑은 인간의 영광을 위한 일입니다.

약속과 믿음/창12:1-4

미국의 다마소라는 사업가가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빚 때문에 너무나 시달릴 뿐만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일만 하는데도 되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빚에 허덕였습니다. 갈수록 빚은 늘어만 가고 재기의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만 갔습니다.그러던 어느 날, 그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크게 실망을 하고서 예전에 품었던 꿈과 야망, 스스로에게 걸었던 모든 기대를 포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중단하였던 기도와 말씀묵상의 시간을 통하여 모든 계획의 하나하나를 하나님과 상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를지라도 그날그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게 되었습니다.바쁜 생활 속에서도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해 일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퇴근길에는 가두전도에 나섰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보고 모두들 정신이 나갔다고 수근 거렸습니다. "저렇게 사업도 망한 처지에 이상한 짓만 하고 다니니 저 사람은 이제 조만간 정말 거지가 되고 말거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곧 망할 것 같았던 다마소의 회사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부도직전의 절망에서 재기하여 대 사업가로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그의 재기의 비결은 간단했습니다.

모든 운명을 주님께 다 맡긴 것입니다. 이것은 말로는 쉽지만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계획과 방법 등 나의 모든 것을 다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세상의 상식과 방법을 뛰어넘는 삶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비웃음과 핀잔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와 같은 절대적인 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수를 믿을 바에야 예수에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무엇인가를 해낼 수가 있습니다.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의 믿음의 행위는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주목하고 믿음으로 순종하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창세기에서 그 내용의 방향을 완전히 전환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전 인류를 상대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역사, 모든 사람들의 삶을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그 방향과 초점을 한 사람에게 맞추고 그의 후손인 한 민족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와 그의 후손들을 통해서 역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시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주이신 하나님은 바로 이 사람을 통해서 한 민족의 하나님, 한 사람의 하나님으로 지칭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의, 한 민족만의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온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시 만 백성의, 전 인류의 하나님이시오, 아버지시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한 사람, 한 민족 속으로 들어가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전 세계, 온 인류를 향해 나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75세의 노인 아브람을 불렀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75세가 될 때까지 무엇을 했는지, 그의 신앙은 어떠했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렇게 아브람에 하시는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이 말씀이 지금까지 아브람의 인생을 종지부 찍고, 새 출발을 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의 과거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는 이유는 아브람의 인생은 지금부터 진정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시간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시간을 계산할 때는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사람들에게는 양적인 시간보다 질적인 시간이 훨씬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살아온 75년의 세월, 긴 세월입니다. 그러나 의미나 가치에 있어서는 부름을 받은 후의 세월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브람의 인생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하나님의 부르심의 말씀을 듣는 순간부터 크게 달라졌습니다. 의미 있는 삶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지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가르치고,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힘을 주시고, 비전을 제시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르시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마르'라는 단어이며 구약성경에서 5280번 이상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은 각 시대, 각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릴 때, 그 말씀이 내 마음에 와서 부딪치고 감동을 주고 도전을 주게 될 때, 그때 내가 변합니다. 그때 새로워집니다.

막연한 믿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겠지’라는 짐작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론, 지식만으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야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 삶에 열정과 불을 붙입니다. 우리 자신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도 말씀에 붙들릴 때 얻게 됩니다. 1.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상당한 재력과 토지, 그리고 유력한 가문을 이루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안락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너는 너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곧 그 동안 아브라함 자신과 그의 가문이 쌓아왔던 안정된 생활 일체를 포기하고서 정든 땅과 친척과 가족을 떠나라는 말씀이었습니다.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은 쉽게 따를 수 있는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정든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크게 출세해서 떠나거나 망하여 이웃을 볼 낯이 없을 때에나 떠나는 것인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이 둘 다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세해서 떠나는 것이었다고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떠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갈 곳도 마땅치 않은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 한마디만 믿고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두들 미쳤다고 할 만 합니다.

도대체 어느 누가 자기가 쌓아왔던 기반을 하루아침에, 그것도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포기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는 삶의 온갖 터전을 뒤로하고 그는 정든 고향산천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이해가 되지 않고 설사 손해가 온다 하더라도 순종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 합리적이고 이론적이고 과학적이어야 수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아브라함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생각과 뜻보다 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우리도 주님의 명령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절대 순종, 절대 믿음, 이런 사람이라야 참된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 손익계산을 따져볼 때가 많습니다.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이해관계의 척도에 따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사는 길이 아닙니다. 사람은 아홉 번 잘하다가도 한 번의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결코 실수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믿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떠나라고 할 때 떠났습니다.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해서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단순한 믿음, 그러나 굳건한 믿음이 바로 오늘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합니다.2.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하나님은 명령만 하시고 마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때 받게 되는 축복을 꼭 약속하십니다.

성경에는 '그러면,' '그리하면'이라는 단어가 자주 눈에 띄는데 하나님의 명령 다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축복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우리 인생들을 축복하시기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떠나라"고 말씀하시면서 "복을 주리라"라고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지명하여 그에게 고향을 떠날 것을 명령하신 것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계보를 일으켜 세우시려는 섭리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1절) 하셨을 때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지만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증언하기를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2,3).

아브라함은 아직 아무 것도 보이는 것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지만 그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며," "복의 근원이 된다"는 3대 축복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끝까지 잘 간직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을 때가 75세였는데 그 후 1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지나도록 그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고 아내 사라는 경수가 끊어져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전혀 실현될 가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또한 이름이 창대케 되리라는 약속도 숱한 현실적인 역경 앞에서 그 빛이 퇴색하게 되었고 오히려 기근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벗어나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아내를 빼앗길 뻔하고 애굽왕으로부터는 심한 질타와 비난을 받는 등 그와 그의 가족에게는 어려운 일만이 계속되었습니다. 돌이켜 볼 때 부름을 받은 지 수십 년 동안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놓지 않고 믿고 나아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이동을 하며 마침내 가나안 땅 세겜이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곳까지는 약 700km나 되는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무더운 사막 기후라 너무 고생스러운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침내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습니다.

가나안을 향한 순례는 하루 이틀에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고 아픔과 시련도 많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일시적인 평안을 위해 영원히 빛날 하나님의 상급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고 그의 이름이 창대케 되었으며 모든 복의 근원이 되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믿고 끝까지 믿음으로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모든 축복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하십시다.

그래서 우리들도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며 복의 근원이 되어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늘의 복을 받게 해야 합니다.3. 그는 예배드리는 생활을 했습니다.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란으로, 그리고 지중해를 향해서 끝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땅으로 왔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7절)고 하셨습니다. 네가 찾는 땅은 이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땅까지 이르게 된 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의지나 결심만으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힘의 원동력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기약 없이 이곳 저곳 방황하던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참고 이기면서 거기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그 어디를 가나 하나님께 감사의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서의 감사의 단은 정말 감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이렇게 감사의 예배를 드릴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주십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험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새 힘을 주십니다.1960년대부터 미국교회가 침체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새로운 신학의 흐름 때문이었습니다. 그 신학은 휴머니즘에 기초를 둔 신학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신의 죽음의 신학"까지 나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 교회에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자유와 정의를 지향하는 출애굽적 교회와 둘째, 감사와 축제가 있는 시편적인 교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 계시록적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콕스 교수는 예배는 구원의 감격, 감사와 축제, 그리고 미래의 소망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에서 예전적인 것보다 축제성이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감사와 영광, 그리고 기쁨이 있는 예배가 있는 교회는 다시 일어납니다.오늘날 미국의 빌 하이벨스 목사(Bill Hybels)의 윌로우 크릭 커뮤니티교회나 릭 워렌 목사(Rick Warren)가 있는 새들백 교회는 축제적인 예배로 미국의 새로운 모델교회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도착하여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렇게 예배가 살아야 신앙이 살게 됩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세상의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나아갑시다. 순종하며 나아갑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서 엄청난 축복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나아갑시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와 영광의 예배로 아브라함처럼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 창13:1-18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여 갔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되었고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을 떠날 때부터 동행하였던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도 함께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업이 양과 소를 치는 목축업인데 하나님의 축복하심으로 한곳에서 그 둘이 한 살림을 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재물과 짐승의 수효가 많아졌습니다.

창13:2절에 보면,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 하였더라”고 하였고, 5절, 6절에는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고향을 떠날 때만 해도 그와 가족의 운명은 안개에 가려진 듯이 불투명해 보였고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순종하여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은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많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믿음의 모델인 아브라함의 순종함을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형통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이 함께 살다가 이제 서로 헤어지는 모습이 나오고 있는데, 그들의 헤어짐은 의가 상하였거나 미움 때문에 헤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해주신 결과 넘치는 은혜로 인한 헤어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제는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좁은 땅에서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들은 짧은 안목을 가지고 지금 당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손해 보면 안 되겠다는 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가운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처신과 롯의 처신을 통해서 얻는 교훈이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자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창13:7~9, 그러므로 아브람가축의 목자와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에 거하였는지라...’라는 말 속에서 아브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사람들을 의식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이권다툼을 통한 소유욕을 보이는 것은 영적으로 약점이 잡힐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는 말 속에서 혈육이며, 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가 상하고 신뢰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예화) 어떤 신앙이 참 좋은 부인이 있었습니다.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그 남편은 죽어라고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남편을 위해 작정기도도 하고 울면서 권면도 해보나 소용이 없습니다. 문제는 어디 있었을까요?

이 부인에게는 다른 교회에 다니는 믿음이 좋은 동생부부가 있었는데 가끔씩 부부동반으로 식사를 하는 시간이면 그때마다 화제에 오르는 것이 교회의 어려움을 시시콜콜 다 이야기 하고 목회자와 장로님들을 흉보는 험담을 해대니, 그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만 하는 남편이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참 은혜스러운 교회니 한번 가볼까?’라고 생각할까요? ...

우리는 말 한마디, 행동거지하나 하나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과 덕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아브라함은 자신이 어른이며 주도권을 행사할만한 충분한 권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여 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행위는 모두가 다 유익하고 잘되기를 바라는 넓은 마음을 가진 큰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가 하면 롯은 어떻습니까?

10절,11절“이에 이 눈을 어 요단 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이 요단 온 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롯은 자기에게 좋은 곳을 거침없이 선택하였습니다. 아랫사람으로서 어른에 대한 예우나 양보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가 없습니다. 혈육이고 가족이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선 내가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였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삶의 모습, 혹은 주님을 믿는 방식에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이 섞여 살아가지만, 사는 방식은 두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흔한, 인간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식은 롯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롯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결정하는데 눈을 들어 요단 온 들판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단 들판 옆에 있는 소돔성과 고모라성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습니다.왜요? 그 성은「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좋아 보이기에 판단하고 결정하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방식을 육신적 안목, 또는 이성적 가치관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안목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안목과 가치관을 갖고 세상을 보는지 모릅니다. 배우자를 선택하는데도, 일꾼을 고르는데도, 주거지를 결정하는데도, 사업을 하는데도‘좋은 것이 좋다.’‘이왕이면 다홍치마다.’하는 식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판단을 아주 자연스런 판단 방식이고, 현명한 결정의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이성적이고, 겉을 보고 항상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의 표상 롯여러분은 이러한 롯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갖습니까? 롯을 어떻게 평가하고 싶습니까?  어쩌면 롯은 오늘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시대를 지혜롭게 사는 표상' 일수도 있습니다.

'성공시대'의 인기 있는 연사일수도 있고 잘 팔리는 베스트셀러의 성공한 주인공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사람들에게 이런 삶을 주문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주변 사회가 우리를 롯과 같은 삶으로 떠밀고 있습니다. 롯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십분 활용할 줄 아는 민첩한 사람이었습니다.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현실적 상황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롯의 선택에 대해 다른 시비를 걸 수가 없습니다. 기회는 붙들어야 하는 것이고, 선택을 할 때는 분명 유익한 것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의 관점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롯의 신분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선택의 관점과 기준이 일반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바라보는 목표가 달라야 합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관점 또한 달라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정신없이 쫓기며 살다보면 신분을 잊어버립니다. 무엇이 바른 원리며 무엇이 성경의 기준인지를 까맣게 망각하고 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래서 마치 세상의 것들이 우리의 것 인양 속고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분명히 해야 합니까? 무엇이 달라야 합니까?  먼저 롯의 선택의 결과를 살펴보면서 선택의 중요성과 바른 선택의 관점을 배우려합니다. 롯은 어떻게 선택했습니까? 그의 선택에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첫째,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하지 말아야 합니다.10절?  을 보십시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 들어바라본즉"이라고 시작합니다.  롯은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자신의 눈에 좋게 보이는 대로 선택했습니다. 여기서 롯의 선택에는 하나님의  이 근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이 삶은 자신에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롯은 세상 사람들의 방법으로 안목의 정욕을 따라 선택을 하고 맙니다.

태초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잘못된 선택을 기억하십니까?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고 자신들의 눈이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움을 따라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동산에서 내어 쫓기며 죄인이 되어 죽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노아 홍수의 원인이 되었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타락한 사건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영웅들을 보면 한 결 같이 그들은 "믿음으로" 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안목의 정욕을 따라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따라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택의 가치관이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롯의 선택의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물의 넉넉함 때문이었습니다. 물이 넉넉하여 그 땅을 선택했다는 것은 롯의 가치기준이 신앙적이기 보다는 세상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은 롯이 물이 넉넉한 요단의 들판을 선택할 때 이미 그는 소돔 성읍까지를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멸망전의 소돔과 고모라 성읍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습니다.  물이 넉넉한 요단의 들판에서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성읍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11절과 12절을 보십시오."그러므로 롯이 요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장막이란 곧 집입니다. 그런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롯의 마음이 소돔성의 풍부함과 향락에 빼앗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결국 롯은 소돔성에 들어앉아 살고 맙니다.(19:1) 그럼 소돔과 고모라 성읍은 어떤 곳입니까?

창13장 13절에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 많은 도성이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하나님이 싫어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이었고 큰 죄인이었습니다.

창세기 19장에 보면 이들의 죄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는데 소돔 사람들은 동성애를 공공연히 즐기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폭력을 서슴없이 일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는 도시는 화려하고 비옥한 곳이었지만 그곳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 도시가 그렇고 그 도시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럼 롯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지금 문제는 롯의 계산에 하나님과 죄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그의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점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사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에 선택의 기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화려함에 마음을 뺏기고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여러분의 시선이 고정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근시안적 선택을 피해야 합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무엇이었습니까? 현재였습니다. 현재의 넉넉함이 선택의 기준이었습니다. 현재  자신의 눈에 보이는 대로 마음이 끌리는 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현재의 유익이 선택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롯의 계산에는 현재가 전부였습니다.  

10절 말씀을 보십시오."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성경은 물이 넉넉한 땅을 소개하면서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라는 특이한 단서를 붙여놓았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암시합니까? 롯의 선택은‘현재에 묶여있는 근시안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롯은 눈을 들어 들판을 바라볼 때 내일을 보지 못했습니다. 장차 다가올 소돔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첫째, 선택한 것들을 다 잃었습니다.(14:11,12)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아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이것은 롯의 잘못된 선택의 결과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소돔 땅에서 결국은 자신이 원래 가졌던 것까지 다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선택을 잘못하면 손해를 봅니다. 육체적 고통을 겪습니다. 재물을 빼앗기고 자신이 붙들리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둘째,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벧후 2:7,8)"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심령이 상했다는 말은 마음의 평안을 얻지 못했다는 말이며, 마음에 영적 상처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롯은 자신이 선택한 물 좋고 땅 좋은 소돔성에 살면서도 그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영은 날마다 괴로움에 시달리며 영력은 점점 쇠퇴해져 갔습니다. 선택을 잘못하면 마음에 평안을 빼앗깁니다. 심령에 고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미래지향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오늘을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늘의 세상에서 내일을 보며, 하나님 나라를 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선택의 기준 또한 마땅히 내일을 생각한 선택이어야 합니다.

아브람의 선택과 결과

아브람은 달랐습니다.

아브람을 보십시오. 그는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맡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고 골육과의 다툼을 피합니다. 그는 오늘 현재의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입으로 야박한 세상이라고 말하면서 그 야박함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우리자신임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브람은 야박한 것이 싫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고 모든 좋은 조건들을 조카에게 양보하였습니다. 이렇듯이 비웠더니 대신 하나님이 채워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그 선택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아브람은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14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14-17절 말씀입니다."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과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네게 그것을 주리라"       여러분, 아브람이 무엇을 잃었는가를 보십시오. 롯에게 선택권을 양보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했던 아브람은 현재 상황으로는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상은 아무 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선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동서남북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이 바라보는 동서남북은 그의 육신의 시선이 미칠 수 있는 한정된 범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라보는 동서남북은 그가 있는 그 자리에서부터 전 세계를 향하여 뻗어나가는 복음의 소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자손 중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오게 하심으로 동서남북의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뜻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종으로 횡으로 걸어 다닌 곳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아무리 빨리 걷는 다 한들 당시에 걸을 수 있는 지역은 상황으로 보아 한정된 것일 수밖에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걸어 다닌다고... 그가 걸은 곳을 다 주신다고 해도 별로 대단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록 아브라함은 한정된 곳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자손가운데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을 모두 정복하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아니,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이스라엘을 떠난 적이 없으신데 어떻게 세상을 정복하시는가?’라고 반문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제자들을 양육하시고 그들에게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시면서 ‘내가 세상 끝 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제자들의 제자들,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까지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함께하시며 온 세상을 정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동서남북을 바라보라는 말씀과 종으로 횡으로 행하라는 말씀은 보다 더 영적이고 선교적인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주목을 끄는 한 구절로 결론을 내립니다. 18절입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18절)여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라는 이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주목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진정 바른 선택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참된 성공입니다. '헤브론'은 교제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마므레'는 부요를 상징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선택을 하면 영적인 충만한 삶과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풍성한 삶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라 일컫는 아브라함과 또 한 사람 롯을 살펴보았습니다. 둘 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그들은 각각 생각과 사는 방식이 달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롯이 되든지 아브람이 되든지 둘 중의 한 가지 삶을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 근시안적인 시야와 인간적인 견해만으로 선택하면 우리의 나중은 불행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를 신뢰하며 영적이며 신앙적인 가치관으로 내일을 바라보고 선택하면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십일조의 참뜻(1) / 창14:17-24

오늘은 창세기 14장의 말씀을 통해서 십일조의 참뜻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세 가지 이유대체로 성도들이 십일조 헌금을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한 세 가지쯤 된다고 생각합니다. 1)첫째는 가르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로 목회자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10장 14절에서 `전파하는 자가 없으면 어떻게 복음을 믿을 수 있겠느냐?" 고 반문합니다. 마찬가지로 만약에 가르치는 자가 없으면 십일조를 누가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십일조가 무엇이며 그것이 도대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 없으면 행하는 자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십일조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저절로 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득의 십분의 일을 어떤 일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은 엄청난 변화요 결단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십일조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2)둘째로 십일조는 율법에 속하므로 은혜 시대에는 하지 않는다고 오해하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냐? 율법은 구약으로 마감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은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살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 가르치는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지 않으냐? 그렇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에 대한 오해입니다.

십일조가 율법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시대는 율법이 있기 400년~500년 전 시대입니다. 모세시대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전 약 사오백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을 통해 십일조의 모범을 최초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십일조를 하나님께 약속합니다.(창28장 20절

~22절)

율법은 오랜 세월 후에 주어졌고 그 율법 속에 하나님께서 십일조 제도를 정착시키셨습니다. 율법 시대가 끝난 후에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이 십일조를 교회의 아름다운 제도로 정착시켜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십일조는 율법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사고방식입니다. 3)세 번째는 성도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이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소득을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닌 다른 어떤 일을 위해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자녀를 위해 십분의 일을 쓰는 것은 어느 부모라도 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일을 누구든지 합니다. 십분의 일이 아니라 전 소득을 다 털어서라도 자녀를 위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직까지 신앙이 어리고 그분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사람들이 소득의 1/10을 헌금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2.십일조는 하나님이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오늘 십일조의 참뜻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생각해 봄으로 우리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십일조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뜻은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14장에 최초의 십일조의 모범을 우리에게 보인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오늘 기록되어 있는 사건의 배경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올 때 그의 조카 롯도 함께 떠나 왔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살다가 점점 가산이 늘어나면서 결국 서로 거주지를 따로 정하게 됩니다. 그때 롯이 정한 거주지는 소돔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그 당시 소돔은 그 지역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발달되어 있는 곳이었고 흥청거리는 도시였습니다. 이 롯이 소돔왕이 벌인 전투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소돔을 비롯한 몇 나라와 그 이웃에 있다는 다른 몇몇 나라의 연랍군이 전투를 벌였을 때 소돔이 이 전쟁에서 지고 맙니다. 그때 소돔 백성 대부분과 롯도 함께 포로로 잡혀가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길러 놓았던 하인 318명을 거느리려고 강력한 그돌라오멜 연합군을 추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강력한 군대를 기습공격으로 싸워 이기고 롯 일가와 포로로 잡혀갔던 소돔성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전리품들을 빼앗아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신비스러운 인물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 말고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되던 그 땅에 살렘왕 멜기세덱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납니다.

19절에 보면 그가 아브라함에게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는 축복을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어떤 인물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성경이 많은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멜기세덱은 갑자기 나타났고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언급이 없습니다.

히브리서 7장 3절에 비로소 약간의 설명이 나오는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더라" 즉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사람이더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멜기세덱은 그 시대의 어느 지역의 한 왕이었던 사람이라기보다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 혹은 하나님의 둘째 位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잠깐 나타나신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해석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축복할 때, 이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그 축복을 지적하고 이 축복이 계속해서 너에게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것들에 대한 감격이 다시 한 번 넘치게 되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자기가 얻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 앞에 내어놓는 모습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금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나타나서 네가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내 앞에 내어 놓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전에 네가 무엇을 얻거든 십분의 일을 어떻게 하라고 명령을 주신 일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할 때 그 마음에 감격이 넘쳐서 어떻게 이 감사를 표시할까 생각하다가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어놓는 방식으로 자기의 감사를 표현했던 것입니다. 3.십일조는 복음의 사역을 위해 드려져야 합니다또한 십일조는 복음 사역을 위해서 드려져야 할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제도적으로 하도록 요구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십일조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1)첫 번째는 레위인들에게 생활비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8장, 레위기 27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2)또 하나는 축제용의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신명기 13장,14장에 나오는 십일조인데 축제를 위해서 몰려드는 사람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3)그리고 구제용 십일조였습니다. 이 십일조는 매번 소득마다 내는 것이 아니고 삼년마다 십일조를 내라고 명하셨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율법의 규정대로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린다고 생각한다면 소득의 약 23% 정도의 십일조를 드리는 셈이 됩니다. 우리가 오늘에 와서 구약 성경에 십일조를 이렇게 내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방식으로 최소한 23%의 십일조를 하자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야말로 율법은 지나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제도여서 십일조를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수종 드는 레위인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여드는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고에 하나님의 양식이 있도록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약시대에 와서도 하나님이 복음 전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창고에 하나님의 양식을 쌓는 일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와 비슷한 정신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4절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건 다른 말씀이 아니고 복음 전하는 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결국 성도들이 헌금한 것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18절에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주의 종들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드린 헌금으로 생활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십일조의 정신을 생각할 때,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복음을 전하는 일, 하나님의 사랑과 의가 전파되는 일을 위해 우리 소득의 1/10을 드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요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4.십분의 일 뿐만 아닌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또 한 가지 십일조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것은, "십분의 일 뿐만 아닌 열 모두가 하나님이 것입니다."라는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혹 잘못 생각하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 특히 말라기서에 `십일조는 내 것인데 왜 도적질하느냐`는 하나님이 책망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혹 `열에 하나는 하나님의 것이고 열에 아홉은 내 것이니까 마음대로 써도 되는데 그 열에 하나를 안 드려서 도적놈 소리를 들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열에 하나를 드린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므로 하나를 떼어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런 대표 원리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 예로 [주일]을 들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신약에 와서 안식 후 첫날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날을 주의 날로 지키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일만 주의 날입니까? 월,화,수,목,금,토까지는 우리의 날이니까 우리가 알아서 살면 되는 그런 날입니까? 아닙니다. 모든 날이 주의 날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주님이시고,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의 주인이 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의 모든 날이 주님의 것이지만, 특별히 하루를 주의 날로 구별하여 예배를 드리고 생업이나 세속적인 날로 보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를 따로 떼어 놓음으로 말미암아 다른 날들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고 주님이 것으로 고백하는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할 속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5월5일 어린이날로 정한것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하루만 우리 아이들에게 짜장면도 사주고 캔터키 치킨도 사주고 나머지 날들은 밥을 먹든지 굶든지 마음대로 놔두어도 괜찮다는 것입니까?

하루를 특히 아이들을 귀히 여기는 날로 만들어 놓고 다른 날들도 아이들을 귀히 여기고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는 뜻으로 이 날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그렇게 행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그 일부인 1/10을 도로 돌려 드림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축복(2)우리는 또한 십일조와 축복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은 축복이나 저주에 대한 이야기를 십일조에 결부시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십일조를 하면 반드시 물질 축복을 받는다. 십일조를 하면 절대로 돈에 궁핍해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욥을 생각해보십시오. 욥은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욥만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한 삶을 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던 이유로 욥은 엄청난 고난을 당했습니다. 욥이 십일조를 안했기 때문에 그의 재산이 날아갔습니까?

아닙니다. 인생사에는 우리가 설명하지 못하는,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다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여러 가지 이유가 많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씀을 어디서 합니까?

로마 감옥에 앉아서 합니다. 사도 바울이 십일조를 안했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 배고픔도 익숙해졌다라고 초라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이라면 십일조 하는 것은 어려서부터 몸에 배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난이 그 앞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도, 주일이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경건한 신자라고 해도 우리 앞에 때로는 궁핍이 기다리고 있으며 때로는 고난이 기다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한 축복의 약속이나 헌금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말라기 3장 10-12절에 보면 십일조에 대한 엄청난 약속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황충을 금하여 너희 토지소산을 멸하지 않게 하며 너희 밭에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너희 땅이 아름다와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마찬가지로 헌금의 축복에 대해서 신약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9장6절에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질의 축복도 주시고 이런 저런 축복도 분명히 주시는 분입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은 물질의 축복이 절대적이고 최고의 축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1.십일조는이제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몇 가지 드릴까 합니다. 1) 십일조를 총수입에서 해야 합니까,순수입에서 해야합니까?

월급봉투에 적혀 있는 액수는 백오십 몇 만원인데 무엇 떼고 무엇 떼고 나면 실제로 얻는 수입은 백 이십 만원뿐인데.. 그런 이야기이죠. 성경은 우리에게 "인색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2) 너무 가난해서 어려운데 그런 때도 십일조를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십일조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것은 내 믿음의 문제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마6:2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며 십일조는 가난하거나 부요하거나 상관없이 우리의 믿음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우 가난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내 신앙과 사랑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름답게 보시지 않겠습니까? 3) 십일조를 꼭 교회에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만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유일한 그의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존립과 사역을 위해서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약화되고 교회는 일을 할 수 없게 되고 교회는 이 땅에서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4) 교회가 아니어도 좋은 기독교적인 단체들이 있지 않습니까? 자선 단체를 비롯한 여러 단체가 있는데 그곳으로 헌금을 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러나 교회로 하여금 그 단체들을 섬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약화되고 교회가 의미 없는 단체가 됩니다. 물론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도 그 헌금을 교회가 알차게 운영하지 못하면 안 되겠지요. 그것은 교회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봉사를 안 한다, 안한다 하지만 그래도 이 사회에서 교회만큼 이웃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가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래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이름이 높아지도록, 우리가 교회에 헌금을 해서 교회로 하여금 이 일을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십일조나 헌금을 개인이 직접 사용하면 안 될까요?

개인보다 교회가 정보가 많고 오류의 위험이 적습니다. 교회에는 달마다 날마다 때마다 각종의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나 전화가 쉼 없이 옵니다. 그래서 원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선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도와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일단 보류해 놓습니다. 왜냐하면 신분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성도들의 헌금을 보내는 무책임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알 수 있는 사람이어도 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지원을 결정하고 헌금을 보낼 때, 심사숙고하고 확인하는 일을 어떻게 해서든 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면들이 있습니다만, 책임 있게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는 것과 개인이 그냥 자신의 헌금을 보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는 것을 생각하시고 교회를 통해 우리가 세상을 섬기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6) 빚진 상태에서도 십일조를 해야 됩니까?

많은 사람들이 빚을 지고 삽니다. 성도들도 빚을 지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빚을 졌다고 해서 아이 등록금을 안줄 겁니까? 빚을 졌다고 해서 전기세를 안낼 것입니까? 우리가 다 빚을 지고 살아도 그런 것을 내고 삽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빚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교회가 운영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전하는 일을 계속하는 이 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7) 예수 믿은지 4.5년이 되었는데도 십일조를 안했습니다. 이제부터 해야 하겠는데 지금까지 밀린 것도 해야 됩니까?

아닙니다. 십일조는 세금이 아닙니다. 이 십일조는 이미 우리가 살펴 본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들에 감사해서 신앙을 고백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에 감동이 되고 꼭 그렇게 해야겠다는 색각이 들고 능력이 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복이라 생각합니다.

8) 어떤 분은 십일조를 떼어 놓고 거기에서 주일 헌금도 하고 회비도 내고, 구제도 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헌금생활도 신앙생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올바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9) 남편이 불신자인 경우나 혹은 아내가 불신자인 경우에, 혹 불신자가 아니어도 한쪽의 신앙이 부족한 경우 부부 가운데 합의가 안 될 때는 어떻게 할 것입니까?

이때는 경제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믿음 있는 분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대로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극구 반대를 하거나 십일조 중요에 가정이 파탄될 정도로 심각하다면 때를 기다리며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10) 장학금, 등록금에서도 십일조를 떼야 합니까?

아닙니다. 장학금, 등록금에서 십일조 떼놓고 등록 못해서 학교 못가면 어떡합니까? 십일조는 소득의 열에 하나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등록금 받아서 십일조 떼서 헌금 해놓고 그것이 채워지지 않아서 등록을 하지 못하는 학생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지혜가 없이 순진한 마음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 비둘기 같이 우직해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또 순진하고 순수한 마음은 없고 지혜만 가지고 있으면 뱀처럼 간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파악해서 그 하나님 앞에 바른 응답을 하는 것이 신앙인들의 옳은 자세라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우리의 소득이 있을 때 십일조부터 떼고 하나님 앞에 드릴 감사의 예물을 먼저 떼어 놓는 것은 좋은 생활 습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떤 장로님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장로님이 어렸을 때 이 장로님의 아버님은 월급을 받아 오면 식구들을 다 모아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린 후 십일조를 떼어놓는 것을 자녀들이 보게 했다고 합니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축복해 주시고 직장을 잘 다니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가운데 십분의 일을 돌려드리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자녀들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영광이 되는 것을 저절로 배우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도 이런 일을 결코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소중한 부분이 여기에 있음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러한 모습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는 중요한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일에 우리가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2.십일조를 드리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싶습니다. 윌리암 번즈라는 스코틀랜드의 선교사가 중국을 향해 떠나려고 할 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선교사로 가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은 믿을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믿게 되어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곳까지 가느냐? 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번즈를 향해 어떤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래 중국인들을 회심시키기 위해 마침내 중국으로 떠나기는 떠나는 것입니까?" 번즈는 대답하기를 "아니요, 내가 중국으로 가는 것은 다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답하고 중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났을 때 많은 회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설령 번즈가 중국에서 삼, 사십년 선교하는 동안 회심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할지라도 번즈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자 애를 썼을 것이고 자신이 선교사로 간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중국으로 가도록 명령하셨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일조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복을 넘치게 주십니다.

그러나 단지 축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일조를 드리자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아브라함을 십일조를 기쁘게 받으셨던 하나님, 감사하는 야곱의 십일조를 기쁘게 받으시고 성경에 기록하셨던 하나님, 그것을 율법 속에 집어 넣으셨던 하나님, 그리고 지난 이천년 동안 교회사 속에서 수많은 성도들의 십일조를 기쁘게 받으셨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이 헌금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여러모로 축복할 것을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벗한 롯 / 창19:1-11 창세기 18장에서 19장 사이에서 크게 네 종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천사들이 방문했을 때, 극진히 잘 대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조카 롯을 생각해서 하나님 앞을 가로막고 서서 중보기도를 했던 사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는 소돔성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이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심판과 멸망을 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셋째는 롯의 아내와 같은 사람입니다.

롯의 아내는 믿음이 있는 롯과 함께 살았지만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즉 신앙인의 가족이지만 신앙적인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결국은 불타는 소돔성을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째는 롯과 같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볼 때, 롯은 분명히 아브라함과 같이 천사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 신앙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도 분명히 그리스도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돔이 멸망할 때, 자신의 어떤 재산도 그 심판의 불 속에서 건질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소금 기둥으로 변하여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믿기는 믿었는데,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2-15절까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롯은 분명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그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이었습니다. 왜, 무슨 이유 때문에 그는 이렇게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롯은 세상과 벗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속에 물들어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기는 믿는데, 세상적인 가치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인생관, 가치관, 삶의 목적이 세상 사람과 같았습니다.

오늘 이 롯을 통해서 왜 그리스도인이 세속에 물들게 되는지, 그 원인과 함께 세속에 물든 그리스도인의 한계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롯은 그 시선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13장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패역한 곳, 멸망의 장소, 죄악의 구렁텅이인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바꾸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타락하게 될 때도,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창 3장 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했던가요? 보지 않았으면 먹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을 텐데...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니까? 눈을 감아도 교회가 보이십니까?

롯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세상과 벗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롯은 소돔으로 들어간 것이 문제였습니다.

13장 12절에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사느냐고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들의 문화, 생활 방식, 도덕적 수준, 사고방식까지도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여 지는 롯의 모습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롯이 성문에 앉았다가 나그네의 모습으로 변장한 천사를 발견하고 그들을 영접해서 잘 대접합니다. 이런 행동을 누구에게서 배웠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롯은 소돔 땅에 들어오기 전까지 아브라함과 함께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고 그에게서 배웠을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는 습관은 유목민들의 전통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몰려와서 방문한 손님들을 내 놓으라고 소리치는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요구에 롯이 어떻게 대처합니까?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남자를 가까이 하지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하건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을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일도 저지르지 말라".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롯은 분명 나그네들의 신변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아버지로서 자기 딸들도 몸을 더럽히지 않도록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자기 딸들을 내 주겠다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리입니까?

그런데도 이런 대안을 제시하는 것을 볼 때, 롯의 성적 윤리 의식이 소돔 사람들과 타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물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소돔 사람들의 문제 해결 방법이지, 결코 하나님의 사람, 그리스도인의 해결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착상과 발상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벌써 롯은 세속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동화되었습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런데 롯은 이런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소돔 사람들의 꾀를 따르고, 그들의 길에 이미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롯이 소돔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롯이 소돔으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을 것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과 벗이 되지 않고 그들을 변화시켰을 것입니다.

롯은 이미 그의 몸이 소돔으로 가기 전에 마음이 소돔에 가 있었습니다. 롯은 이미 소돔에 있는 죄는 보지 못하고 그곳의 부, 화려함만 보고 사랑하다가 죄까지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롯은 소돔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소돔의 친구, 세상의 벗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세상과 가까워져서 하나님과는 멀어진 그리스도인. 이런 그리스도인은 능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의 소금도 빛도 아닙니다.

롯은 소돔에서 지위에 한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 있다가" 천사를 영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약성서에서 성문이 무엇 하는 곳인지 아십니까? 고대 중동에서 성문은 일종의 시민 광장 역할을 했습니다. 거기서 여론도 형성되고, 재판도 열렸습니다.

롯이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재판장이나 그 도시의 장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시편 127편 5절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899쪽).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성문'은 사회적 지위를 의미합니다.

롯이 성문에 앉았습니다. 소돔에서 롯이 이런 지위에 올랐습니다. 어른의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지역의 유지가 된 것입니다.

롯은 세상적인 부귀를 위해서 소돔으로 이주했습니다. 거기에 집을 짓고, 거기서 그 곳 남자들에게 자신의 딸들을 시집보내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의 성문에 앉을 수 있는 지위, 장로의 지위, 어른의 대접을 받게 되었습니다. 큰 성공입니다. 삼촌 아브라함의 보호를 받던 사람이 독립해서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한계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이르되 너는 물러나라. 또 이르되 이 자가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하는 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가서 그 문을 부수려고 하는지라".

'들어와서 거류하면서'...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나그네살이 하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롯의 한계입니다. 결국 이방인은 이방인입니다. 롯이 아무리 소돔 사람들에게 "이런 악을 행하지 말라"고 "자기 딸들을 대신 주겠다" 까지 말하며 설득해도 그들이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돈 벌었다고, 사회적인 지위가 있다고, 성공했다고 롯의 말이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함께 실컷 노름하다가 "이보시오. 이제 우리 노름은 그만하고 삽시다." 이렇게 말하면 그들이 말을 듣겠습니까? "실컷 함께 술자리에 가서 함께 술 먹고 취하고 지내다가 이보시오. 이제 우리 술 끊읍시다." 그러면 그들이 그 말을 듣겠냐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세상과 벗하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할 때 얻어지는 것입니다.

타협하는 신앙이 가끔은 현명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의 판단이고 하나님의 판단은 다릅니다. 그렇다고 세상과 담쌓고 고립된 삶을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누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으로 들어가되 세상 사람들을 동경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떳떳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입니다. 우리 모두 그러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 (창세기 19:23-28)                                

만연된 죄악으로 소돔성이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유황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도성이 불바다가 되어 멸절될 때에 제외된 사람이 있었는데,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가족이었다. 그들은 천사의 도움을 받아 부귀영화의 땅 소돔과 고모라를 버리고 아침 일찍 소알 땅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당부를 롯의 아내가 듣지 않고 뒤를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1. 없어질 것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은 참외밭에 가 있다.'는 속담이 있듯이, 롯의 아내는 비록 천사와 남편 롯에 의하여 피신하긴 했어도 마음은 하나님이 버린 것, 유황불로 태울 것, 즉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무의미한 것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 뜻과 반대의 길에 서 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롯의 가족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그늘에서 건져내시면서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17절)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을 말하는 것보다 그녀가 소돔에 있는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세상의 재물이나 없어질 것에 미련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6:21)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그 첫째는 바로 그런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홀히 여겼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는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는 불신의 자세입니다.

(마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셨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거나 사랑하는 맘이 없었기에 그녀는 타 가는 소돔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2. 롯의 아내는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었습니다.

사람은 대개 가시적인 것에 확고한 믿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롯의 아내는 그 예의 대표입니다.

소돔성은 그녀의 눈에 너무나 튼튼하고 아름다운 도성이었습니다. 멸망당할 어떤 징조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와 똑같이 향락과 영화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사가 일러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반신반의(半信半疑)한 것입니다.

그녀의 눈은 영적으로는 완전 장님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도성이 망할까?' 하고 의심하면서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마음에 그만 뒤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불신앙의 결과는 멸망입니다.

(계21:8)에 있는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천사의 인도하심도, 성령의 인도하심도 믿지 않으면 기다리는 건 멸망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는 자여 왜 의심하느냐"하고 책망을 하셨는데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들으면 안 됩니다.

믿고 뒤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 재물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는 찬송도 있습니다. 롯의 아내는 재물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단단한 믿음과 신뢰로 주님의 나라에 동참하여야 합니다.

3. 말씀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롯의 처는 믿음이 없는 것만이 아니고 자신의 눈앞에서 이야기한 천사의 말을 무시한 것입니다. 자기 생각으로만 산 사람이었기에 남의 말은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은 것입니다.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결국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롯의 아내가 평소의 생활태도가 남의 말 듣지 않고 무시하는 습성이었기에 소금기둥이 되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도 또 하나의 롯의 처들인 우리를 향하여 계속 말씀하십니다. (눅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복음은 복된 소식이며 구원의 은총입니다. 이 복음의 소리를 듣지 않거나 들으려 하지 않거나 들어도 무시하는 자는 바로 그가 롯의 처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미 롯의 사위들이 그랬었습니다. (창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 때 사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나 후에 롯의 처가 그런 것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요3:18)에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로만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무시하거나 듣고도 행치 아니했다가 롯의 아내와 같은 소금기둥이 되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주의하여 살펴야 합니다. 이 세상 재물은 우리의 영혼을 빼앗을 수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 롯의 아내 소금기둥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버린 것에 미련 두고 아까워하지 말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더 나은 것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가벼이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 길에 축복과 넘치는 은혜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이삭의 출생과 시험 / 창21:1-7

1. 이삭의 출생 - 창21:1-7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얻기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있은 후에 25년을 기다렸습니다.‘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는데 25년이란 세월은 적은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기간 중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이스마엘을 얻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믿음이 성장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믿음이 한없이 떨어져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이 험한 태산준령 같습니다. 높이 솟은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깊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믿음의 정상을 달릴 때가 있는가 하면, 깊은 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길이 있다가도 끊어지기도 하고 길이 아닌 곳에서 방황하기도 합니다.아브라함의 인생과 믿음만 그렇습니까? 모든 인생이 그렇습니다. 전도서 기자도 만사에 때가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고,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올라갈 때가 있고, 이렇게 수차례 골짜기와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길도 없는 곳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막막한 심정으로 주저 않은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브라함의 인생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으므로 모든 역경을 헤쳐 나가며 궁극적으로는 승리하게 된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예배생활을 통해,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삭의 출생은 아브라함 가정의 큰 숙제였습니다.

이 문제 때문에 아브라함은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요. 이러한 과정 속에 태어난 이삭과 그의 출생이 주는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기적의 아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 때, 사라가 90이 되어서 이삭을 낳게 했을까요? 왜 25년이나 기다리게 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함, 그분의 권세를 알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여러분! '100세에 아들을 낳았다. 90세 된 할머니가 출산을 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타당한 지식이나 상식으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과학이나 의학으로도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라의 나이가 90인 것도 문제이지만 이미 그는 태가 닫힌지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십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능력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믿어지는 믿음, 삶속에서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믿음, 병든 몸이 고침 받고 이제까지 안 되던 일들이 회복되고 불가능해 보이던 것들이 가능한 것으로 바뀌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긍정적인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이삭의 탄생으로 이제 하나님의 구속사가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왜 이스마엘이 아닙니까? 이스마엘도 똑같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지만 그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히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둘째로, 이삭은 언약의 아들입니다.

오늘 본문 1절,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이 짧은 두 절에서 똑같은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말씀]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고”,“말씀하신 기한이 되어”. 말씀하셨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약속하셨다는 것입니다. 90세의 여인이 아들을 낳는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모든 것이 생겨났고, 그가 명하셔서 모든 것이 견고하게 제자리를 잡았습니다(시33:9). 예수님의 탄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세주를 보내 주시겠다, 독생자를 보내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습니다.

천지만물이 말씀대로 되었듯이 이삭의 탄생도,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오심도 말씀대로 되어진 일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약속하신 것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이삭은 웃음을 준 기쁨의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웃었습니다.

17장 17절을 보면,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18장 12절,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아브라함 부부는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받아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자신들의 형편을 볼 때,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성이 없는 말씀을 하시니 그들은 속으로‘하나님 말씀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으니 기대하지 않습니다.’그런 의미 에서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마음을 다 아시고 아들을 낳으면, 이삭, 즉 웃음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말씀했습니다.(창17:19)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진짜 웃게 될 날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의 웃을 날을 내다보고 그 이름을 이삭, 웃음이라고 부르라고 하신 것이지요.

창21장 6절,“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진정한 웃음이 있습니까? 행복하게 살고 있느냐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웃으면서 살기는 해도 웃음너머에는 많은 번민과 아픔, 고통과 괴로움이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이삭, 곧 웃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처럼 웃는 집으로 복이 들어옵니다. 웃으며 살 수 있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웃음이 사라지고 대신 불평과 원망과 불만으로 채워진 마음과 그런 사람들이 사는 집, 그런 사람들이 출석하는 교회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으십시오. 성령의 열매가운데 희락의 열매가 있습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진정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쁨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삭은 기쁨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90세 된 할머니가 아들을 낳을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보약으로도 안 되고, 운동으로도 안 되고, 수술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기적은 일어났고 기쁨과 행복이 찾아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기에 행복이 있음을 믿습니다. 약속의 말씀 속에 기쁨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에게도 진정한 웃음이 있습니다. 이 약속 때문에 우리도 기쁨의 자녀, 행복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믿음이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지는 못합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가기도 하고, 죄를 이기고 승리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하고 좌절의 수렁에 빠질 때도 있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의심하고, 충성한다고 하면서도 때로는 불충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스스로 완전할 수 없고, 우리 스스로 똑바로 설 수 없음을 우리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망 가운데서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어떤 형편과 상황과 조건을 뛰어 넘어 역사 하시는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실수, 그의 약했던 믿음,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에 그는 약속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행복의 주인공이 되고 기쁨의 결말을 장식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음을 기뻐하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모든 상황과 불리한 조건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이 있는 한, 구원은 우리의 것입니다. 행복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기쁨의 찬송이 여러분의 찬송이 되기를 바랍니다.

시험과 축복 - 창22:1-19

바다를 항해하는 배가 항상 크고 작은 파도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크고 작은 시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구하는 사람에게 시험은 필수이며, 성공적인 사업을 꿈꾸는 사람에게도 시험은 필수적이듯이 좋은 믿음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시험은 필수입니다.

시험을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학생은 원하는 학교와 직장에 들어가며 시험을 잘 극복한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시험에서 승리한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1.시험하시는 하나님 (창22:1,2)“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삶을 살펴보면 맨 처음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는 것부터가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신앙은 떠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한 부자 청년은 예수님 앞에까지 오기는 했었지만 결국 물질의 욕심에서 떠나지 못해서 근심하다가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사도바울을 따라서 예수님을 믿기로 했던 데마라는 사람은 세상의 쾌락을 완전히 떠나지 못해서 결국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세상에서 완전히 주님께로 돌이켜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은 두 번째 하나님의 새로운 요구를 듣게 됩니다. 즉 100세에 난 아들, 그것도 독자요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고 이런 요구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시험하시려고...”라는 말씀은 신앙을 테스트하기 위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아브라함의 신앙을 더욱 온전하게 만드시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뜨거운 불도가니를 거쳐서 비로소 고귀한 정금이 생산되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처음에 신앙은 세상으로부터 떠나는 것으로 시작하여 하나님 앞에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인가 엄청난 희생과 헌신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고향을 떠났고 그 결과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100세에 아들을 얻는 축복도 누리게 됩니다.

그렇게 많은 축복과 은혜를 받은 후에 오는 시험은 가장 귀한 것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이냐 아니면 하나님이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차라리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했더라면 그것이 훨씬 더 쉬웠을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무엇이라도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면 못 바칠 것이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들을 요구하실 때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여기에 아브라함 신앙의 일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창22:2절에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는데, 바로 그 다음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곳으로 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신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기 위하여 즉각 순종을 합니다. 그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듣고 아내 사라와 밤새도록 의논하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의 이야기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우리들에게 믿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2.준비하시는 하나님 아브라함의 이 같은 순종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뢰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말이, 창 22장 5절에,“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 오리라하고”라는 말과 창 22장 8절에,“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하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같은 아브라함의 순종은 독자 이삭을 주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되 그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바치는 자에게 더 좋은 것으로 되갚아 준비하여주시는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3.축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 같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면서 여러 가지를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1) 지금까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었던 내면적인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창 22장 12절,“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말씀하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여 주셨으며,

2) 창22장 13절에, 이삭을 바치게 하는 대신에 번제할 수양을 미리 준비시키셔서 번제로 드리게 하여 이삭의 생명을 안전케 하셨으며,

3) 창22장 17절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하시며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있으시다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이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었으나 믿음으로 기꺼이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큰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 땅에서 성도의 삶은 시험이라는 것을 목적이 이끄는 삶을 통해서도 배웠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격, 믿음 ,복종, 사랑 ,성결한 마음, 그리고 충성에 대하여 끊임없이 시험을 하는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바치라하셨고, 창세기의 요셉은 형들의 미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야하는 시험을 이겨냈으며, 다니엘은 사자 굴에 들어가는 시련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아니했고,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가마속에 들어가는 시험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이들은 아주 특별한 어려운 과정의 시험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때로는 그들의 시험에 버금가는 연단을 겪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작고 큰 끈임 없는 연단에 직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큰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람을 통하여 시험하시고 또 여러 가지 문제들 즉, 성공, 갈등, 불의, 질병 그리고 심지어 날씨에 반응하는 우리들을 시험하시며 아주 사소한 행동도 지켜보고 계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고전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약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인내심이 없으면 시험을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고 어렵습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정금같이 나오는 믿음입니다. 우리 앞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시련과 연단의 과정들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능히 이겨내고‘여호와이레’하나님이 준비하신 모든 복을 받아 누리며 믿음의 견고한 반열에 들어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아름다운 향년 - 창25:7-11

인생이란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을 식물에 비유한다면, 시작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이며 / 과정은 자라나는 것이고 / 결과는 꽃피고 열매를 맺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 출발은 잘 했으나 나중에 결과가 좋지 않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출발은 별로였지만 나중이 좋은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결과까지 다 좋은 사람도 있으나 사실 이런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을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여 부족함이 없다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면서 계속해서 문제가 일어나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그런가하면 잘 가다가도 또 넘어지기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착오도 많고 실패도 많고 아픔도 많은 인생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을 마감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행복한 향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가 많이 들면 두 가지 부정적인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한 가지는 자기집착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어렵고 고달프게 살아온 분들에게서 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데,“이제는 나 혼자 있게 내버려둬라”“나만의 인생을 갖겠다”“나만을 위해 살겠다”라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염세적이고 운명론적인 생각인데,“나는 이제 늙었구나”“아무도 나를 찾지도 않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다”“나를 기다리는 것은 무덤밖에 없구나”라는 부정적인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 순간부터 온 몸의 세포가 하나씩 둘씩 죽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생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진정으로 영생을 믿는다면 우리는 늙고 병들고 죽음에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슬퍼할 필요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는 우리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이 한 삼일 간 분주하게 오고가며 이 세상에서의 이별을 슬퍼하게 되겠지요. 그리고 그 이후로 며칠, 몇 달이 지나면 나라는 존재를 생각 속에서 잊어버리고 자기들 삶에 분주할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서운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때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품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의 향년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향년이라는 말은 "한평생 살아서 누린 나이"란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향년이 175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창23장 1절에 127세를 살고 죽었다고 기록함으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 남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보통이나 아브라함의 가정은 아내인 사라가 48년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차는 있지만 사라도 죽고 아브라함도 죽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의 죽음을 통해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한번 태어났다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음의 준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1. 믿음으로 사는 삶 이었습니다.

이 땅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아브라함만큼 믿음이 가지는 여러 가지 국면들과 그 풍성한 의미를 잘 보여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믿음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었고, 또한 그의 믿음은 절제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으로 무장된 수도원적인 삶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실수가 없었던 완벽한 사람도 못되었고, 하나님의 뜻을 완벽하게 알고 따라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어떤 때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도 하는 우를 법하기도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영웅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송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어다니며 엄마 밥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성씨들의 신화에 보면 가끔 그런 황당한 사건들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닌 신화에 불과한 것일 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스스로는 땔 수 없는 명찰을 달고 출생을 합니다. 모두가 다 부족한 인생일 뿐입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날 때부터 믿음의 조상이며 의인은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롬4:3,“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하고 실천하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내가 순종하고 따르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약2:21,2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온전케 되었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삽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행함이 있는 믿음의 본을 보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2. 만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8절에,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이 말의 원어의 뜻은 "나이에 만족하여"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다 채워지고, 모든 소원이 다 실현되고, 이루어져서 만족한 가운데 평안히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이 말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생전에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습니까? 그는 그의 후손이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올 온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의 죽음을 만족의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은, ‘거기까지가 그의 삶이었고 또 거기까지 그는 만족했다’라는 말 입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만 순종하면서 살면 결과에 관계없이 만족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도 가나안에 못 들어갔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이며 그것이 그의 만족한 삶이 된 것입니다. 내 인생에 내 목표, 내 소원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을 만족으로 알면 그것이 만족의 삶입니다.(죽어서 전도한 무디) 청장년이 중년이 되고 중년이 노년이 되며 세상에서는 점점 육신적인 힘을 잃어갑니다.

시편90:10절,“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말씀하신 것처럼 늘 아쉬움과 후회가 많은 인생이지만 그렇기에 이제 하루를 살아도 독수리 같은 청춘처럼 살려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시편103편5절,“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연세가 70이 넘고 80이 넘어도 마음만은 청춘같이 독수리의 강력한 날개 짓처럼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설령 인생 7~80을 무엇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고 하지라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 믿음 안에서 멋지게 살면 됩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진정으로 시작할 때입니다.

3. 본향을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8절에 아브라함의 죽음을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다가 이제는 영원한 본향으로 갔다는 말입니다.

히11:10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11:13절에도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 증거 하였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그네요 외국인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진정한 돌아갈 본향인 것입니다. 지금 힘들고 어려워도 내가 가야할 곳이 있음을 기억할 때 진짜 여행의 즐거움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돌아갈 내 집, 나를 반겨 맞아줄 나의 집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땅에서 우리 인생이 참으로 즐거우려면 내 인생 끝난 다음에 내가 가게 될 본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장차 본향을 바라보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모든 고난과 불편을 견딜 수 있으며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은 175세를 살고 세상에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계속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통해서 그 아들 야곱을 통해서 야곱의 열두 아들을 통해 열 두 아들 중 유다자손을 통해서 다윗을 통해서 그의 자손 가운데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해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천상병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인생을 소풍 온 날처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는 우리 성도님들의 인생이 젊으면 젊은 대로 연세가 드셨으면 연세가 드신 대로 정말 보람되고 즐거운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아버지와의 동행 속에 은혜가 있고 감격스러운 삶이 있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한 평생을 살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주신 삶의 진정한 목적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힘 있고 능력 있고 보람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이 부를 실 때 기쁨으로 하나님 품에 안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유한 신앙의사람 / 창26:12-25

성경에서 이삭에 대한 기록은 그다지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버지인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아들인 야곱처럼 두드러지는 활동이나 특색 같은 것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삭을 평가할 때 조용한 사람, 온유한 사람, 묵상의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곤 합니다.

이삭의 이름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창18:12)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이고, 사라가 90살에 나은 아들이지요.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 속에 태어났고 가정과 세상에 기쁨을 주는 인물이 되었으며 메시아인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에 대열에 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온유한 신앙의 사람으로 평가되는 이삭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1.먼저 이삭은 순종의 사람입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가 자기를 제물로 드려야 한다고 할 죽음의 자리에서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백세가 훨씬 넘은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를 묶으려고 하면 혈기가 넘치는 청소년이 밀칠 수도 있고 도망 갈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순순히 묶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실로 예수님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놓고 고민하실 때에도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처럼 이삭도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이 이런 순종을 하였던 것은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입니다. 신앙의 계승이 잘 이루어져서 아버지의 가장 좋은 점을 본받고 있습니다.

대개 가정에서 자녀들이 부모를 닮아갈 때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좋지 않은 것을 본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좋은 것을 본받는 것이지요. 문제는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정적인 것이나 긍정적인 것이나 둘 중에 두드러지는 것이 있기에 그것을 그대로 본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순종하는 신앙을 본받음으로 믿음의 가문을 이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물론 뒤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아브라함에게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던 것처럼 이삭에게도 문제점이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근본에 있어서는 아버지의 좋은 믿음을 계승하는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오늘 본문의 이삭이 큰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모두 순종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창26:12~13을 읽어봅시다.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처음에 시작하는 것은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이 크면 순종도 큰 법입니다.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순종을 잘하는 큰 믿음의 소유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5:8-9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시라."라고 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명령이 모순 같고, 억지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순 같은 명령에도 "예"하고 "아멘"으로 응답할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머리로만 계산하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에 명령이 주어지면 그것을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이 참 좋은 믿음이며 모든 사람이 본받을 만한 믿음인 것입니다.

2.이삭은 타투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삭은 천성이 온유하고 유순하고 침착하며,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삭은 아브라함이 백세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금이야 옥이야 키웠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란 이삭이 버릇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으련마는 이삭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삭도 결정적인 잘못을 저지른 경우가 있는데, 블레셋에 갔을 때에 블레셋사람들에게 자기의 처를 누이라고 한 것일 것입니다.(창26:6~11) 사실 이것은 자기의 아내가 너무나 아리따워서 아내 리브가 때문에 자기가 죽을까 두려워서 거짓말을 한 것이지 남을 해하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이 이삭도 허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허물의 형태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아버지의 좋은 것도 본받았지만 본받지 말아야 할 것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우리들은 아브라함이나 이삭보다 더한 잘못과 실수를 범하며 삽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럴만한 자격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창26장 13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13,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14,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15,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16,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복을 받게 되자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 때 팠던 우물을 흙으로 메워버리고 말았습니다. 잘 된 꼴을 못 보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우리 땅이니 이방인은 떠나가라는 뜻이지요. 이것이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마음의 태도입니다.

18절에 보니 그랄 에 가서 장막을 치고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을 다시 팠습니다. 그런데 그랄 목자들이 와서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시비를 겁니다.

이 우물의 우선권은 아브라함의 것이니 이삭에게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다투지 않고 물러나고 맙니다.

이렇게 하기를 세 차례나 합니다. 참는 것도 한 두 번인데 여러 차례 부당하게 참는 것은 어려운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다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이삭이 새로 판 우물을 그랄 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니 더 이상 다투지 않고 줘 버렸습니다. 그리고 [에섹]이라 하였습니다.(20절)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인데 사실상은 강탈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21절에 또 우물을 팠는데 이번에도 또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또 포기하고 [싯나]라고 하였습니다. 싯나란 대적함을 뜻합니다.

22절에 거기서 장소를 옮겨 또 다시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그때야 비로소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르호봇]이라고 하였습니다. 장소가 넓다, 번성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체면과 위신을 생각해서 한 두 번은 참으나 계속 참지는 못합니다. 계속 양보하고 가만히 있으면 무능한 자로 여기고, 또 정말 잘못한 것이 있어서 당하고 있는 줄 착각합니다. 그리고 바보취급을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을 잘 이해하고 적용을 해야 합니다. 무턱대고 양보하고 무조건 손해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더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어떤 이해관계가 걸려있을 때는 내가 결정적인 손해를 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웬만한 것은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치게 악착같이 조금도 손해를 안 보려고 하고 끝까지 싸워서라도 내가 더 가지려고 하면 그것은 좋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삭은 예수님의 마음을 많이 닮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삭에게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과 너그러운 양보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고 하셨습니다. 마11:29절을 마저 읽어봅시다. -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가룟유다가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옵니다. 그리고 그에게 입맞춤을 신호로 예수님이 체포당하십니다. 그 때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벱니다. 이 모습을 보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것까지도 참으라!" 말씀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정말 참을 수 없을 그 때에도 참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상황에서 참지 못하는 약점을 가진 것이 문제이지요. 이런 상황은 고사하고 조그만 일에도 참지 못하고 발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평범한 대화를 나누다가도 별 것도 아닌 말 한마디에 갑자기 발끈하면서 다투기도 합니다.

성도의 인격은 날마다 예수님을 본 받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부분들이 있지만 그 거친 마음을 날마다 다듬어 가면서 우리의 인품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5:39-42, 말씀하시기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 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깊은 의미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것입니다. 선은 악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선으로 무장하면 우리를 미워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창26:26이하에 보면 어느 날 이삭에게 그랄 왕 아비멜렉이 그의 군대 장관 비골을 데리고 이삭을 찾아 왔습니다. 전에 이삭이 우물을 파면 와서 빼앗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와서 이삭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26:28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음으로..."라고 합니다. 그랄 사람들이 이삭을 그 동안 살펴 본 것입니다. 우물을 뺏고, 건드려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도 여전히 그는 형통하였고, 의연한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이삭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과 평화 조약을 맺자고 제의합니다. 좋은 사람들이니 우리와 평화롭게 지내자는 말이지요. 이것이 주님을 생각하면서 인내하고 견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 그들을 이삭을 큰 잔치를 베풀고 융숭한 대접을 해서 보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의 인격입니까! 훌륭하진 않아도 누구에게나 무난한 인격을 가진 좋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이삭은 경건한 기도의 사람입니다.

창25:21에 "이삭은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함으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 하매 여호와께서 그 간구를 들으셨음으로 그 아내 리브가가 잉태하였더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삭은 40세에 늦장가를 갔습니다. 그러나 이런 늦장가임에도 결혼 후에 20년이나 아이가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삭이 어떤 행동을 하였습니까! 자기 아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고 하나님께 그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리브가에게 잉태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여인이 잉태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여호와께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시127:3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 이취했습니다. 다른 여인 이통해서 자식 이얻으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처럼 종 이취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삭은 한 아내와 더불어 자식이 있든지 없든지 평생을 사랑하면서 살았습니다. 다더불기도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경건한 모습이요, 기도하는 인격입니다. 그는 늘 묵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24:63에 보니 "이삭이 저물에 늦 들늦 나가 묵상하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삭은 자기 집의 늙은 종 엘리에셀이 자기의 신부감을 구하러 간 동안늦 늘 묵상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모습은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한 집을 축복 받는 집으로 만들어갈 진정한 가장의 모습입니다.

이삭은 그의 아들인 야곱이 나중에 보여준 얍복강 나루터의 투쟁하는 듯한 강렬한 기도는 없었지만 이삭은 그의 성격처럼 조용한 가운에 묵상하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깊은 물이 소리 없이 흘러가듯이 이삭은 늘 조용한 사람이었지만 내면에는 아주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속으로 강한 외유내강 [外柔內剛]의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성격과 기질이 모두 다릅니다. 조용한 사람도 있고 매우 활발한 사람도 있습니다. 때와 시기에 맞추어서 각기 자기를 개발해나가면서 나름대로 충성하면 됩니다. 이삭의 경우는 외유내강의 믿음이었습니다.

이 같은 신앙 인격으로 살았던 이삭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시는데, 창26:12이하에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잘 살기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을 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아무리 아둥바둥 애를 써도 자기노력으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란하지 않게 조용한 모습으로 살았지만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성실하게 살고 경건한 묵상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며 살았던 이삭이 큰 복을 받았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있음을 기억합시다. 일상생활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임을 잊지 맙시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이 되고, 온유 겸손함과 양보의 미덕을 가진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인본주의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늘 기도하고 묵상하며 경배함으로 오늘 이 시대에 이삭과 같이 복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의 하나님, 함께하시는 하나님 / 창28:10-22  성경에서 야곱은 대단히 욕심이 많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100세에 약속의 씨 이삭을 낳고, 이삭은 리브가에게서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을 낳습니다. 그런데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 동생 야곱은 자기가 먼저 나오지 못하는 것이 억울해서인지 먼저 나오는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름도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라 했습니다.

두 형제가 장성하매 에서는 사냥을 좋아 한 고로 사냥을 즐겼는데 어느 날 에서가 들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왔을 때 마침 야곱이 군침 도는 팥죽을 쑤어 먹고 있음으로 에서는 야곱에게 '내가 배가 고파 죽겠으니 죽 좀 달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내게 주면 이것을 주겠노라'고 할 때 에서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까짓 장자 명분이 무슨 소용이냐?'며 장자의 명분을 경히 여기고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과 바꿉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 이삭이 눈은 어둡고 세상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장자 에서에게 '들에 가서 사냥을 해 오라 내가 그 고기를 먹고 힘을 내어 너를 축복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때도 욕심 많은 야곱은 몸에 털이 많은 형 에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염소 가죽을 몸에 걸치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가 받아야 할 축복 안수기도를 대신 받습니다.

들에서 돌아온 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자신의 축복을 가로챈 동생 야곱을 죽일 계획을 세웁니다.

이것을 안 어머니 리브가가 이 사실을 야곱에게 귀띔 해주고 야곱은 결국 브엘세바에서 무려 800km나 떨어져 있는 외삼촌이 사는 밧단아람(하란)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줄거리는 바로 야곱이 형 에서의 낮을 피하여 브엘세바를 떠나 외삼촌이 살고 있는 밧단 아람으로 가던 도중 한 곳에 이르러 해는 지고 어두워 지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곁에 있는 돌을 취하여 베개를 하고 노숙을 하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의 내용이 12절 이하에 오늘 본문과 함께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을 떠나는 야곱야곱에게는 두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조용하고 선하게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의 꾀를 부리며 사는 간교한 마음이 더 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경건한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육적인 성향이 너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적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도 알았고 장자권도 알았습니다. 또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품에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것이 너무 강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쉽게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죄는 인간 안에 죄의 성품을 만듭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쌓고 쌓아지는 것입니다. 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 유혹을 받으면 쉽게 무너지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잘못된 줄 알고,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육의 욕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쉽게 죄를 짓고 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적인 방법을 앞세우고 자기 꾀로 일들을 꾸미면서 잘 될 줄로 착각하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자기 꾀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조금 심한 말로 하면 남을 속여서라도 자기가 잘 되기를 바라는 심보를 가졌으니 이것은 사기꾼 기질이 농후한 것입니다. 사기꾼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종종 거짓말을 하고 남을 속여서 자기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실에 위배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속성과는 반대가 되는 것이므로 이런 삶의 방식은 버려야합니다.

야곱의 경우 자기가 심은 대로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는 것으로 고난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결혼 생활과 사업 등 삶의 모든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되는 것이지요.

10절,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났다’는 말은 야곱이 태어나서 자란 곳, 부모 형제와 자기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던 어머니를 떠나야 하는 심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생소한 땅, 낮선 사람들이 살고 있는 하란 땅을 향해 갑니다. 그 곳은 8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며칠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야곱은 처음으로 혼자 떨어지게 되었기에 힘들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주변에 사람이 많이 있느냐 적게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야곱처럼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서도 외롭지만 사람들이 많아도 그 사람들이 나하고 아무런 상관도 없고 도움도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없는 것만도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병들거나 죽게 되면 외로움을 느낍니다. 혼자 아파야 하는 경우가 많고 홀로 죽을 때는 홀로 죽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군중속의 외로움이라는 말처럼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조밀한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외로운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지 않고 말은 이웃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통하지 않고 서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기 때문에 너도 외롭고 나도 외로운 경우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외롭게 살지도 말고 외로움을 주지도 맙시다. 마음이 오고가며 서로에게 좋은 이웃으로 다가가며 서로 돕고 도움을 받으며 밀고 끌어주면서 살아야 합니다.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사람들을 받아들이세요.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야곱에 대해 상상해 불 수 있는 것은 그가 지금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당장 오늘 저녁에 어디서 자야 하는가’하는 것부터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바람이 들이치지 않는 곳을 찾았을 것입니다. 11절,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들녘 한 곳에 이르렀을 때 땅거미가 내려앉습니다. 그리고 곧 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유숙하려고 돌을 하나 취해서 베개를 삼아 누웠습니다. 야곱이 누웠을 때 그가 본 것은 하늘에서 빛나는 수많은 별이었을 것입니다.

배부르고 여유 있을 때는 별을 보는 것이 찬란하고 멋있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춥고 외롭고 불안할 때는 오히려 허무함과 슬픔을 더해주는 것이 별일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그는 별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하늘을 지붕 삼아 쭈그리고 누워서 잠을 청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처지가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고,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후회하며 서러운 마음으로 막 잠을 청하였습니다. 그 밤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이 가난할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절망했을 때 희망은 시작됩니다. 포기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이런 절대절망과 좌절감 속에 빠져있을 때가 하나님이 우리 곁에 가까이 오시는 시간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주의 도움을 간구하는 이에게 도움을 주시고 지은 죄로 인하여 통회하고 자복하는 자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2절“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야곱은 잠이 들어 꿈을 꿉니다. 그는 지나온 삶 속에서 여러 차례 꿈을 꾸었겠지만 이번에 꾼 꿈은 다른 꿈이었습니다. 꿈속에 찾아오신 하나님

그는 꿈에서 길게 펼쳐진 돌계단을 봅니다. 그 돌계단은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까지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13, 14절,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찌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야곱이 경건한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많은 교육을 받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제사도 수 없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그 자리가 처음이었습니다.

잘 살펴보니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오시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미 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매우 인간적이었고 교만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봤을 뿐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몰라봅니다. 이제 그가 마음을 비우니 하나님이 보여 집니다.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내 힘만 의지하고 혈기 방장하여 하나님의 도움도 구하지 않고 내 능력대로만 살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세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야곱은 집을 떠나 외롭고 고통스러운 환경 속에서 어느 누구도 자기 친구가 되어주지 아니하고 홀로 섰을 때 그제 서야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가장 가까운 곳에 와 계시고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는데 더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이 지금 야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자신을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네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란 그들과 약속하셨던 것을 이루시는 약속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라 말씀하심으로 두번째는,‘나는 네 하나님이 되겠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 때부터 약속하신 모든 축복, 특별히 메시아에 대한 축복의 약속을 야곱에게 이어가시고 계십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택해주신 것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 믿는 단계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과 상관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입니다. 조상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멀리계시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 계시는 분이라는 사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말씀이 15절에 있습니다.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은 아무 것도 제대로 한 일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복을 주시겠다는 선언을 듣습니다. 임마누엘의 영원한 약속을 주십니다.여기에는 네 가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2)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를 지켜주고 보호해 줄 것이다.

3)너를 이끌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해줄 것이다.

4)이 약속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약속 입니다. 은혜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은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며, 너를 지켜주며, 너를 복되게 하며, 너와 함께 하리라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할렐루야!

진실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이 음성을 듣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을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야곱은 꿈속에서 이런 은혜를 받고 잠에서 깨어납니다.

16, 17절,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에게 있어서 꿈과 현실은 하나입니다. 꿈에서 환상을 봤지만 그것은 현실로 이어지는 비전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식이나 깨달음보다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진정으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17절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야곱이 제일 처음 한 말은 ‘두렵도다’입니다. 이것은 무섭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고 경외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바른 태도는 경외감입니다. 신앙인은 방자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도 굉장히 방자합니다.

말을 함부로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깨닫지를 못합니다. 자기감정을 앞세우고 제 뜻대로만 하려고 합니다. 고집스럽고 강퍅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정말로 만난 사람들은 마음에 겸손함과 온유함, 그리고 경건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보니 형용할 수 없는 경외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마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경외심의 표현입니다. 찬양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무릎을 기도하며 손을 들고 나의 모든 것을 드리고 싶은 감동이 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변하는 삶 18, 19절, “야곱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베개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지난 밤 만난 하나님에 대한 감동과 기쁨과 충격을 견딜 수가 없어서 베개 했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릅니다.‘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하나님을 만난 이 감격과 기쁨을 예배와 찬양으로 표현합니다.

은혜 받은 사람은 예배의 감동을 압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행복을 압니다. 예배의 충천한 체험을 압니다. 예배의 감동에 젖어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2절,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예배는 서약과 헌신이 주어집니다. 야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서원을 합니다. 우리에게 뭔가 있어서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으로 자신의 몸을 헌신하고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께 드린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셨고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나에게 복을 주셨다는 그 사실 때문에 야곱은 약속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원래는 루스라는 평범한 동네였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 이후 벧엘로 바뀌었지요.

벧엘은 이 후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종교적인 구심점 역할을 하여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예배를 드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서원대로 된 것입니다. 야곱의 물질관도 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표현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입이 적을 때는 십일조를 하지만 액수가 커지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해서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야곱은 자기 할아버지인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드렸던 십일조를 기억하며 아직은 빈털터리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채워주시면 소득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이때부터 야곱의 생애에 하나님이 간섭하십니다.

한 불행한 영국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항상 중환자실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심한 기침을 해댔습니다. 소년은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거부가 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미국행 선박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미국으로 가던 도중 선장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저를 미국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세계적인 부호가 되어 조국에 보답 하겠습니다” 선장은 그를 양자로 삼았습니다.

선장이 늙어 병들자 소년은 배를 팔아 치약회사를 차렸습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콜게이트사의 설립자입니다. 콜게이트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치약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경영철학은 `철저한 십일조'였습니다. "나는 오른쪽 주머니에는 십일조, 왼쪽 주머니에는 이익금을 담는다"고 말했습니다.

콜게이트사에는 현재 십일조를 관리해주는 직원만 3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남의 얘기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유대인은 십일조를 잘하기로 유명합니다.

세계의 재벌가 들은 유태인이 제일 많습니다. 102층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시카코의 110층이나 되는 씨어스 타워도 모두 유태인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두 감사한 마음의 십일조를 드렸던 사림이며 역사 속에서 물질적 축복을 크게 받았던 간증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 감사의 십일조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감사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결 론

야곱이 잠자면서 베개 했던 돌을 취하여 값비싼 기름을 붓고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다' 라고 한 것처럼 여러분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한 것은 벧엘에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리고 죽음너머에 있는 영생의 세계까지 임마누엘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으며 작정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은혜 받으면 변화됩니다. / 창32:22-32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새롭게 변화된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은혜를 받으면 변화됩니다. 불행한 존재가 행복한 존재로 변하고, 연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미움과 질투 속에서 살았던 사람이 사랑의 사람으로, 악한 사람이 선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이는 그 안에 역사 하는 성령의 힘과 은혜 때문입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에 그 유명한 김익두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청년시절 유명한 깡패였습니다. 시장에서는 오늘 김익두를 제발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물을 떠놓고 비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김익두는 많은 사람에게 고통과 불안을 안겨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김익두 청년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회개한 다음에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김익두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깡패 김익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굉장히 좋아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으면 그의 부고장을 받고 그렇게들 좋아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죽었다는 이 사람이 시장에 나타났습니다.

시커먼 책 하나를 가지고 등장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김익두가 예수 믿고 변화되어 목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때 한 사람이 김익두 목사님을 시험하려고 길을 지나가는데 물통으로 뒤집어 씌웠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물을 툭툭 털고 쳐다보더니 "너는 옛날 김익두가 죽었다는 그 사실을 인해서 기뻐하라. 살았다면 너는 요절이 났을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네가 받았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도 후에 변화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땅도 바다도 풀도 나무도 꽃도 그리고 사람도 변합니다. 사실 무엇보다도 변화의 정도가 가장 빠르고 심한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은 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세월이 갈수록 늙고, 병들고, 허약해지고, 무기력해집니다. 이런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우리의 인격이나 품성이 나쁜 쪽으로 변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예수 안에서 더 온전해지고, 좋아져야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생의 연륜이 쌓여 갈수록 은혜롭게 변화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성도들은 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말씀을 배우면서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똑같이 예배드리고, 목사의 신앙지도를 받아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빗나간 길로 나가서 잘못되는 경우까지도 있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들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고, 복된 사람으로 신앙과 인격이 변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변화된 이야기입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는데,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습니다. 이는 뱃속에서부터 형이 되고픈 그의 욕망 때문이었나 봅니다. 그는 기어이 형을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태어난 순서는 에서가 먼저였지만 장자의 축복은 야곱이 받고 형이 된 것입니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원한을 품은 형 에서가 동생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야곱은 더 이상 집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피난을 간 것이지요.

그는 20년을 고생했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드디어 큰 성공을 이루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에서의 원한은 풀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형은 동생이 귀향한다는 소식을 듣고 장정(사병) 400명을 이끌고 동생 일행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야곱은 진퇴양난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뒤로 돌아갈 수도, 그렇다고 형의 군대를 뚫고 전진할 수도 없었습니다.

바로 이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야곱이 행한 일이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한 것입니다. 캄캄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얍복강가에 홀로 엎드렸습니다. 처자식도, 종들도, 재물도 다 먼저 강을 건너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야곱 홀로 남아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도 위기가 올 때가 있고,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엎드려야 할 시간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야곱은 어렵고 힘든 중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기도 후에 야곱은 달라졌습니다. 1.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27절에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발뒤꿈치를 붙잡다`라는 뜻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싸워 이긴 승리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기도하고 응답 받았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날마다 이기는 삶을 주십니다.

고전 15:57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름이 바뀌어야 합니다.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래는 사라로, 야곱은 이스라엘로, 시몬은 베드로로, 사울은 바울로... 예수 믿는 사람은 이름이 변해야 합니다.(그리스도인, 성도) 생각이 변하고, 삶이 변해야 합니다.

이름이 변해야 한다는 것은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자기 이름값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동생을 돌로 쳐 죽였던 가인이 그랬습니다.(얻음, 선물) 가룟유다가 이름값을 못한 사람입니다.(찬송)

변화되기 전의 야곱처럼 남의 발목이나 잡고 넘어뜨리고 피해를 주고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물귀신작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귀신 작전은 끝까신작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나쁜 방향으로 으로 들어가는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집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식입니다. 네가 잘되는 꼴을 못 보니 나 혼자 망하고 죽을 수는 없다. 그러니 같이 망하고 같이 죽자하고 달려듭니다.

발목을 잡아 넘어트리는 인생을 살지 맙시다. 오히려 우리는 넘어진 사람을 붙들어 일으켜주며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니 그리스도인, 즉 기독교인이며 거룩한 백성이니 성도라는 구별된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에 맞게 생각을 하고 이름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2.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창세기 32장 10절 이하를 보면 야곱이 자기 형 에서에게 다섯 번이나 '주'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형의 주가 되기 위해 형을 속이고 큰아들의 명분을 사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한 맺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 후에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님을 20년 만에 만나자 '내 주', '주님께'라며 형님을 높이기 시작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겸손해져야 합니다. 자기를 더 낮추어야 합니다. 높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점점 낮아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한 후에는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삶이 행복한 태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감사의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행복해집니다. 기도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기도한 후에도 변화되지 않으면 올바로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야곱은 기도한 후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창 33:3을 보면 "야곱이 에서 앞에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했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꺾은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으로,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은혜 받은 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는 넉넉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봉사하고, 섬기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은혜 받으면 생활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증거요, 특징입니다. 기도하면 태도가 긍정적이며, 소망이 넘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약4:6)

야곱처럼 기도하는 은혜를 통하여 낮아져야 합니다. 기도한 후에는 마음을 비우고, 더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여 주실 것입니다. 3. 놀라운 것은 야곱이 기도했더니 에서도 변화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변화되기보다는 상대방의 변화를 바라거나 기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쉽게 남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남을 변화시키려면 먼저 나부터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명한 안소니 드멜로는 "내가 청년 시절에는 세계를 변화시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답니다. 중년이 되어서는 "내 이웃을 변화시켜 주십시오"하고 기도 드렸고, 70이 되어서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여,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변화, 환경의 변화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내가 은혜 받아야 합니다. 우선 나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야곱이 기도 후에 변화되고 나니 적대감정을 가지고 있던 에서도 변화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내 힘으로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변화되게 하신 주의 은혜입니다.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창세기 33:4을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 맞추고 피차 우니라"고 했습니다.

동생을 죽이겠다고 400명 장정을 동원해 출동했던 에서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동생을 만나자 달려와 껴안고 입 맞추고 대성통곡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유는 야곱이 목숨 걸고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내가 변화되면, 다른 사람도 변화됩니다. 남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기도의 능력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가정과 사회를 그리고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꼭 변화되어야 할 가족이 있습니까? 꼭 변화되어야 할 친구나 이웃이 있습니까? 해결해야 할 문제 있습니까? 에서의 400용사처럼 두려운 일이 있습니까?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기도한 후에 먼저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환경도 변화되고, 문제도 해결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우리 모두가 행복해 집니다. 변화무쌍한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배 드렸으면 뭔가 달라져야 합니다. 기도한 후에는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고, 예수 믿은 지 꽤 되었어도 변화되지 않는 것,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 믿음 안에서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나쁘게 변질되면 안 됩니다.

처음에는 겸손하였다가 나중에는 교만한 마음으로 변질된 사울왕은 버림을 받았습니다. 변질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 바울의 동역 자였던 데마는 믿음이 변질되어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나쁘게 변질되면 상하고 썩습니다. 썩으면 악취가 납니다. 그것은 죽었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만이 주님의 사람으로 끝까지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방향으로,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끝까지 변화와 성장을 향해 나가도록 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은혜를 체험하면 인생이 달라지고 내 주변의 환경이 아름다워집니다.

환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도 귀하게 보이고 일들에 대한 의욕이 생기고 삶에는 열정이 주어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도 후에 예배 후에 은혜 받고 변화되어 야곱이 영광의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우리도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 창35:1-8

야곱의 나그네 인생길의 행로는 매우 거칠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여정을 보면 우리 모든 인생의 여정을 미리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산전수전이란 말이 있습니다. (‘산에서의 싸움, 물에서의 싸움’이란 뜻으로,‘세상일의 온갖 어려운 고비를 다 겪은 경험’을 비유하는 말)

누구나 인생을 오래 오래 살다보면 산전수전을 다 겪게 되는 것이 인생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피한 세월이 20년이 지났습니다. 밧단아람에서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지내며 많은 고생도 하였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지시로 인하여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창31:3).그러나 고향을 향해 떠날 때 순탄치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외삼촌 몰래 떠났기 때문입니다. 창30장으로 돌아가서 내용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야곱의 양들이 없었습니다. 재산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자 그러지 말고 함께 살자고 말합니다. 그때 둘이 양들에 대한 재산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에 제의한 것이 양들이나 염소 중에 알록달록한 점박이들은 야곱이 소유하기로 하고 흰 것들은 외삼촌이 가지기로 합니다. 외삼촌이 흔쾌히 허락한 이유는 알록달록한 짐승은 몇 마리 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야곱이 꾀를 내어 양들이 물을 먹으러 와서 새끼를 밸 때에 버드나무와 살구나무, 신풍나무의 가지를 껍질을 벗겨서 놓아두니 그것을 보며 새끼를 가진 양들은 모두 알록달록하고 점이 있는 양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주 튼실한 양들이 새끼를 밸 때를 골라서 그렇게 하니 시간이 흐르자 야곱의 양과 염소는 강건하며 심히 많아졌고 외삼촌 라반의 양들은 점 점 줄어들게 되었으니 라반이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라반의 안색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경계의 눈초리를 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고향으로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31:1~3 야곱이 들은즉 라반의 아들들의 말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소유로 인하여 이같이 거부가 되었다 하는지라 야곱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하더라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떠나기는 했지만 외삼촌 라반에게는 아무 말도 안하고 도망치듯이 떠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고우나 미우나 20년을 같이 살았고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면 외삼촌 덕을 본 것인데 그렇게 떠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요. 게다가 야곱의 부인 라헬이 자기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쳐가지고 가기까지 했으니 라반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떠난 지 사흘 만에 이 사실을 안 라반은 야곱을 쫓아갑니다. 쫓아 간지 칠일 만에 결국 야곱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 라반의 꿈에 나타나셔서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창31:24)고 말씀하셨고 결국 외삼촌 라반과 화해하고 헤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 사건도 라헬이 지혜롭게 처신하므로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됩니다.

이런 위기상황을 넘기게 되자 또 하나의 산이 닥쳐왔지요. 그것이 얍봅강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20여년 동 안 복수의 칼을 갈고 있던 형 에서와의 만남은 실로 극적이었습니다. 원한과 복수의 칼이 아닌 뜨거운 형제애의 사랑으로 서로 껴안고 입을 맞추며 고개를 어긋맞기고 눈물을 흘리는 재회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사실 이 모든 것은 인생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제 야곱이 큰 산들을 넘어 마음과 주변까지 평안해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가 조심할 때입니다.

그렇게 고심했던 에서의 위기가 해결되자 야곱은 해이한 마음으로 숙곳과 세겜에서 지나치게 지체하다가 커다란 시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서원했던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그 곳에 도착한 야곱은 장막을 치고 하몰의 아들들에게서 은 일백개를 주고 그 땅을 구입하였습니다(창33:18-19). 그는 벧엘에서의 하나님과의 약속은 잊어버리고 세겜에 안주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으로 도망자 야곱이 외로움과 고독에 잠겨 있을 때 하나님을 뜨겁게 체험한 장소였고, 하나님께 서원했던 장소였습니다.

세겜은 하나님의 사람 야곱이 있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정착하려고 하는 세겜은 우상과 거짓과 음란과 복술자들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결코 벧엘이 아니었습니다.성도가 있어야 할 위치에 있지 않을 때 무서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야곱은 세겜에 거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거주하다가 큰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그 곳의 추장 세겜에게 겁탈을 당하게 됩니다(창34:1-2). 그리고는 세겜이 디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아버지 하몰에게 디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청을 합니다. 그래서 하몰은 야곱의 가족들을 만났고, 야곱의 아들 시므온과 레위는 그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하고 그 때를 이용해 그곳의 남자들을 다 죽이는 살인을 자행하게 되었습니다(창34:25-29).이 일로 인하여 야곱은 후한이 두려워 깊은 탄식을 하였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34:30).

지금 야곱에게는 벧엘이 없습니다.

안일과 자기만족과 영적 침체는 하나님의 뜻을 잊기에 충분한 것들이었습니다. 벧엘을 망각하고, 벧엘을 등지고 살던 야곱! 그는 불신앙의 세겜 사람들 틈에 끼여 슬픔과 위험과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불신 세상의 풍파에 멍들고, 깨지고, 찢기고, 상처투성이가 된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히 실패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마땅히 해야 될 사명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인생의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세겜에서의 실패는 야곱에게 너무도 아픈 상처였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회가 되었습니다.하나님은 벧엘을 잊고 세겜(세상)에 심취해 있던 야곱을 한 사건을 통해서 각성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벧엘은 야곱이 피난가면서 캄캄한 밤에 돌을 베개삼고 잠을 자다가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땅으로 놓여지고 거기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본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곳입니다.

야곱은 벧엘에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찌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감격스러운 야곱은 베게 삼았던 돌을 세워 기름을 붓고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말하며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습니다.

벧엘은 곧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기서 야곱은 두 가지를 서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는 것과,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약속입니다. ① 벧엘은 하늘 문이 열린 곳입니다.

(28:12) 사닥다리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였습니다.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한 것으로 우리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벧엘은 예수를 믿고 영접하여 거듭난 체험이 있는 곳입니다. 그 체험이 있던 곳으로 다시 올라가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첫사랑, 처음 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의 뜨거운 감격과 사랑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와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② 벧엘은 신앙의 체험이 있는 곳입니다.(28:13-15) 하나님을 만난 곳이요, 말씀을 받은 곳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은 타락한 그 현장에서 일어나 다시 신령한 체험신앙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③ 벧엘은 하나님과 서원한 곳입니다.

야곱은 은혜와 감격을 누리고 세 가지를 서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것과 벧엘이 하나님의 성전이 될 것이라는 것과 십일조를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서원을 다시 일깨워 주시려고 "일어나 벧엘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반드시 지켜 행해야 합니다. 신23:21-23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대로 행할찌니라"고 하셨고, 민30:2절에는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를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분명히 지키십니다. 또한 우리의 서원도 지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거짓말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그동안 지키지 못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이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생활의 약속, 온전한 십일조의 약속, 사명감당의 약속 등을 잘 지켜야 합니다. 벧엘로 올라가서 이 약속을 되새겨야 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이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본문 2절에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고 하였습니다.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비록 실패했던 야곱이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아는 야곱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난 사람의 철저한 순종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자의 태도입니다.하나님이 말씀하시니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즉각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비록 10여년의 세월을 방황하며 세겜에서 머뭇거렸으나 이제는 더 이상 지체 할 수가 없었습니다.야곱이 체험한 하나님은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었고,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3절)이었습니다.야곱은 벧엘로 올라가기에 앞서 가정의 종교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① 이방 신상을 버리도록 요구하였습니다.야곱의 가정에 이방 신상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한 일었습니다. 이것은 곧 야곱의 묵인으로 인한 범죄였을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야곱의 가정이 상당히 세속화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헬이 하란에서 나올 때에도 그 아비의 드라빔을 훔쳐 온 일도 있었습니다. 4절에는 귀고리까지 야곱에게 가져 왔는데 이것은 단순한 장신용이 아니라 점치는 것 같은 미신적 행위에 사용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우상 숭배임을 알아야 합니다.하나님 중심의 삶, 하나님 제일주의로 사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② 자신을 정결케 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이것은 이방 풍속에 젖어 있는 불결한 삶을 청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성결 운동입니다. 죄를 씻어 내는 정결 운동입니다.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밖에는 없습니다. 그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을 수가 있습니다. 벧엘로 올라가기 위해서 성결 작업을 해야 됩니다.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의지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③ 의복을 바꾸도록 요구하였습니다.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므로 의복을 바꾸는 것은 현재의 죄인의 삶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에로의 결단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율법 시대에 깨끗한 옷을 입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인 개혁과 의를 행하는 것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우리는 말씀에 합당치 못한 삶은 모두 벗어버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롬13:14) 할 것입니다.신앙은 타협도, 공존도, 주저함도, 미련도 없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을 철저히 행하고 그들은 벧엘로 발행하였습니다(5절).

여기 '발행하였다'는 말씀은 세겜과 완전히 결별하고 행동으로 옮겨 그 자리를 떠난 것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이러한 행동이 세겜과 같은 이 세상에 사는 우리들의 삶속에서 매일 매일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이는 곧 올라가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벧엘은 다른 지역보다 높은 곳입니다. 그러나 벧엘로 올라가자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가 올라가야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문제 해결을 위해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야곱은 말씀대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갔습니다. 야곱의 고백을 보십시오. 3절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리라"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셨고, 두려움과 환난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너무 큰 은혜를 받은 야곱은 단을 쌓고 예배드린 후 이곳을 [엘벧엘]이라고 했습니다. 즉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창35:7)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복을 누리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올라가야 합니다. 영적 상태가 내려가면 기쁨을 상실합니다. 큰 환난과 실패를 당하게 됩니다. 히10: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앙 생활은 마치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자전거는 앞으로 전진 해야지 제자리걸음을 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뒤로 물러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계속 전진하고 올라가야 합니다.

눅10장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매를 맞아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강도가 들끓고 죄악이 관영한 곳입니다. 즉 마귀가 들끓고 죄악이 관영한 곳을 의미합니다.

새롭게 결단해야 합니다.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는 신앙으로 살아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최상의 예배, 최고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정말 간절하게 믿음으로 기도하고 응답 받읍시다. 맡은 직분 충성되게 사명을 감당합시다. 드려야 할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리며, 점점 올라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도 올라가고, 믿음도 올라가서 더욱 큰 은혜와 능력을 힘입는 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이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음성입니다.본문 9절에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야곱과 그의 일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에 도착하였습니다(6절).

실로 약 30년 만에 다시 찾은 벧엘입니다. 회개를 촉구하시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행동으로 옮긴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축복하셨습니다.

① 야곱을 이스라엘로 개명하였습니다(10절).물론 이스라엘이란 개명은 창세기 32장 28절에 나타나지만 여기서는 그 개명의 확증이요 갱신입니다.

② 생육과 번성의 복입니다(11절).자손의 번성은 육적 이스라엘도 가리키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 즉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무수한 신자들이 일어날 것을 의미합니다.

③ 메시야의 복(왕들이 나옴)입니다(11절).예수 그리스도는 후대 다윗의 계보를 따라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④ 기업을 얻는 복입니다(12절).

이 기업은 육적으로는 가나안 땅이요, 영적으로는 우리가 가야 될 하늘나라입니다. 이 모든 복은 야곱의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전승(傳承)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약속은 불변하시고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이 말씀은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는 곧 올라가는 신앙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음성입니다.

신앙생활을 좀 더 활기차게 해야겠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벧엘신앙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벧엘은 신앙체험이 있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우상숭배를 버리고 정결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제 날마다 올라가는 신앙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독수리가 비상하듯이 힘차게 올라갑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모든 은혜와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꿈꾸는 사람(창37:1~11)

야곱에게는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아 열세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이들 열 두 아들은 이스라엘의 열 두 조상이 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이 열 두 아들 중 아버지 야곱이 특별히 정을 더 많이 주고 사랑한 이들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열한 번째 아들이 요셉입니다. 오늘은 이 요셉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 닮은 점은 꿈을 꾸는 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도 벧엘에서 꿈속에 하나님을 만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는데 요셉도 꿈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비전을 보게 됩니다.

물론 요셉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 계보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닙니다. 메시아 계보는 야곱의 넷째아들인 유다로부터 이어져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셉의 삶을 상고해 보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의 삶이 모범적인 신앙인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본받을 만한 신앙의 모범이 보여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붙들어서 크게 쓰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셉이 살았던 시대에는 요셉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육신적으로 예수님의 직접적인 조상의 계보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요셉의 생애를 보면 예수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는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요셉의 생애를 예수님의 그림자와 같다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 그렇고, 은 이십에 팔리는 것이 그렇고, 고난을 당하지만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너그러이 용서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요셉의 삶을 조명해 볼 때, 요셉에게 붙여줄 수 있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꿈꾸는 자’라는 별명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처럼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꿈속에서 장래의 비전을 본 사람입니다.

야곱처럼 요셉도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지만 그 꿈은 현실로 이어지고 있고 장래와 연결되고 있기 때문에 단지 잠속의 꿈이라고 단순하게 평가를 할 수는 없고, 사실상은 그의 인생에 대한 비전을 갖게 해주는 이상이었습니다.

오늘은 졸업입학 감사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큰 수레바퀴를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졸업생 입학생들을 위해 본문에 초점을 맞추게 하셨습니다.

특별히 우리 어린친구들, 그리고 중고등부 학생들, 젊은 청년들은 아름다운 꿈을 꾸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장래에 대한 비전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밝고 긍정적인 꿈을 가지세요. 꿈을 이루려면 먼저 꿈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꿈꾸는 사람입니다. 꿈을 가진 사람의 미래는 꿈이 없는 사람의 미래와 현저하게 다를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꿈꾸는 사람 앞에는 희망찬 미래가 기다리고 있음을 모두가 짐작하기에 꿈꾸는 사람 앞에서는 머리를 숙입니다.

두 번째는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소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초월해서 삽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빈털터리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많은 것을 소유해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나눌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함께 나누며 산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사람을 감당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진 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입니다. 이것을 좋은 측면에서 해석하면 무슨 일을 하든지 죽기를 각오하고 하면 못 할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평범한 듯이 보여도 결코 평범하지 않으며 소유에 집착하지 않으며 일사각오의 자세로 모든 일에 임하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대단한 잠재능력을 가지게 되며 큰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17세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꾸는 요셉의 모습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창37:1~4, “야곱가나안 곧 그 아비의 우거하던 에 거하였으니 야곱약전이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 칠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에 그 아비의 첩 빌하실바의 아들들로 더불어 함께하였더니,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요셉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보다 그를 깊이 사랑하여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그 형들이 아비가 형제들보다 그를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언사가 불평하였더라”

요셉은 지극히 평범한 소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함께 양을 치는 목동이었고 그렇다고 해서 당시에 요셉이 좋은 성격을 가졌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2절 뒷 부분,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 하는 고자질쟁이였습니다.

잠언17장 9절에,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라고 하였는데 요셉은 그런 면에서 많이 부족한 소년이었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그의 꿈이 자라는 것처럼 인격도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되지요. 그러나 소년시절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 있어서 완벽하고 잘나서 꿈을 주시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꿈을 주시고 그것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리고 요셉의 출신배경을 보면 보통 그 집안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은 네 명의 부인과 함께 살았고 네 명의 부인이 낳은 열두 명의 아들과 딸 하나, 그러니까 어머니가 다른 형제자매들이 함께 복잡한 관계를 이루며 사는 가정이니 그 환경으로 보아 결코 순탄한 인생은 아닙니다.

대통령이 된 장로님께서 말하기를 자신이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고생하며 고학을 해서 자수성가하여 대 그룹의 CEO가 되고, 국회의원, 서울시장, 그리고 대통령이 되었다라고 고백하는 것을 방송을 통해 보셨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돈 많고 능력이 있는 가문에서 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가문, 지식, 세상적인 기반을 뛰어 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이 없다면 이 모든 것도 다 쓸모가 없는 것이지요. 생명력이 강한 풀은 잡초입니다. 들에서 비바람을 견디어 내며 추위와 더위를 극복해 나가는 야생초는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온실의 화초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생명력이 끝이 납니다.

들판의 야생초들이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자생력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6: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들풀은 사람이 돌보지 않지만 하나님이 돌보십니다.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려운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셔서 강인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입니다.

요즘 세상에서는 환경이 좋아야 성공도 하고 부모의 절대적 지원, 즉 물질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길이 열리게 되는 시대라고 말들 합니다.

그 말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그보다 더 위대한 길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처한 환경과 형편이 매우 불리하고 힘들다고 할지라도 극복할 수 있으며 훨씬 더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의 꿈은 환경을 초월합니다. 위대한 믿음 안에서의 꿈은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잠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봅시다. 요셉은 꿈을 꾸었고 그 꿈으로 인하여 격려를 받은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미움이 점점 더 커져만 갑니다.

창37:5~11, “요셉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을 들으시오 우리가 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요셉이 다시 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을 꾼즉 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신 꿈을 말하였지만 모두의 반응은 냉담하였고 오히려 형제들의 미움만 더 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아버지 야곱은 달랐습니다.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영적으로 바라보는 야곱은 요셉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장래 일을 위해 꿈을 말하거나 포부를 밝힐 때 주변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비아냥거리고 농담으로만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꿈이 없는 사람들, 내일에 대한 포부와 계획이 없는 사람들은 꿈을 부인합니다. 매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약해지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꿈도 씨앗과 같아서 꿈을 품는 것은 씨를 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씨를 심으면 언젠가는 싹이 돋듯이 꿈을 가지면 분명히 이룰 날이 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꿈을 말한 후의 인생은 고난의 가시밭길 이었습니다.

창37장18절 이하에 보면 요셉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들에서 양을 치는 형제들에게 안부를 물으려고 갔다가 극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형제들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고 결국은 형제들이 미디안 상인들에게 은 이십 개에 팔아넘겨서 애굽에 노예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요셉의 옷에다가 염소의 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가지고가서 맹수에게 잡혀 먹힌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요셉인데 이런 소식을 듣고 야곱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무리 미움이 사무쳐도 그렇지 한 형제인 요셉을 종으로 팔아먹고 아버지를 속이는 이들의 모습은 소돔사람 같은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후에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장군의 집에서 노예로 섬기게 됩니다.

창39장 2절 이하에 보면,“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라고 했고 3절에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놀라운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주신다고 항상 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후 요셉은 보디발 장군 아내의 유혹을 받게 되고 그 유혹을 뿌리쳤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니 참 굴곡이 많아 보이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니 이 모든 과정이 꿈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의 앞길에 늘 형통한 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련과 고통의 날들이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창39장 21절,22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사람은 시련을 당할 수는 있지만 시련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결국 요셉은 왕에게 잘못을 하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던 왕의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시간이 지난 후에 왕 앞에 서게 됩니다.

애굽의 왕인 바로가 꿈을 두 번 꾸었는데 너무나도 무서운 악몽이었습니다. 처음 꿈은 하수에서 살이 찐 일곱 마리의 암소가 올라와 풀을 먹고 있는데,

그 뒤로 흉악하고 바짝 마른 일곱 암소가 나타나 살찐 암소를 잡아먹어 버립니다. 두 번째 꿈은 한 줄기에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후에는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서 충실한 일곱 이삭을 먹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가 애굽의 모든 술객들과 박사들을 불러 꿈을 이야기 했으나 아무도 해석을 못합니다.그 때에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 자기가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요셉이 자기의 꿈을 해석해서 다시 복직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답을 준적이 있었고 요셉이 청하기를 다시 복직이 되면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라고 당부했지만 그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 년이나 흘렀던 것입니다.

이제 왕이 꿈 때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야 요셉이 생각이 난 것이지요. 이렇게 돼서 요셉이 드디어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 이 꿈의 내용을 하나님이 알려주실 것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꿈을 해석합니다.(창4장 25절 이하)

일곱 살찐 암소와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은 장차 애굽 땅에 칠년 동안 풍년이 올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것들을 먹어버린 바짝 마른 일곱 암소와 마른 이삭은 바로 그 뒤에 칠년 흉년이 올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꿈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이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비슷한 내용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정하셨고 속히 행하실 것이라는 것까지 말합니다. 꿈을 해석하는 요셉을 보며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바로는 분명히 알 수가 있었습니다.

창 41장 38절~43절,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을 총리하게 하노라 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에 끼우고 그에게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사슬에 걸고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하더라 바로가 그로 애굽 전국을 총리하게 하였더라”

그 때 요셉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17세의 나이에 형들에 의해 애굽으로 팔려온 요셉은 13년 만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며 자신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아무런 역경과 시련을 겪지 않고 꿈을 이루는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는 아래로 떨어지는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서 구덩이 아래로 던져졌습니다. 구덩이 아래로 빠졌을 때에는 모든 것이 끝 난 것 같은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거기서 죽을 뻔 했지만 다시 건져졌고 그 다음에는 노예로 팔려갑니다. 비록 노예였지만 노예생활의 형통함도 맛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감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니 하나님이 그를 이끌어 올려주십니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연단의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큰 손으로 붙들어 주시는 사람은 많은 시련의 과정들을 겪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모두 극복하게 되고 승리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산이 높을수록 골짜기가 깊습니다. 큰 꿈을 가진 사람일수록 연단의 과정이 힘이 듭니다.

창49장 22절에 야곱이 그 아들들을 축복할 때, 요셉에 대한 축복기도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을 넘었도다”

요셉은 하나님의 은혜의 샘 곁에서 꿈을 펼쳐나가기 시작해서 무성한 가지를 내며 그 가지가 담장을 넘었습니다.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끼치는 축복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졸업생, 입학생 여러분! 꿈을 가집시다. 큰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강원도의 작은 마을 대관령에 살고 있지만 세계를 품는 이상을 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관령이 비록 작은 마을이나 아주 높은 마을인 것처럼 여러분의 꿈과 기상도 높기를 바랍니다. 확실한 것은 나는 작지만 하나님은 크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세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꿈을 주시고 꿈을 이룰 능력을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찬란하게 빛나도록 하여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꿈을 가진 사람은 성공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밝은 영안을 가집시다(창48:10~22)

요셉의 연고로(중략) 이스라엘의 온가족이 애굽의 기름진 땅 고센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애굽에 온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가 '당신 연세가 얼마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년입니다'고 대답합니다. 야곱은 그의 인생을 나그네 길로 보았으며, 자신은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로 여겼습니다. 나그네 인생은 떠나가는 것이 철칙입니다.

창47장 29절 이하에 보면, 죽을 기한이 가까운 야곱은 그 아들 요셉을 불러 이르기를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환도뼈 아래 넣어서, 나를 인애와 성심으로 대접하여, 애굽에 장사하지 않기를 맹세하고,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선영에 장사하라'고 당부합니다.

야곱은 그 아들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영화를 누리고 있는 애굽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고,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소원했는데, 이것은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야곱의 신앙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미국의 일간지[볼티모어 선]이 독자들에게 설문을 냈습니다. '당신이 1년만 살고 죽는다면 그 1년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수백 통의 응답이 있었는데 집을 사겠다든지, 은행 저축 잔고를 얼마로 올리겠다는 등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는 물질적 희망에 대한 것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가장 많은 내용이 '더 많은 도움을 주겠다. 더 많은 미소를 주겠다. 더 많은 사랑을 주겠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을 더 밝게 해 보겠다'는 내용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진정한 소망이 물질에 있지 않고 더 높고 고귀한 것에 있음을 증명해 줍니다. 야곱이 그의 장례식 문제에 대해 지시하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요셉은 그의 부친 야곱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창48장 1절에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에노쉬' 인생입니다. 사람을 뜻하는 히브리어 '에노쉬'란 말은 '약하다' '병들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에노쉬' 인생은 참으로 약하고 병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젊은 날의 야곱은 얼마나 강인한 체력을 가졌었던가요? 야곱은 창31:40에서 외삼촌 라반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며,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내었나이다'고 했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노쇠한 야곱은 젊은 날의 그 강건한 기력은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창48장 2절을 보면,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라고 한 것을 보아서, 이미 일어날 기운도 없이 쇠잔한 몸이지만, 강인한 정신력으로 지탱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힘을 내어 침상에 앉은 야곱은, 잠시 지난날에 대한 회상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 꿈과 희망을 가지고 부지런히 삽니다. 그러나 늙어진 후에는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삽니다.

인생을 80으로 보았을 때, 40세 까지는 상향적인 것으로, 앞날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고, 40 이후로는 하향적인 것으로,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시인 '푸쉬킨'도 '지나간 것은 다시금 그리워지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들도 가만히 보면, 지난 날 그 가난했던 시절에 대한 얘기를 아련한 그리움과 함께 가끔 하게 됩니다. 추억은 아름답습니다. 당시에는 하잘것없고, 또 무척 고통스러웠던 것들까지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회상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승화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 살아 나는 법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회상은 단지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 대한 회상만은 아닙니다. 3-4에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셨느니라' 라고 한 대로,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와 인도하심을 회상하는 것입니다.

1)전능한 하나님에 대한 회상입니다.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라고 했습니다. 창18:4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라고 하였고, 출6:3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 전능한 하나님께서 지팡이 하나만 가지고 집을 떠났던 야곱을 거부가 되게 하셨습니다.

2)목자 되신 하나님에 대한 회상입니다.

15절에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의 직업은 목축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야곱은, 자신은 항상 가냘픈 한 마리의 양에 불과했지만, 목자 되신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먹이시고, 기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신 것을 회상하였습니다.

3)구원의 하나님에 대한 회상입니다. 16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라고 하였습니다.

창31:29에 보면, 외삼촌의 집을 몰래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던 야곱을 추격해 온 라반이 말하기를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어제 밤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야곱을 건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을 치러 오던 에서의 마음을 변하여 목을 안고 입맞추고 울어 버리게 하신 하나님이시었습니다.

또한 여동생 디나가 욕보임 당한 원수를 갚는다고, 세겜성의 남자들을 다 살해한 아들들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에게 전멸 당할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 사면의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여' 추격하지 못하도록 하신 적도 있는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회상한 야곱은, 요셉이 데리고 온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손자를 축복하기 위해서 자기 앞으로 가까이 이끌어 오라고 합니다.

이 때 야곱의 눈은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고 했습니다.

이때 야곱의 축복은 참으로 뜻깊은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 형제의 동생으로 태어나서, 장자의 명분과 그 축복을 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여, 형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을 사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아 낸 야곱은, 그 후 줄곧 나그네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이제 그 나그네 길의 마지막 여정에 다다른 야곱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요셉의 아들이요, 자신의 손자인,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남겨 주는 매우 값진 축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 손자에게 입을 맞추고서, 요셉을 향하여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뜻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소생까지 보이셨도다' 하면서, 원하던 것 이상의 은혜에 대하여 감격해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야곱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도 뜻하지 않았던 것, 과분한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미얀마의 빈곤? 방글라데시와 아프리카의 기아... 우리 민족이 받은 과분한 은혜 - 복음의 편만, 물질적인 부 등) 과분하게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잊지 아니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손자들을 축복하려는 야곱에게 그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의 손을 잡고 아버지께로 인도합니다.

12-14에 보면 그 때의 장면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이 아비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리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右手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左手를 향하게 하고, 左手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右手를 향하게 하고,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右手를 펴서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左手를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어긋맞겨 얹었더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손을 어긋나게 얹어서 축복하기를 하나님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 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로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곧 두 손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동참케 되기를 축복한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팔을 어긋 맞겨 그의 아들들에게 축복하는 것을 보고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右手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히브리인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오른손은 힘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사도 신경에 부활하신 주님께 대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분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오른편, 곧 하나님의 가장 영향력이 강한 편에 계신 분이심을 의미합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그의 큰아들 므낫세의 머리에 오른손을 얹고 축복해 주시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요셉은 생각하기를 아버지 야곱이 눈이 어두워서 큰손자인지 작은손자인지 구별을 못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손을 들어 바꾸어 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같은 요셉의 요청을 허락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고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고 하면서, 요셉의 차자 에브라임을 장자 므낫세보다 앞세웠습니다. 동생인 에브라임에게 형인 므낫세 보다 나은 영예를 준 것은 동생이 형보다 나은 면이 있다거나 공로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야곱은 지금 자기가 하는 일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실수로 한 것도 아니며, 기분으로나 어느 하나를 편애해서도 아니고, 선지자의 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는 행동임을 말합니다.

이 같은 야곱의 예언적인 축복은 적중해서, 후일 이스라엘의 지파들이 광야에 집결했을 때, 에브라임이 므낫세보다 수효가 많았고, 여호수아도 에브라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나누어져서 반은 요단 동쪽에, 반은 그 건너편에 있어 힘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일에 에브라임은 이스라엘의 대표지파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야곱은 영안이 밝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두 손자 중 누구를 더 크게 축복해야 할 것을 바로 알았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아도 야곱은 이삭과 다릅니다.

창27:33에 보면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후 에서가 들어왔을 때 '심히 크게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길 뻔했던 자기의 실수를 깨닫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삭과 같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그 권속들의 제사장으로서도 허물없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영안이 밝았던 것은, 야곱의 신앙의 깊이와 성화의 수준이 가히 어느 정도이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야곱처럼 영안이 밝은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 4:4에서 '이 세상 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라고 탄식했습니다.

이 세상 神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했다는 말은, 곧 마귀가 불신자들로 하여금 '소경이 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세상의 참 빛이신 그리스도의 빛을 받기 전까지는 언제나 다 소경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진리를 알지 못하고 배척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소경된 인도자여'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하면서 호되게 책망하셨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가인 페더는 그가 알게 된 한 청년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그는 어느 날 길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주웠습니다. 그 후 그는 길바닥만 내려다보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10년 뒤에 그가 얻은 것은 29000개의 핀과 돈 12달러와 구부정한 어깨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잃은 것은 찬란한 햇빛과 별들의 반짝임과 길에서 스쳐 가는 사람들의 미소와 가로수의 싱싱한 잎들과 푸른 하늘과 인생을 사는 맛이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땅의 것 아래 것만을 내려다보고 살다가 실로 많은 손해를 본 것입니다.

미국의 노래에 이런 것이 있다고 합니다. [지미와 조는 감옥에 갇히었네 / 어느 날 둘은 바깥세상을 보았다네 / 지미는 트럭이 달리는 진창길을 보았고 / 조는 밤하늘을 수놓은 별을 보았다네]

똑같이 철 창 신세가 된 두 친구인데 그들의 '보는 눈'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더러운 진흙탕 길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아름다운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지미는 내려다보고 조는 올려다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아마 앞을 못 보는 소경일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소경보다 더 불쌍한 인생은, 마음의 눈이 어두운 영적인 소경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못보고, 물론 천국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스런 모습도 보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 형벌 속에서 고통당할 자신의 모습도 물론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알고, 눈에 보이는 것, 땅의 일만을 밤낮 추구하면서 삽니다. 신자들 가운데도 이러한 영적인 소경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神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우리 앞에 있는 소망이 얼마나 찬란한 것이며, 성도가 얻을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여야 영안이 밝아집니까? 세상 것에 밝으면 영안은 흐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찬송가 작시자 존 케블(J.Keble)은 '영혼의 햇빛 예수여 가까이 비쳐 주시고, 이 세상 구름 일어나 가리지 않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의 거친 들에서 야곱처럼 나그네 세월을 재나고 있습니다. 이 나그네 세월을 보내면서, 성령의 감동하게 하시는 역사로 야곱처럼 변화되고, 야곱처럼 영안이 밝아지게 되시기 바랍니다.

환난 중에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고 했던 욥처럼, 환난을 통해서 오히려 영안이 밝아지는 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력을 테스트 할 때 2.0이면 제일 좋은 눈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몽골 사람들은 보통 3.0이 넘고 아마존강 원시림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눈은 6.O이 될 정도로 밝은 눈이 되어서, 조그만 개미 새끼가 기어가는 것까지도 다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육신의 눈이 점점 흐려지십니까? 육신의 눈은 흐려져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안을, 육신의 눈 6.0 보다 밝히 열어 주셔서, 저 천성 문을 환히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눈이 십자가를 밝히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고난 받으신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며 새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이 영적 세계를 꿰뚫어보는 영안이 활짝 열리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곱의 축복기도 / 창49:8~10, 22, 28

사람은 한 평생을 살면서 복을 받는 분량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고 복을 주시는 분이신데, 중요한 것은 그 복을 받을 사람의 분량입니다. 복의 분량은 준비된 그릇만큼 받게 됩니다. 그러니 큰 그릇이 되는 것이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야곱이 자기 아들들을 불러 놓고, 그들을 위해 축복의 말을 해 주는 내용이 창세기 49장입니다. 야곱은 아들들에게 그들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을 말해 주면서 축복을 해 주었는데, 자기 아들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떤 분량대로 자기 아들들을 축복했을까요?

첫째는 생각과 마음의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많이 축복을 받은 사람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기 아들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사람 몫으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의 형제들보다 두 배의 몫을 분배받은 것입니다. 창세기 49장 22절에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고 했고 25, 26절에 "하나님이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요셉이 많은 복을 받은 것은 그의 생각과 마음의 분량이 컸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자기 형들이 자기를 미워했고, 죽이려고 했고, 애굽으로 팔아버렸지만, 그 형들을 미워하지도 않았고, 복수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형들에게 양식을 주고, 환대하고 도와주었습니다.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인 고센에서 살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선으로 악을 갚은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하나님의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마음이 강퍅하고,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애굽왕 바로의 마음이 강퍅해지니까 하나님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마음을 곱게 잘 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 정직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실 때, 먼저 그 사람의 생각을 고치게 하시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넓은 마음을 갖게 하신 후에 복을 부어 주십니다.

에스겔 11장 19절 이하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구약에서 복 받은 사람 가운데 솔로몬을 꼽을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기브온 산당에 올라가서 일천 번제를 드린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넓은 마음을 주셔서 크게 복을 주셨습니다.

열왕기상 4장 29절에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우연히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지혜를 주시고 넓은 마음을 주셔서 그 많은 복을 받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하고, 넓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밭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길가처럼 딱딱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돌 짝밭 같이 겉은 부드러우나 속에는 깨지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은 가시떨기 밭 같이 근심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고 축복의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풍성한 축복의 열매를 가질 수가 있습니다. 길가처럼 딱딱한 마음은 갈아엎어야 합니다. 돌 짝밭 같은 마음은 부숴 뜨려야 합니다.

가시떨기 밭 같은 마음은 잡초 같은 근심걱정 염려를 뽑아버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요엘 2장 13절에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했습니다.

우리의 딱딱한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야 합니다. 우리의 좁은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더러운 마음을 정결케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우리의 마음의 분량이 커져서 하나님의 복을 받되 풍성히 받게 됩니다.

둘째로 우리의 믿음과 행동의 분량이 커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또 큰 복을 받은 아들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그의 자손 중에 왕이 나오게 될 것이고, 그의 후손이 왕족이 될 것을 예언 받았습니다. 이 축복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며 복된 예언이 되었는데, 그의 후손으로부터 만 왕의 왕이요,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메시아'가 탄생할 것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다의 축복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이 단지 유다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1. 형제들의 찬송이 될 유다(8절)

유다에게 내려진 축복 중에서 제일 먼저 내려진 축복은, 유다 지파가 여러 지파들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지파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탁월성은 그 이름 '유다'가 의미하는 '찬송'이라는 의미에서 좀 더 명확히 나타나는데, 이러한 찬송은 그가 원수의 목을 잡을 때에 그의 이름이 가장 크게 영광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한 유다의 영광의 넁어서서,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그가 사탄의 목을 눌러 이길 때 받을 커다란 영광과 찬송을 의미하는 바, 바로 '정복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2. 獅子같은 유다(9절)

유다에 관한 두 번째 축복은 그를 '獅子'로 묘사함으로서, 그가 힘과 위용을 갖춘 자가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란 힘과 위용을 갖춘 메시아의 모습, 자신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물리치는 능력자, 전능자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5:4에 "유대 지파의 사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기었다고 하였습니다.

3. 笏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10)

여기 '실로'가 오시기까지라는 말에 대해서,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실로'를 하나의 장소, 즉 지정된 어떠한 거룩한 장소로 해석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실로 라는 말이 의미하는 그대로 '평화'와 '안식'을 주는 자, 다시 말하면 '평화를 가져오는 사람' '안식을 주는 사람' 즉 '메시아'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사 9:6에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 한 대로, '실로'는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다에게 내려진 이러한 축복의 진정한 의미는 유다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가 탄생할 뿐만 아니라, 유다로부터 시작되는 왕국은 메시아의 탄생에 이르러 그 정점을 이루게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왕국은 이 세상의 왕국과는 구별되어 '홀이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원한 왕국이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렇듯 유다는 야곱의 그 어떤 아들들보다도 풍성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이처럼 큰 축복을 받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이와 같이 크고 놀라운 축복을 받은 것은, 그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습니다.

실로 그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대도로 가족들을 위기에서 구하고,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유다는 요셉을 죽이려는 형제들을 설득하여 요셉을 살림으로써 훗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형제들의 제2차 애굽 방문 때에는 기근으로 가족들이 굶어 죽게 되었는데도 야곱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자, 자신의 생명을 베냐민의 담보로 내어놓고 야곱의 허락을 얻어냄으로써 가족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하였습니다. 또한 요셉의 은잔 시험으로 베냐민이 평생 애굽의 노예가 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는,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애굽의 종이 되기를 자청하면서까지 베냐민을 놓아줄 것을 간곡히 요청함으로써, 요셉과 형제들간의 대화해를 이루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로 이런 일들이 유다로 하여금 다른 모든 형제들보다 더욱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써 풍성한 축복을 받게 합니다.

이처럼 유다가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마음과 행동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는 대담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심정으로 행동했을 때, 요셉을 통해 큰 혜택을 받고, 문제를 해결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칭찬하시고 적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책망하셨습니다.

백부장이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할 때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칭찬하시고 그의 하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기 딸의 귀신병을 고쳐 달라고 찾아왔을 때 "여인아 네 믿음이 크도다" 칭찬하시고 그녀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중풍병 걸린 사람을 들것에 담아 지붕을 뚫고 달아 내린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심으로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커야 합니다.

바람과 파도를 보고 두려워한 제자들에게 "왜 두려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이 귀신 들려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들어가는 것을 고쳐 달라고 그 아이의 아버지가 "할 수 있으면 고쳐 주세요"라고 했을 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주여 믿습니다.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외칠 때,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커야 합니다.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라"고 종종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무한하시고 축복은 한없지만, 믿음의 분량이 적으면 적게 받고, 크면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행동의 그릇을 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인생은 안전합니다. 형통합니다. 복된 길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고 했습니다.

기도와 말씀의 분량이 큰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의 분량을 크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복이 크게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잘 감당하게 될 줄 믿습니다.

- 창세기 설교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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