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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폐함 가운데서도 찬양하며 나아가리” 시편 63:1-4

작성자길창원|작성시간20.02.09|조회수45 목록 댓글 0

 

주를 갈망하며 주를 앙망할 때. . .

황폐함 가운데서도 찬양하며 나아가리

   


중심구절 | 시편 63:1-4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황페한 땅에서 부르는 노래 - ‘유대광야

유대광야는 성경에서 아주 많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입니다.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매우 건조한 지역이죠. ‘중앙산지라 불리는 지형에는 1년에 5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쏟아지지만 유대광야에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독특한 지형을 가진 유대광야는 바로 중앙산지에서 흘러내린 물로 인해 많은 협곡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 황량한 곳에서 예수님은 40일의 금식기도를 통해 공생애를 준비하셨고, 다윗은 사울 왕과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며 수많은 시편을 노래했습니다.

황폐한 곳에서 가장 선명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던 곳, 지금도 그 곳에 가면 위험천만한 절벽에 수도원들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생각나는 찬양이 하나 있습니다.

찬송가 370장인데요.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주님만 따라가리

 

이 찬양의 작사가는 엘리자 히윗 여사입니다.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나 교육학을 전공한 히윗은 독신으로 살면서 불량 청소년들을 상담하고 선도하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죠. 한 청소년을 상담하던 자리에서 폭력을 휘두른 소년에 의해 척추를 다쳐서 7주간 병상 생활을 해야 했답니다.

그렇게 쉽게 낫지 않는 상황과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혼란스러웠던 때,

그렇게 꼼짝 없이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던 순간, 콧노래를 부르며 병원을 청소하는 흑인 여성을 보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 참지 못하고 노래를 그만 부를 수 없느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제 인생 또한 무척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지만 괴로울 때면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 순간 히윗 여사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구나! 저 여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찬양을 멈추지 말라고 말씀하시는구나!

그런 깨달음에서 만들어진 찬양이 바로 370장입니다.

그렇게 그녀가 만든 찬양들이 여러 개가 있습니다.

찬송가 453예수 더 알기 원하네찬송가 539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와 같은 곡들이죠. 그리고 주의 은혜로 7주 동안의 투병생활을 다 마치고 다시 그녀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소년들을 돕는 사역을 평생 계속해서 이어가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유대광야와 같은 황폐한 길을 걸어야 할 때도 있고, 위로의 시간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말인데, 우리의 삶에 가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좋아하는 찬양 이 또한 지나가리라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단한 인생길)

고단한 인생길 힘겨운 오늘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지나간 아픔도 마주할 세상도 예수 내 마음 아시네

하루를 살아도 기쁨으로 가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후회도 염려도 온전히 맡기리 예수 늘 함께 하시네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믿음의 눈 들어 주를 보리 이 또한 지나가리라

주어진 내 삶의 시간 속에 주의 뜻 알게 하소서

 

때가 있으니 이 때를 잘 지나가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순간이 있는가 하면,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고백이 아닐까요?

다윗에게 있어서 주님을 간절히 찾으며 주를 갈망하고, 주를 앙모하며 살아가야 하는 순간 말입니다. ‘때가 있다는 말은 또한 우리들에게 이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가는 대로, 물결에 휩쓸려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를 알고 그 때에 적절한 반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의 인생에는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나아가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라는 말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때그리고 주님께서도 때가 이르렀다혹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라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지요.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는 이 를 구분하는 두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와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흘러가는 시간을 표현하는 운명에 자신을 맡기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감지하며 믿음으로 반응합니다.

고든 맥도날드는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서 계획되지 않은 시간의 법칙을 이야기 합니다.

1.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자신의 약점이 있는 곳으로 흘러 들어간다.

2.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영향력에 의해 좌우된다.

3.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긴급한 일들에 소모된다.

4.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대중의 갈채를 받는 인기 있는 일들에 소모된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계획 없이 그냥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꽤 오래전 일입니다. 저는 준비를 철저히 하는 성격입니다. 그러다보니 설교원고도 이렇게 철저히 작성을 하지요. 제가 한동대 채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여러번 설교를 해야하니까 시간에 맞춰서 준비해갔습니다. 그런데 소개를 받고 설교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저의 마음에 강력하게 말씀하셨어요. “저 학생들에게 적절하지 않다.”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시간에 맞춰서 준비해왔는데 지금 적절하지 않다고 하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때 저는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준비한 원고를 강단에 놓고 옆으로 나와서 섰습니다. 그리고 그냥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는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준비한 대고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를 쓰시는 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니 나는 아무런 준비할 필요가 없을까요?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이 마음대로 쓰시니 나는 준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최선을 다해 자기 인생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을 참 많이 경험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계획이 어그러진 곳에서 그리고 우리의 계획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 이르러서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된다는 것이죠.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생의 계획을 세우고 성실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조차 경험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계획적으로 살아도 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며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죠.

 

오늘 시편 기자의 고백은, 그에게 주어진 삶의 때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황폐한 땅에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그냥 인생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갈망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질문을 던져봅니다.

다윗이 황폐한 땅에 서 있는 것이 자신의 의지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황폐한 곳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위에서 잠깐 언급한 대로, 다윗은 황폐한 광야에 머물겠다고 계획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왜 거기에 있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처한 상황에 대하여 물음을 묻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신앙적 인간이 되는 것이죠.

이 물음에서 광야는 아주 의미 있는 장소가 되기 시작합니다.

광야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곳이기에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그런 곳으로 인도하셨을까요?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여러분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연애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장소에서 그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나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둘 만의 시간을 위해 남이 보지 않는 곳,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곳, 은밀한 곳을 찾아가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다윗을 광야로 이끌어 내셔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사랑을 확인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때, 다윗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렇게 주어진 인생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반응했습니다.

 

자신의 계획 속에는 없었던 황폐한 땅에서 수동적 인간으로 그냥 자신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능동적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은 동일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것을 어떻게 질적으로 충만하게 사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16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NIV에서는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라고 표현했습니다.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월을 아끼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며 질적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가치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죄를 짓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 악한 세상에서, 영적인 침체 가운데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기독교인의 사명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의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을 성화하며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간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동일한 시간 가운데서 우리는 어떻게 질적으로 충만한 시간을 향유할 수 있을까요?

시간을 보기 위해 시계를 볼 때, 나침반도 함께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시계는 우리들에게 지금 바쁜 것이 무엇인지를, 나침반은 우리들에게 지금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바라보게 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시편 63편 말씀은 우리 귀에 너무나 익숙합니다. 특별히 찬양을 통해 우리들에게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1.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무엇을 갈망하고 있을까요?

그의 인생의 갈급함은 주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에 사라진 주님의 음성이 아닐까요? 갈급함은 어느 날 자신의 인생을 열심히 살았으나,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자리에서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갈망이야말로 인생의 축복이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며 광야를 헤매는 동안 이 시편을 썼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그의 인생에 심각한 갈증이 찾아 왔습니다. 사랑을 잃어버린 아픔이죠.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하고 도망자가 되어 버린 상황이죠.

그런데 그런 상황, 인생의 황폐함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내적 아우성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야 하겠구나!

인생의 황폐한 갈망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내적 갈망이 시작되는 곳이 축복이라는 고백입니다.

도망자로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에서 목숨보다 더 귀한 분을 갈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그가 느끼고 있던 갈증이 문제가 아닌 것이죠.

그의 상황을 모면하고 극복해야 해결될 것 같은 갈증이, 내면 깊숙이 바라보니 하나님을 만나야 해결될 것이라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 갈증으로 인한 아우성에서 하나님을 향한 갈증과 경청으로 전환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

 

저는 갈망경청과 동의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좋은 상담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의 이야기를 잘 듣습니다.

좋은 목회자도 좋은 부모도 잘 듣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라비아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듣고 있으면 내가 이득을 얻고, 말하고 있으면 남이 이득을 얻는다.”

 

성경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119.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물이 없는 황폐한 땅에서 다윗이 느꼈던 것은 육신의 갈증이 아니라 영혼의 갈증이었습니다. 황폐하고 척박한 땅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영적 통찰이며 신앙의 고백입니다. 2절 말씀.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육신의 문제의 해결을 영적인 것에서 찾았습니다. 그의 갈망을 풀어 줄 단서를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며,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갈망함이 그의 삶의 축복임을 알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황폐한 그의 인생 한가운데서 주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이죠.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 ‘성전을 찾아 기도하고,

아무에게도 그 곤고함을 이야기할 수 없을 때, 조용히 어머니 기도실을 찾아 기도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만이 이 다윗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황폐함 가운데 성소에서 주의 권능과 영광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을 사건이 아닌 해석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상이 하나 서있다. 그 동상이 서있는 동안은 두 나라가 서로 전쟁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자고 합의를 하고 세운 동상이다.

그러나 아이러닉하게도 이 동상으로 말미암아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뻔하였다.

그 동상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칠레의 한 사람이 지적하기를 그 동상의 예수님은 칠레에다 등을 돌리고 계시다고 했다. 즉 동상의 전면은 아르헨티나를 향했고 뒤는 칠레 쪽을 향하게 된 것이었다.

 

이 일은 칠레 사람들의 마음을 대단히 상하게 하고 자극시켰다. 이렇게 동상을 세우는 일은 칠레를 무시한 처사라고 했다. 칠레 사람들의 감정은 점점 거칠어지고 그것은 곧 폭발할 것만 같았다.

바로 이때 한 기자가 신문에 실은 글 때문에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그 신문의 글은 말하기를 예수님의 얼굴이 아르헨티나를 향하고 서 계시는 이유는 아르헨티나가 칠레보다 예수님의 감시, 감독을 더 필요로 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신문의 글은 전체 칠레 사람들의 감정을 즉시 무마시키고 무서운 마찰을 피하게 했다.

 

사실 해석이라는 것은 프레임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분노와 미움이라는 프레임으로 사건을 보는 것도 가능하고 용서와 사랑의 프레임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나 중심적으로 사건을 보는 것과 상대방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 무슨 일을 당하느냐를 생각하는 것과 하나님의 관점에서 어떤 일을 행하시는지를 보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기로 결정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신앙적 결단입니다. 신앙적 결단은 하나님을 붙들기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을 붙듦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심하다!

다윗의 곤고함 가운데서, 성소를 찾아가 만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요?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다윗의 마음에 이런 결심이 생겼습니다. 3-4.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나는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이, 그의 체험이 인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평생에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평생이 무엇인가요? 그가 이 땅에서 숨을 쉬고 살아가는 날 동안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말입니다.

3절의 표현을 빌자면, . . .my lips will glorify you.(NIV)

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입니다.’라는 말이죠.

가만히 우리의 신앙여정을 돌아보세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으로 인해 감격스러웠던 때, 입술에 넘쳤던 고백이 무엇인가요?

감사하죠!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할렐루야!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죠!

이 모든 말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저는 동산지기들과 위로 차 대만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가이드가 정말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아름다운 곳은 없습니다. 오로지 아름다운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웃으십시오.”

한국사람들은 여행 와서도 잘 웃지 않는 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주 인상적인 말을 했습니다.

대만에는 16개의 원주민 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이드가 제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한국을 단일민족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도 원주민 부족이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알고 계셨나요?

한국에는 불만족과 수면부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이 여행을 오면 여행 내내 입술을 내밀고 불평을 한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의 입술로 무엇을 고백할 것인가.

 

하나님은 우리의 고백 여부와 관계없이 일하시고 영존(永存)’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백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때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기쁨 속에 우리의 인생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내 손을 들리라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지난 청년 BTD 12기에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청년이 있었습니다. 회사의 사장이 먼저 경험하고는 한 번도 교회를 다녀본 경험이 없는 청년을 보낸 것이죠.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루를 지나면서 모르는 찬양을 따라 부르려고 애쓰기 시작했고, 찬양을 부르며 두 손이 약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참 놀라워했습니다. 어떻게 처음 영성훈련을 대하고 신앙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서 저런 반응이 나올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청년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참 이상합니다. 나는 완전히 손을 들고 찬양할 정도는 아니지만, 이 정도는 손을 들고 찬양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손을 들지 않죠?”

 

우리가 종종 찬양을 하며 손을 듭니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이 두 손을 들고 찬양 합시다!’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높여 본 경험이 있는 사람, 그리고 찬양을 부르며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본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싶은데,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은데 표현할 방법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손을 듭니다.

 

하나님! 이 손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을 알아주세요. 그리고 이 노래가 입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기를 원해요.”

 

그런 마음입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나의 신앙의 척도를 알리기 위한 것도 아니고, 남들이 하니 그저 나도 따라해야 할 것 같은 마음도 아닙니다.

 

마음의 결심이 선 것입니다.

황폐함 가운데서 육신의 곤고함 가운데서,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 성소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고, 그 분의 능력과 영광을 경험하고 나니, 그 분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된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 가운데서 다윗의 마음을 읽습니다. 저에게는 오늘 다윗의 고백이 결심으로 들립니다. 왜 다윗은 결심을 해야 했을까요?

 

늘 무너지고 넘어지는 자신의 연약함과 영혼의 곤고함을 알았기 때문이죠.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잊고, 자신의 육신을 따라 살아갈 때, 쉽게 넘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알았던 것이죠.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한, 그의 입술이 여호와를 고백하고, 그의 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들려질 때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그의 인생의 곤고한 일들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간 영혼의 궁핍함 때문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황폐한 인생, 삭막한 사막을 가로지르는 인생이 말입니다.

자신이 사막을 걷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를 사막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초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다 하나님을 잊어 버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기쁨과 결심을 유진 피터슨은 더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My lips brim praises like fountains. I bless you every time I take a breath;

My arms wave like banners of praise to you.

 

‘brim’이라는 말이 넘쳐흐르다라는 뜻입니다. ‘나의 입술의 찬양이 마치 샘이 넘쳐흐르는 것처럼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멈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찬양한다는 말이 이렇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내가 숨을 들이 쉴 때마다주님을 축복(bless)’합니다!

참 흥미롭죠?

인간이 무슨 자격으로 하나님을 축복합니까?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은, 실상은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나는 것입니다.

가장 황폐한 곳에서, 우리 인생이 소망을 잃은 곳에서 하나님 때문에 소망이 넘친다고, 마치 샘이 솟는 것처럼, 내 안에서 찬양이 흘러나온다고 고백할 때, 그 찬양이 진짜인지 거짓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두 손을 들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거짓으로 찬양할 때, 우리가 얼마나 무섭게 타락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짓 찬양이란, 우리의 환경에 의하여, 우리의 욕망에 의하여 좌우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찬양이란,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황폐한 곳에서 그 분이 행하신 일로 인하여 두 손을 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유진 피터슨은 손을 든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치 내 팔이 파도처럼 흔들린다’ (wave) ‘banners of praise’ 손을 흔드는 것 가지고는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찬양의 깃발이 흔들립니다.

깃발은 우리의 맨손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아니 더 찬양하고 싶은데, 더 높이고 싶은데 그 무엇이 필요해서 들은 것입니다. 종종 운동경기를 하며 응원도구를 가지고 나오는 사람들을 봅니다. 무언가를 더 표현하고 응원하고 싶은 열망 때문입니다.

황폐한 곳에서 주를 갈망하며, 주를 앙망하며 찬양의 손을 드는 것을 보며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누군가 보지 않겠습니까?

주를 찬양하는 깃발을 바라보며 우리가 찬양하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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