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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로부터, 예수께로. 누가복음 17:11-19

작성자길창원|작성시간20.02.29|조회수49 목록 댓글 0

2020. 03.01.

예수로부터, 예수께로.

누가복음 17:11-19
I. 본문 속으로
오늘 설교제목이 “예수로부터, 예수께로”입니다.
모든 은혜는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다. 하는 내용입니다. 모든 치유는 모든 감동은 모든 이적과 기사와 표
적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예수님 만나야 완성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얘기지요.
열 명의 나환자가 예수님을 만나 치유를 경험합니다.
아홉 명은 치유를 경험하고 세상으로 달려갔습니다.
꼭 이방인 한 명만이 치유를 경험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오늘 본문 이 모습은 은혜 입은 사람들의 축소판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이 현장의 축소판입니다.
예배 중에 감동을 받습니다. 은혜를 받습니다.

감동만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 감동을 끌어안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가 문제에 부딪힙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나게 됩니다.
질병을 만나게 됩니다.

기도하고 치유 받고 해결 받습니다.
병만 낫는 사람이 있고 고난만 해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 감사를 끌어안고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 가져서 가난하게 살던 사람들이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돌아와서 내가 왜 물질을 얻었는지, 내가 왜 건강을 얻었는지, 그 이유를 예수님으로부터 발견하고 세상을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더라.
모든 은혜는 예수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은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예수 만나야 하는 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어느 구석진 마을에 각자 살던 동리에서 쫓겨나 모여 살던 나환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가 나쁜 소문을 듣느냐? 좋은 소문을 듣느냐?

인생의 갈림길입니다.

세상 썩은 얘기, 어지러운 얘기, 우리의 영성을 혼란시키는 소식이 자꾸 들린다.
경성하셔야 됩니다. 기도하셔야 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Good news 좋은 소문입니다. 유앙겔리온. 좋은 소식 좋은 소문입니다.

내 귀에 좋은 소문이 들린다. 누가 병이 나았대. 누가 은혜를 받았대. 누가 달라졌대. 예수님이 임재하신대. 가면 은혜 받는대. 소문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12절“멀리 서서” 13절“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시고 14절“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라고 응답하십니다.

당시 한센씨병을 진단하는 사람도, 치료된 것을 확인해 주는 사람도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서 보이라”라고만 하셨지 “나을 것이다, 나았느니라”치유를 약속해 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을 붙들고 제사장에게 간다고 쉽게 마을을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지고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열 명의 나환자들은 예수님 말씀 하나 붙들고 갑니다.
그런데 보세요. 14절 하반절“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들이 마을로 들어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할렐루야.


“예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부를 때는 아직 나병환자였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말씀하실 때에도 여전히 나병환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한센씨병이 나았다는 건 오늘날도 마찬가지겠지만 그 당시엔 기적 중에 기적이지요.
죽음의 자리, 저주의 자리에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로 달려와 큰 소
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한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각자 제 길로 가버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시고 17절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주님이 찾으십니다.
한소망가족 열 명 모두 구원받은 것 아니냐? 달라진 사람은 이방인 한 사람이냐?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특밤을 통해 열 명 모두 은혜받고 감동 받은 것 아니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지난 1년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너희를 지켰다.
너희를 돌봤다. 내가 뜨거운 사랑으로 너와 함께 하지 않았느냐?
열 명 다 은혜받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 얘기입니다.

행여나 내가 그 아홉 속에 포함되어 있다면 불행입니다.
열 명 모두 큰 고통이 있었습니다.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자존감, 자신감이 다 무너졌습니다.

가야할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열 명 모두 예수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열 명 모두 치유를 받았습니다.

가다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열 명 모두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 믿고 늘 받을 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년 교회 다녀도 믿음이 성장되지 않습니다. 평생을 믿었는데 변화되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신앙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 감사하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사람, 예수 만난 사람 그에게서 변화와 성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감격이 있습니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항상 감사가 있고 언제나 기쁨이 있고 언제나 감격이 있습니다.


II. 감사의 언어
하나님 죽음의 신학자 니이체가 생전에 복음주의신학자들과 논쟁 한 적이 있습니다.
나이체의 한 마디가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입을 막아버렸습니다.
신구약성경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 곁에 예수 믿는 다는 사람을 봐라.

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냐?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하녀정도로 생각하지 않느냐?

하나님을 지팡이로 생각하는 사람들 아니냐? 언덕에 올랐기에 지팡이를 버린 사람들, 하나님을 버리고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냐?

하나님이 그들의 수단, 이용가치라면 나무토막, 돌에 절하는 사람들도 그것 정도는 믿는다.

그것이 나의 “하나님 죽음의 신학이다”라고 했답니다.
내가 변화된 삶을 보여주지 못할 때에 예수 믿는 향기가 사라졌을 때에 무신론자를
만들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 죽음의 신학자들을 만들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진짜 은혜 받았으면 예수 만나고 예수님께 돌아가는것입니다.

나 혼자 눈물 흘린다고 감동이 아닙니다. 감동은 예수님께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야 합니다. 그 감동이 내 삶을 바꾸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

리고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로부터, 예수께로”입니다.
어떤 사람들 곁에 가면 늘 불평, 불만의 악취가 드러납니다.
반면 항상 감사와 기쁨, 찬양의 향기가 더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걸핏하면 불평합니다. 기가 막히게 비난합니다.

부정적인 것을 보고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내 입이 불평을 하면, 비판과 비난을 하면 다른 사람의 귀에 전달되기 전에 제일 먼저 각인되는게 내 머리입니다.

내 뇌가 그걸 기억합니다.

한번 쌓이고 두 번 쌓이고 세 번 쌓이다 보면 이 뇌가 기가 막히게 불평체질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을 때에 불평의 언어를 정확하게 만들어 줍니다.

불평체질로 바뀌어진 뇌는 사건이 있을 때마다 기승전결 비판하는 논리가 만들어 집니다.

불평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찬송을 합니다. 감사를 합니다. 항상 격려합니다. 긍정적인 말을 합니
다. 항상 긍정적인 것을 봅니다.

생명의 능력이 거기에 더해집니다.
내가 감사하게 될 때에, 다른 사람들의 귀에 전달되기도 전에 내 귀가 듣고 내 뇌에 새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았지만 감사체질, 감사존재로 바뀌어진 사람은 기가 막히게 긍정적인 논리가 섭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긍정적인 언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말이 쌓여지면 논리가 됩니다. 말과 논리가 쌓여지면 습관이 됩니다.
습관이 쌓여지면 품성이 됩니다. 품성이 쌓여지면 영성이 됩니다.
영성이 내 인생에 명운을 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영성은 말이 쌓여져 만들어지는 인격입니다.
영성은 내 언어가 쌓여져 만들어지는 내 인격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18:21)

부정적인 혀를 놀리고 살면 부정의 열매를 먹는 겁니다.
불만의 입술을 토하고 살면 불만의 열매를 살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언어를 토하고 살면 믿음의 열매를 먹고 사는 겁니다.
긍정적인 언어를 만들어 내는 논리가 내 안에 있으면 긍정의 열매를 먹고 사는 것
입니다. 오늘 나는 내 입술의 열매를 먹고 산다. 그렇게 믿으면 틀림없습니다.
우리 곁에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성공의 언어가 있습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배후에 실패의 언어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믿을수록 교회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불행의 언어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 생활하는데도 밥 먹고 삽니다.

삽니다. 그런데 불행한 가정들이 있습니다.

그 가정에는 불행의 언어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그 사회가 감사의 언어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있습니
다.
한 공산주의자가 서구에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말끝마다 Thank you! 감사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공산사회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투쟁해서 얻은 것인데, 내가 피흘려 얻은 것인데 감사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한 신학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저주하실 때 실패와 질병과 고난으로 저주하지 않는다. 그 마음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빼앗아간다. 감사의 언어를 빼앗아간다. 감사의 마음을 빼앗아간다.”고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불평과 원망이 쌓여지고, 기쁨과 감사의 언어가 사라졌습니까?
기억해야 됩니다. 행여나 하나님이 나로부터 감사의 언어를 빼앗은 저주는 아닌지.


III.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하느냐 불평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놀라운 치유 앞에서 가는 길이 달라집니다.
성공하고 출세한 다음 발걸음이 달라집니다.
열 명의 나환자가 야호! 소리를 질렀지만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15절 16절을 보세요.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눅17:15-16)
이때 예수하신 말씀이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은 내 병이 진짜 나은거 맞나? 잠시 일어나는 예수님 말씀 들은 심리적인
작동 아닐까? 확실하게 나은 다음에 가리라. 뭔가 곱씹다가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가기는 간다. 이 모습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목욕하고 옷이라도 한벌 사 입고 아니 취직하고 출세한 다음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빠져서 못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 것 그것 가지고 감사할 일이 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면 당연히 그러고 사셨을 건데 늘상 하던 말씀 아니
야. 내가 가서 감사까지 할 게 뭐 있어? 안 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나병으로 가정에서 쫓겨날 때에 돌 던진 사람, 집안에서 모질게 말한
사람, 나를 멀리 했던 사람들 내가 낫기만 해봐라. 내가 본때를 보일 것이다.

그래서 주님 앞에 못 간 겁니다.
어떤 사람은 기분 좋다고 소고기 먹지요. 구워서 오늘도 한잔, 내일도 한잔 술독에 빠
져서 못 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얼마나 보고 싶었던 가족입니까? 가족을 만납니다. 친구를 만납니다.

갓집에 가서 장인어른 제가 나았습니다. 옛날보다 더 건강해 졌습니다.
자랑하고 다니다가 주님 앞에 못 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갔더니 집이 텅 비어있습니다. 마누라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습니
다. 그 마누라 찾아다니다 화딱지 나서 폐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은혜 받을 수 있습니다. 감동 받을 수 있습니다.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은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가 예수 만나는 겁니다. 그분이 누군지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내가 왜 이 땅에 태어났는지 알고 살아가는 겁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병 낫고 이름을 날리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
다. 수단입니다. 그것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우화적 소설「지옥의 단편」이란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날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
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한 주정꾼을 만납니다.

그는 거의 폐인과 같이 된 젊은이였습니다.

예수께서 “왜 그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주정꾼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이 걷지 못하던 나를 일으켜 걷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걸어 다닌들 무엇을 먹고살라는 말입니까. 아는게 있습니까?

기술이 있습니까? 경험이 있습니까?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습니다.”
한 여자가 창녀가 되어 남자들 사이에서 희롱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는 여자에게 말합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로 되돌아갔습니까?” 창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나를 창녀에서 건져 새 사람을 만들어준 것 같았으나, 창녀에서 발을 씻은들
무슨 행복이 있단 말입니까.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나니까 내가 진실해도 소용없더라.
세상사람 아무도 믿어주지 않더라.

나는 태어나기를 창기로 태어났구나. 다시 창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불량자가 되어서 이웃과 싸움질하고 흉터투성이입니다.
예수는 그에게 묻습니다. “어째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불량자는 예수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이 눈을 뜨게 해 준 옛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나 눈 뜨고 나니까 세상 더러워서 못 보겠다는 겁니다.

차라리 눈 감고살 때가 훨씬 좋았다는 겁니다. 나는 차라리 세상을 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예수 못 만나면 성공하고 망합니다. 건강 얻고 망합니다.
예수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IV. 예수께로 돌아가야!
1.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것이 많습니다.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날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자격이 있어 구원받았습니까? 공로가 있어 구원 받았습니까?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피 흘리시고 내 죄 다 덮으시고 담당하시고
아무런 구원받을 조건도 자격도 없는데 날 구원해 주신 하나님 앞에감사해야 합니다. 구원의 감사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2.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는구나.
좁은 구석, 왜소한 인격에, 냄새 내는 내 안에 성령님이 와 계신대요.
감사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느날 내가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되겠다.
제자들이 우리는 어떡하라구요? 내가 돌아가는게 너희들에게 유익하단다.
생각해 봐라. 내가 갈릴리에서 너희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에 예루살렘에 있는 고난
과 시련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를 만날 수 없지 않느냐.
옆집에 있는 울고 있는 저 사람이 나를 못 만나지 않겠느냐.
내가 서울에서 역사할 때에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 어떡하느냐?
내가 미국에서 너희와 함께 할 때에 주만 다르고 장소만 달라도
너희와 함께 하지 못하지 않느냐. 유럽의 형제들은 어떻게 하느냐?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요
14:16)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줄 것이다. 성령을 보내줄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 안에서 그 곁에서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니라. 할렐루야.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 곁에 계시던 그 예수님, 요한의 손을 잡았던 그 예수님, 나병환자를 어루만지던 그 예수님, 소경의 눈을 쓰다듬던 그 예수님, 죽은 자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하시던 그 예수님이 내 곁에 내 안에 함께 하십니다.

창원아 일어나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3. 예수님께서 피 흘려 세우신 교회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가 함께 예배드립니다.
말씀을 듣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나타납니다.
칼뱅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사람은 교회를 어머니로 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처럼 교회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간밤에 강사님과 저녁식사를 나누면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곳저곳 젊은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교회를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고 울화가 치밀어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를 향하여 함부로 말하고 살면 안됩니다.

교회 욕하고 그걸로 먹고 살면 안됩니다.
입술을 깨물어야 됩니다. 신학생때는 욕 좀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면 교회의 책임은 나 한테 있고 목사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로 지켜야 될 교회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교회 지켜야 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날 낳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 은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철없는 나를 두고 일찍 돌아가신 내 아버지 은혜 잊지 말라고요?
그렇습니다. 잊지 말아야 됩니다.
등록금도 제때에 못준 내 어머니 은혜 잊지 말아야 한다구요?
그렇습니다. 그분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분의 피를 타고 난 나로서는 그분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여덟살 어린나이 홀어머니 손에 맡겨진 버려진 아이와도 같았습니다.
길거리 불량배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남들이 학교 갈 때 깡통 들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남의 집 머슴살이로 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쌀 밥은 못 먹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먹였습니다.
따뜻한 옷을 입혀주지는 않았지만 어머니 눈물의 기도로 나를 입혀서 키웠습니다.

는 하나님이 지킬 거야. 하나님이 함께 할 거야.

평생을 새벽마다 울면서 기도하셨던 내 어머니, 목사가 된 다음에는 금요일이 되면
언제나 금식기도 했던 내 어머니! 그분이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살기 만만치 않았지만 밥 굶어본 적 없습니다. 옷 벗고 산 적이 없습니다.
공부하고 싶을 때 공부 못한 적 없습니다. 어찌 믿음의 내 어머니, 착하신 내 아버지 피를 타고 난 것 내 아버지 내 어머니에게 감사하며 살아야지요.
불평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한 것입니다. 이게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의지할 데가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그게 복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습니다.
여러분 잘 나서 그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가질 만 해서 가졌습니까?
누릴 만 해서 누렸습니까? 은혜 아니면 아니 되었던 일들 아닙니까?
하나님의 은혜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 돌아올 때 예수님 뭐라 말씀하십니까?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감동만 안고 살아가지 마세요. 치유만 안고 살아가지 마세요.
성공만 안고 살아가지 마세요. 주님께 돌아와야 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얘들아 내가 가라고 그랬더니 가다가 나았지. 예수님이 당신의 공로를 드러내기 위해
서가 아닙니다. 더 큰 은혜 주시기 위하여, 더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를 찾으
시는 것입니다.
조그마한 반딧물 하나를 얻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 들고 감사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등을 주셔서 험한 이 세상, 길 없는 이 세상 길 찾아다니게 하는 것입니다. 그 전등 감사할 때에 달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 헤쳐 나갈 때에 하나님이 승리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 달빛 감사하게 될 때에 햇빛을 주셔서 어디 가든지 간에 어두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고난이 떠나갑니다. 부정적인 것들이 바뀌어집니다.
그곳은 빛과 사랑이 언제나 찬란하게 넘치게 되는 햇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햇빛 보고 감사하게 될 때에 영원히 나와 함께 살자.

천국 빛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 말씀하십니다. 돌아오라. 돌아와 돌아와. 나랑 살자.
내 안에 은혜가 있다. 내 안에 모든 것 있다.
예수로부터, 예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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