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3. 08.
흔들려도 괜찮아! - 엠마오의 두 제자
무엇 때문에 흔들리고 있어요? 괜찮아요.
모두들 평생 흔들려요. 다만 그 분 앞에서 매일 수정할 뿐이죠.
우리를 제자리에 놓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13~35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흔들림의 순간에. . .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믿음이 흔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때로 우리의 인생에서 ‘흔들림’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인생에서 ‘흔들림’을 실패라고 정의하지 않고, 찾아오셔서 만나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이죠.
우리는 종종 우리들의 흔들림의 때에 절망을 생각합니다. 또한 흔들림의 순간에 하나님의 우리를 버리셨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흔들림보다 더 무서운 것은 ‘버림받은’ 느낌이 들 때가 아닐까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의 절망과 실망 가운데서 엠마오로 향하고 있던 제자들에게 주님이 다가 오셔서 동행하고 계셨다는 것이죠. 본문 13절부터 16절을 보겠습니다.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저에게는 몇 가지 상황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이 두 명의 제자가 엠마오로 가면서 서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어떤 이야기였을까요? NIV성경에 보니 14절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14 They were talking with each other about everything that had happened.
바로 직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죠. 그들이 메시아로 알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비극적인 사건 말입니다.
이들에게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절망’적인 순간이란 바로 그런 것이죠. 이해가 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때 말입니다.
그래서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의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똑같은데 서로 묻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서로 묻고 이야기하는 상황이죠.
오늘 말씀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과 풀리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었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다가오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과 동행하시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죠. 16절.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여기서 그런 의문이 듭니다. ‘두 제자’라고 하니, 열두 제자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제자’라 불릴 만큼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고, 예수님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다가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신기합니다.
문제에 함몰되는 순간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언가 집중해서 바라보면 주변 것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그들의 삶에 ‘절망’이 전제되어 있으니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라고 생각하니 부활하신 주님이 옆에 계셔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언젠가 [런닝맨]이라는 프로그램에 영화 [미션 임파서블-풀 아웃]을 홍보하기 위해 톰 크루즈, 헨리 카빌, 사이먼 페그 라는 세 명의 영화배우가 출연했습니다.
패널들과 함께 예능에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 있었는데, 중국집 배달통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죠. 그런데 거기에서 아주 경이적인 모습이 보이는데, 톰 크르즈가 배달통 안에 붙여놓은 ‘성냥개비’를 맞춘 것입니다.
사람의 집중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반대로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경이적인 일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예수님께서 동행하실 뿐 아니라, 말을 걸어오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성경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인식하지 못한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슬픔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인생에서 믿음이 흔들려 주님이 보이지 않고, 믿음이 사라져 절망의 순간에 서 있다는 것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믿음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시작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믿음이 수없이 흔들리고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간 비겁자들이 되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릴 때,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했을 때, 그들에게 확실한 믿음이 찾아왔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괜찮습니다. 지금 흔들려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 하나 붙들고 주님을 찾으며 기도하니 말입니다. 증거를 대 볼까요? 요한복음 6장을 보세요.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6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69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흔들리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만나주셨고, 약속해 주셨고, 설명해 주셨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에 대한 답은 ‘모르는 것을 알게 되었다’가 아니라, 모든 답을 아시는 주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열려진 것처럼, 주님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친절한 예수님!
참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예수님께 ‘예수님에 대하여’ 아주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죠.
십자가에서 부활까지의 이야기가 본문 18절부터 24절까지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25~27절은 이제 이들의 말을 다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이 조금 더 친절하셨으면 좋을 텐데, 25절에 보니 ‘미련하다’고 이들을 질책하십니다.
저는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보고 듣고도 믿지 못하는 것, 선지자들의 말을 지식적으로만 알았지 믿음으로 받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예수님의 답답함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요? 메시지 성경에 보니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So thick-headed! So slow-hearted! Why can't you simply believe all that the prophets said?
예수님의 답답한 마음이 묻어납니다.
또 하나, 자신들의 환경에 매몰되어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위를 환기시킬 방법으로 이들을 질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지적해주지 않으면 잘 모르는 때가 있으니 말입니다. 어쩌면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예수님의 지적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지적’이 예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는 것이죠.
27절에 보니 그들의 우매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라는 말은 맨 처음부터 설명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놀라운 신비와 신앙의 패러독스를 보게 됩니다. 31절을 보세요.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조금 전까지 이들은 예수님이 다가 오셨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눈이 밝아져’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밝아졌다는 것을 영어 성경에서는 ‘open’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고,
‘알아본다’는 말은 ‘recognize’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이 그들에게 보이지 않습니다.
옆에 계셔도 알아보지 못했던 그들의 마음에 ‘슬픔’과 ‘절망’이었는데,
예수님이 사라져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되었더니 ‘소망’이 생겼습니다. 이 소망을 32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마음이 문제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절망이었다면, 그 마음이 뜨거워지니 소망도 생기고 열정도 생기는 것이죠.
장준식 목사가 쓴 『괜찮아, 하나님이 계시니까』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고 있는 잠언서의 말씀이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마음속에 이미 들어간 것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다. 마음속에 타락한 마음이 들어가 있는데 그것을 지킨들 무슨 덕이 되겠는가.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라는 뜻이다.”
마음이 뜨거워지니 이들에게서 일어난 변화가 분명합니다. 본문 33~35절.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
조금 은유적이지만 말씀을 통해 우리는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을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는 길이 그들 인생의 하향곡선을 보여준다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은 열정으로 가득한 인생의 희망 곡선입니다.
그들이 떠나왔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엠마오로 내려가며 나누던 이야기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신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엠마오로 내려가며 그들이 하던 이야기는 ‘의심’으로 가득했다면,
제자들에게 돌아가 그들이 쏟아낸 말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 적이 있으신가요?
신앙은 피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저는 가끔 영성훈련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아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에 대하여 들으셨습니까?”
마음이 뜨거워지면, 냉랭하게 굳어 있었던 응어리들이 풀어집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고체가 녹아서 액체가 된다는 것이지요.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눈물과 콧물과 침까지 흘리는 이유가 괜한 것이 아닙니다.
변화산 때가 되면 정말 강대상에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눈뜨고 못 봐 줄 때가 많아요. 그런데 바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고는, 그런 주님과의 만남이 없이는 우리의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삶의 의욕이 생기고, 삶의 추진력이 생깁니다. 내려가던 인생이 올라가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보이지 않던 소망이 보이고, 세우지 못했던 인생의 목표들이 새롭게 세워지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황수관 박사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3대 째 예수님 믿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은 것은 많아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도 했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학교에 가서 만난 담임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보고는,
“담배 피우는 저런 죄인이 나를 어떻게 가르치나.”라고 생각을 했다는 것이죠.
눈으로는 판단이 되지만, 가슴으로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 그의 신앙이 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렇게 울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전도하기 시작했대요. 예수 믿으세요!
하루는 그렇게 지하철 안에서 전도를 하고 있었답니다. 그 당시 황수관 박사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조교를 있었는데, 전도지를 나눠 준 사람이 이화여대 의과대학 교수였답니다. 그 분이 그 전도지를 받고는 눈물을 흘리더래요. “나는 평생을 살면서 이렇게 전도 한 번 해보지 못했는데….” 그러면서 서로 소개를 하고 그 분의 소개로 연세대학교 의과 대학 교수로 초빙이 되었다는 간증을 들었습니다.
황수관 박사는 은혜를 체험하고 난 후에 그가 살아야할 인생의 목표가 뚜렷하게 생겼다고 합니다. 의사로서의 삶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목표 중에,
D. L. 무디는 죽으면서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마중 나오신다”라고 했으며,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 7:55) 라고 했는데,
자신은 죽을 때, “하늘 문이 열린다, 신바람 난다”며 죽고 싶은 소망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죽음에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에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의 소망이 생긴 사람이 어떻게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꾸지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엠마오로 가던 두 제가가 마음이 뜨거워지더니 그들의 삶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방향을 바꾸어. . .
본문 말씀 33절을 보세요.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
여러분들은 이제 펼쳐질 이들의 삶을 상상하실 수 있나요?
이들이 그대로 엠마오에 정착했다면 이전의 삶으로 육신의 편안함을 누리며 살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이 살아갈 예루살렘에서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요, 복음 때문에 협박을 받고 매를 맞으며,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삶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그렇게 살아야할 이유와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바꿀 만한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 전에는 자신들의 꿈이 무너져 내리고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얻지 못한 것 때문에 실망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왕 되신 주님, 우리에게 생명주시는 주님을 전파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가치를 발견하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된 것이지요.
찰스 스펼전 목사님은 설교 중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누가 나더러 황금면류관을 쓰고 한 나라의 제왕이 되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에게 대답하겠습니다. 그런 사소한 일을 위하여 애쓸 시간이 없다고 말입니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보다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노예가 되겠습니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겸손하며, 섬기는 삶으로 바뀌었을 지를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들은 처음 받은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살았는데, 어느새 주님을 하인처럼 부리며 살아가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그 사랑과 감격을 다 잃어버리고 엠마오로 향해 가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355장입니다.
1 부름 받아 나선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라/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2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안고 찾아가서
3 존귀 영과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후렴)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이 찬양의 가사가 아직도 여러분의 기도요 찬양입니까?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한 없이 주면서도 더 주지 못해서 가슴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목숨을 내어 놓으셨는데,
우리는 그 은혜에 빚진 자가 되어 예루살렘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셨나요?
오늘 교회의 위기는 사람들이 교회에 없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그들의 삶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인생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은혜를 모르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혹시 여러분들의 삶의 이상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 보셨나요?
여러분들이 소유한 돈, 시간, 그리고 명예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하시나요?
그 모든 것 가운데 우리를 핏 값으로 사신 주님이 계신가요?
얼마 전 태국에서 오신 강석종 선교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 25세의 나이에 와서 삶을 불사른 아펜셀러 선교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1년 만에 안식년을 찾아 고국을 찾아갔답니다. 그 때 아버지가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나보다 더 늙었구나. 이제 되었다. 나와 함께 여기서 살자꾸나.”
그러자 아펜젤러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늘나라는 미국이라고 가까운 것도, 조선이라고 먼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에서 살다 조선에서 죽어 하늘나라에 가겠습니다.”
그 후 몇 년을 더 살다가 조선에 온지 17년 되던 해, 그가 타고 목포로 가던 배가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아펜젤러 목사님은 물에 빠지지 않았지만, 물에 빠진 청년 두 사람을 건지려고 바다에 뛰어 들었다가 배와 함께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분명히 정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산 사람의 죽음은 참으로 멋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간다면 아름다운 하늘나라에서 주님의 낯을 바로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람들, 그들의 인생이 변했습니다.
오늘 마지막 시간, 엠마오로 내려가던 삶을 살던 사람이 있다면, 예루살렘으로
사명을 향해 올라가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복음에 빚진 자의 삶, 섬기는 자의 삶,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여러분들 삶에 가장 분명한 목적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