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은혜로 드디어 예정론의 최고난제 토기장이의 비유를 해석할 수 있게 되다!
칼빈주의자들은 1. 이삭과 이스마엘, 2. 야곱과 에서, 3. 모세와 바로 이렇게 그럴듯하게 정렬을 합니다. 그 후 세 가지 다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과 유기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궁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15)고 하셨는데, 바울은 바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라고 말했습니다. 앞 구절이 선택에 대한 것이고, 뒤 구절에도 절반은 같은 표현이기 때문에 실제로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을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바로는 이삭이나 야곱 형제와 다릅니다. 그 증거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6)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삭과 야곱 두 형제의 예를 들었습니다. 그 논점에 맞게 이스마엘, 이삭, 에서, 야곱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들입니다. 그러나 모세와 바로는 앞의 두 경우처럼 형제도 아니고 더구나 바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두 경우와 분명히 다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삭을 긍휼히 여기시고 선택하셨으나 이삭과 대비되는 이스마엘을 완악하게 하시진 않았습니다. 또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고 선택하셨지만 야곱과 대비되는 에서를 완악하게 하신 일이 없습니다. 게다가, 모세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은 대표적인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바로 역시 단순히 유기된 경우와 다릅니다. 최강대국 애굽의 왕이었고 하나님이 목적이 있어서 '세운' 자였습니다(17). 그러므로 바로는 앞의 두 경우와 다릅니다.
이로 보건대 바울이 18절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 때문에 제기되는 의문과 그 대답인 토기장이 비유를 그 전에 나오는 이스마엘이나 에서에게까지 소급 적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을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절대주권에 의한 무조건적인 선택이나 유기로 둔갑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한편, 본문에 나온 대로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기 위해 바로를 완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불의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9절에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않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0-21)
예지예정을 믿는 우리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영락없이 무조건적인 선택 혹은 유기에 관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토기장이 비유가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이나 유기와 무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의외로 굉장히 많습니다.
첫 번째 증거
14절의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라는 질문과 19절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가 같은 질문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14절의 질문은 야곱-에서와 관련한 질문이고 19절은 이와 경우가 다른 바로와 관련한 질문입니다.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또, 개역개정의 "허물하시느냐"는 공동번역과 표준새번역에 나와 있듯 "책망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19). 그런데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이 부분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이들은 책망을 받지도 않고 더구나 불공평하다고 느껴지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즉 바로를 완악하게 한 것에 관한 질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토기장이 비유가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토기장이 비유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 것과 관련이 있고 선택이나 유기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따라서 예정론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증거
로마서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여기에 나오는 '뜻'은, 헬라어직역성경이 번역한 대로 '계획'을 의미합니다. 거두절미하고 하나님은 누구를 지옥에 보낼 계획을 세우시지 않습니다. 그런 계획을 세우는 자는 마귀지 하나님이 아닙니다(요10:10). 누군가를 죽이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음송 가사에도 나오듯이 "선하신 분!"입니다(스3:11, 시86:5, 119:68). 하나님은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멸할 계획을 세우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19절에 나오는 "그 뜻" 즉 하나님의 계획은 예정이 아니라 '일'과 관련 있는 단어입니다. 즉 바로의 유기가 멸망이 아니라, 바로를 통해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퍼지게 하기 위한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7절도 이것을 뒷받침해줍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함이라."
오리겐이 지적한 대로 "이를 위해 내가 너를 세웠다"고 말씀한 것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구원이나 멸망이 아니라 어떠 '일'과 관련이 있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토기장이 비유는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이나 유기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세 번째 증거
바울은 21절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를,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그리고 대답해보십시오. 이것이 구원에 대한 진술입니까? 아닙니다. 그릇은 쓰임받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디모데후서 2:20-21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이처럼 '그릇'은 쓰임 즉 귀히 쓰임받을 것이냐 천히 쓰임받을 것이냐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본문은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17)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바로의 선택이나 유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쓰신 것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잠언 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이 구절의 공동번역성경을 보면 마치 바로를 두고 한 말처럼 보입니다.
"야훼께서는 모든 것을 각각 쓰임에 맞게 만드셨으니 불의한 사람은 재앙이 내리는 날에 재앙 받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토기장이 비유는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이나 유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네 번째 증거(가장 결정적인 증거)
토기장이 비유를 옳게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키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서 9장의 헬라어 원문입니다. 왜 그동안 토기장이 비유에 대한 해석이 불가능했는지 아십니까? 어이없게도 번역에 하자가 있는 성경을 가지고 계속 씨름했기 때문입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19절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구절은 흔히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무조건 유기해 놓으시고 왜 지옥에 보내시느냐?"고 항변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다른 내용입니다! 바로가 본래 완악했으므로 멸망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하나님께서 더 완악하게 하셨으니 그것까지 책망하실 수는 없는것 아니냐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절대주권에 의한 일방적인 유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근거가 있냐고요? 그 근거는 한국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가진 한국어 성경들을 일일이 살펴보았는데 어디서도 그 근거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보면 한국어 성경에 없는 'yet' 즉 1) 아직 2) 그러나 3) 하지만 4) 그런데도 5) 여전히 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고 NASB, NIV 그리고 영어확대번역성경에도 1) 아직도 2) 여전히라는 뜻을 가진 'still'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토기장이 비유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 때문에 19절의 의미가,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으므로 멸망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그 이름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더 강퍅하게 하셨으므로 그것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옳지 않느냐?'라고 항변하는 내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로 영어 성경이 최종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원문입니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찾아보
았는데, 감사하게도 '아직', '여전히'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에티'가 들어있었습니다. 바로 이 '에티' 때문에 헬라어직역 신약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면 혹자는 내게 말할 것입니다. '왜 아직도 그분은 흠을 발견하려고 하시는가? 참으로 누가 그분의 계획을 대적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아무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유기된 자들의 항변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변에 '바로의 멸망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므로 당연하다'는 의미가 깔려 있는 질문입니다. 그것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바로를 더 완악하게 한 것에 관해서만 왜 그것까지 허물하시느냐고 항변하는 내용입니다.
단지 '에티'라는 부사뿐만이 아니라 같은 절의 "참으로 누가 그분의 계획을 대적할 수 있으랴!"(개역개정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도 이런 이해가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분의 계획"("그 뜻")은 그 전에 나오는 17-18절에 기록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19절의 항변은 무조건적인 선택이나 유기가 아니라 스스로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더 강퍅케 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19절의 항변에 대한 답인 20-21절에 나오는 토기장이 비유 역시 절대주권에 의한 선택이나 유기를 옹호하고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단지, 본래 마음이 강퍅하게 한 자들을 더 강퍅하게 하여 선한 목적을 위해 쓰실 권한이 하나님께 왜 없겠느냐?는 의미일 뿐입니다.
바울은 "왜 아직도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답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부분까지 하나님이 책임을 묻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바로와 같은 자들을 그렇게 쓰실 권한이 있다는 주장으로 그 질문을 일축해버립니다.
여러분, 이것이 토기장이 비유의 의미입니다. 이 해석은 구약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바로가 처음에는 자신의 의지로 마음을 강퍅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후에 하나님의 역사로 마음이 더 강퍅해졌습니다. 이것이 명백하기 때문에 심지어 칼빈주의의 원조인 어거스틴조차 "사람들의 의지는 완전히 하나님의 권능하에 있으므로, 하나님은 마음대로 그 방향을 돌리심"이라고 허튼소리를 하다가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죄는 다른 죄에 대한 벌인 때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사도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롬9:22)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예입니다. 또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실 목적으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신다고 한 것이나(출7:3)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를 바르게 벌하시기 위해서 그들이 공포심에 사로잡혀 아이 성의 원수들 안에서 도망치게 한 것이(수7:4-5) 다 이런 예입니다."
몇 페이지 뒤에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그 의지를 마음대로 좌우하심"이라고 다시 허튼소리를 하다가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에게 불의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확고부동한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들을 유혹하신다거나, 그들의 마음을 둔하고 굳게 만드신다거나 하는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그들이 우선 악행을 했기 때문에 이런 공정한 결과를 당한다는 것을 결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른 해석입니다.
이상과 같이 설명을 통해, 여러분 모두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 하)라는 표현이 절대주권에 의한 일방적인 유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로 앞에 나오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18 상)도 절대주권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고자 하시는"이라는 공통된 표현이 보여주듯이 둘 다 같은 성격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의 이야기와 토기장이 비유뿐 아니라 로마서 9장 전체는 절대로 절대주권에 의한 무조건적인 선택과 유기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한편, 그런데도 칼빈주의자들은 예정론과 무관한 이 구절들을 오래도록 예정론의 근거인 양 사용해왔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토기장이 비유를 잘못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었습니다. 절대주권을 강조하므로 하나님을 높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명예를 추락시켰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정론을 통해 그려낸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아니라 코란에 언급된 알라와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바울이 토기장이 비유를 통해 칼빈주의의 대적을 꾸짖은 것처럼 으름장을 놓습니다. 적반하장이고 어이가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므로 절대 그들에게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로마서 9:22-23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매우 세심한 주의를 가지고 이 구절들을 연구하지 않으면 이 두 구절이 선택(긍휼의 그릇)과 유기(진노의 그릇)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그렇게 착각합니다. 만약 이것이 선택과 유기에 대해서 말한 것이라면 지금까지 한 설명들이 모두 헛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18)라는 구절에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를 쓰임에 대한 것으로 따로 분리시킬 수가 없고, 토기장이 비유는 절대주권에 의한 예정론을 설명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저는 이곳에서 벽에 부딪히고 좌절했었습니다.
그런데 올해 초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로 기가 막힌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들이 긍휼의 그릇과 진노의 그릇을 통해 선택과 유기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구절 다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결과 즉 그것이 두 그릇에 미치는 결과(또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이유나 목적)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자 덤으로, 읽을 때마다 의미가 모호했던 23절도 그 의미가 선명해졌습니다. 정말 신기하고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그럼 돌파구가 되어준 그 기가 막힌 깨달음을 여러분에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2절과 23절은 '카이'라는 접속사로 연결된 하나의 문장입니다. 개역개정은 접속사 '카이'를 "또한"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22절은 진노의 그릇의 유기를 말하고 23절은 영광의 그릇의 선택을 말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번역은 '카이'를 "이로써"라고 번역함으로 22절과 23절이 선택이나 유기가 아니라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들을 보여주는 구절임을 대번에 알 수 있게 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목적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둘이 아니라 세 가지입니다.
첫째, 열 가지 재앙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시는"(22)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첫 번째 이유요 목적입니다.
둘째,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22) 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17). 이것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두 번째 이유요 목적입니다.
셋째, 열 가지 재앙을 통해 긍휼의 그릇들에게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23). 이것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한 세 번째 이유요 목적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여기서 '영광'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로마서의 용례를 보면 '영광'이 자주 '구원'과 관련이 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로마서 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로마서 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8: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로마서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더 결정적인 증거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23). 즉 구원받을 자들인 긍휼의 그릇을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 그릇"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다"는 것은 긍휼의 그릇들에게 구원의 풍성함을 알게 해주시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의미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