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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 앞에 서다 III (김용의 선교사님의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23.12.05|조회수29 목록 댓글 0

  ▣ 십자가의 완전한 복음 앞에 서다

 

  ♣ 십자가 없이 뜨겁기만 한 믿음은 무용지물

 

  믿음에 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자기 확신'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뜨거웠나 안 뜨거웠나, 열렬한가 아닌가'로 믿음의 여부를 가늠하는 겁니다. 

 

  사기 당할 때도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에 넘어간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사기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기도 믿음이 있어야 당하는 거다 이 말입니다. '얼마나 확실하게 믿었는가, 믿을 때 마음이 뜨거웠는가'보다 중요한 건, 내가 믿은 대상과 내용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정말 믿을 만한 대상이냐는 겁니다. 믿음 만한 대상을 믿고, 의지할 만한 걸 의지해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의 생각으로 무턱대고 믿어 버리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을 만나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졌어. 그의 눈동자가 정말 진실해 보였거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은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았어. 그래서 전부 다 줘 버렸는데, 사기꾼이라고?"

 

  누가 그 따위로 믿으라고 했습니까? 믿음은 내 느낌,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마음을 수련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믿는 겁니다. '믿을 때 내게 어떤 반응이 일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떤 내용를 믿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을 믿을 때 '어떤 감동과 감격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어떤 신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느낌이 좋아도 평생을 넘어 영생에까지 전혀 도움 안 되는 우상 잡신이 아닌, 살아 역사하시며 영원한 진리 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겁니다. 변함없는 진리를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알기만 하면, 혼란스럽거나 헷갈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살아 계신 영광의 주님이 영원한 복음으로 우리를 초대하시고 십자가의 복음 앞에 세워 주셨는데, 이제는 어떻게 해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출애굽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 상징되는 사탄과 지옥의 권세로부터 구원받은 동시에 가난과 질병, 고통 같은 눈에 보이는 상황과 환경으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성취된 가장 놀라운 역사는, 나 자신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눈길에서만, 그의 악독한 채찍질에서만, 애굽에서만 벗어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애굽 땅을 나와 홍해를 건너 광야에 도착한 그들은, 눈에 보이는 바로보다 자신의 악한 심령 속에 숨어 있던 병든 옛 사람, 병든 옛 자아가 더 무섭고 지긋지긋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어도 변하지 않고 훈련해도 바뀌지 않는, 아무리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아도 감사할 줄 모르는 밑 빠진 독 같은 정욕의 구덩이 같은 나!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따라 여전히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병든 나 말입니다. 원수의 손에서는 건짐을 받았지만, 정작 내면의 대적 때문에 광야에서 주저앉아 죽은 사람이 애굽에서 죽임 당한 사람보다 더 많았습니다. 이 내면의 적을 해결하지 않는 한, 병든 옛 자아를 죽이지 않는 한, 진정한 구원은 성취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병든 옛 자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죄와 사망에서, 저주받은 상황과 환경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 옛 자아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믿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실 때 하나님은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믿어야만 약속의 땅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두말할 것 없이 완전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것을 믿는 자에게만 완전한 복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4:2)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완전한 보혈의 능력이자 사탄의 머리를 깨뜨리는 능력이며, 우리를 자유케 하는 능력의 근거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나 자신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 살아 있는 십자가 믿음을 가지라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온전한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의 입맛에 맞게 상품화된 싸구려 가짜 복음을 받아들이면, 아주 참혹하게 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정확하게 듣고 아는 것이 참된 복입니다. 내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즉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온전한 복음을 듣고 믿었다면, 그 믿은 내용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려면, 먼저 그 사람을 정말로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좋은 사람이에요. 정말 귀한 분이더라고요. 그런데 아직 결혼할 생각까지는 없네요."

 

  이는 결혼할 수 있을 만큼 믿지는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믿을 수 있는가'라는 마지막 한 줄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믿습니다, 주님! 믿어요. 아멘입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따라가지는 못하겠다면,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 보려고 용쓰느라 이러한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런 건 믿음이 아닙니다. 

 

  미국의 뉴욕에서 캐나다의 국경 쪽으로 올라가면 그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가 나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며, 한강 정도 되는 너비의 강이 거침없이 흘러가다가 갑자가 밑으로 푹꺼지는데, 높이가 자그마치 20-30층 정도됩니다. 그게 나이아가라 폭포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찰스 브랜든이라는 미국인 곡예사가 하나 있었는데, 세계 1, 2위를 다툴 만큼 서커스계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답니다. 그가 한번은 한강보다 더 넓은 나이아가라 폭포에 줄을 걸어 놓고 외줄 횡단에 도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기에 엄청나게 아슬아슬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평지를 걸어가는 것보다 더 잘 걸어다녔습니다. 결국 외줄 횡단에 성공해서 반대편에 도착하니, 기다리던 군중이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유난히 거품을 물면서 "신의 발이다, 신의 발!"이라고 하면서 엄청난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신의 경지다"라는 뜻인 겁니다. 

 

  이 곡예사가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킨 뒤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제 능력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횡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이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특히 아까 그 남자는 입에 거품을 물면서 더 큰 소리로 "그렇고 말고요, 당신은 세계 최고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곡예사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도 제 실력을 다 보여 드리지 못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지금처럼 저 혼자 건너오는 것은 평지를 걷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사실 저는 한 사람을 등에 업고도 건너갈 수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사람들이 흥분해서 소리치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특히 아까 그 남자가 가장 난리를 쳤습니다. 이제 곡예사가 그 남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럼요!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당신은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곁에서 직접 제 실력을 보실 수 있는 특권을 선생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제 등에 업혀서 함께 폭포를 건너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무슨 농담을 그렇게 심하게 하는 거요?"라고 말했습니다. 

 

  "방금 제 능력을 믿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사람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거랑 당신 등에 업혀서 저길 건너는 게 어떻게 같아?"

 

  남자는 결국 이렇게 말하면서 한 성질부리고 도망쳐 버렸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입으로만 믿는 주둥이믿음입니다. 주둥이믿음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 움직이지 않는 건, 일반 정신 수련에서도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17)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복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 진리라면, 그것을 믿는 믿음 역시 실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도 실재가 될 수 없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자기 최면이나 정신 통일을 위한 주문, 예배 시간에 신앙고백을 할 때 사용하는 기도문 따위가 아닙니다. 말 그대로 나를 살리고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복음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은 목회자나 선교사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나 침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선포해야 하는 진리이자 삶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영적 수준이 되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가장 대표적인 의식은 세례 혹은 침례입니다. 성령이 십자가의 진리를 내 안에 적용시키셔서 믿게 하신 것을 온 교회 앞에서 고백하는 세례 혹은 침례는, 쉽게 말해서 자신이 죽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 사람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정말입니다! 제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죄에 찌들어 살던 병든 자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제 이름표를 달고돌아가실 때 함께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모든 미련의 끈을 놓고 죄와 나 자신에 대해 죽은 자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거나 물로 머리를 적시는 것은 우리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 속에서 다시 일어설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로운 생명으로, 주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이 실재가 되어 삶의 주체로 작용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롬6:3-4)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본질입니다. 사실 주님은 진리를 철저히 내 것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분을 따를 수 없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9:23)

 

  주님의 성도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신부로 살아가는 영적인 삶은 십자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십자가가 실제로 내 삶의 중심에 세워지지 않고는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부인하라고 하신 '자기'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주인 되어 살아온 나, 신앙생활에서조차도 시퍼렇게 살아서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용쓰는 나, 거룩해지기 위해 애쓰는 나,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나, 내 인생의 주체인 바로 나입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엡2:1-3)

 

  주님의 십자가가 삶에서 실재가 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내 삶의 주인이 철저히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내게 필요한, 내게 도움을 주는 문제 해결사 정도로 여기는 거지, 내 삶의 주인이나 왕, 진정한 생명으로 모시지는 않습니다. 어떤 직분을 가졌고 어떤 영적 체험을 했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이 삶의 주인인 사람에게 주님은 주인이 되실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야망과 목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이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는데, 왜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까?' '똑같이 주의 일을 하는데, 왜 나는 성공하지 못할까?' 이런 갈등으로 신앙생활하는 것 역시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 홀로 있을 때 당신의 믿음은 어떠한가?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하와에게 다가와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라고 속삭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4-5)

 

  거짓말하고 훔치고 싸우고 간음하는 것은 죄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열매들입니다. 정말 무서운 죄는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 주인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 스스로 왕과 주인이 되어 병든 자아를 추구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죄의 근원입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추구하는 죄인 장아찌 같은 삶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나 혼자만 있을 때,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심심할 때,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을 자연스러운 상태로 내버려 두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자신에게 솔직히 대답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여러분 앞에 두 개의 DVD가 놓여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는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문화영화로, 주인공이 착한 일을 해서 상도 받고 행복하게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등급의 영상물이니 열심히 시청하기 바란다고 권고문까지 붙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요상한 내용의 19금 영상물로,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상영해서는 안 되고 가급적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경고문이 붉은 글씨로 적혀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고 나 혼자만 있을 때, 골치 아픈 생각들을 모두 접어놓은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 어느 쪽 DVD에 손이 가게 될까요? 문화영화입니까, 19금 영상물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을 지켜도 아무런 유익이 없고, 지키지 않아도 처벌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전과 다름없이 행동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겁니다. 법을 지키는 것도 사실은 자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이렇게 인간이란 뻣속부터 철저히 죄인 장아찌인 존재들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와 허물덩어리란 말입니다. 

 

  죄로부터, 병든 자아로부터 자유케 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병든 자아의 종노릇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문둥병이나 에이즈는 병의 진행 속도보다 발병 여부가 도 중요한 질병입니다. 한 번 걸리면 나을 소망이 없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를 열매로 보지만 주님은 죄를 존재로 다루십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5:27-28)

 

  간음이라는 행위의 결과도 심각하지만, 간음의 동기인 음욕이 더 큰 문제입니다. 경중을 따지자면 결과보다는 존재가 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다행히 피할 수 있었다 해도, 마음속에 음욕을 갖고 있는 한 상황과 조건이 갖춰지면 얼마든지 간음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자처럼 보여도 한순간에 가장 악하고 음란하게 망가질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말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살인을 못한 거지, 그동안 살인하고 싶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저는 다 압니다. 며느리를 죽이고 싶었던 게 한두 번입니까? 시어머니 돌아가시길 바랐던 며느리가 없겠습니까? 결혼한지 1년도 안 되어 연애 때 했던 약속을 깡그리 잊어버린 남편이 그만 숨 쉬기를 얼마나 바랐던가요? 

 

  열매보다 중요한 건 그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입니다. 빨갛게 잘 익은 사과를 풍성하게 수확했습니다. 아예 이파리까지 다 따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듬해에는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릴까요, 열리지 않을까요? 더 풍성하게 열릴 겁니다. 더 충만하게 말이죠.

 

  부흥회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감동받아, 그동안 묵혀 놓았던 죄와 허물을 모두 회개했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정도는 부흥회 약발이 먹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본래 성격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하면, 이전의 삶이 자동으로 반복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죄인 장아찌이기 때문에, 뿌리가 아닌 열매를 아무리 건드려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회개를 통해 죄의 열매를 제거합니다. 그런데 모태신앙인은 죄의 열매를 만들 기회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저처럼 처음부터 '내놓은' 삶을 산 사람은 삶 자체가 죄투성이지만, 모태신앙인은 극성맞은 부모 때문에 애초부터 죄를 지을 수 없는 물리적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살게 됩니다. 어디 다른 데를 가야 죄도 짓고 할텐데, 주말만 되면 예배다, 성경공부다, 교회 봉사다 해서 종일 교회에 붙들어 매놓지 않습니까? 모태신앙인은 정말 힘들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계산해 봐도 모태신앙인이 저 같은 화류계 출신보다는 죄의 열매를 훨씬 덜 맺었을 거라 이겁니다. 그중에서도 회심하기 전의 사도 바울처럼 열심이 있는 모태신앙인은, 어렸을 때부터 모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이 정도면 의인이라고 해줘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나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은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그와 정반대되는 정욕이 올라와서 날마다 매 순간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것도 끊임없어 말입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되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롬7:24)

 

 

  하나님을 떠나 죄인 장아찌가 되어 버린 비참한 운명, 죄와 사망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비극에서 벗어날 길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돌을 열심히 갈고 닦아도 보석이 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인격을 수련하고 도덕적으로 살려 애쓴다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아무리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긍정의 힘을 이용해서 부리가 닳도록 노력한다 해도, 닭은 결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근육 강화 훈련을 하고 부리를 갈고 발톱을 날카롭게 갈아도, 힘센 수탉은 될 수 있겠지만 독수리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요3:3). 거듭나지 않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존재가 바뀌지 않으면, 생명이 바뀌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고 구경조차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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