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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죄에 침묵하지 말라 (존 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19.07.04|조회수753 목록 댓글 0


  ■ 죄에 침묵하지 말라


  우리는 부활하신 왕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성경의 마지막 책에서 예수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일곱 개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그것이 이 역사 속의 교회들에게만 주신 말씀이라면 굳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씀이 성경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곧 예언적인 말씀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이 말씀은 처음 선포될 당시의 교인들만큼이나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이 현재 시제로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살펴 보자. 칭찬이든 사랑의 질책이든 우리에게 해당된다고 판단되면 겸허히 받아들여서 격려를 받을 것은 받고 고칠 것은 고치자.


  ※ 이세벨은 누구인가


  이번 장에서 우리가 초점을 맞출 역사 속의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다. 예수님은 자신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면서 말씀의 포문을 여신다(계2:18). 그분의 눈이 물질의 중심을 꿰뚫어보는 레이저빔 같고 그분의 발이 강하기 짝이 없는 좋은 주석과 같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기분 좋게도 예수님은 칭찬부터 해 주신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2:19). 보다시피 예수님은 죽은 교회가 아니라 살아서 성장하는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을 인정하고 칭찬하면서 시작하신다. 교회나 사역 기관의 죽음은 주로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식으면서 시작된다. 이 비극적인 상태에서 의의 다른 열매들이 차례로 시든다.


  바로 이것이 주님이 에베소의 첫 교회를 질책하신 이유였다. 그들은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두아디라 교회는 아니었다. 예수님은 이 교회의 사랑을 칭찬하신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를 남들을 돌보는 신자들의 공동체로 소개하시는데, 하나님의 눈에는 이것이 극도로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것이 여기서 예수님이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심지어 믿음이나 섬김, 인내보다도 먼저 사랑에 주목하신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교회는 사랑과 믿음, 섬김, 인내에서 '자라가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 신자들의 공동체는 '유지' 차원을 넘어 중요한 영역에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더욱 훈훈하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네가 나를 위해 하고 있는 일을 잘 안다. 그 사랑과 믿음, 봉사와 끈기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렇다. 대단히 인상적이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너는 더 열심이다." 예수님께 직접 이런 칭찬을 들으면 얼마나 기쁠지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칭찬이 훈계로 돌변한다.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2:20).


  이 구절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꽤 많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세벨"이란 이름부터 살펴보자. 이것이 실존 인물의 이름일까?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뉴 아메리칸 주석: 요한계시록》(The New American Commentary : Revelation)은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그리스 로마 문학에 이세벨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1세기 이후에 크리스천들이 아이의 이름을 유다로 짓지 않고 유대인들이 아이의 이름을 예수로 짓지 않는 것처럼 딸의 이름을 이세벨로 짓는 유대인은 없었다." NLT성경이 예수님의 말씀을 "저 이세벨"로 번역한 것으로 보아 그 번역자들의 생각도 같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름을 이렇게 부르는 것은 늘 웃긴 짓을 하는 사람을 "저 개그맨"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승하다. 이것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행동을 묘사한 표현이다.


  실제로 이름이 이세벨은 아니지만 이세벨로 불린 영향력 있는 실존 인물이라고 보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 여인은 영향력이 커서 적잖은 리더들이 그녀의 가르침을 따랐다. 오늘날로 치면, 그녀와 비슷한 가르침을 펼치는 한 남자나 여자 혹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경우든, 중요한 사실은 이 목회 철학이 교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 여인을 그런 이름으로 부르셨을까? 필시 그것은 그 여인의 열매가 열왕기에 기록된 고대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열매와 흡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실존 인물에 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는 그녀가 이스라엘에 미친 전반적인 영향을 살펴보자. 그는 우상 숭배자였다. 그녀로 인해 그녀의 공동체인 이스라엘 국가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리더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온 백성이 나태를 넘어 거의 혼수상태에 빠져들었다. 오직 한 사람, 엘리야만이 이 안타까운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일 배짱이 있었다.


  엘리야가 온 국가를 향해 순종과 죄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촉구할 때 이세벨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엘리야는 이세벨의 녹을 먹는 '목회자들' 즉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앞에서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했다. 이 선지자들은 엘리야 시대의 미디어 제국 황제들이요 유력 단체의 회장들이었으며 국회의원이요 법관들이었다. 온 백성이 한자리에 모였고, 엘리야는 국가의 실세들 앞에서 백성들에게 양단간의 결단을 촉구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습관적인 죄)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조용한 믿음만으로는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한다. 우리는 사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울이 그 답을 알려준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4:2).


  온 이스라엘에서 잘못을 솔직히 지적할 만큼 백성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오직 엘리야뿐이었다.


  이세벨의 권력은 리더들과 백성들에게 극심한 공포를 심어주었다. 모두가 겁을 먹고 더 이상 '여호와'를 위해 입을 열지 못하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습관적인 죄가 판을 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되었다. 신약에서도 교회 안에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그런 상황을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에 엘리야처럼 그분을 위해 담대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종인 사도 요한을 찾으셨다.


  ※ 진짜 문제


  자, 예수님이 두아디라 교회에서 육체적으로 음란을 일삼고 우상에게 바쳐진 제사 음식을 먹은 교인들을 지적하신 것일까?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왜냐하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바울이 두 교회에 보낸 편지들에서 문제 삼지 않았기 때문이다(롬14장과 고전 10장을 보라). 바울이 성령의 감화 가운데 인정한 것을 예수님이 악으로 규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한 저명한 주석서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사람들이 음란에 빠진 것에 관해, 적지 않은 주석가들이 실제로 난잡한 성행위가 있었을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판단했다. 분명 교회 안에서 그 정도는 용인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영적 혹은 교리적 외도를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뉴 아메리칸 주석 : 요한계시록)


  어떤 경우든, 예수님이 지적하신 문제는 따로 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야 할 대상은 예수님이 지적하신 문제이며, 그 문제는 바로 '용납'이다. 예수님은 "네가 용납함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용납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아오'(eao)다.《요한계시록 안내서》(A Handbook on the Revelation to John)는 이 단어를 잘 정의해 준다. "그 의미는 '허락하다', '허용하다'와 같이 긍정문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금하지 않다', '저지하지 않다', '막지 않다'와 같이 부정문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가하면 참담하기 짝이 없다. 우상 숭배(고의적인 죄)를 조장하는 가르침을 펼치는 사람, 오늘날의 경우에는 여러 사람이 교회 안에서 버젓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몇 차례 경고가 있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계2:21).


  이제 예수님은 이런 일이 계속되도록 허용하고 있는 사람들을 호되게 질책하신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신약에서 기분 좋고 희망적인 내용만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우리는 진리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세벨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현 상황은 불난 집에 비유될 수 있다. 지금 우리 모두는 불난 집에 갇혀 있는데 아무도 탈출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탈출을 돕는 사람도 없다. 지붕과 담이 시시각각 무너져 내리는데 우리가 계속해서 큰 복을 받았다는 말로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사랑을 표현하고만 있다.


  ※ 비슷한 딜레마


  사도 유다도 비슷한 딜레마를 마주했다. 유다는 믿음의 형제자매에게 구원의 경이에 관한 기분 좋은 말만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집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다는 교회에 은밀히 침범한 크립토나이트를 다루어야 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1:3-4).


  하나님의 사람 유다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유익과 복, 약속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누구나 그렇듯 유다도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유다의 딜레마가 결코 남 얘기 같지가 않다. 나도 글을 쓰거나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격려의 말'만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귀한 자녀를 파괴하려는 것을 지적하고 다루라고 성령이 우리를 촉구하고 계신다.


  따라서 유다는 믿음의 형제자매를 보호하겠다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으로 경고의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두아디라 교회의 상황과는 약간 달랐다. 목사나 리더, 신자의 탈을 쓴 이 불경한 자들은 자칭 '관대한 은혜'를 가르치고 그에 따라 살았다. 그들이 말하는 관대한 은혜는 죄를 멀리하거나 죄에서 떠날 능력을 주는 은혜가 아니라 마음껏 죄를 짓고 살게 해 주는 은혜였다. 능력을 주는 힘이 아닌 죄를 덮어 주는 담요쯤으로 은혜를 축소하면 사람들이 제멋대로 살게 된다. 즉 나약한 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타락한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니, 그런 가르침은 신자들을 크립토나이트에 노출시키는 원흉이다. 마음껏 죄를 짓고 살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취지가 아니다.


  유다는 교회 안에서 이런 작용을 하는 누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참된 목회자였기 때문에 믿음의 형제자매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왜곡된 삶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두아디라 교회의 리더들과 달리 유다는 질책하지 않고 유다는 질책하지 않고 칭찬하셨다.


  또 다른 참된 목회자 바울도 교회 안에 분열과 다툼, 부도덕, 불법, 탐욕 같은 불경한 행위가 가득한 상황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바울도 믿음의 형제자매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곳곳으로 삽시간에 퍼져나가는 누룩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주 없었다. 야고보와 베드로도 다르지 않았다.


  초대 교회 교부들의 글을 읽어보면 그들도 사도들의 본을 따라 하나님의 기록되고 선포된 말씀이라는 무기를 꺼내 교회 안에 습관적인 죄를 차단했다. 그들은 성경적인 가르침에 반하는 세상적인 개념과 논리를 공개적으로 지적하고 몰아냈다. 이세벨의 수족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이 리더들은 아랑곳없이 문화적 우상들을 허물었다! 


  ※ 침묵은 곧 동의다


  리더의 침묵은 무언의 승인이다. "당신의 행동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계속 그렇게 해도 좋소"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동의이니 말할 수 있을 때 말해야 한다는 옛 라틴 격언도 있다. 초대 교회 목회자들은 크립토나이트가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이 맡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은밀히 침투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그 크립토나이트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유독하고 치명적이며 누룩처럼 얼마나 무섭게 퍼지는지를 잘 알기에 위협과 오해를 무릅쓰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요일5:19). 이 세상에는 끊임없는 악의 흐름이 있다. 이 악의 흐름은 은밀해서 더 무섭다. 그렇다. 이 악은 '선'으로 위장하고 있다. 이 기만적인 흐름을 성경은 "이 세상 풍조"라 부른다(엡2:2).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라. 강에서 상류로 가려면 노를 저어 강의 흐름을 거슬러가야 한다. 우리는 흐름이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이 흐름은 하나님 나라의 흐름과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더 무서운 점은 '선'으로 교묘하게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침묵하는 것은 노를 던지고 흐름에 배를 맡기는 것과도 같다. 물론 배의 머리는 여전히 상류를 향하고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외향과 말은 여전히 기독교의 냄새를 풍길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시대의 윤리를 따라가며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우리는 노를 던져 두려운 것과의 직면을 피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과감히 마주해서 다루지 않는 것은 바뀌지 않는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이런 말을 했다. "악이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뿐이다." 리더들이 침묵하는 동안 신자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적 우상들은 나날이 더 강해져 간다.


  기만이 뿌리를 내리면서 처음에는 마지못해 용납하던 것이 이제는 아예 눈에 거슬리지도 않는다. 우리의 초자연적인 힘을 갉아먹는 것에 공감이 가고 심지어 끌리기까지 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반문화가 아니라 허위문화다. 여전히 '기독교'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이제는 '능력의 사자'가 아니라 '혼란의 주범'이 되었다. 주변 세상은 그런 우리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교회가 보이고 음악이 들리고 사랑과 은혜에 관한 가르침이 들리는데 도대체 전능하다는 하나님의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기독교를 표방하지만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들을 사실상 십자가의 원수로 규정한다. 그렇다. 원수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빌 3:18-20).


  첫 구절을 유심히 읽어 보라. 첫째, "여러 사람들"이 있다. 둘째, 그들이 원수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은 그들의 말이 아니다. 그들이 말로는 예수님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딛1:16). 그들은 경건한 외향으로 위장하고 있으나 행위로 원수임을 드러낸다. 그들의 행위는 정욕과 쾌락, 지위, 인기, 음욕, 험담 등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 있다.


  바울은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지적한다. 그의 서간문들을 읽어보면 우리의 불경하고 세상적인 행위에 대한 경고와 질책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이 바울의 말이 아니라 그이 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는 것이 이 견고한 진들을 허물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가 성경으로 직접 맞서지 않으면 이 철학적인 요새들이 계속해서 불신자들뿐 아니라 신자들의 정신과 마음속에 크립토나이트의 영향력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 상반된 결말


  우리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의 결론은 무엇일까? 심약한 사람들은 단단히 각오하고 들으라. 예수님은 거짓 가르침을 펼치는 자들이 회개할 때까지 "큰 환난"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하신다. 그때 모든 교회가 그분이 우리의 생각과 뜻을 꿰뚫어보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계2:22-23을 보라).


  하지만 반대로 좋은 소식도 있다. 크립토나이트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과 말씀을 굳게 부여잡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버지께 받은 것과 똑같이 온 나라를 다스릴 권세를 받게 될 것이다.


  두 결말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는가. 하나는 지독히 불행한 결말이고, 다른 하나는 놀라운 보상이다. 이래도 이런 명령을 무시하려는가? 특히, 부활하신 우리 왕의 입에서 직접 나온 명령을 흘려듣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내 삶의 크립토나이트 제거하기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압박해 침묵하게 했고, 심지어 그들중 많은 수를 죽였다. 이렇게 살벌한 시대에 오직 한 사람만 하나님을 위해 목소리를 낼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한 사람을 위해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보라. 하나님은 그를 보호하고 필요한 것을 완벽하게 공급해 주셨고 초자연적인 징조와 기사로 지원해 주셨다. 생각할수록 놀랍다.


  지금도 하나님은 과감히 나서서 진리를 선포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렇다고 해서 사사건건 비판만 하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죄인 사냥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퇴보적이고 가혹하고 편협하다는 식으로 말할까봐 두려워서 침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첫 번째 단계는 우리 스스로 이 경고에 주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아왔던 죄에서 해방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마라. 그렇게 해서 자유를 얻은 뒤에는 부지런히 죄의 위험성을 알리면서 남들도 해방되도록 도우라.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고후10:6).


  죄를 지적하기가 주저된다면 그런 용기를 낼 만큼 남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할 다음번 표적으로 삼으라. 당신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고 나면 남들도 승리하도록 도울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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