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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각종 방언의 은사 III (케네스 해긴의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19.12.26|조회수502 목록 댓글 0


  ■ 각종 방언의 은사


  ※ 공적 사역에서 방언의 은사


  방언 기도의 개인적인 기도생활 측면 외에 공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공적인 방언 사역에 사용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고린도전서 12:30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 ...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 ?"


  분명한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구절에서 개인 기도를 위한 방언의 은사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직분에 더 가까운 사역 은사인 각종 방언의 공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2:30 말씀을 문맥과 상관없이 취하여 바울이 이렇게 말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방언으로 말하지 않고서도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바울은 이 구절에서 사역 은사로서의 방언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8을 말함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고전12:28).


  사역적인 은사나 직분은 하나님에 의해 교회에 세워집니다. 그 사람들은 오중사역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29-30에서 질문을 계속 합니다.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12:29, 30).


  물론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니오"입니다.


  바울은 29절 이하에서 질문했을 때, 그 질문들은 오중사역의 은사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30절도 오중사역의 은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전서 14:27-28에서 공적인 방언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7, 28).


  헬라어로 둘, 셋이라는 단어는 인칭 대명사이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단지 두 세 사람만 예배에서 말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바울은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라고 말했습니다(고전14:29). 회중들 중에서 말할 수 있는 선지자는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예배에서는 그들 중에 두 세 사람만이 말해야 한다고 이 구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훈은 지역 교회에서 경쟁적으로 말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는 은사의 공적 사역에 관한 이런 교훈들을 주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고전14:40).


  ※ 예언은 방언과 방언 통변을 합친 것과 같다


  교회는 공적인 집회에서 누군가 방언으로 말하고, 그 방언에 대한 통변이 있을 때 덕이 세워집니다.


  바울은 예언하는 것은 방언 및 방언통변과 동등한 것인데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명백히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4:3). 바울은 또한 말합니다.


  " ...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5).


  바울은 만약 누군가 그가 방언으로 한 말을 통역한다면, 예언하는 자는 방언과 통변을 함께 하는 자보다 크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 구절에서 방언이 통변과 함께 할 때 예언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10센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5센트짜리 동전 두 개가 필요합니다. 5센트짜리 동전 두 개는 10센트가 아니지만, 그것들은 10센트와 동등하게 취급됩니다. 바울은 예언은 10센트와 같고, 방언과 통변은 5센트짜리 두 개와 같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것들은 동등합니다.


  당연히 공적 집회에서 5센트(방언)만 갖는 것보다 10센트(예언)를 갖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통변이 방언과 함께 한다면 그 둘은 합쳐져서 예언과 동등해집니다.


  내가 전에 말했듯이, 예언은 본래 설교가 아닙니다. 물론 예언은 감동받은 말이기 때문에, 간혹 설교할 때에 예언의 요소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의미에서 예언은 성령님의 뜻대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은사입니다. 만일 예언이 단지 설교라면 여러분은 설교를 준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효과적으로 설교하기 위해서 연구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2:15).


  여러분은 방언을 하거나 통변을 하기 위해서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언하기 위해서 연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옵니다. 물론 어떤 사람이 기름 부음 아래에서 설교할 때에 갑자기 그가 이전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성령의 감동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초자연적인 말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예언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방언을 말하고 통변할 때 교회는 덕이 세워집니다. 방언 통변과 함께 사용된 방언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게 사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의 실제성을 의식하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확신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고 구원받도록 합니다(고전14:22).


  ※ 공적인 모임에서 방언으로 말하기


  공적인 모임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합당할 때도 있나요?


  우리는 그에 대한 답변을 마가복음 16:17-1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6:17, 18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먼저 17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 " (막16:17).


  축사는 사적으로 행해질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공적으로도 행해질 수 있습니다(공적으로 축사가 행해지는 경우 분별이 요구됩니다). 그 동일한 성경 구절은 계속 말합니다.


   " ...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막16:18).


  병든 자에게 안수하는 것 역시 사적으로 또는 공적으로 행해질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따르는 또 다른 표적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 ... 새 방언을 말하며" (막16:17).


  다른 두 가지 표적과 마찬가지로, 방언으로 말하는 것도 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또한 때로는 공적으로도 행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적인 예배에서 방언으로 길게 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언이 통변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덕 세움을 받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단에서 조용히 방언으로 당신이 원하는 만큼 기도하는 것은 올바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덕 세움을 받기 위해서 그리로 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배 중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며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그 때에는 당신도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회중들이 방언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경배할 때, 나도 또한 참여해서 그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회중들이 기도하는 것를 그칠 때, 나도 또한 기도하는 것을 그칩니다. 내가 소리를 크게 내서 방언으로 계속해서 기도한다면 회중들이 덕 세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이 축복을 받고 덕 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것을 가장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 방언의 은사의 개인적인 작용과 공적인 작용의 차이 


  고린도전서 14:18, 19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기도의 은사로 사용된 방언과("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18절) 공적인 사역에 사용된 방언(" ...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19절) 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방언은 가르침의 은사나 설교의 은사가 아닙니다. 이것은 방언의 목적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강단에서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대신에 방언으로 말을 한다면 회중들은 전혀 덕 세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덕 세움이 되지만 듣는 사람들에게는 덕 세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회중들에게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 더 유익이 됩니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방언을 무시한 것이 아닙니다.


  " ...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이 구절에서 바울은 단지 그것이 나누어져야 했기에 그것을 나눈 것뿐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 ...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14:19).


  다른 말로 하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중들은 내가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그들의 모국어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데서 더 많은 유익을 얻을 것이다."


  모든 신자들은 개인적인 기도생활에서 방언을 통변하기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고전14:13).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을 방언으로 공적인 말을 하도록 사용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은사이고,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영적인 은사들]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11).


  모든 성령의 은사와 마찬가지로, 방언의 은사도 성령의 뜻대로만 작용합니다. 누구도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 공적인 집회에서 이 은사를 사용하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한 실수였고,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자주 실수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종 방언의 은사를 공적으로 사용하는 방법과 그 작용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훈들을 순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개인 기도생활에서 일관성 있게 방언 기도를 실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초자연적으로 비밀을 말함으로 우리의 영이 덕 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영적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뜻대로 하나님께서 방언과 통변의 은사를 통해서 그의 메시지를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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