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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방언 통변의 은사 (케네스 해긴의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19.12.27|조회수2,604 목록 댓글 0


  ■ 방언 통변의 은사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를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변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고전12:7-11).


  이제까지 성령의 은사들을 연구해 보았는데, 이제 마지막 주제인 방언 통변의 은사에 이르렀습니다.


  먼저, 우리는 세 가지 계시의 은사, 즉 어떤 것을 계시하는 은사인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및 여분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다음 세 가지 능력의 은사, 즉 어떤 것을 행하는 은사인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및 기적 행하는 은사를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것을 말하는 세 가지 발성의 은사, 즉 예언, 각종 방언 및 방언 통변의 은사에 대한 연구를 마치려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에 대한 많은 오해가 있어 왔습니다. 바울이 그러한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12:1).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무지하기를 원치 않으셨다면, 오늘날의 성도들도 무지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적 은사에 대한 무지가 있다는 것을 볼 때 놀라울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은사들 중 일부는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 중 일부만이 우리들을 위한 것이고, 그 나머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은사 중 일부가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은사들 전부가 오늘날 우리들을 위한 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성령님이 이런 은사들을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주셨다고 말합니다(고전12:7). 


  하나님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원하십니다. 영적 은사들은 우리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수단입니다. 나는 성경 어디에서도 하나님이 교회에서 영적 은사들을 제거하셨다고 말하는 부분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들 영적 은사들은 당연히 오늘날 우리들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사들에 대해서 무지한 유일한 이유는 성경이 영적인 은사들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발성의 은사인 예언, 각종 방언, 방언 통변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언급했듯이, 성경은 방언 통변과 함께 한 방언은 예언과 동등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명백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 ...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5).


  영적 은사들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의 차이를 분류하고 목록화(list)함으로 더 잘 정의 내리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세 가지 발성, 곧 영감의 은사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므로 먼저 그것들을 정의 내려 봅시다.


  예언은 우리가 아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말입니다. 각종 방언은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말하는 초자연적인 말입니다. 방언 통변은 방언의 의미를 성령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방언 통변은 방언을 번역(trandlation)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해석(interpreation)하는 것입니다.  


  ※ 방언 통변의 은사


  방언 통변의 은사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은사입니다.


  왜냐하면 이 은사는 작동하기 위해서 다른 은사, 즉 각종 방언의 은사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은사는 방언이 작동하지 않으면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방언 통변의 목적은 방언을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방언을 말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전 교회 회중들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고, 그것으로 덕 세움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 ...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5).


  그러면 하나님은 공적인 모임에서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없습니까? 아니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고 실제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방언 통변이 아닌 공적인 메시지를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받습니다. 그런 메시지들은 예언의 은사가 나타난 결과입니다. 예를 들어, 시, 찬미, 신령한 노래들은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성령님에 의해 주어진 것입니다(우리는 18장에서 이것을 논하였습니다).


  이 모든 은사들은 믿음을 통해서 작동하지만, 예언의 은사는 방언이나 방언 통변보다 더 많은 믿음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방언과 방언 통변을 하는 사람들은 그 말들을 완성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의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방언 통변의 은사를 가진 사람을 의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은 그가 받은 것을 나눠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롬12:6).


  ※ 개인 기도생활에서의 방언 통변의 은사


  개인기도에서 하는 모든 방언이 반드시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고전14:14).


  그러므로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든 것은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내가 이해하거나 통변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방언으로 하는 기도를 명백히 이해하십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고전14:2).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기도를 통변하기를 원하실 때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13에서 이런 제안을 합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고전14:13).


  우리는 개인기도 생활에서 우리가 하는 방언 기도의 내용을 알 때도 있습니다. 성령님이 뜻하시는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통변을 주십니다. 이것이 내가 처음으로 개인 기도생활에서 방언 통변을 시작한 방법입니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었을 때, 갑자기 나는 내가 모국어인 영어로 기도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고, 그 기도 내용들을 내가 통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방언기도 내용을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도 우리의 방언기도의 내용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예를 들어, 한 번은 내가 결혼을 하기 전에 영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전혀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방언으로 2-3시간을 기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 기도의 일부분을 통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나는 자연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결혼을 생각하거나 기도하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 아내에 대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당시 나는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관심조차도 없었습니다. 나는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통변하면서 영어로 기도했습니다. 방언 통변을 하면서 내가 결혼하게 될 것을 나는 영으로 알았습니다. 나는 그 당시에 지금의 아내와 한두 번 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내가 결혼할 그 처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습니다. 또한 방언 통변으로 우리가 두 명의 아이를 가질 것을 알았습니다. 첫째 아이는 남자이고, 둘째는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연히 우리는 결혼하여 첫째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고, 나는 아내에게 남자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남자 아이의 이름을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그 다음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이번에는 여자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내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연이 되기도 전에 나는 이러한 내용들을 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방언 통변의 은사에 개인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은 우리들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방언 통변의 은사에는 공적인 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공적인 면에서 사용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있을 때만 나타납니다.


  ※ 공적인 사역에서의 방언 통변의 은사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27).


  바울은 예배에서 방언으로 공적인 사역을 할 때 두 명, 많아야 세 사람이 방언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NIV 성경을 보면 더욱 명확합니다. 


  "If anyone speaks in a tongue, two-or at the most three-should speak, one at a time, and someone must interpret.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고전14:27).  


  어떤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이 구절은 세 개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실제로 우리는 성경 어디에서도 "방언의 메시지들"(messages in tongues)이라는 표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런 구문은 단지 사람이 이 성경 구절(27)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 넣은 것입니다. 더 나은 용어는 "방언의 말"(utterance in tongues)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특별한 성경 구절은 메시지들이나 말들(messages or utterances)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people)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꼭 남성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함)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 " (고전14:27).


  바울은 그들이 얼마나 많이 말을 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지 두세 사람이 말하되 차례를 따라 말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들 모두가 한꺼번에 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절은 같은 사람이 한 번 이상 말할 수도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 성경 구절을 기초로 해서 볼 때,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어떤 집회에서 만약 세 사람이 이미 공적인 방언을 하였다면 네 번째 사람은 그곳에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보충할 말이 있다 할지라도 이미 말해오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말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올바른 순서를 유지하는 방법이며, 바울이 지역 교회에서 초자연적인 말을 하기 위한 올바른 질서의 원리로 제시한 이 성경 구절(고전14:27)과 모순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 ...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라고 한 것을 주목하여 봅시다(고전14:27).


  성경 어디에도 한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그 자신이 통변하는 것을 반대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실제로 방언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그 방언을 통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혹은 그 방언을 통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 이상 더 많을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4:13에 따르면, 방언하는 자들은 방언 통변의 은사를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지니."


  바울이 여기서 방언 통변을 기도하라고 한 이유는, 방언 통변이 공적으로 쓰임받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경우 개인적으로 자신의 기도를 통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방언 통변은 그 사람의 영적인 덕을 세움에 많은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 사람을 공적으로 사용하실 뜻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런 영역에서도 기능하도록 무장이 될 것입니다.


  사실, 바울이 " ...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라고 고린도전서 14:27에서 말한 것은 경쟁적으로 통역하지 말라고 훈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두세 사람이 통변함으로 서로가 이기려고 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하고 스스로 통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 방언을 말할 때, 방언 통변의 은사로 자주 쓰임 받는 사람은 성령님이 예배에서 하시는 것에 이미 협조적인 상태에 있지 않다 하더라도 성령님의 운행하심에 즉각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 사람은 그 자신이 쓰임 받도록 해야 하며, 주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그 은사를 드러내시도록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때때로 나는 다른 누군가가 통변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중 어느 한 쪽이 방언을 통해서 주어진 메시지를 통변할 수 있었을텐데, 우리가 성령님과 협조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 메시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즉, 우리는 상대방이 그러한 일을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민감하지 않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들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때때로 우리가 메시지의 통변을 받아야 할 때 그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때로는 내가 메시지의 통변을 놓쳐 버렸을 때 내가 그 방언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다시 그것을 말해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통변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말하기 시작할 때 기름 부음이 다시 나에게 임하여 나는 다시 성령 안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은 그 방언에 대한 통변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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