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 III (변승우 목사님의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다!!!"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20.07.07조회수596 목록 댓글 0■ 10.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
(4) 새 예루살렘성은 실제인가? 상징인가?
새 예루살렘서에 대해 불분명하고 그래서 제가 궁금해하던 것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은 실제인가? 아니면 상징인가? 가 그것입니다. 이런 궁금증은 다음 두 구절 때문에 생겨납니다.
요한계시록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 21:9-11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이 구저들 때문에 새 예루살렘성은 실제 성이 아니라 교회를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새 예루살렘성이 실제로 성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과연 둘 중 어느 것이 옳을까요?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계시록에 나오는 "큰 성"이 바벨론 백성("음녀")과 바벨론 제국("큰 성")을 동시에 의미하듯, 새 예루살렘성도 성도("신부")와 도시("새 예루살렘성") 둘 다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다음 두 구절을 비교해보십시오.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로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요한계시록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자세히 보시면 둘 다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또한, 둘 다 "이리(로) 오라 ... 네게 보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그랜트 오즈번은 앞 구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부분은 21장 9절의 서론(일곱 대접을 가지고 (있는) ...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 네게 보이리라)과 똑같고, 큰 음녀와 어린 양의 신부들을 의도적으로 대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리차드 브룩스도 이렇게 썼습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고 초대하였습니다! 이 천사는 요한에게 17:1절에 나왔던 괴상망측한 음녀를 보여주었던 자였습니다. '동일한 천사로 하여금 두 환상들을 소개하게 함으로써 음녀의 도성이 멸망되는 것과 거룩한 성의 영광이 크게 대조된다.'(윌슨)"
이처럼 큰 성 바벨론과 새 예루살렘성은 각각 음녀와 신부로서 서로 대조됩니다. 그러므로 큰 성 바벨론 백성("음녀")과 바벨론 제국("큰 성")을 동시에 의미한 것처럼, 새 예루살렘성도 성도("신부")와 도시("새 예루살렘성") 둘 다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가 새 예루살렘성이 교회의 상징이냐 아니면 실제 성이냐? 라는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 때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그랜트 오즈번의 글입니다. 그는 새 예루살렘성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 성과 성도들의 관련성에 대하여 논란이 있다. 새 예루살렘은 성도들이 거하는 장소인가, 아니면 성도들 자신을 가리키는 상징인가? 튀징(Thusing 1968)은 새 예루살렘은 한 장소가 아니라 온전하게 된 사람들 자신이라고 말한다. 건드리(Gundry 1987: 256)는 '요한은 성도들의 영원한 거처에 대하여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 곧 성도들 자신을 묘사하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성도들의 미래의 집이 아니라 미래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다(Draper 1988: 42도 보라). 마운스(Mounce 1998: 382)는 이것을 고린도전서 3장 16-17절과 관련시킨다. 거기 보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성읍으로, '온전하게 되고 영원한 생태 속에 들어간 교회'를 가시화한 것이다.
그러나 ... 본문의 이미지들의 전환에 대하여 연구를 한 더치는 요한은 고통받고 있는 신자들을 미래의 복에 대한 약속으로 위로하기 위하여 악한 도시인 큰 성 바베론과 대조시키는 용도로 새 예루살렘을 선택했다고 결론짓는다. 바벨론은 성도들과 장소 둘 다 가리켰고, 이것이 본문에 대한 더 나은 대답이다. 새 예루살렘은 21장 9-10절에서는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로 보여주고, 21장 13-14절에서는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가 이 성의 문과 기초석이기 때문에 성도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21장 3절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21장 7-8절에서는 독자들이 그곳을 '상속받거나' 아니면 불못 속에 던져지거나 하므로, 또 21장 24절, 26절에서는 만국의 영광이 그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은 한 장소다. 요약하면, 새 예루살렘은 그 안에 거하는 성도들과 그들의 거처를 함께 가리키는 하늘을 표상한다."
WBC 요한계시록 주석에서 데이비드 아우내도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해석상의 쟁점은 새 예루살렘이라는 상징의 의미다. 널리 지지를 받고 있는 한 가지 통설은 새 예루살렘은 성도들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쉬슬러 피오렌자는 새 예루살렘을 성도들과 구별해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 21:2은 도성을 신부에 비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성이 신부일 수 없다. (2) 21:7은 성도들이 도성을 물려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도성일 수 없다. (3) 도성은 성도들이 거할 '장소'로 묘사된다(21:24-26)."
새 예루살렘성이 실제인가? 상징인가? 하고 묻는 것은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실제인가? 상징인가?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당연히 실제입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성도 실제라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저는 새 예루살렘성이 교회의 상징인 동시에 실제로 존재할 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성은 예루살렘성이 이스라엘의 수도이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세상 중앙이라고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에스겔 38:12 "물건을 겁탈하며 노략하리라 하고 네 손을 들어서 황폐하였다가 지금 사람이 거주하는 땅과 여러 나라에서 모여서 짐승과 재물을 얻고 세상 중앙에 거주하는 백성을 치고자 할 때에"
그런데 새 예루살렘성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요한계시록 21:15-16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측량하려고 금 갈대 자를 가졌더라.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스다디온은 190-210미터입니다. 따라서 만 이천 스다디온은 2,280-2,520킬로미터쯤 됩니다. 새 예루살렘성은 이렇게 큰 정육면체입니다. 중간 수치인 2,400킬로미터를 취하면, 이 성은 약 13,824,000,000세제곱킬로미터의 크기를 가진 성이 될 것입니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새 예루살렘성이 비현실적으로 너무 크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실제가 아니라 상징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 근처 롯데월드타워의 높이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554.5미터입니다. 그런데도 세계 6위입니다. 5위는 텐진에 있는 골딘 파이낸스 117인데 596.5미터입니다. 4위는 선전에 있는 핑안 국제금융센터인데 599.1미터입니다. 3위는 메카에 있는 마카 클록 로얄 타워인데 601미터입니다. 2위는 상하이에 있는 상하이타워인데 632미터입니다. 그리고 1위는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인데 828미터입니다. 오래전, 사람들이 이렇게 높은 건물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이런 빌딩들이 지어졌고 더 크고 높은 빌딩들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의 기준과 잣대로 천년왕국 후에 하늘에서 내려올 새 예루살렘성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보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의 건물은 사람이 지은 것이고 새 예루살렘성은 천국에서 주님의 감독하에 천사들이 지은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의 성들은 왕이나 성주가 사는 곳이지만 새 예루살렘성은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이 영원히 거하실 성입니다. 그런데도 너무 크다 할 것입니까?
(5) 만국과 땅의 왕들은 누구인가?
요한계시록 21:24-27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가리라.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여기에 보면 "만국"과 "땅의 왕들"이 나옵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요? 로버트 마운스는 이들에 대해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24절부터 26절까지에 제기된 문제(22:2와 22:15와 더불어)는, 악의 멸망과 새 하늘과 새 땅의 회복으로 특징지어지는 마지막 심판 뒤에 천상의 예루살렘 밖에 존재하는 이방인에 대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묘사된 그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데이비드 아우내의 글에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땅의 왕들이 새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온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예루살렘이 이 땅에 있으리라는 것과 아울러서 세상의 열방과 그 통치자들이 존재하리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Strathmann, TDNT 6:532). 그러므로 이 절(그리고 26절)에 의해서 소개된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인 시나리오 속에는 두드러진 비일관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9:17-21과 20:7-9은 땅의 왕들과 그들의 군대의 멸망에 관하여 말하고 있고, 21:1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4-27절을 보면 땅의 열방과 열왕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국"과 "땅의 왕들"이란 표현은 '새 하늘과 새 땅도 천년왕국과 유사한가?'라는 의문을 일으킵니다. 천년왕국 안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재앙을 당하고 벌을 받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스가랴 14:16-19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그들은 천년왕국이 끝나갈 무렵 사탄에게 미혹되어 자기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새 예루살렘성 밖에 이와 유사한 사람들이 산다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이런 의문은 다음 성구 때문에 더욱 심해집니다.
요한계시록 22: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그러면 진실은 무엇일까요? 정말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천년왕국 때처럼 악인들이 새 예루살렘성 밖에 거할까요? 그리고 세상 나라들처럼 그들에게 왕들이 있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은, "만국"이나 "땅의 왕들"은 구원받지 못한 악인들이 아닙니다. 불신자나 악인은 절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증거로 계시록 20장 끝부분에 흰 보좌 심판이 있습니다. 그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합니다(계21:1). 그리고 이기는 자만 이것들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7). 나머지는 모두 불못에 던져집니다(8).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 악인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계시록 21장 27절은 "만국"과 "땅의 왕들"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그들은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구원받은 자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럼 이들은 구원받은 신자 중 구체적으로 누구일까요? 그랜트 오즈번은 "땅의 왕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놀라운 것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가 '땅의 왕들'이라는 것이다. 이전에 그들은 짐승과 결탁하여(17:2, 18, 18:3, 9)아마겟돈으로 군대를 끌고 갔고(16:16, 19:19), 그러므로 그 군대들과 함께 멸망을 당했다(19:21). 이사야서 60장 3절을 보면, 그들은 '왕들'이고, 그래서 요한은 의도적으로 '땅의 왕들'을 강조한 것이다. 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의 자비가 어떻게 궁극적으로 악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고, 심지어는 '땅의 왕들' 가운데에서도 얼마를 구원하시는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재림 후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천년왕국 후에 임합니다. 그러므로 틀린 말입니다.
그렇다면 "만국"과 "땅의 왕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2019년 11월 6일, 저는 이 구절에 관한 모든 주석들을 읽고 정리해서 일단 설명을 완성해놓았습니다. 그러나 임시적인 것이었고 옳다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 4시경, 저는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누워 이 주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계시록 21-22장을 펴서 읽으면서 깊이 묵상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때 깨닫게 된 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휴거한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어디에 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워치만 니는 그들이 새 예루살렘성에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성 안에 있는 구원받은 사람들은 신구약시대에 주를 믿고 또 그의 보혈을 의지했던 사람들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성문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으며, 또한 그 성의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도 오래도록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열두 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열두 기초석에 열두 사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반드시 거기에 다 산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계시록 22장 14절에 의하면 휴거한 자들이 새 예루살렘성의 문들을 통하여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새 예루살렘성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 다수의 휴거된 사람들이 새 예루살렘성에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날 저는 그렇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지 그 이유들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먼저, 21장 3절에 보면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을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성을 사람이 사는 곳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불렀다는 것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또, 7절에 보면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두 구절을 비교해보면, 이기는 자가 유업으로 받는 것이 단순히 새 예루살렘성이 아닙니다. 불못에 반대되는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 전체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성 안에 휴거된 사람들이 모두 사는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24절에 보면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거주가 아니라 방문입니다.
또, 26절을 보면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거주가 아니라 방문을 뜻합니다.
그 다음, 22장으로 넘어가 보면 우리가 두루마기를 빨아야 될 이유가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두루마기를 왜 빨아야 합니까? 문들을 통해서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즉 21장에 계속 나온 것처럼 새 예루살렘성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방문할 권세를 얻기 위함입니다. 두루마기를 빨라는 말은 요한의 독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신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모두 휴거됩니다. 그러므로 휴거하는 자들에 대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의하면, 그들은 새 예루살렘성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성을 마음대로 방문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것은 21장 26절과 27절을 상기시켜줍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24절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24절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라는 말씀에 나오는 만국과 땅의 왕들이 누구냐? 였습니다. 이것이 궁금한 이유는 휴거한 모든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성에 사는 것이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산다면 궁금할 이유가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휴거한 성도들과 재림 때 회개한 성도들이 퍼져서 사는데, 그중에 왕 노릇 할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고, 그들을 가리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사야 60장이 계시록 21장의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구절들이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내용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60: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계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이사야 60:11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계21:25-26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겠고")
이사야 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똑같지요. 그래서 이사야 60장에 나오는 "만국"이 실제로 만국이고 "왕들"도 실제 세상 왕들이니, 계시록도 같은 종류의 만국과 왕들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 로버트 마운스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다가올 시대에 중생하지 않은 자들이 존재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요한이 선지자들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언어와 특징을 계승했는데, 여기에는 종말론적인 시기가 시작된 이후에도 이방인들이 땅 위에 계속해서 있을 것이라는 점이 가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예언적인 관점이란 미래를 현재의 역사적 상황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을 뜻했다. 그 외에 어떤 식으로 선지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적인 경험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을 묘사할 수 있었겠는가. 요한은 영원한 장면을 묘사하기 위해 선지자들의 환상을 사용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배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떤 요소들을 그대로 놔둔 것이다. 이것이 영원의 상태에서 '새 예루살렘의 바깥에' 만국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된다."
즉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표현하다 보니, 만국과 왕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말한 것이 아니라 그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과 백성들이 되어 사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리차드 브룩스의 견해도 이와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밝은 조명을 보고서 이방 열국과 왕들이 경의를 표하게 된다고 말하였으므로, 요한이 이 본문의 예언을 지상의 만국으로부터 모아질 구속받은 자들의 영원한 현실에 적용한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이사야 60장의 예언은 과거 이스라엘에게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재림 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재림 때 회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0장은 재림 전이 아니라 천년왕국에 대한 예언입니다. 존 마틴도 "이것은 천년왕국 때 일어날 일"이라고 했습니다. 또 19절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까지 동시에 예언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미 그 장에서 천년왕국과 새 하늘과 새 땅 때 전 세계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만국과 왕들이라는 현재적이고 일상적인 표현을 통해 예언한 것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면 계시록 21장에 나오는 만국과 왕들을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구원받은 성도 전체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땅의 왕들"이라는 표현 때문에 사람들이 더 헷갈리는 것 같습니다. '땅의 왕들이라 했으니 이 세상의 왕이 아닌가?'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년왕국도 하늘이 아니라 땅입니다. 그곳에서 성도들이 왕 노릇 할 것입니다. 계시록 5장 10절에도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라고 나와 있지 않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새 땅이니 땅이지요! 그러므로 천년왕국이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왕 노릇 할 자들을 "땅의 왕들"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땅의 왕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날 새벽, 여기까지 이해하는 것은 쉬웠습니다. 그런데 복병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14장 1-3절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구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천국입니다. 거기에 처소를 예비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즉 재림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이 예비한 처소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휴거한 성도들은 주님과 땅으로 내려와서 천년왕국 때 함께 왕 노릇 합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끝나면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성이 내려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주님이 예비한 처소가 새 예루살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새 예루살렘성에서 휴거한 모든 성도들이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거한 성도들은 다 새 예루살렘성에서 산다 이렇게 생각하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계시록 21-22장의 표현들을 꼼꼼하게 살펴본 후에, 휴거한 성도들이 모두 새 예루살렘성에 사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과 모순이 됩니다. 때문에 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그 날 새벽 한참 고민하고 씨름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까, 한 가지 해결방안이 있더라고요. 그것은 요한복음 14장 1-3절을 열두 사도들에게 한 말로 한정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 말씀은 열두 사도들에게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전에 식사하시고 세족식을 하셨습니다. 모두의 발이 아니라 열두 사도의 발을 닦아주셨습니다. 그 후 열두 사도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안에 요한복음 14장 1-3절이 있습니다. 그리고 31절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백히 열두 사도에게 한 말이지요.
우리는 이 말씀이 모든 성도들에게 한 약속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맥에 의하면 열두 사도에게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열두 사도가 누구입니까?
누가복음 22:30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들은 일반 신자가 아닙니다. 열두 보좌에 앉아서 열두 지파를 다스릴 사람들입니다. 이런 놀라운 약속을 받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것이지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의 처소를 새 예루살렘성에 예비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14장 1-3절을 이런 의미로 이해하면, 모순이 사라집니다.
새 예루살렘성이 어떤 성입니까? 하나님의 성 즉 왕의 성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그 안에 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어떻게 한 성 안에 모든 백성들이 다 삽니까? 그런 나라나 성은 없습니다. 어느 나라든 왕의 성 안에 모든 백성이 다 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왕의 성이지만 그 안에 왕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성은 우리가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성이 아닙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비교되는 큰 성입니다. 실제로는 예루살렘보다 훨씬 더 큰 성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들이 살았듯이 새 예루살렘성도 그럴 것입니다.
비근한 예로, 천년왕국 때도 예루살렘에 모든 구원받은 성도가 살지는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0:9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여기서 "사랑하시는 성"은 예수님이 계셔서 통치하실 예루살렘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에 모든 성도들이 거했습니까? "성도들의 진"이라는 말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볼 때 그렇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뿐 아니라 전 세계 여러 곳에 성도들의 진이 있었고 그곳에 퍼져서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의 예루살렘이나 천년왕국 때와 마찬가지로 새 하늘과 새 땅 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새 예루살렘성에 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왕의 성에 누가 사느냐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고관대작들이 살겠지요. 과거 실제로 그랬지 않나요? 왕성 안에 왕과 신분이 높은 귀족들이 살고, 성 밖에서 편민들이 농사짓고 살았습니다. 그처럼 새 예루살렘성은 하나님의 장막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성도들이 살게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사람들과 선지자들, 신약의 사도들과 성인들, 그리고 신앙의 위인들과 가장 탁월한 성도들이 여기에 살 것입니다. 열두 사도도 그들 중의 일부겠지요.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자들을 위해서 새 예루살렘성 안에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휴거한 모든 성도들을 위해 새 예루살렘서 안에 처소를 예비하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은 무주택자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에 그들의 집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불쑥불쑥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새 예루살렘성의 장과 광과 고가 2,280-2,520킬로미터라도 그렇지 즉 한반도의 두 배가 되어도 그렇지, 인류 역사상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어떻게 이 성 안에 다 산다는 말인가? 뭔가 조금 이상하다 이런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재림 때 회개한 천년왕국의 백성들은 새 예루살렘성을 제외한 새 하늘과 새 땅 전체를 차지하고 살고 휴거한 자들은 새 예루살렘성 안에서만 산다면, 뭔가 형평성이 맞지 않질 않나? 물론 새 예루살렘성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겠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들이 더 많은 것을 차지한 것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곤 했습니다. 이 땅에서도 닭장 같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에 지쳤는데 천국에서도 아파트 생활을 할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제가 설명한 것처럼 이해하면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억지로 끼워맞춘 해석이 아니고 자연스럽고 당위성이 매우 큰 해석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실제로 이렇게 해석할 수밖에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왜냐하면 휴거의 시기가 7년대환난 전이 아니라 재림 때입니다. 재림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천년왕국이 시작됩니다. 그 후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을 없애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 아니라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이 재림 전에 모든 성도들의 처소를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저 하늘에 만들 수 있겠습니까? 혹 예수님이 재림 전에 모든 성도들이 거할 집을 하늘에 있는 천국에 다 지어놓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내려오게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계시록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즉 새 예루살렘성 외에 황금 집과 보석 집들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또한, 새 예루살렘성의 외양뿐 아니라 내부까지 계시록 21장과 22장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새 예루살렘성이 각종 보석으로 지어졌다는 것만 나오지 그 안에 금은보석으로 된 성도들을 위한 무수한 집이 있다는 말은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점이 있습니다. 천국의 길이 뭐로 되어 있지요? 금이라고요. 틀렸습니다. 천국의 모든 길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성의 길이 순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21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각 문마다 한 개의 진주로 되어 있고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금 좋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아스팔트나 시멘트로 된 길을 걷는 것이 좋습니까? 흙길을 걷는 것이 좋습니까? 흙길을 걷는 것이 더 좋지요.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길이 좋습니다. 그래서 요즘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흙길들을 많이 만드는 추세잖아요. 그래서 저는 전에 가끔 이렇게 생각하곤 했습니다. '천국의 길은 순금이라는데 모든 길이 순금으로 되어 있으면 별로 안 좋겠다. 좋기는 하지만 운치가 없잖아! 나는 흙길을 걷고 싶은데 ...' 그러다 이번에 알았습니다. 새 예루살렘성의 길만 순금이라는 것을!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는 길들은 금 길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이것이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가 이 말을 왜 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새 예루살렘성의 성벽이나 문 그리고 길까지 자세히 기록했는데, 휴거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금은보석으로 만든 집이 그 성 안에 있다면 그것을 왜 쓰지 않았겠느냐?'고 여러분에게 묻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제가 깨달은 것처럼 새 예루살렘뿐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 전체가 휴거한 성도들과 재림 때 회개한 성도들이 흩어져서 산다고 이해하는 것이 최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