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바로 알기!
(3)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어떻게 다른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말씀'이 공통점입니다. 둘 다 말씀의 은사입니다. 이에 대해 고든 피는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여기서 지식의 초자연적 기능, 예를 들어 선지자적 전통에서 자주 일어나고 이교도의 예언자적 신탁에서 사실로 간주되는, 성령의 도움 없이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사실적 정보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단어 '로고스'를 서술하는 소유격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이것을 영감 된 가르침에 좀 더 유사한 어떤 것을 의미하여 아마 성경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기독교적 통찰과 관련 있다고 본다. 이 단어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취해진 것이며 앞선 '지혜의 말씀'과 밀접하게 묶여 있기에 어떤 면에서 이 둘은 평행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은사는 말씀의 은사라는 공통점이 있으나 서로 다른 은사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진술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8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이처럼 바울은 서로 다른 사람에게 두 은사가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두 은사가 한 사람에게 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혜의 말씀을 강하게 받으면 대개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가 따라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두 은사가 모두 임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을 사도뿐 아니라 교사라고 소개한 것과 고린도전서 14장 6절에서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라고 말한 것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곧 이 구절의 의미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나 선지자들에게는 두 은사가 세트로 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서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를까요? 앞에서 설명해 드린 대로, 지혜의 말씀은 말씀이 계시적으로 임하는 '계시'의 은사입니다(엡6:19). 반면에 지식의 말씀은 성경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연구'의 은사입니다. 하나는 계시적이고 하나는 학구적입니다. 하지만 고든 피는 저와 생각이 다릅니다. 그는 지식의 말씀의 은사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계시로서 '성령이 주신 말씀'임에 틀림없다. 이는 나중에 '계시'와 '예언' 사이에 지식이 위치한다는 점(14:6), 그리고 그것이 예언과 방언과 함께 종말에 폐해질 것이라는 사실(13:8)로 확인된다."
이처럼 그는 지식의 말씀을 계시적인 은사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혜의 말씀은 지혜가 계시의 통로가 되므로 계시의 은사가 맞지만, 지식의 말씀은 계시의 은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가 다름 아닌 고든 피가 증거로 내세운 고린도전서 14장 6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으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으로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 구절에 보면 '지식'이 '계시'와 '예언' 사이에 나옵니다. 고든 피는 계시와 예언이 계시적인 은사들이므로 그 사이에 나오는 지식도 계시적인 은사일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지만, 여기서 "계시"는 예언과 다른 계시 즉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받은 진리에 대한 계시입니다. 베드로가 증언한 대로 바울은 이런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받았습니다(벧후3:15).
그러니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직접 온다면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제일 먼저 무엇을 하겠습니까? 미래에 대한 계시를 나눌까요? 성도들에게 개인예언을 해줄까요? 아닙니다. 사도로서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받은 복음과 진리들에 대한 깊은 계시를 풀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에 나오는 '계시'는 예언과 다른 계시 즉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받은 진리에 대한 계시들을 뜻합니다.
또,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그 다음으로 나누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연구하고 깨달은 말씀들 아니겠습니까? 디모데후서 3장 15-17절이 보여주듯이 바울에게도 구약성경이 있었고 그것을 읽고 연구했으니까요. 그런데 바울은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받은 것만 '계시'라고 쓰고 지식의 말씀의 은사를 통해서 얻은 지식은 계시라고 칭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시의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혜의 말씀은 계시의 은사지만 지식의 말씀은 계시의 은사가 아닙니다.
저는 지혜의 말씀은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주시는 은사이고, 지식의 말씀은 목사와 교사들에게 주시는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제게 그런 깨달음을 주셨고 그래서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러다 후에 두 은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깨닫기 위해 주석들을 읽다가 찰스 하지의 책을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찰스 하지가 두 은사에 대해 이렇게 썼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지혜를 말하거나 전달하는 은사이다. 그리고 지식의 말씀은 지식을 전달하는 은사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지혜와 지식 간의 차이에 대해서 결정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전자는 실제적이고 후자는 사변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아주 그 반대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각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구절들이 인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지혜는 직관에 의해 인식된 것, 즉 이성에 의해 이해된 것(그들이 말하는 대로)과 관련이 있고, 지식은 이해에 의해 인식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의 효과는 영적 분별력이며, 그리고 후자의 효과는 과학적 지식, 즉 분별된 진리들의 논리적 성질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들이다. 또한 지혜는 복음, 즉 계시된 진리의 전체 체계이며, 지혜의 말씀은 그 진리체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밝히는 은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음과 같은 사항들(또는 동기들)이 이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1. 바울은 그 말을 이러한 의미로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2장에서 그는 '우리가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도 결코 발견할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계시해 오신 숨겨진 지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참조 고전2:6, 7).
2. 직임들의 배열이 여기에서 제시된 은사들의 배열과 어느 정도 부합되는 28절에서 추론될 수 있듯이 그 은사는 가장 중요한 은사로서, 또한 사도들의 특징적인 은사로서 첫 번째에 위치한다. 은사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지혜의 말씀이다. 그리고 직임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사도들의 직임이다. 비록 그것이 실행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러한 대응을 처음에 주목했어야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 이 은사는 완전히 사도들에게만 속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신약성경의 선지자들에게도 속했다. 그러므로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종종 동일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연상되고 있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엡3:5, 또한4:11도 참조하라)). 이 직임자들의 부류들 간의 특징적인 차이는 전자가(사도들) 영원하고 완전한 영감을 부여받았던 반면에 후자는(선지자들)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영감을 부여받았다는 것이었다.
지혜의 말씀과 구별된 지식의 말씀은 아마도 교사들에게 속했던 은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들이 28절에서 제시된 열거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다음에 나오고 있다. 지식의 말씀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계시된 진리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하게 나타내는 은사였다. 이것은 지식의 은사가 현재 상태에 속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13:8의 진술과 일치한다."
놀랍게도 찰스 하지는 지혜의 말씀은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주신 은사이며, 지식의 말씀은 교사들에게 주시는 은사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큰 성과입니다. 찰스 하지가 19세기 최고의 신학자라고는 하지만 신학이 계속 발전해 왔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깨달은 것과 정확히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랍기도 하고 너무 반가웠습니다.
여기서 많은 이들이 교리의 영향 때문에 지혜의 말씀을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나 그 당시 활동하던 선지자들에게 주시는 은사로 제한하는 실수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도들이 아니라 고린도교회 전체에게 보내는 편지였고 그들 가운데도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때까지 이 은사들은 계속 교회 안에 존재할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은 성경을 기록한 토대적인 사도들이나 그들과 동역한 선지자들에게만 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성경 기록과 무관한 비토대적인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당연히 지식의 말씀 역시 지금도 목사와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은사입니다.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받은 사람은 사도적인 혹은 선지자적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사도적인 설교란, 감리교에 빗대어 설명하면 웨슬리총서에 나오는 표준설교들처럼 목사와 교사들의 설교에 표준과 토대 혹은 안전한 울타리 역할을 하는 설교를 뜻합니다. 또 지식의 말씀을 강하게 받은 사람은 목사적인 혹은 교사적인 설교를 할 수 있습니다. 즉 사도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되고 정립된 혹은 분별된 토대적인 진리를 잘 배우고 소화해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잘 가르치는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두 종류의 사역자를 다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전자가 후자보다 중요하고 우리 교회의 다음 세대뿐 아니라 우리나라와 열방의 교회들을 위해 훨씬 더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아포스톨로스 즉 보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만이 이들을 택하고 연단하고 기름 부어 보내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의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받은 참 사도와 선지자들을 보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4) 두 은사에 대한 저의 이해가 옳다는 증거!
저는 지혜의 말씀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설교가 계시적으로 임하는 은사이고, 지식의 말씀은 성경과 종교서적을 읽을 때 학자처럼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은사라고 정의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그리고 오래도록 경험해 온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들이 실제로 이런 말씀의 은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진귀한 증거들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은사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
베드로는 은사를 크게 두 부류로 인식했습니다. 바로 '말씀'과 '봉사'입니다.
베드로전서 4:10-11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이 중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라는 부분을 마이클 벤트리, 박윤선, 이상근 박사님은 설교로, 퍼임 퍼킨스는 예언으로 보았습니다. 반면에 WBC 베드로전서 주석에서 램지 마이클스는 둘 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 중에서 오직 두 가지의 예, 즉 말하는 것과 봉사하는 것을 소개한다(롬12:6-8에 나오는 7가지 예와 고전12:7-11에 나오는 9가지 예와는 대조적으로). ...
'말하는 것'은 통상적인 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일 수가 없다) 예배 속에서의 권세 있는 말씀을 가리킨다. 켈리(Kelly, 180)는 베드로가 여기서 염두에 둔 말하는 것을 '가르침과 설교 같은 통상적인 기능들'('탈혼 상태에서의 말들'과 구별되는)로 제한하고 있지만, 본문에는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 이 용어는 바울이 '예언'(롬12:6), '가르침'(롬12:7), '권면'(롬12:8),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고전12:8)이라는 표현들을 통해서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할 것이다. '방언'(고전12:10)은 로기아 데우("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예배 회중에게 들려진 이해 가능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일종의 기도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고전14:2, 28). 하지만 방언의 해석은 배제되지 말아야 한다. 베드로는 바울과는 달리 말과 관련된 은사들 중 어느 것도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한 재구성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베드로가 말하고자 한 초점이 전도를 위한 선포가 아니라(예를 들어, 행4:1; 10:44; 13:42에서처럼) 예배 상황 속에서 '각각'(10절)의 신자들을 향한 말씀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옳습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말씀의 은사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제가 뭘 말하려는지 아시겠습니까? 베드로는 은사를 말씀을 포함한 말하는 은사와 봉사의 은사 두 가지로 대별했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가르치는 은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더구나 에베소서 4장 11절에 나오는 사역은사들은 모두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2장의 아홉 가지 은사를 케네스 해긴 목사님처럼 이해하면 말씀의 은사가 없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미래나 과거 혹은 현재에 대한 계시의 은사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말씀의 은사로 이해해야 합니다.
2) 고린도전서 12장에 있는 두 은사 목록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의 은사에 나오는 '말씀'은 원어로 '로고스'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로고스 즉 말씀이 말씀의 은사를 뜻한다는 증거가 뭐냐?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증거가 고린도전서 12장에 두 은사 목록이 있는데, 그 목록들 간의 대비라고 말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8-10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고린도전서 12:28-30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이 두 목록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전자는 '은사'를 후자는 은사에 따라 주어지는 '직분'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2:4-5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성령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각 사람에게 그에 맞는 직분을 주십니다. 그런데 8-10절은 은사 목록이고 28-30절은 직분 목록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빛을 던져줍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은사 목록 맨 위에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나오고, 두 번째 은사 목록 맨 위에는 "사도, 선지자, 교사"가 나옵니다. 서로 뜻이 통합니다. 왜냐하면 셋 다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에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말씀의 은사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두 은사에 대한 저의 정의가 옳다는 더 확실한 증거입니다.
참고로, 찰스 하지도 두 은사를 말씀의 은사라고 생각했으며, 그 증거로 같은 지적을 했습니다.
"직임들의 배열이 여기에서 제시된 은사들의 배열과 어느 정도 부합되는 28절에서 추론될 수 있듯이 그 은사는 가장 중요한 은사로서, 또한 사도들의 특징적인 은사로서 첫 번째에 위치한다. 은사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지혜의 말씀이다. 그리고 직임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은 사도들의 직임이다. 비록 그것이 실행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러한 대응을 처음에 주목했어야 하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 이 은사는 완전한 사도들에게만 속했다. 그러나 그것이 부분적으로는 신약성경의 선지자들에게도 속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종종 동일한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연상되고 있다('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엡2:20).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엡3:5, 또한 4:11도 참조하라)). ...
지혜의 말씀과 구별된 지식의 말씀은 아마도 교사들에게 속했던 은사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사들이 28절에서 제시된 열거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다음에 나오고 있다. 지식의 말씀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계시된 진리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적절하게 나타내는 은사였다."
참으로 깔끔하지요!
그러나 한 가지 더 설명해야 할 것은, 왜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오는 두 번째 은사 목록에 에베소서 4장 11절과 다르게 복음전하는 자와 목사는 빠지고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두 말씀의 은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에베소서 3: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이 구절들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사도와 선지자는 교회의 토대가 되는 복음과 진리들을 계시받은 말씀의 종들입니다. 그리고 교사들도 말씀의 종들입니다.
본래 성경의 장로는 모두 목사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다 가르치는 일을 잘하지는 못했습니다.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목사는 본래 잘 가르쳐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디모데후서 2:24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그러나 초대 교회는 초창기였기 때문에, 그런 목사들의 충분한 수급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목사들은 다스리는 일만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목사와 달리 교사들은 모두 잘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사도, 선지자, 교사만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들과 대비되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말씀의 은사라는 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이것은 사도와 선지자들에게 임했던 것이 계시적인 지혜의 말씀의 은사이고 교사들에게 임했던 것이 지식적인 지식의 말씀의 은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3) 큰 은사 순으로 기록한 고린도전서 12장의 은사 목록
전에 저는 윤석전 목사님이 전국 목회자세미나에서 9가지 은사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CD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윤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를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서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윤석전 목사님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에 대해 바로 보셨습니다. 둘 다 말씀의 은사로 이해하고,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기므로 그 다음이 믿음의 은사, 믿음으로 능력을 행하고 병을 고칠 수 있으니 그 다음이 능력 행함과 병 고치는 은사, 그 다음은 예언, 영분별, 방언, 방언통변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셨습니다. 그때는 제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에 대해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던 때라 '참 특이하게 설명하시는구나. 그런데 말이 되네!'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가 그 설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를 무작위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질서 있게 나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원칙을 가지고 성령의 은사를 나열했을까요?
지난 1월 4일 오전, 집에서 기도할 때였습니다. 갑자기 주님이 제게 성령의 9가지 은사에 대해 계시해 주셨습니다. 약 두 주 후(1월 20일), 수양관에 있을 때 주님은 은사에 대해 제게 추가로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후 그것을 토대로 연구한 것을 여러분에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나오는 9가지 은사는 은사가 주어진 순서대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순절 날 방언이 제일 먼저 주어졌는데, 맨 뒤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순서로 기록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큰 은사 순입니다. 바울은 은사가 다 같지 않고 더 큰 은사가 있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그렇다고 이 구절이 은사의 우월성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서로 자기의 은사가 더 크고 중요하다고 다퉜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이유입니다.
고린도전서 12: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바울이 그들의 주장에 동의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큰 은사가 있다는 말은 어떤 은사는 우월하고 다른 은사는 열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2:15-16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거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그러면 "더 큰 은사"란 무슨 뜻일까요? 즉 어떤 은사가 왜 더 큰 은사일까요? 이것은 방언과 예언을 비교한 것을 통해 드러납니다.
고린도전서 14:1-5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은 예언보다 작은 은사입니다. 반대로 예언은 방언보다 큰 은사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4:4-5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이처럼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나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웁니다. 그래서 예언이 더 큰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얼마나 덕이 되는가? 즉 유익한가? 에 따라 은사의 크고 작음이 결정됩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순으로 성령의 은사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은사는 본래 교회의 덕을 세우고 성도들을 유익케 하는 봉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린도전서 14: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베드로전서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그래서 은사를 자기를 내세우기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사랑을 따라 구하고 성도들에게 유익을 끼치기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만일 은사를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사랑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아무리 은사가 뛰어나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에 도움이 도기는커녕 도리어 해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강하게 경고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1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린도전서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들은 반드시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긴 하나 그렇다고 이것이 진리의 전부는 아닙니다. 우리는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2:28-31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여기에 "첫째", "둘째", "셋째"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첫째는 사도요"라는 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도는 이 말씀 안에 열거되는 목록 중 첫 번째로 등장하는 사역의 은사입니다. 하지만 이 사도직이 지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 은사라거나, 사도가 교회 내의 다른 사역들을 다스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사도가 교회 내의 다른 사역들을 다스려야 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은 맞습니다. 이것이 신사도운동이 착각한 부분입니다. 그들은 사도의 권위를 과도하게 강조하고 사도적 네트워크를 만들어 자기가 세우지 않은 교회들을 다스리며 십일조를 거두어들입니다. 그러나 각 교회를 다스려야 할 자들은 이 장에 "다스리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 담임목사입니다. 사도라고 담임목사도 아닌데 다른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도직이 지역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은사라거나"라는 부분은 "지역교회에서"라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라고 담임목사가 아닌데 지역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가 가장 중요한 사역은사가 아니라는 말은 틀린 말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진정한 사도라면 연단기간이라면 몰라도 사도로 세움을 받은 후에 지역교회에서 담임목사 아래 있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사도는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가장 존귀한 직분입니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항상 사도들에게 최고의 권위가 주어졌습니다(고전14:37, 엡2:20, 3:5). 그들은 실제적인 초대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었습니다(행15장 참조). 그리고 사도 다음으로 선지자, 교사 순으로 권위가 주어졌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행13:1-3). 때문에 피터 와그너뿐 아니라 이한수 교수님도 "여기에는 '첫째는', '둘째는', '셋째는'이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바울은 여기서 존귀한 것들부터 순서대로 배열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4장 11절의 순서와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첫째, 둘째, 셋째를 은사의 크기와 무관하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라는 말씀 역시 이것을 뒷받침해 줍니다. 즉 문맥에 의하면 "첫째", "둘째", "셋째"가 "더욱 큰"과 다시 말해서 "큰 은사"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둘째, 셋째를 무조건 순위나 중요성과 무관하다고 보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이상 설명해 드린 것처럼, 은사들은 서로 크기나 중요성이 다릅니다. 또한 더 큰 은사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더 큰 책임과 권위가 주어집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가장 큰 권위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고린도전서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고린도후서 10:8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히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빌레몬서 1: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사도들에게 이런 권위를 주신 것은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유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서를 위해 그리고 최대한의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주신 권위에 순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가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 중요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성 12장 28-30절에서 사역은사들을 비롯하여 은사들을 큰 은사 순으로 기록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은사 하나 하나를 크기순으로 나열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큰 은사 순으로 나열했습니다. 즉 은사를 낱낱이 크기 순으로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그룹별로 1. 말씀의 은사, 2. 기적의 은사, 3. 예언 계통의 은사 이렇게 크기순으로 나열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장 전반부에 나오는 9가지 은사는 크기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기록했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9가지 은사 역시 큰 은사 순으로 기록했습니다. 즉 성도들에게 더 유익한 은사 순으로 기록했습니다. 더 나아가 도리어 9가지 은사는 단지 그룹별로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철저하게 은사의 크기순으로 기록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면, 먼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이미 말했듯 사도, 선지자, 교사에 해당되는 목회자들이 받는 은사입니다. 이것은 양들에게 필요한 꼴을 준비하는 은사로 성도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하게 보고 맨 앞에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 바울은 믿음과 능력 행함과 병 고치는 은사를 기록했습니다. 기적을 행하는 은사들을 예언의 은사보다 앞세웠습니다. 이 은사들이 말씀을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예언보다 더 큰 은사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당연한 처사지요.
예를 들어, 구약의 선지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계시만 받은 선지자들(소선지자들)보다 기적을 함께 행한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같은 선지자가 더 큰 선지자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이들보다 엄청난 표적과 기사를 행했던 모세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더 큰 선지자로 평가를 받습니다. 두 사람이 대표로 변화산에 나타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예언, 영들 분별함, 각종 방언, 방언들 통역함 순으로 기록했습니다. 이것도 당연한 순서입니다. 예언은 방언보다 큰 은사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먼저 기록했습니다. 그 다음 영분별이 나오는데 이는 예언과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미가야와 거짓 선지자 400명의 경우가 보여주는 것처럼 예언은 성령 아니면 악령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분별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예언 다음에 영분별의 은사를 기록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다음, 방언이 없으면 통역할 필요가 없으므로 먼저 방언을 기록하고 그리고 방언통변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큰 은사 순으로 기록한 것이 맞지요!
저는 9가지 은사가 큰 은사 순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또 한 번 확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삼중사역을 통해서입니다. 어떤 분은 삼중사역이 성령의 9가지 은사와 무슨 상관이냐 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그러므로 성령의 9가지 은사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신 일을 하고 그보다 큰일을 하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신 삼중사역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삼중사역을 통해 성령의 은사가 큰 은사 순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삼중사역은 진리를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고,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것을 뜻합니다(마4:23, 9:35). 삼중사역의 첫째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둘째도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는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가장 앞에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다음 삼중사역의 셋째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뒤에 기적에 관한 은사인 믿음,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를 두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삼중사역 어디에도 영성운동에서 말하는 미래를 아는 지혜의 말씀이나 과거나 현재에 대한 정보를 아는 지식의 말씀이 없습니다. 즉 예언이 없습니다. 이 은사들은 삼중사역과 함께 쓰였습니다. 그러나 삼중사역의 핵심이 아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은 마태복음 24장이 보여주듯이 가르치는 사역에 쓰였습니다. 또 과거나 현재에 대한 계시를 주는 예언도 수가성 여인 전도가 보여주듯이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데 쓰였습니다. 그리고 네 친구가 데려온 중풍병자에게 다짜고짜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9:2)라고 말씀하시고,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있던 오래된 병자에게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5:14)고 말씀한 것에 나타나듯이 치유사역에도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은 삼중사역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삼중사역을 돕는 보조사역입니다. 때문에 병 고치는 은사 뒤에 예언과 그와 동등한 방언통변을 기록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9가지 은사가 실제로 큰 은사 순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아시겠지요!
이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은사에 초점을 맞춘 고린도전서 12장 8-10절에 나오는 9가지 은사와 직분에 초점을 맞춘 28-30절에 나오는 은사의 목록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큰 은사 순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혹은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와 일치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임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나오는 "믿음, 능력 행함, 병 고치는 은사"는 그 뒤를 잇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혹은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언, 영분별, 각종 방언과 방언통변"은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혹은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와 일치합니다.
이처럼 서로 깊은 관련이 있고 순서대로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28-30절을 통해 8절-10절에 나오는 성령의 은사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역추적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을 통해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선지자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계시를 받는 은사가 아니라 사도, 선지자, 교사들에게 주어지는 말씀의 은사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것을 통해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에 대한 저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재확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떤 분들은 왜 고린도전서 12장 28절 이하에 예언이 빠지고 없습니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이 빠지고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둘 다 사도, 선지자, 교사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언도 선지자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믿음과 영분별이 생략되어 있듯이 이미 앞에서 9가지 은사를 정확히 나열했으므로 대략 말하면서 예언을 생략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즉 제 해석을 흔들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것을 주님이 주신 계시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후에 찰스 하지도 온전히는 아니지만 이것을 어느 정도 캐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심지어 케네스 해긴 목사님도 일부 은사들을 잘못 정의하기는 했지만 9가지 은사가 큰 은사 순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성령의 은사들』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은사들은 중요도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계시의 은사 중에서 지혜의 말씀이 최고의 은사입니다. ...
세 가지 능력의 은사 중에서 믿음의 은사가 최고의 은사입니다. ...
세 가지 발성의 은사 중에서 예언의 은사가 최고의 은사입니다. ...
지혜의 말씀은 모든 은사들 중에서 최고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이 말 자체가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에 대한 해긴 목사님의 이해가 오류이고 제가 설명해 드린 것이 옳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생각해 보십시오! 성령의 9가지 은사 중 가장 큰 은사가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좋아했던 예언입니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치유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큰 은사는 지혜의 말씀입니다. 그 다음 큰 은사는 지식의 말씀입니다. 이 은사들이 큰 이유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미래를 아는 은사나 과거나 현재에 대한 계시적인 지식을 주는 은사로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그런 은사가 가장 큰 은사 즉 교회에 가장 큰 유익을 끼치는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요!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해긴 목사님이 착각한 그런 은사가 아닙니다. 둘 다 교회에 가장 필요한 말씀의 은사입니다.
4) 로마서 12장의 은사 목록에 예언이 제일 앞에 나오는 이유!
고린도전서 12장뿐 아니라 로마서 12장에도 은사 목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언이 제일 앞에 나옵니다.
로마서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 "
당혹스럽지요! 도대체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그것은 로마서 12장은 고린도전서 12장과 달리 큰 은사 순으로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순으로 기록했을까요? 궁금하시죠? 저도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1월 26일 새벽, 갑자기 주님이 그 이유를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유는 매우 간단합니다. 고린도전서 14장이 보여주듯이, 놀랍게도 예언이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주의를 요하는 은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로마서 12장의 문맥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12:3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구절은 바울이 은사에 대한 교훈을 주는 목적을 기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경계한 것처럼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믿음의 분수를 가장 많이 뛰어넘습니다. 즉 교만하고 주제넘게 행동하여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6절에서 은사들을 다루면서 제일 먼저 예언을 언급하고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입니다. 이제는 왜 예언이 고린도전서 12장과 달리 로마서 12장에성 제일 앞에 나오는지 아시겠지요!
한편, 성경이 예언에 대해 뭐라고 말했습니까?
고린도저서 13: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이곳에 나오는 "모든 비밀"에 미래에 대한 계시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큰 은사 순으로 기록한 고린도전서의 은사 목록 맨 앞에 있는 지혜의 말씀을 미래를 알려주는 은사로, 두 번째 나오는 지식의 말씀을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은사로 오해하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더 기고만장하게 만들어서 바울이 우려했던 예언의 은사의 문제점에 기름을 붓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이 그랬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은 절대로 그런 은사가 아닙니다. 또 지식의 말씀도 절대 그런 은사가 아닙니다. 둘 다 말씀의 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