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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 II (변승우 목사님의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21.02.05|조회수514 목록 댓글 0

  ■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

 

  마태복음 5:1-16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산상수훈의 서론은 마태복음 5장 1-16절입니다. 제자의 특성과 제자의 역할에 대해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의 본론은 마태복음 5장 17절부터 7장 12절까지입니다.

 

  마태복음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보다시피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이 인클루지오 구조를 이루고 있는 부분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셨습니다. 그처럼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해석하고 선지자들처럼 필요한 교훈들을 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은 마태복음 7장 13절부터 27절까지입니다. 산상수훈을 들은 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어가 생명을 얻고,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촉구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것이 산상수훈의 구조입니다.

 

  여러 해 전,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가 쓴 『제자입니까?』라는 책이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제자 즉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보여준 책입니다. 그런데 그 책보다 참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팔복입니다!

 

  약 24년 전 제가 산상수훈을 처름 설교할 때, 저는 팔복이 제자들 즉 구원받은 신자들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그 당시 몇몇 분의 글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먼저, 존 웨슬리입니다. 그분은 팔복에 대해 "산상설교에서 첫째로 참된 신앙의 전모를 8가지 조목으로 종합해서 말씀하셨다"고 썼습니다.

 

  또, 존 스토트입니다. 그는 "팔복은 특히 ... 그리스도인의 성격과 행동의 8가지 주요 특징과 이러한 특징을 나타내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축복을 강조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로이드 존즈입니다. 그는 이와 관련해서 가장 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는 팔복은 "기독교인의 본질적 성격"을 서술한 것이고, "팔복은 기독교인의 기본 면모와 특징"이고, "팔복을 모두 한 군데에 모으면 기독교인의 윤곽"이 잡히게 되어 있고, "팔복은 하나의 합성인물을 묘사한" 것인데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팔복이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성격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는 중요한 지적을 했습니다.

 

  "기독교인은 '모두'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 이것은 일부 특수 기독교인들을 서술한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일부 뛰어난 인물들의 성격을 묘사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 개개인에 대한 서술입니다."

 

  존 스토트 역시 같은 주장을 했습니다.

 

  "이러한 특징(팔복의 특징-저자 주)을 나타내는 집단은 평범한 그리스도인들과 동떨어진 영적 귀족 사회인 엘리트 집단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팔복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그리스도께서 친히 상세히 설명해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특성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특성이다."

 

  또한, 로이드 존즈는 모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팔복이 전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런 특징을 '모두' 나타내야 합니다. 이 특징은 모든 기독교인들을 위한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런 특징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런 특징을 또 어떤 사람은 저런 특징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해야 하게' 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애통해야 하게' 되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화평케 해야 하게' 되어 있다는 말은 가당찮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이 모든 특징을 동시에 나타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기독교인에게 어느 특징이 다른 특징보다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직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불완전성 때문인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마침내 완성에 이를 때에는 이 모든 특징들을 완전하게 나타낼 것입니다. ... 제가 강조하고 있는 점은 우리가 이 모든 특징을 함께, 동시에 나타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팔복은 하나의 완전한 전체이므로, 이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존 스토트도 이에 대해 동의합니다.

 

  "팔복은 그리스도의 백성들의 균형 잡힌 다채로운 성격을 나타낸다. 이것은 여덟 개의 분리된 서로 다른 제자들의 집단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온유하며, 어떤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핍박을 견디라는 요구를 받았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동시에 온유하고 궁휼히 여기며,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하며, 애통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화평케 하고, 핍박을 받는 똑같은 집단의 여덟 가지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박윤선 박사님은 마태복음 주석에서 "팔복에 참예한 사람들(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썼습니다.

 

  오래전 저는 이분들의 글을 통해서 팔복이 그리스도인들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이것을 이렇게 자세히 소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팔복에 대한 이런 놀라운 견해가 제가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저 개인의 독선적이고 이상한 주장이 아닙니다. 안심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해석입니다.

 

  한편, 팔복이 이런 것이라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널리 퍼진 거짓 구원론 때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로마서 10장 9-10절에 의거해서 신앙고백을 하고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팔복이 구원받은 자에 대한 묘사라는 것은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기는 자가 가는 나라!」라는 설교를 처음 들었을 때와 같은 충격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여부에 대해 "당신은 이기는 자인가?"와 같은, 또 다른 질문 "당신은 팔복의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필연적으로 낳기 때문입니다.

 

  로이드 존즈는 이 점을 정확히 간파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산상수훈을 강해하면서 세 번이나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들 서술(팔복에 대한 설명-저자 주)은 분명히 성경의 어느 것보다 더 분명히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사이에 근본적이며 절대적인 차이를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정작 우리의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산상설교를 고려해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사람의 행실을 서술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의 핵심은 기록교인과 비기독교인과의 이 같은 차이점에 있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이 점을 절대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대의 여러 가지 사태를 관망해 볼 때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본질적 차이에 대한 이해입니다. 이 같은 이해가 무디어져 있습니다. 즉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오므로 교회는 세속화 되었습니다. 한계가 분명치 않아졌습니다."

 

  "팔복의 말씀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일반적 서술을 살펴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인과 본질상 얼마나 다른가를 아셨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들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소속되어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요 주가 되시는가?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이런 자질들을 나타내고 있는가?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고 있는가?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작정되어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참으로 복된 자인가? 우리는 행복한가? 우리는 가득 채워졌는가? 우리는 평화를 얻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총 서론에서 우리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라고 여러분들께 질문을 던졌습니다. ...

 

  '우리의 상태는 어떠합니까?'라는 질문은 간단한 질문입니다. 팔복에 대한 우리의 즉각적 반응에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가 정확히 판별될 것입니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해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서 우리가 찾아내어야 할 것은 팔복의 증거가 그에게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캇 맥나이트 역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복 받을 사람을 나열한 이 목록을 처음 들은 사람이라면, 즉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과연 내가 이 목록에 포함될까?'

 

  팔복은 하나님 왕국의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급진적인 선언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누가 그 왕국의 백성이고 누가 아닌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팔복이 단지 윤리적인 교훈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얼마나 사활적으로 중요한지 아시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팔복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필연적으로 야기시킵니다.

 

  '나는 과연 팔복의 사람인가? 팔복이 과연 나의 마음과 삶의 특징인가? 즉 나는 마음이 가난한가? 나는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인가? 나의 마음은 온유한가? 나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가? 나는 긍휼히 여기는 자인가? 내 마음은 청결한가? 나는 화평케 하는 자인가? 나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인가?'

 

  이것은 모두 사활적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확히 깨닫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24년 전에 팔복이 그리스도인의 초상화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이것을 계속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것이 가능한 해석 중의 하나인 줄 알았습니다. 그 해석이 유익하니 괜찮다고만 생각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말한 팔복이 실제로 정확히 그런 의미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지내오다가 양용의 교수님의 『마태복음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비롯해서 산상수훈에 대한 세계적인 학자들의 책들을 읽고, 그것이 가능한 해석이 아니라 팔복의 의미 그 자체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엄청난 차이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선택과 필수의 차이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막연히 '팔복의 사람이 되어야지' 했던 우리를 필사적이 되게 합니다. 팔복의 가치와 중요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입니다.

 

  또, 은혜받고 도전받는 것은 한 주나 길어도 한 달을 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팔복이 곧 그리스도인의 초상화라는 것을 철두철미한 검증을 통해 배우고 확신하게 되면 그 말씀이 평생 우리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평생 그 말씀에 붙잡혀 "나는 팔복의 사람이 되어야 해"라는 마음을 갖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가 될 확률이 수직 상승합니다. 너무너무 중요하지요!

 

  그래서 저는 팔복이 그리스도인을 묘사한 것이 맞는가에 대해서 더 철저하게 확인하고 검증해드리길 원합니다. 감사하게도, 이에 대한 증거는 매우 많고 게다가 결정적입니다.

 

  1) 마태복음의 문맥

 

  산상수훈은 팔복으로 시작되고 그 첫 번째 복은 심령의 가난입니다. 그러나 팔복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심령의 가난부터 시작하면 안 됩니다. 즉 산상수훈 연구를 팔복으로부터 시작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산상수훈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 연구는 마태복음 5장 3절이 아니라 마태복음 4장 17절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이것이 산상수훈 특히 팔복을 이해하는 키가 되는 구절입니다. 스캇 맥나이트는 이 구절이 "산상수훈 전체를 떠받드는 주춧돌이며, 예수님의 말씀 전체를 밀고 나가는 동력"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비로소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외치기 시작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외침을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 중 일부가 회개하고 천국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마태복음 5장 1절에 나오는 "제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들은 예수님이 약속하신 천국을 얻었습니다(마4:17). 그래서 예수님이 팔복의 첫 번째와 마지막 복에서 그들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우리가 바르게 정립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팔복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회개한 자들이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회개하고 구원받은 사람은 팔복의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팔복이 구원받은 사람을 묘사한 것이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맞지요!

 

  한편, 이것은 왜 교회 안에 팔복의 사람이 이렇게 적은가? 그 이유를 알게 해줍니다. 왜 많은 이들이 자신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데 팔복의 사람들이 아닐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왜 많은 이들이 가짜일까요? 그것은 바로 설교자들이 회개를 외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중들이 믿는다고 하지만 회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잘 보십시오. 세례요한은 먼저 회개를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예수님도 먼저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마태복음 4:17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또, 베드로와 12사도도 회개를 외쳤습니다.

 

  마가복음 6:7, 12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사도행전 2:37-3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한, 사도 바울도 회개를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26:19-20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하라 전하므로"

 

  그런데 요즘 회개를 강력하게 외치는 설교자가 몇이나 됩니까? 거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가짜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앵무새처럼 "오직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믿음만 강조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또, 사도 바울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사도행전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또한, 성경에 나오는 누구도 믿음만 외치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회개와 믿음을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 증거가 바로 다음 구절입니다.

 

  히브리서 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 도의 초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회개와 믿음은 초대 교회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본들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공동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넘어서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새번역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서, 성숙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초대 교회의 모든 설교자들이 회개와 믿음을 외쳤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슬로건인 "오직 믿음"을 외치고 정통인 체해도 회개하라고 외치지 않는 설교자는 진짜 정통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사 인격이 훌륭하다 해도 참 종이 아닙니다. 그는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일뿐입니다.

 

  그러니 생각해보십시오. 산상수훈을 배울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팔복에 나오는 심령의 가난이 아닙니다.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입니다! 즉 내가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실제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자동적으로 팔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해야 팔복의 사람이 됩니다. 회개를 않고 팔복의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팔복으로 자기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누구든 팔복의 사람이 아니라면 참 회개를 안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에 의거해 볼 때, 팔복의 사람은 단지 회개만 한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믿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그런데 이 구절에 나오는 "복음"은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입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태복음 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천국 복음'은 회개를 강력히 촉구하는 복음입니다(마4:17).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그 뜻대로 살라고 촉구하는 복음입니다(마7:21).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회개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천국 복음에 대해 오늘날 너무도 많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마치 과도기적인 복음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후 바울이 로마서를 쓴 후로는 칭의의 복음이 천국 복음을 대신한다는 근거도 없는 막연한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이신칭의"라는 표현이 이런 착각을 더 부채질합니다.

 

  이것은 미혹입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 복음은 폐해지지 않았고 폐해질 수도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본문 5장 17-20절에 의하면 율법도 폐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이 폐해질 수 있겠습니까?

 

  또,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히1:1-2).

 

  또 그는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진리를 구약의 율법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히2:1-4).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그날까지 천국 복음을 포함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이 유효할 것으로 보셨습니다(마28:18-20).

 

  심지어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한 대로 세상 끝날까지 천국 복음은 절대 폐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은 천국 복음과 다른 복음이 아니라 천국 복음을 더 구체화한 것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즉 칭의의 복음의 시작이 천국 복음이고 천국 복음의 완성이 칭의의 복음입니다. 둘은 결국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칭의의 복음이 아닌 천국 복음이 세상 끝날까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전한 복음과 바울이 전한 복음은 서로 모순이 되지 않습니다. 일치하고 조화를 이룹니다. 때문에 김세윤 교수님은 『칭의와 성화』라는 탁월한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이 불트만과 융엘이 생각했던 식의 단순한 차원을 넘어 더 깊은 차원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 상응한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바울의 칭의의 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인 표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논증할 명제입니다. 바꿔 말하면 바울의 칭의론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틀로 이해해야 왜곡함 없이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개신교 전통에서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무관하게 해석하다 보니 칭의의 의미를 편향적으로, 또는 왜곡해서 이해했습니다. 그 결고 칭의론은 의인으로서의 삶이 없으면서도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교리, 심지어 의인으로서의 삶을 방해하는 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대다수 개신교들은 믿음을 윤리와 분리해서 이해하고, 윤리는 없어도 믿음만 있으면 자신들이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비극의 가장 근본 원인입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칭의의 복음을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구원론적 표현으로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자세히 설명할 마음은 없습니다.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그 책 93-194페이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간단하고 쉽게, 성령께서 제게 가르쳐주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하실 때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의 내용을 자세하게 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음 성구가 그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16:12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예수님이 이때 다 말씀하지 않은 이유는 예수님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12사도들이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진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21-22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마가복음 9:30-32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누가복음 18:31-34 "예수께성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하면 경기를 하고 손사레를 쳤습니다. 도무지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1-8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이처럼 십자가와 부활의 도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에서 칭의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부활은 더 못 믿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에 의한 칭의의 복음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왜 예수님이 지금은 제자들이 감다할 수 없다고 하셨는지, 그리고 칭의의 복음을 그때 설명하실 수 없었는지 이해가 되시지요!

 

  예수님은 당시 십자가와 부활에서 비롯되는 의롭다 함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단지 회개와 주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천국 복음을 전하는 데서 그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13-14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여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

 

  이것은 12사도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당연히 바울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즉 제자들이 감당할 수 없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못한 것을 오순절 이후 성령님께서 12사도와 특히 바울에게 자세히 계시하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을 핵심으로 한, 즉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함으로 죄에 대해서 죽고 성령에 의해 하나님에 대해 살아남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칭의의 복음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복음과 칭의의 복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같은 복음입니다. 서로 모순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천국 복음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고 천국 복음의 그 폼 혹은 틀 안에서 복음의 내용을 더 구체화시키고 가득 채운 것이 칭의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전한 천국 복음과 바울이 전한 칭의의 복음은 결국 하나입니다(참조. 마24:14).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할 때 하셨던 것처럼 칭의의 복음을 전할 때 오직 믿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외쳐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복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해야 합니다. 제자가 지불해야 할 대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칭의의 복음은 천국 복음에서 무엇인가를 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천국 복음의 틀 안에서 더 자세히 그리고 가득 채운 것이 칭의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너무너무 애석하게도, 교회들이 이 중요한 것을 놓쳤습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왜곡된 구원파적인 거짓 복음이 많은 교회들 안에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경고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속히 미혹에서 깨어나 구원파적인 거짓 복음에서 벗어나십시오! 회개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복음은 예수님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들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아도 믿고 시인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 역시 예수님과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 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짓 복음을 전파하여 수많은 영혼들을 멸망의 넓은 길로 인도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도 이 설교를 통해 정신을 차리고 자신과 배우자와 자녀와 부모 형제들의 영혼을 위해 앞으로는 절대 거짓 복음을 전하는 맹인 인도자들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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