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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나는 애통하는 자인가? (변승우 목사님의 "나는 팔복의 사람인가?" 중에서)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21.02.15|조회수644 목록 댓글 0

   ■ 나는 애통하는 자인가?

 

  마태복음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이라는 슬로건으로 종교개혁을 한 후, 교회 안에 회개를 도외시하고 믿음만 강조하는 이상한 풍조가 생겨났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우는 자들 즉 애통하는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저는 존 스토트의 지적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중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때때로 죄를 경시하는 것을 염려한다. 우리가 죄를 아무리 슬퍼해도 지나치지 않다."

 

  본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것이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들은 다시 애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1) 애통의 구체적인 의미

 

  많은 학자들이 누가복음 6장에 근거해서 애통을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로 해석합니다. 일례로, 스캇 맥나이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애통하는' 자는 그들 자신이 겪는 비극과 불의, 죽음 때문에 애도하며, 타인이 불의, 죄, 악, 비극, 죽음을 경험할 때에도 애도와 연민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 자신도 고통을 겪지만, 고통을 겪는 타인까지도 사랑한다. ...

 

  이 복의 의미는 이들이 애통하는 이유에 달려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애통하는가? 포로 상태에 있는 혹은 억압을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 때문에?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불의 때문에? 그 땅에 사랑과 평화, 거룩함, 정의가 부재하기 때문에? 아니면 매우 많은 사람이 주장하듯이,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가?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면 역사적 상황을 조사해야 한다. (이사야서 40-66장이 제시하는 소망의 흐름 속에 포함된) 이사야 61:1-4로 시작하자. ...

 

  - 성구 생략 -

 

  이 본문은 애통하는 자들이, 이스라엘 민족의 포로 상태와 그들 각자의 포로 상태 모두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들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한다."

 

  이처럼 애통을 불행한 환경 때문에 애통하는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반면에 데이비드 터너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들은 다양하고 많은 불행들 때문에 애통하지만, 여기서 애통하는 가장 가능성 있는 이유는 죄 ...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 중 어느 것이 옳을까요? 저는 후자라고 확신합니다.

 

  본문의 '애통'은 누가복음과 달리 가난과 불행으로 인한 애통이 아니라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에 사로잡혀서 애통하는 것입니다(고후7:10). 그 증거는 다음 세 가지입니다.

 

  ● 팔복의 가난의 특성

 

  팔복의 첫 번째 복인 가난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에서 그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입니다. 그렇다면 애통도 같은 성격의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싱클레어 퍼거슨이 이것을 잘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생활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묘사하는 가난이란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영적인 가난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묘사하시는 슬픔도 자기 죄에 대한 인간의 애통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실망시킨 일에 대한 후회입니다."

 

  ● 팔복의 순서

 

  마태복음 5:3-4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처럼 애통은 심령의 가난 다음에 나옵니다.

 

  애통이 어디에서 생겨납니까?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집니까? 아닙니다. 심령의 가난에서 생겨납니다.

 

  이미 설명해 드렸듯이, 가난한 마음은 자기의 죄와 내적 부패를 깊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해지면 자연스럽게 애통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이에 대해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그의 성결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응시해 볼 때 나는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봅니다. 내가 나의 영의 상태를 볼 때, 이것은 즉각 나를 애통하게 합니다. 내가 그와 같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애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더 이상 오만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가난함에 대한 인식과 함께 애통이 시작됩니다. 가난한 마음은 애통한 마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심령의 가난 뒤에 나오는 애통은 일반적인 애통이 아닙니다.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이사야 66장 2절과의 병행

 

  " ...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팔복의 첫째와 둘째는 물론이고, 제가 믿기로는 세 번째 복까지 이 구절의 순서 그대로입니다. 이 구절에서도 '가난'이 마음의 가난이고, 가난과 마찬가지로 "심령에 통회"하며 라고 했습니다. '통외'("몹시 뉘우치다")는 일반적인 애통이 아니라 죄로 인해 애통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애통이 죄 때문에 애통하는 것을 의미함이 분명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이사야 6장을 보십시오.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하고 거룩하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사6:5)라고 말하며 애통해 했습니다.

 

  누가복음 7장의 여인을 보십시오. 그 여인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38).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를 보십시오. 그는 아버지께 돌아오기 전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18)라고 고백했습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있는 세리를 보십시오. 그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3)라고 고백하며 부르짖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오순절 날 회심한 3천 명도 마음에 찔림을 받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2:37)라고 탄식하며 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 7장을 보십시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자기의 죄를 깨달은 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7:24)고 울부짖었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우리를 애통으로 인도하고, 애통은 우리를 참된 회개와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그런데 영접기도를 따라했을 뿐 죄 때문에 애통하며 회개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절대 그런 분이 되지 마시고 애통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말을 듣고 어떤 분들은 "저는 이미 애통했고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애통하는"은 현재시제로 되어 있고 계속적인 용법입니다. 애통은 한 죄인이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자마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후에도 계속됩니다. 이에 대해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개심에 있어서도 그러할 뿐 아니라 기독교인에게 계속되는 일입니다. 그는 죄책이 자기에게 있음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이것 때문에 낙심하고 애통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이번에는 그를 그리스도에게 돌아가게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는 순간 주님의 평화와 행복이 돌아오며 그는 위로를 받습니다. 이처럼 여기에는 즉각 가득 채워질 그릇이 있는 셈입니다.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으며 행복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인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생활입니다."

 

  일례로,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자기 죄로 인해 절규하듯 애통해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고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여전히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위험이 있습니다.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뿐 아니라 거듭나고 죄의 지배에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성 때문에 그는 탄식합니다.

 

  로마서 8:22-23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그러므로 죄로 인해 애통은 거듭난 후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평생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한때 애통하는 자였던 사람이 아니라 평생 애통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애통의 또 다른 의미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와 내적 부패 때문에 애통합니다. 거듭난 후에도 평생 애통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자기 죄 때문에만 애통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죄 못지않게 부모와 형제, 배우자, 자녀, 친지, 친구, 이웃 등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에스겔 9: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오늘날 우리나라와 열방의 교회들의 현실을 보고 우리도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사람과 같습니다. 때문에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같은 것을 봅니다. 기독교인은 사회 상태와 세계 상태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리고 신문을 읽으면서 그가 보는 것에, 그리고 그것에 혐오감을 표하는 것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 때문에 애통합니다. ... 그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의 도덕적 혼란과 인류의 불행과 고통을 보면서 세상의 상태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는 온 세상이 불건전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음을 봅니다. 그는 이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며 이 때문에 애통합니다."

 

  이 점은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예레미야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빌립보서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7-8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이렇듯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 때문에 애통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애통합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그들의 구원을 위해 상한 심령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그러므로 자문해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런 애통이 있습니까?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왜냐하면 그런 사람만이 팔복의 사람 즉 참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오직 그런 사람들만 그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값싼 눈물이 아니다.

 

  여기서 제 얘기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성 프랜시스 같은 교회 안의 우는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죄 때문에 회개하며 울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감사해서 울고, 다른 이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울며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부러웠습니다. 제가 좀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울며 기도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 귀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김옥경 목사님을 만나게 해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겪어본 결과, 잘 운다고 다 김옥경 목사님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캐더린 쿨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도꼭지를 틀어서 물을 흘러내리듯이 매우 쉽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남자와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에 내가 배운 것은 눈물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투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질투하는 사람이 최초로 사용하는 무기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내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는 것이 속임수에 지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한 무기로 삼는 경우가 있음을 나도 알고, 먼저 그것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기 연민(self-pity)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엽게 느끼면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며, 어느 누구로부터도 동정을 받으려고 노력해온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눈물만큼 의미가 없는 것은 없다'는 사실과 '눈물만큼 의미가 있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줄곧 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눈물을 흘리고 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음 구절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7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에서가 눈물을 흘림며 구해도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시지 않은 이유는 그의 목적이 축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죄를 슬퍼한 것이 아니라 축복을 잃어버린 것을 슬퍼했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구했습니다. 그 결과 회개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에 속지 않으십니다. 요엘 선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엘 2:12-13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울기만 하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즉 마음을 찢는 상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토마스 왓슨은 이런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눈물이 없어도 슬픔은 있을 수 있다. 겉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마음에 가득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중시하시는 것은 우는 눈보다 상한 마음이다."

 

   베니 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감정적이거나 육체적인 애통을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주님 앞에서 깨어진 마음을 갖는 영적인 애통이었다. 다윗은 또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했다(시51:17). 다윗은 통회자복했으며 죄로 인해 깨어진 마음을 갖고 있었다."

 

  놀랍게도, '애통'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통'의 원어는 "펜데오"인데 "슬퍼하다, 애통하다"라는 뜻입니다. 더구나 '애통'(哀痛)의 사전적인 의미는 우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고 가슴 아파함"입니다. 비근한 예로,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21:27-2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이 중 27절을 다른 성경들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새번역 "아합은 이 말을 듣고는, 자기 옷을 찢고 맨 몸에 굵은 베 옷을 걸치고 금식하였으며, 누울 때에도 굵은 베 옷을 입은 채로 눕고, 또 일어나서 거닐 때에도 슬픈 표정으로 힘없이 걸었다."

 

  현대인의성경 "그는 엘리야의 말을 듣자 자기 옷을 찢고 몸에 삼베를 두르고 금식하며 삼베를 걸친 그대로 잠을 자고 다닐 때에도 암울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다녔다."

 

  보십시오. 아합은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옷을 찢을 뿐 아니라 마음을 찢었습니다. 상한 마음으로 애통했습니다.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어떤 죄를 지었어도 괜찮습니다.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상한 마음으로 회개하며 나아가면 아합을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여러분을 긍휼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울지만 말고 상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회개하므로 용서받고 변화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애통하는 자들이 받을 하늘 위로!

 

  예수님은 사람들의 통념을 깨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복된 이유는 앞으로 그들이 받게 될 '위로' 때문입니다.

 

  그럼 애통하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위로를 받게 될까요?

 

  그것을 말씀드리기 전에 정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팔복을 읽어보면, 5장 3절과 10절의 약속 진술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로 같은 내용이고 현재 시제를 사용한 반면, 그 사이 4-9절에 나오는 약속 진술들은 미래 시제를 사용했습니다. 3절과 10절에서 현재 시제를 사용한 이유는 천국이 가까이 왔고 제자들이 이미 그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4:17). 또한, 인클루지오 구조를 통해 그 사이 4-9절에 나와 있는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들이 천국 즉 구원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더글라스 헤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확약은 가난한 자들과 핍박받는 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10절), 아홉 개의 복 선언의 주요부분을 괄호로 묶어주며, 아마도 아홉 가지의 복 모두에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팔복 단락은 하늘나라 주제로 감싸인(3절, 10절) '인클루지오' 구조를 통해 그 전체 초점이 하늘나라에 맞추어져 있음을 강력히 시사해준다."

 

  또한, 싱클레어 퍼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처음과 끝에 나오는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절과 10절)입니다. 4-9절은 위로(4절)와 땅을 기업으로 받음(5절)과 배부름(6절)과 긍휼히 여김을 받음(7절)과 하나님을 봄(8절)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9절)인데 예수님은 이 여섯 가지의 특별한 복을 언급함으로써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축복을 더 자세히 설명하고 예증해줍니다."

 

  이외에도 많은 학자들이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 진술들은 1번째와 8번째 복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1번째와 8번째 복에 대한 약속 진술과 달리 현재시제가 아닌 미래시제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들은 미래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 즉 궁극적인 구원을 뜻합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이기는 자들에게 한 약속과도 같습니다. 계시록 시리즈 설교 때 자세히 설명해드린 바와 같이, 그것은 모두 궁극적인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표현은 달라도 모두 궁극적인 구원을 뜻합니다. 팔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팔복의 약속 진술들도 모두 궁극적인 구원을 뜻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계시록 2-3장의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왜 중요했습니까? 그것을 이해해야 이기는 자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구원론의 정수가 되는 진리가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성도들에게 반드시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활적으로 중요하고 강력한 교훈을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팔복도 정확히 그러합니다. 우리가 1번째와 8번째 복의 인클루지오 구조를 통해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 진술들이 궁극적인 구원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팔복은 한낱 윤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깨달으면, 팔복이 윤리 도덕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를 묘사한 것이라는 것이 밝히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팔복의 사람이 되면 좋지만 안 되도 그만이 아니라 필히 되어야 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해지고, 팔복의 메시지는 좌우에 날선 검이 됩니다. 그래서 심령을 찌르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4-9절의 약속이 미래 시제로 되어 있는 것의 의미를 더 자세히 알아야 합니다. 그 약속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에 대한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이 미래시제라는 것에 근거하여 그것을 미래적인 의미로 해석합니다. 예를 들어,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썼습니다.

 

  "'인클루지오' 구조를 형성하는 처음 복(3절)과 마지막 복(10절)의 귀결절들의 경우 그 시제가 공히 현재인데 반해, 다른 귀결절들의 경우 그 시제가 모두 미래다. 만일 여덟 개의 복이 모두 하늘나라와 연관된 것이라면, 이러한 귀결절들의 시제상 차이는 하늘나라의 시간적 긴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인클루지오'를 형성하는 귀결절들은 제자가 현재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특권을 언급하고 있는 데 반해, 다른 귀결절들은 하나님 나라가 보장하는 미래적 보상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8번째 복에 대한 약속은 현재시제이고,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은 미래시제이므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고 깔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해석에 반대할 마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1번째와 8번째 복에 의한 인클루지오 구조에 의거,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들이 현재와 미래 즉 이미의 구원과 아직의 구원 둘 다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헤르만 리델보스도 저와 생각이 같습니다.

 

  "4절 이후에 나오는 복들의 하반절에 천국의 복이 미래시제로 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3절과 10절에는 분명히, 천국은 이미 예수님께서 복 있다고 선언하시는 사람들의(현재적-역자주) 소유물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4절 이하의 말씀 속에 담긴 예수님의 말씀의 진의는 이러한 소유가 하늘에 이미 저장되어 있다는 것만은 아니다(참조 12절). 오히려, 최초의 구원의 현시는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하여 지상에 현존하며(11:1-6; 12:26; 눅17:21) 그것은 심지어 사람들이 손을 뻗치면 닿을 만한 곳에 있다는 것이다(11:12)."

 

  그래서 저는 2-7번째 복에 대한 약속 진술들이 이 세상에서 현재 누릴 이미의 구원과 미래에 누릴 아직의 구원 둘 다를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춰서 각 복에 대한 약속 진술들을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를 그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해드리고자 합니다.

 

  ● '이미' 차원의 위로

 

  애통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받을 위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아더 핑크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은혜로운 약속은 첫째로, 하나님의 위로로 말미암아 즉각적으로 뒤따라오는 참된 회심에 의해(즉, 회심보다는 뉘우침과 회개가 먼저다) 성취된다. 다시 말하면, 양심이 견디어 낼 수 없는 죄책에 대하여 깨닫게 되는 죄의 부담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또한, 존 스토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18세기 아메리칸 인디안의 선교사였던 민감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데이빗 브레이너드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회개인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고후7:10)을 더욱더 체험해야 한다. 그는 1740년 10월 18일자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아침 기도시간에 나의 영혼은 심히 녹아내려 나의 엄청난 사악함과 타락을 몹시 슬퍼하였다.'

 

  이와 같은 눈물은 하나님께서 그의 병에 담으신다고 하는 거룩한 눈물이다(시56:8).

 

  자신이 죄가 많다는 것을 슬퍼하는 그와 같은 애통하는 자들은 그들의 슬픔을 덜어줄 수도 있는 유일한 위로 즉 하나님의 값없는 용서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모든 위로 가운데 가장 큰 위로는 통회하고 애통하는 모든 죄인에게 내려진 사죄의 선언이다.'(렌스키, p. 187)"

 

  맞습니다. 회심과 죄 사함! 이것이 곧 애통하는 자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위로입니다.

 

  저는 이 중 후자가, 다윗의 회개 시들에 가장 구체적으로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편 32:1-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럼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편 51:1-17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애통하는 자에게는 이런 위로가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애통하고 회개하고 자백하므로 이 위로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편, '위로'는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로 '소환하다', '초청하다', '권하다', '훈계하다', '격려하다', '애원하다', '간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 연구 프로그램 바이블렉스 9는 이 단어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파라켈레오는 '부르다(소환하다), 초청하다, 구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행 28:2에서 파라칼레오는 '(자기에게로) 부르다, 소환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토인들이 우리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비가 오고 날이 차매 불을 피워 우리를 다 영접하더라.'

 

  행 28:14에서 파라칼레오는 '초청하다'라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거기서 형제를 만나 저희의 청함을 받아 이레를 함께 유하다가 로마로 가니라.'

 

  행 16:9 이하; 행 8:31; 행 13:42에서도 유사하게 전도나 선교 사역에 대한 요청을 나타낸다."

 

  그런 면에서 이동원 목사님의 주장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 단어('위로'-저자 주)는 대단히 흥미 있는 단어로서, '곁에'라는 전치사와 '부르다'라는 동사가 결합된 것입니다. '곁에 부름을 받아서 누군가가 서 계시다.'

 

  주님은 성령을 보혜사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보혜사란 말이 바로 똑같은 말입니다. 곁에 부름을 받아서 서 계신 분, 성령님!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은 바로 우리 곁에 계신 분이십니다.

 

  여기 '위로한다'는 말이 이와 똑같은 단어로 쓰여졌습니다. 여러분, 주께서 곁에 계신 것을 경험하십니까? 진정한 주의 위로를 발견하십니까?

 

  한 영혼이 자신의 죄를 직시하며 그 죄에 대면하여 참으로 아파하는 바로 그곳에 주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용서와 치유와 그리고 은혜의 주님이 우리 곁으로 다가오시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그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합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십니다. 결코 그들을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잘못을 저지른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책망을 해도 자녀들은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부모가 원하는 것은 자녀를 징책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가 자기 잘못을 깊이 깨닫고 애통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것보다 기쁘고 반가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은 부모가 간절히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기 죄를 깊이 깨닫고 애통하는 자녀를 멸시하거나 멀리하겠습니까? 그들을 끌어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습니다.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죄는 하나님의 임재는 물론이고 인간에게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빼앗아갑니다. 혼자라는 그리고 하나님께 배척당하고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그러나 애통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심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57:15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원하시면 애통하고 회개하십시오. 그래서 죄 사함과 함께 하나님을 얻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 '아직' 차원의 위로

 

   데이비드 터너는 "애통하는 자는 이사야 61장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통해 미래의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메시야의 직무 중의 하나가 위로입니다.

 

  이사야 61:1-3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게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메시야는 위로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런데 메시야는 현재 위로자이실 뿐 아니라 미래에도 위로하십니다. 즉 애통하는 자는 현재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미래에도 위로를 받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내세에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럼 애통하는 자가 미래에 받게 될 위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부자나 나사로의 비유에 나오는 바로 그 위로입니다.

 

  누가복음 16: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아더 핑크도 애통하는 자가 받게 될 위로를 설명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위로'는 우리가 영원히 이 세상과 죄악에서 떠날 때 받게 되는 최후의 위로이다. 그때에는 '슬픔과 한숨이 사라질' 것이다. 아브라함은 지옥에 있는 부자에게 '네 집에서 구걸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눅16:25)라고 말했다."

 

  이 구절을 누가복음 6장 24절과 비교해보십시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그러면 애통하는 자가 누리게 될 위로가 실제로 천국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편, 애통하는 자가 미래에 받을 위로를 더 잘 설명한 곳이 있습니다.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 7:15-17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요한계시록 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할렐루야!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가 미래에 받게 될 위로입니다. 양용의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모든 죄와 고통과 죽음을 제거하시고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겨주실 것이다(계21:4). 그때에 '애통하는' 제자들은 하나님께 진정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마치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로할 때 눈물을 닦아주며 위로하듯이 그때가 되면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정말 완벽한 위로 아닙니까? 애통하는 자들은 이런 완전한 위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애통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자들은 이런 놀라운 위로를 받지만, 애통하지 않는 자들은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됩니다(마22:13, 24:51, 25:30). 이 때문에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에서 "화 있을찐저!"라는 강한 말을 사용하여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누가복음 6:20-25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애통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세상에 취해서 웃고 있는 자입니까? '지금!' 즉 살아 있고 기회가 있을 때 애통하는 자가 되십시오.

 

  야고보서 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지금' 자기 죄를 깨닫고 심령이 가난하게 되어 애통하는 자가 되십시오. 그래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는 위로를 받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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