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인가?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림과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절실하고 기본적인 욕구들입니다. 주림은 먹을 것을, 목마름은 마실 것을 요구합니다. 음식과 음료는 사치품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품입니다. 마찬가지로 의도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먹을 것과 마실 것에 의존하듯 영적 생명은 의를 사모하고 배부름을 얻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죄는 우리 영에 죽음을 가져옵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야고보서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반대로 의는 우리 영혼에 생명을 가져옵니다.
로마서 8:6, 13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그러므로 우리에게 반드시 그리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의입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의에 대한 설명을 잘 들으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 의에 주리고 목마른 복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는 무엇인가?
싱클레어 퍼거슨은 예수님이 이 구절에서 말씀하신 의에 세 가지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의(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는 세 가지 차원을 지닙니다.
첫째, 의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를 위해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죄인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믿음으로) 우리는 의를 얻을 수 있습니다(고후5:21). 이것이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제공해주십니다. ...
의의 두 번째 차원은 그리스도를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구세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환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로서 우리를 죄의 권능과 죄의 영향에서 구원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우리 안에서 활동하십니다. ...
디트리히 본회퍼가 '값싼 은혜' - 우리를 실제로 죄에서 구해내지 못하고 우리를 현 상태에 머물도록 하는 구원자 - 가로 부르던 것을 우리가 지금까지 믿었던 것은,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세속적' 그리스도인과 '영적'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실제로 죄에서 구원해주신 분을 믿는 것과 현 상태에 그대로 머물게 하는 분을 믿는 것, 이 두 가지 믿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정당화하였습니다. ...
하나님의 의의 세 번째 측면은 그것이 어디서나 성취되기를 바라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복음 사역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를 개혁하는 임무를 수행함으로써 도덕적 순결과 올바른 관계를 확산시켜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도사역과 사회 개혁의 임무를 상호 선택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두 가지는 동시에 행해져야 합니다."
이 중 첫째와 둘째 개념은 문제가 없습니다. 칭의도 이 구절의 주된 의미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안에 세 번째 개념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더글라스 헤어는 이 구절의 "의"가 세 번째 의미라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관례적으로 여기에 나오는 '의'를 개인적 윤리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해왔다(그래서 TEV는 다음과 같이 옮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을 가장 큰 욕망으로 삼는 자는 행복하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을 지지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다. 제1복음서는 개인 윤리를 매우 강조한다(5:20, 7:21-24을 보라). ...
주리고 목마른 자의 은유는 우리의 의지와 행위에 지배되지 않는 의,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많아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 예언자들에 의해 선포한 하나님의 구원의 의이다. '내 의(RSV: '구원')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그들이 사모하는 의는 그들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다.
이 복 선언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면("하나님의 구원 하시는 의가 실현되는 것을 사모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누가의 번역과 마태의 번역 간의 거리가 크게 좁혀진다. 누가의 평행구에서 이 복 선언은 첫 번째 복과 마찬가지로 문자 그대로 굶주린 사람들을 지칭한다. 여기에 대응되는 화 선언은 굶주리는 자들이 배부른 자들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다(눅6:21, 25). 마태는 누가와 마찬가지로 사회 정의가 확립되기를 갈망한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바로잡으시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굶주림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지구상에서 굶주리고 있는 수백 만 명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는 재화와 용역이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있음을 탄식하는 사람들 모두가 다 포함된다. '굶주리는 자들, 그리고 정의가 편만한 것을 보고자 주리고 목말라하는 자들은 얼마나 복된가! 그들이 만족을 얻을 것이다."
참으로 의외지요! 그런데 이처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을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가난한 자'와 "우는 자"의 연장선상에서 봐서 사회적인 공의가 확립되길 기다리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제법 많습니다.
또한, 이런 해석은 나름 상당한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복은 단순히 구원받은 자들인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부여주는 것이고, 그 뒤의 말씀들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구분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현 교회의 수준 낮은 상태와도 잘 조화가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한결 편해집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그런 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진의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미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또 우는 자 역시 이사야 66장 2절의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라는 병행구를 통해 가난하고 힘들어서 우는 것이 아니고 죄 때문에 통회하는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또한, 온유한 자도 이사야 66장 2절에 나온 것처럼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즉 들을 귀와 관계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미 설명해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맥락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사회적인 공의가 확립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인격과 삶을 갈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행히,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에 나오는 "의"를 사회적인 의(공의)가 아니라 개인적인 의(거룩)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먼저,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는 필연적으로 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심령의 가난이 무엇이며 내부의 죄로 인한 애통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나서 우리는 당연히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기를 소원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적극적으로 성결해지기를 소원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저는 이것을 이 이상 더 훌륭히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또, 존 스토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격과 행동의 의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에 이어서 계속해서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의와 바리새인의 의를 대조시킨다(20절). 후자는 율법을 따르는 외적인 것이며 전자는 마음과 정신과 동기의 내적인 의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주리고 목말라해야만 한다."
그리고, 양용의 교수님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태가 제자들의 열망의 대상으로 제시한 '의'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통치의 선물로서, 제자와 하나님 사이의 새로운 인격적 관계에 의거하여 나타나게 되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지칭한다(참조. 5:20; 6:33; 7:21).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의 특징은 자신의 삶과 관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적극적으로 고대하며 기도하는 것이다(6:33). 따라서 제자가 실제로 그처럼 '의'에 굶주리고 목말라할 때, 그것은 자신의 제자 신분을 확인해주며, 그러한 사실 확인은 그에게 행복의 요건이 되는 것이다."
저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마태복음의 문맥에 의하면 팔복의 사람들은 회개한 사람들입니다(마4:17). 그런데 과연 그들의 관심이 단순히 사회적인 정의일까요? 그런 것은 회개하지 않은 자들 중에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사항 아닙니까?
또, 팔복은 어떤 사람이 복이 있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인가? 즉 구원받는 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뿐 아니라 궁극적인 구원의 조건들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인 부조리 때문에 탄식하고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구원받은 증거요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구원과 직접 연계시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합니다.
무엇보다도, 산상수훈의 초점은 사회정의가 아닙니다. 물론 "의"는 산상수훈의 핵심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산상수훈에는 "의"라는 개념이 정규적으로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의로 말미암아 핍박당할 때도 있습니다(5:10). 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하는 의를 지녀야 합니다(5:20).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해야 합니다(6:1). 특히 하나님께서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6:33).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사회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의를 가리킵니다. 때문에 저는 이 구절의 "의"가 사회정의가 아니라 신자들의 성품과 생활에서 나타나야 할 의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2) 주리고 목마른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주림'과 '목마름'은 육체의 기본적인 욕구일 뿐 아니라, 매우 강한 욕구입니다. 수년 전 여름, 폭염이 한창일 때 산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물을 가진 사람이 못 쫓아오고 산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혼자 푹푹 찌는 더위에 땀을 비 오듯 흘리며 산을 네 개나 넘어갔는데, 얼마나 목이 타던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말라버린 계곡의 구정물을 4차례나 마신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물 부족 국가가 아닙니다. 정말로 목마를 때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전에 제가 이스라엘에 갔는데 계절을 잘못 선택해서 한여름에 갔습니다. 그런데 더위가 우리나라 더위가 아닙니다. 마치 찜통 속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얼마나 푹푹 찌고 무더운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이 새롭게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는 지금보다 더 심했습니다. 당시 팔레스틴에선 주리고 목마른 것이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물도 귀했고 때로는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상황을 이용해서 어떻게 의를 갈망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단어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가 어느 정도로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강한 도전입니다.
여러분, 왜 많은 이들이 "나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했는데, 왜 아직까지 배부름을 얻을 수 없을까요?"라고 묻는지 아십니까? 바로 참으로 혹은 충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그것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육적인 사람의 반론. (그가 말하기를) '나는 의를 갈망했지만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당신의 말은 당신이 주렸으나 만족함을 얻지 못했다는 것인가? 아마 하나님이 당신의 주림에 만족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스미스 위글스워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거룩함을 간절히 사모할 때, 청결하려고 참으로 원할 그때만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사망과 저주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시킬 수가 있습니다."
또, 존 스토트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은 되풀이하여 굶주린 자들에 대한 그의 약속을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을 채워주신다.'(시107:9) 만약 우리가 부진한 성장을 의식하고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의 욕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단순히 주리고 목마른 것만으론 배부름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진짜 그리고 충분히 의에 대해 주리고 목말라야 합니다.
그럼 진짜 그리고 충분히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여러분에게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에 대한 설명 몇 가지를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존 웨슬리는 정말 어떤 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인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였는데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첫째로, 주리고 목마른 것은 인간의 모든 육체적 욕구 중에 가장 강력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육체의 기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사모하는 의에 대한 영혼의 기갈은 모든 영적 욕망 중에 가장 강렬한 것으로서, 이 욕망이 우리 가슴 속에서 일단 싹트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로 지음을 받으려는 일념에 다른 모든 욕망을 삼켜 버립니다.
둘째로는 우리가 한번 굶주림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 느낌은 더욱 더 증대하여 음식물을 구해 배를 채울 때까지 가만히 있지 않든지 그렇지 않으면 죽든지 두 길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을 사모하는 마음이 일단 생기기 시작했다면 이 영적 욕구에 대한 열의는 식어지지 않고 더욱 가열되어, 이 욕구가 충족되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는 기갈자에게는 음식물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갈자에게 음식물 이외에 화려한 의복과 금은보석이나, 높은 영예나, 모든 좋은 것을 줄지라도 이것들은 그에게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것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먹을 것을 달라. 내가 죽겠으니'라고 할 것입니다. 의의 기갈자도 그렇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부귀영화를 다 준다 해도 그는 '이런 것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사랑을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소'라고 할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주림은 음식 말고는 아무것도 만족하게 해줄 수가 없다. 배고픈 사람에게 꽃, 음악을 가져다주어 보라. 재미나는 이야기를 해주어보라. 음식 말고는 아무것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바질의 표현을 빌린다면 주린 영혼은 주려서 찾는 것을 차지하여 즐길 때까지는 거의 미친 듯이 마음을 가누지 못한다."
또, 마이클 윌킨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매우 궁핍한 상태에 있다. 그들은 채움을 받지 못하면, 죽고 말 것이다. 의를 갈망하는 자의 열정도 그러하다."
무엇보다, 저는 캐더린 쿨만의 말이 심령에 가장 깊이 와 닿았습니다.
"사람이 가장 깊은 열망으로 하나님을 구하기 전까지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나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그것을 보아왔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찾고 구하는 바로 그것을 얻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기 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진실로 찾기 원하는 것을 삶에서 찾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목마르다는 것은 강한 표현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께 목말라 할 때, 그는 하나님으로 충만케 됩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매우 실제적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에서 내가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께 절규하지 않았던 때를 한순간도 생각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육체적인 배고픔을 화제로 삼습니다. 나오 육체적인 배고픔으로 음식물을 필요로 해왔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리를 화제로 말씀드립니다만, 영적인 굶주림보다 더 심한 육체적인 굶주림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정말 충격이고 큰 도전이 되는 고백이지요! 그러므로 어느 정도 시도하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캐더린 쿨만을 본받아 육신의 주림보다 더 심한 주림과 육신의 목마름보다 더 심한 목마름을 가진 자가 되십시오.
한편, 성경은 사람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고 거듭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되,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충분한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 있습니다.
시편 107:9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마태복음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누가복음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하나님은 절대 거짓말하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토마스 왓슨은 "하나님은 우리가 헛되이 사모하도록 버려두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토저 박사의 "어떤 사람이건 그가 원하는 만큼 경건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된다"라는 말은 이제는 유명한 말이 되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사람 잔 G. 레이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이 가진 영혼의 갈망은 반드시 만족을 얻고 틀림없이 충족됩니다. 그것이 성령의 깊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즈는 장담하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여러분은 배부를 것입니다. 이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 의에 주리고 목마르고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사모한다면 여러분은 이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옳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될 뿐 아니라 배부름을 얻게 될 것을 믿으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모두 의의 배부름을 얻고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성령으로 채우사 주 보게 하소서
주의 임재 속에 은혜 알게 하소서
주 뜻대로 살아가리 세상 끝날까지
나를 빚으시고 새 날 열어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주님
하늘의 아버지 날 주관하소서
주의 길로 인도하사 자유케 하소서
새 일을 행하사 부흥케 하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성령의 기름 부으소서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니
내 잔을 채워 주소서
내 잔을 채워 주소서
내 잔을 채워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