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과 혼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문제들!
사람의 구조에 대해 이분설과 삼분설이 있는데 삼분설이 옳습니다. 그런데 삼분설을 믿는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나치게 영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가 대략 세 가지인데, 마지막으로 그것을 하나하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주장
삼분설을 믿는 사람들은 지나치게 영 중심입니다. 혼이나 몸을 낮게 보거나 너무 부정적으로 보고 혼을 영과 대치되는 것으로 봅니다. 삼분설을 믿었던 초대 교부들에 대해서는 자료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 위트니스 리의 가르침의 경우 문제가 심각합니다.
워치만 니의 대표작은 『영에 속한 사람』1, 2, 3권입니다. 그는 그 책에서 영과 혼 사이에 대립각을 세우고 영이 혼을 다스리고 혼이 육을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그가 쓴 『혼의 잠재력』이라는 책에 보면 "혼의 세력이 있는 곳에 또한 악령도 있다"고 했고 "모든 성령의 역사는 인간의 영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모든 원수의 역사는 인간의 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또한,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혼을 처리해야 한다."는 단락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의 제자 위트니스 리는 영이 혼에서 구원받아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혼을 그처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혼이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또, 사도 요한은 혼이 잘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에 비례하여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프쉬케-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혼을 통과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가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구절은 영과 혼이 함께 쓰일 때 순서가 뒤바뀐 유일한 경우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순서가 바뀐 이유는 말씀이 영이 아니라 혼에 먼저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령은 "지혜와 계시의 영"이시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성경의 완성과 함께 특별계시가 끝났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계시보다 더 필요한 것이 올바른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가르침을 먼저 혼으로 접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 그다음 영을 통해 말씀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는 소원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혼은 영의 적이 아닙니다. 영과 혼은 동료이고 깐부(한편)입니다.
또, 혼이 알고 있는 것처럼 혼이 영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과 혼과 몸이 모두 성령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 생각하면,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나오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일례로,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상)』권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2:14-3:4
이 말씀은 육에 속한 사람(고전 3:1), 신령치 못한 사람(문자적으로는 혼에 속한 사람. 고전 2:14), 그리고 신령한 사람(고전 2:15) 등 세 종류의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분은 육신에 속한 불신자, 혼을 따라 사는 신령치 못한 사람들, 그리고 '영'의 소욕을 따르는 성숙한 신앙인 등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이 글을 읽고 저는 잠시 '어! 정말 그렇다면 워치만 니의 주장이 옳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에 속한 사람이 불신자, 혼에 속한 사람이 어린 신자, 영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이 성숙한 신자라면, 우리가 육에 속한 자나 혼에 속한 사람이 되지 말고 영이 혼과 몸을 다스리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이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르게 각색된 것입니다. 잠시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2장 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이고, "육에 속한"의 원어가 '프쉬케코스' 즉 혼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절인 15절에 나오는 "신령한 자"는 '프뉴마코스'입니다. '프뉴마'는 영입니다. 이처럼 불신자가 혼에 속한 사람이고 신자가 신령한 사람입니다. 그 후 3장으로 가면 "육신에 속한 자"가 나오는데 원어로 "싸르키노스"입니다. 이것이 진짜 육신에 속한 자인데 불신자가 아니라 어린 신자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불신자, 혼에 속한 사람은 어린 신자, 신령한 사람은 성숙한 신자라야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이 옳은 것이 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이 신자를 혼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이 영에 속한 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신령한 자"도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령의 통치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증거로, 신령한 사람에 사용된 '프뉴마코스'는 사람의 영이 아니라 성령과 관계가 있습니다. 문맥에 그 점이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바울이 줄곧 성령에 대해 말했고, 성령의 역사로 복음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자가 바로 신령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고린도전서 14장 37절에 다시 한번 "신령한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그런데 이것도 영이 아니라 성령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들과 관계가 이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자는 영에 속한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영에 속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이런 구분은 성경적으로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이 영에 복종하는 영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혼과 몸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여기서 바울이 몸을 쳐서 누구에게 복종하게 했습니까? 자신의 영이 아닙니다(참조, 벧전 2:11).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함으로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빌립보서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이 구절 역시 말씀에 즉 하나님께 복종하라는 뜻입니다(마 7:21). 이와 같이 성경은 자기 영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혼과 영의 투쟁이 아닙니다. 혼에 속하느냐 영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우리 영혼이 육신을 따를 것이냐 성령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3:1-4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영-성령)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보십시오. 실제로 서로 대치되는 것이 영과 혼이 아니라 성령과 육신이지요! 이 같은 사실은 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육이라는 것이 성경 곳곳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로마서 13: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고린도전서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골로새서 2: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베드로전서 2: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프쉬케-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또한, 우리가 영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도 성경 곳곳에 분명히 나타나 있습니다.
로마서 8:3-6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12-14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갈라디아서 5:16-23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여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가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혼을 영에 굴복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육신에 굴복하지 않고 성령님께 굴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화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으로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릅니까? 단지 영이 아닙니다. 영혼입니다! 사람의 영과 혼은 분리도어 있지 않고 하나가 되어 영혼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요한복음 3장 6절과 베드로후서 1장 9절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듯, 구원은 단지 영이 아니라 영혼이 받는 것이고, 성장도 영혼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의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을 따를까? 혼을 따를까?'가 아니라 '성령을 따를 것인가? 육체를 따를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육신이 아닌 성령님께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이고 성화입니다!
한편, 저는 위트니스 리의 책은 물론이고 워치만 니의 책도 여러분에게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학생 시절 저는 워치만 니의 『영에 속한 사람』1, 2, 3권에 대한 명성을 듣고 그 책을 사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믿음이 안 가고 거부감이 들어서 조금 읽다 그만두었습니다. 참 진리는 영적으로 공명이 되고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참 진리가 아닌 것은 아무리 지혜로워 보이고 논리적이고 그럴듯해도 영적으로 깊이 공명이 안 됩니다. 뭔가가 미심쩍고 꺼림칙합니다. 성령님은 그것을 사용해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 책이 정확히 그랬습니다. 그 뒤로도 워치만 니의 얇은 책을 몇 권 읽기는 했으나 관심이 없어서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기총회장을 지낸 유명한 목사님이 신기한 간증을 들려주며 워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위하여』라는 책을 저에게 강력 추천했습니다. 얼마 후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KBS의 한 베테랑 PD가 저를 찾아와서 다시 그 책을 저에게 강력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혹 내가 선입견을 가지고 워치만 니의 책을 잘못 판단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책을 사서 열린 마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감칠맛 나게 로마서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잘해서 '와~ 정말 대단하구나!' 하면서 기대감을 갖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어보니 심각한 결함과 문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오류는, 제시 펜 루이스의 『십자가의 도』라는 책에 나온 것과 동일한 오류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이 설명한 "십자가의 도"를 베드로전서 2장 24절에 근거해서 신유에 요구되는 믿음처럼 믿어야 죄를 이길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병이 치유되려면 예수님이 채찍에 맞았으므로 나는 나았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죄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께 대해서 살아났다고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이기고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설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워치만 니도 이렇게 알고 잘못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또한, 실제로 효과가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지려면 계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여기는' 비결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계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친히 오는 계시가 필요하다(마 16:17; 엡 1:17, 18).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다는 사실에 눈이 뜨여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교리로서 아는 것 이상이다. 그러한 계시는 모호하고 불명확한 것이 아니다. 우리 중 대부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 날을 기억할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에 관해서도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 단계들은 무엇인가? 첫째로 계시가 있다. 우리가 이미 논의한 대로 이것은 언제나 믿음과 경험을 앞선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그의 아들에 관한 진리를 보여주신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가 믿음으로 그 사실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경험으로 실제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얻은 것은 다음과 같다.
1. 계시(객관적)
2. 경험(주관적)"
그런데, 문제는 이 주장에 따르면 구원이 두 단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들어서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계시를 받아야만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믿음이 다시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결을 말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은 치유를 받는 것만큼이나 죄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 불확실하고, 요원하고, 어려운 것이 되게 할 뿐입니다.
훗날 칭의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설교를 할 때 설명해드릴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자세히 설명하진 않겠습니다만, 바울이 뭐라고 말했는지 자세히 보십시오!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십자가의 도를 설명한 후 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여기서 정말 바울이 이렇게 여기고 믿으면 죄를 능히 이길 수 있고 변화된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 직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마서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이처럼 그렇게 여기면 죄를 이기게 된다고 하지 않고, 그렇게 여기고 우리의 몸을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죄를 이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11절은 죄를 이기는 비결이 아니라 죄를 이겨야 할 당위성을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것이 이 구절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런데 워치만 니는 11절을 죄를 이길 수 있는 비결로 착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오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