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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 (변승우 목사님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중에서)

작성자진순은|작성시간24.10.30|조회수131 목록 댓글 0

  ▣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의 초가집에서 펌프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웃집에 심방 온 원당교회 감관오 목사님이 저를 전도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줄곧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보편적으로 장로교회에서는 말씀을 굉장히 강조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성경에 심취하여 읽으면서 말씀의 은사를 구하고 구하고 또 구해 왔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말씀의 은사가 저에게 임했습니다. 

 

  신학생 때의 일로 기억됩니다.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학교 앞 순복음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부흥회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는데, 갑자기 '왜 하나님은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 걸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강사 목사님께 손을 들고 허락을 받아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랫동안 방언 통변의 은사를 구해 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랬더니 목사님이 설교를 중단하고 기도를 하신 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강사 목사님에게 성경책을 한 권 보여 주셨답니다. 그 성경책은 제가 신학생 시절에 읽던 것으로 성경 겉장 가죽을 세 번 갈았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적게 쳐진 곳이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줄이 쳐져 있고 여기저기 많이 낡고 해어져서 스카치 테이프로 보수공사를 해 놓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성경책을 보여 주시는데 그 성경책이 강사님의 말을 듣고 있는 저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저의 성경책인데 성경 겉장과 안장이 모두 투명하게 비치는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덮여 있는데도 성경 내부가 보이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이 한 눈에 다 보였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제 성경책 주변의 여백에 그 성경 구절과 관계 있는 다른 성경 구절들과 읽으면서 깨달은 것을 빽빽하게 적어 놓았는데 그 책에도 여백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큰 도서관을 하나 가득 채울 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완벽하고 총체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분량의 내용이 책이 덮여 있는데도 저의 눈에 한 번에 다 보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이 한꺼번에 다 보일 수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저는 그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여 주시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통하다. 이것을 어찌 방언 통변이나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는데 너는 이 은사로 인해 내게 한 번이라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 늘 방언 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른 작은 은사들을 주고도 감사기도를 받는데 이런 엄청난 은사를 주고도 감사하다는 말은 못 듣고 늘 불평만 들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저는 이 꿈에서 깨어난 후 저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다른 은사들을 구하지 않고 말씀에 착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작심삼일이라 했던가? 인간의 마음은 어찌 그렇게 간사한지요.

 

  어는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에 있는 집에 내려와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를 두루 체험했으며 특별히 영 분별의 은사가 강한 나이 지긋한 여 전도사님과 저의 어머니와 함께 울산에 있는 작은 기도원에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또다시 왜 하나님이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지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중단시키고 그것을 위해 함께 기도해 주실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한참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그 여 전도사님이 큰 소리로 배를 잡고 웃습니다. 그냥 웃는 게 아니라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아예 뒤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기도하다가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이분이 잘못되었는가 보다. 악령이 들어갔는가 보다.' 하고 놀라서 "전도사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을 하고 이런 얘기를 제게 들려주셨습니다.

 

  기도 부탁을 받고 그 전도사님이 "하나님, 변 전도사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세요. 저렇게 사모하는데 저는 예언의 은사도 있고 방언 통변의 은사가 꼭 없어도 괜찮으니 안 되겠으면 저에게 있는 방언 통변의 은사를 거두어 가시고 대신 변 전도사님에게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셨답니다. 얼마나 고마운 기도입니까? 그런데 그 기도를 하자마자 제가 옆에서 방언으로 한마디 쏘더랍니다.

 

  "네가 가진 은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깟 것을 나에게 주라고 그러느냐?" 

 

  참 황당한 노릇 아닙니까? 만약 이 말을 제가 한국어로 했다면 실례도 보통 실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으로 한 말입니다. 그것도 저는 방언 통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을 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에게는 통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알아들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분은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변 전도사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습니까? 무슨 은사를 주셨기에 아홉 가지 은사를 다 체험한 저에게 저렇게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 나는 그에게 단순히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의 쓸 때 가지고 있었던 그런 영감을 주었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린 것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은사를 어찌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그런데 그는 이 은사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고 있다. 그래서 걸핏하면 방언 통변이나 다른 은사를 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신비적인 기질이 있기 때문에 만약 내가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면 말씀은 제쳐 두고 방언 통변이나 하고 앉아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에게는 현재 방언 통변의 은사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내가 말씀으로 그를 지도하고 세밀하게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방언 통변의 은사를 그에게 줄 수 없는 이유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 응답을 문자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말씀의 은사를 주셨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것은 방학 전에 꾸었던 꿈이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내게 확증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후 저는 말씀에 착념했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고 또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검의 칼날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의 은사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제일 먼저 주신 것이 마태복음 7장 6절 말씀이었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저의 영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은 거룩한 것이요, 진주와 같이 보배로운 것이다. 그러나 성급하게 아무하고나 그것을 나누지 말아라. 많은 사람들이 네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를 찢으려고 할 것이다.

 

  앞으로는 네가 누군가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그가 네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네 말을 들을 수 있는 자를 만나면 내 영이 너를 흔들어 깨워 너의 영을 감동시킬 것이며, 말씀의 신선한 기름부음이 너에게 임할 것이다. 너는 그런 사람들에게만 내가 네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누어야 한다.'

 

  주님이 이렇게 경고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속에 무지와 편견, 고정관념, 잘못된 교리 등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지적 교만 때문에 귀가 먹었고, 어떤 이는 죄의 유혹으로 마음이 강퍅케 되어 고의로 진리를 대적하고 거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의 설교나 제가 말하는 것을 듣고 튕겨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대단히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은 그냥 들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귀머거리가 아닌 이상 말씀을 그냥 들으면 됐지 무슨 말씀을 듣는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은 유대인들'(31절)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는 들었으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저에게 가르쳐 주신 여러 가지 계시적인 진리들을 나누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러분이 보다 수월하게 하나님이 저에게 계시해 주신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이단들은 말씀을 어떻게 듣는가?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이론상으로는 매우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보면 대단히 어렵습니다. 

 

  제가 서울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보라매공원에서 목회자체육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도하러 왔습니다. 그들은 한 곳에서 쉬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저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래요? 그런데 성경은 몇 번이나 읽으셨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번도 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을 여러 번 읽었는데 한 번도 안 읽은 여러분이 어떻게 저를 가르칠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하는 말이 다른 사람은 성경을 백 번 읽었어도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은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었어도 성경의 참된 의미를 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말씀에는 짝이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말씀의 짝을 모르고 읽지만 자기네들은 말씀의 짝이 무엇인지를 배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아, 그래요? 이사야 34장 16절 말씀 말이군요(그들은 그 구절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말씀에는 짝이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성경을 달라고 해서 이사야 34장 16절 말씀을 펴서 읽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이 말씀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들뿐 아니라 교회 내에도 말씀에 짝이 있는 줄로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말씀에는 짝이 없습니다. 말씀은 꼭 어떤 말씀과 비추어 보아야만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그냥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읽고 말씀에 짝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문맥으로 보아야 합니다. 말씀에는 짝이 없습니다. 말씀이 무슨 암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짝이 있습니까? 이제 제가 그것을 보여드리지요."

 

  이렇게 말한 후 저는 이사야 34장 1절부터 차례로 설명하면서 읽어나갔습니다. 이사야 34장은 에돔 땅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기록한 것입니다. 

 

  사 34:9-10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붙는 역청이 되며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않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이처럼 이사야는 에돔 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폐허와 황무지가 될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부터가 중요합니다. 

 

  사 34:11 "당아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이 말씀에 보면 당아(펠리칸)와 고슴도치, 그리고 부엉이와 까마귀가 나옵니다.

 

  사 34:13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시랑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또 시랑(이리 혹은 하이에나)과 타조가 나옵니다.

 

  사 34:14-15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수 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 거하여 쉬는 처소를 삼으며 부엉이가 거기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그 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

 

  그리고 들짐승, 이리, 수 염소, 올빼미, 부엉이, 솔개가 나옵니다. 이것들은 모두 말씀이 아니라 동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 모든 동물들이 "그 짝과 함께 거기 모이리라."(사34:15)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이 1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그러므로 여기서 "이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말씀이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동물들입니다. 따라서 "그 짝" 역시 말씀의 짝이 아니라 동물들의 짝을 뜻합니다. 말씀은 암수가 없고 그러므로 짝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물들은 암수의 구분이 분명하고 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나오는 짝은 말씀의 짝이 아니라 폐허가 된 에돔 땅에 거하게 될 들짐승들의 짝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 구절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입증됩니다. 

 

  사 34:17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친수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눠 주셨으니 그것들이 영영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 거하리라."

 

  문맥을 보면 16절의 "이것들"과 17절의 "그것들"이 서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그것들"에게 땅을 나눠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에게 에돔의 어떤 땅을 나눠 주었습니까? 그리고 마태복음에게는 에돔의 어떤 땅을 나눠 주셨습니까?" 이 질문은 그 자체가 우스꽝스럽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34장 16절 말씀은 성경에 관해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짐승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근거로 짝을 운운하며 있지도 않은 말씀의 짝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는 남이 알지 못하는 성경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시 저는 이런 사실들을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예 들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기 말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들은 방금 논리적으로 풍비박산이 난 바로 그 "짝"이라는 것을 통해서 깨달은 자신들의 허황된 교리를 제게 설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단에 대해서 하나 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몇 년 전의 일입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못 보던 젊은 자매가 한 사람 왔습니다. 그 자매는 이요한 목사님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권신찬, 유병언, 박옥수 등이 구원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요한도 구원파 중의 하나라는 것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상합니다. 그래서 그 자매가 이단에 빠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챘습니다. 

 

  그 자매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가셨으므로(이것은 옳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다 용서되며(이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이후로는 죄를 회개하거나 자백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구원파에서 주장하는 이단교리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라는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이냐? 성경에는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짓게 되는 죄들은 자백을 할 때 용서받게 된다고 나와 있지 않느냐?"라고 질문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므로 참된 성경 해석은 결코 다른 구절을 부인하게 되거나 충돌을 일으키지 않으며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런데 자매의 주장은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과 배치되므로 결코 참일 수가 없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백한 사실을 그 자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저는 무려 세 시간 반을 할애해야 했습니다. 세 시간 반을 설득한 후에야 결국 그 자매로부터 구원파와 관계를 끊고 집 가까이에 있는 정상적인 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수가 있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께 물어 보겠습니다. 왜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자기들의 주장의 근거가 기초부터 무너져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주장을 버리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왜 구원파에 속해 있었던 자매는 지극히 분명하고 다순한 진리를 설명했을 뿐인데도 그것을 이해하기까지 세 시간 반이 걸렸을까요?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건져내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사용하여 자기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성경의 문맥을 무시하여 엉터리 주장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을 통해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성구들은 그  뜻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론과 달리 실제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거의 불가능합니다. 오죽했으면 성경에서 바울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뒤에 멀리 하라."(딛3:10)고 했겠습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말씀을 들을 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유대인들은 말씀을 어떻게 들었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오해한 가장 대표적인 집단입니다.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 즉 전통에 사로잡혀 있었고, 메시아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한 모세나 아스라엘을 절대강국으로 키운 다윗 왕 같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는 정치적인 해방자였으며, 그들이 생각한 구원은 외세에서의 자유와 경제적인 번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메시아를 약속한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메시아가 아니라 영적인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즉 인류를 위해 대속의 죽임을 당하시고 삼 일 만에 다시 부활하사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눅 24:46-48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이처럼 메시아의 임무는 외세에서 이스라엘 한 나라를 구원하여 번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일입니다. 바울도 처음에는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된 후, 그는 이 진리를 사랑하는 동족들에게 가르쳐 주길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사용하여 이 일을 했습니다. 

 

  먼저, 그는 성경의 예언들을 통해 성경에 약속된 메시아는 정치적인 메시아가 아니라, 대속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를 통해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그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는데,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 즉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야말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증거이며, 또한 예수님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라는 사실이 부활을 통해 입증된다고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유대인들을 전도할 때 사용한 통상적인 방법인데, 사도행전 17장 1-3절에 나타납니다.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러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 "

 

  어떤 사람은 이것이 우리와, 그리고 말씀을 듣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아주 중요한 것을 다룰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유대인들을 위해 쓴 복음서에서 구약 성경을 자주 인용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던 것처럼 바울도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충분하고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바울의 말을 들은 모든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항상 두 패로 나누어졌습니다. 

 

  행 28:24 "그 말은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그러면 바울이 구약 성경을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충분히 입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다수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절하고 반대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행 28:25-27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일러 가로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라는 부분입니다. 마치 이단자들이 자기 말만 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처럼 유대인들 역시 복음에 대하여 귀를 막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듣기는 들으나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위대한 부흥사 찰스 피니의 책에서 저는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이 있는 다음과 같은 글을 발견했습니다. 

 

  "자기들의 관심사에 벗어나는 그런 주제들에 관한 증거에는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그 증거가 아무리 중대할지라도 아주 하찮은 난관이라도 보일 듯하면 그냥 넘어지고 만다. .... 어떠한 것이 되었든 일단 문제나 어려움이 생기면 그것을 빌미로 이적들의 증거까지도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한 경우에는 논리적 증거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시해도, 그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 가장 죄악되고 혐오스러운 마음의 상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면서 피니는 그 대표적인 케이스로 유대인들을 지목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애, 가르침, 이적들, 죽으심은 물론 그의 부활조차도 유대인들에게 아무런 확신을 줄 수 없었을 때, 바로 이 태도가 그들 가운데서 아주 혐오스럽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일 것이라는 선입견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에 대한 그릇되고 터무니없는 해석들이 그들의 마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증거로 내놓으신 모든 증거의 위력을 분쇄하기에 충분한 반대 이유들이 되었다. 불신앙이 진리를 입증하는 증거의 위력을 어떻게 무력하게 만드는가를 보면 놀라우면서도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무게 있는 증거나 허다한 많은 증거로도 엉뚱하기 짝이 없는 반론들을 하는 사람들의 지성과 마음은 결코 지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유대인들은 그릇된 메시아 사상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가르쳐 준 왜곡된 성경 해석에 세뇌되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인도하는 자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소경과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에 정통해 있었던 바울의 강력한 복음 증거 앞에서도 그들이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적대세력이 된 주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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