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시에 대한 구부러진 잣대
(3) 설교는 지적이어야만 하고 계시적이어선 안 되는가?
지난번 통합 대국민사기극 폭로 기자회견 때는 저는 통합이 구원론뿐 아니라 계시론에 있어서 무지하여 그들보다 더 성경적인 우리를 이단으로 정죄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온 기장 중 한 사람이 합동 이대위와 관련이 있는 목사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교단들이 실제로 문제 삼는 것은 단순히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설교를 계시를 받아서 하고 설교 중 계시를 받는다는 말을 자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교는 계시일 수가 없습니다."
저는 조금의 의혹도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다소 본질에서 벗어나는 질문일지라도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해드리겠습니다.
1) 설교는 지적일 뿐 아니라 계시적이어야 합니다.
아마도 제게 질문한 분은 에베소서 6장 19절에 주의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하나님께 계시적으로 말씀을 받아서 설교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모하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것을 위해 성도들에게 중보기도를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바울처럼 성경기록을 위한 계시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위한 계시는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설교와 예언은 다릅니다. 저도 그것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물론 학자들 중에도 "설교가 곧 예언이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예언이 곧 설교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설교는 설교고 예언은 예언입니다! 이것은 웨인 그루뎀의 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언과 가르침의 차이
우리가 아는 바에 의하면, 신약성경의 모든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역사에 근거한다(cf. 행11:28, 21:4, 10-11, 눅7:39, 22:63-64, 요4:19, 11:51에 소개된 예언에 대한 이해를 참고하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즉각적인 계시를 받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예언이 없다.
대조적으로 가르침이라고 불리는 인간의 행위나 교사가 하는 일 등 '가르치다'라는 동사가 묘사하는 어떤 활동도 신양에서는 계시에 근거해서 한다는 기록이 없다. 오히려 가르침이란 단지 성경에 대한 설명이나 적용(행15:35, 11:11, 롬2:21, 15:4, 골3:16, 히5:12), 또는 사도들의 교훈의 반복 내지는 설명을 가리킨다(롬16:17, 딤후2:2, 3:10 등). 우리는 그것을 '성경 가르침' 혹은 오늘날 '설교'라고 부른다."
저는 오래도록 일관성 있게 이것을 주장해왔습니다. "로마서 12장에 나오는 예언의 은사와 가르치는 은사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은사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와 예언은 하나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다"라고 말해왔습니다. 설교는 성경에 나오는 사도들의 교훈을 설명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즉각적으로 하는 예언과 다릅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기 때문에 설교가 계시적 혹은 예언적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웨인 그루뎀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장 뒤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둘의 구분은 명백하다. 만일 전하는 메시지가 본문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포함한 성경의 본문에 대한 의식적인 사고의 결과라면 그것은(신약성경의 용어대로 하면) 가르침이다. 그러나 만일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갑자기 마음에 주신 어떤 것에 대한 보고라면, 그것은 예언이다. 물론 잘 준비된 가르침이 전혀 계획에도 없던,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마음속에 주신 보충 자료에 의해 중단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경우에 그것은 예언이 가미된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웨인 그루뎀이 살짝 언급한 것을 대 설교가 로이드 존즈는 자세하게 그리고 반복적으로 다루었습니다. 많은 신학대학교에서 설교학의 교재 내지는 필수적인 참고서로 쓰이고 있는 로이드 존즈의 『목사와 설교』라는 탁월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제가 경험한 것을 로이드 존즈도 여러 번 경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설교의 매우 중요한 요소로 꼽았습니다.
"19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들 중 한 사람인 스펄전은 이 문제에 있어사 가장 강한 노선을 취했습니다. ... 본문들은 설교자에게 주어지게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자기는 이 일로 주님을 찾으며 인도해주실 것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고집하기를 설교자는 결정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도해야 하며, 이 일에 자신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는 어느 특정 부분이나 진술에 인도함을 받아서 그것을 설교 형태로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그 견해는 스펄전과 다른 많은 이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나는 성령께서 한때는 따로 떨어진 본문에 입각해 설교하게도 하시고 어떤 경우에는 연속된 설교를 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나는 내 체험에서 이런 일을 여러 번 겪었음을 겸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어느 날 아침, 옷을 차려입고 있는데 갑자기 무엇이 짓누르듯이 하나님의 성령이 나에게 '영적 침체'에 대해 연속된 설교를 하라고 명하는 것같이 생각되었습니다. 정말 글자 그대로 내가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내 심중에 설교 순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메모 용지에다 여러 개의 본문과 그런 식으로 떠오른 순서를 적어놓았습니다. '영적 침체'에 대해서 일련의 설교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러한 일도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처럼 왔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크게 집중시킵니다. 그것은 다른 것과는 달리 매우 놀랍고 영광스러운 체험입니다. ... 나는 그 연속설교가 성령님 자신에 의해 지시된 것으로 확신합니다."
"나는 설교 본문을 얻기 위해 성경을 읽는 나쁜 버릇에 대해 경고했고, 우리 자신의 선과 덕성 함양을 위해서 늘 성경을 읽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떤 말씀이 여러분에게 부딪쳐 오게 될 것을 지적했습니다. 누구든지 그 실제를 따라가는 자는 결코 설교 본문이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요, 자기의 신앙을 위해서 성경을 읽는 동안에 준비한 설교안들을 한 묶음 비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덧붙여서 한 편의 설교가 사실상 주어진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설교들이 여러분에게 직접 왔기에 여러분은 그 설교들에 관해 조금만 일하시면 됩니다. ... 하나님은 초기에는 자비하시고 매우 은혜로우셔서 설교 본문을 주시고 설교 내용을 주실 것이고 때로는 완전한 설교 내용까지 주실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처방 중 하나는 몇 년 전 『창조 사역』(The Act of Creation)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아서 케슬러(Arthur Koestler)의 책입니다. 케슬러는 물론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분야에서의 위대한 과학적, 시적 발견들이 이루어지는 방법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대 요점 중 하나는 가장 주목할만한 과학적 발견들은 순전한 논리적 사고 과정의 결과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과정의 일익을 담당하나, 보다 큰 것들이 거의 갑작스레 예기치 한게 온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주어졌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과학자가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 급기야는 궁극적인 지점에 이르는 것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결정적인 흔히, 일종의 계시가 번뜩이는 가운데서 왔다는 것입니다. ... 나는 이런 체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 내가 한 본문과 씨름하느라고 오전 시간을 다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어떻게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내 아내가 점심을 먹으라고 했을 때까지 계속 씨름했습니다. ... 그런데 갑자기 내가 긴 시간 동안 내내 씨름하고 있었던 그 문제가 완전히 풀린 것입니다. 그 모든 것, 순서, 대지, 틀(shape) 등 모든 것이 단번에 생각난 것입니다. 그 음악이 끝나자마자 내 서재로 달려가서 할 수 있는 한 빨리 그것을 종이 위에 다 옮겨 놓았습니다."
"모든 설교자의 체험에서 분명한 일, 즉 어떤 메시지는 설교자에게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 점은 언급한 바 있습니다. 어떤 설교 내용들은 비상한 명확성을 가지고 설교자에게 임합니다. 설교자는 요점들을 표현할 순서까지 부여받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 같습니다. 그뿐 아니라 설교자는 이 메시지가 성령에 의해 어떤 의의 회개나 어떤 이들에 대한 특별한 축복의 수단으로 쓰여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나라의 조용기 목사님도 이와 유사한 고백을 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목사님께서 그렇게 바쁜 사역 가운데에서도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설교를 준비하실까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메시지를 준비하는 목사님만의 어떤 방법이 있으십니까?
조용기 목사: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24시간 계속해서 메시지를 위해서 기도하고 살아갑니다. 메시지를 남의 책에서 읽는다든지 남이 설교한 것을 하면 힘이 없습니다. 구성을 잘하고 지적으로는 흠이 없을지 모르지만 내가 마음에 받지 않은 메시지는 그 메시지에 따르는 힘이 없습니다. 앵무새처럼 반복음 할 수 있지만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께 직접 메시지를 받아, 이것이야말로 이때 이 장소에 이 사람들에게 준 메시지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서 나갑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집회 강사로, 부흥 강사로 미리 메시지를 적어달라고 한 달 전에 열흘 전에 요청해오는데 저는 메시지를 적어주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가서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미 메시지를 적어놓고 나면 성령이주시는 살아 있는 말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언제나 현장에 가서 기도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주시는 메시지를 마음속에 받아서 설교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늘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메시지를 주십니다. 저는 메신저이기 때문에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주인에 제게 말씀을 주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 저는 목회를 시작한 그날로부터 매일 하나님께 메시지를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지를 주실 때에는 걸어가다가 주실 때도 있고, 남의 설교를 듣다가 주시기도 하고, 성경 읽다가 자다가 메시지를 주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포켓에 수첩과 연필을 들고 어느 순간 하나님의 영감이 오면 그것을 적습니다. 영감이라는 것은 그때 잡아놓지 않고 놓쳐버리면 나중에는 잡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감을 받고 나면 이제는 제가 신학적으로 배운 방법대로 서로, 본론, 결론 이런 구서으로 귀납법적으로나 혹은 연역법적으로나 성도들을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요리를 해서 설교를 합니다. 아무리 요리를 잘한다고 해도 메시지가 내용이 없으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용을 받고 난 다음에는 가장 쉬운 말로 가장 이해가 잘 되도록 설교를 해야 합니다."
윤석전 목사님의 경우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10:19-20)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성령께서 주시는 대로 설교합니다. 저는 이런 설교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쓰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5,000명이 넘는 목회자들과 수만 혹은 수십만의 성도들이 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이고 듣고 은혜를 받고 깨지니 말입니다. 이 외에도 유기성 목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할 때 자주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통합 교단과 이단사냥꾼들은 제가 성령께서 이런 책을 써라 혹은 이 설교를 하라고 내게 말씀을 주셨다는 말을 한다고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요!
참고로, 제가 이런 말들을 할 때 그 의미는 주님의 현현이나 천사의 방문 혹은 환상을 통해 이런 설교를 하라 혹은 책을 쓰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한 설교자들이 경험한 그런 계시적인 깨달음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기본 자료로 설교를 준비하고 책을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많은 설교자들이 본받아야 할 하나의 모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