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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과 혼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 XII (변승우 목사님의 "너 자신을 알라!" 중에서)

작성자진순은|작성시간26.06.19|조회수30 목록 댓글 0

  ■ 영과 혼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

 

  6. 예상반론들과 그에 대한 답변!

 

  (4) 바울이 영으로 가서 먼 곳의 성도들을 판단한 것을 볼 때 영에 의식이 있는 것 아닌가?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매우 신비한 경험에 대해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5:3-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골로새서 2: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프뉴마)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이처럼 몸이 아니라 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들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영에 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었습니다. 때문에 영이 아니라 혼에 의식과 지정의가 있다는 저의 견해가 틀린 것 아니냐? 라는 반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대해 답변해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방금 소개한 두 구절이 다음 구절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이처럼 몸은 아니지만 마음으로는 함께 있었다는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마음"은 프뉴마가 아니라 카르디아입니다. 또, 두 구절을 그 이상의 의미라고 보는 학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고든 피는 고린도전서 5장 3-4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인 '너는 내 생각에 있다'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 이상의 것을 의도한다. 전반적으로 우리에게는 불분명하게 생각될지라도 바울은 모인 공동체 안에 '영/성령으로' 그가 함께 있음을 인지했다. ... 다시 말해 바울은 자신이 몸으로 그곳에 없기 때문에 마치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사실 성령을 통해 그곳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피터 오브라이언은 골로새서 2장 5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그는 영으로 그들과 함께 있다. 멀리 있으면서도 자신의 동료 신자들과 함께 있다는 바울의 영적 현존의식은 아주 강력하고도 생생하다. ...

 

  그러나 바울이 어떻게 자기의 영이 골로새 교인들 혹은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상상할 수 있었을까?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고전 5:3-5) '영으로'란 표현은 그것이 사실이었든 어떻든 간에 자기의 생각과 기도 가운데 그들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 이상의 어떤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그들이 자기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들과 함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전서 5:4에서 분명히 그것은 단순히 그가 그들의 판결에 동의한다는 것이 아닌 실질적인 현존인데, 그 이유는 그가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자기 육신이 서 있는 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에 자기 영의 현존을 생각했다." 

 

  두 구절 중 의미가 더 확실한 것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멀리 떨어진 성도들과 영으로 함께 있었느냐가 수수께끼입니다. 그런데 찰스 하지는 그것이 이런 뜻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바울의 판단하는 능력 또는 권위, 또는 그 판단을 실행하는 그의 권세는 그의 몸이 어디에 있든지 관계가 없었다. 그는 영으로 함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그가 마음으로 함께 있어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번영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식과 권위, 능력이 그들과 함께 있었음을 의미한다."

 

  상당히 그럴듯하지요! 앤서니 티슬턴도 이에 동의합니다. 

 

  "편지를 통한 사도적 의사소통은 그 자체로 사도적 임재에 해당한다."

 

  또, 데이비드 갈런드도 이에 동의합니다. 

 

  "이 문제를 다루고자 바울은 급히 고린도에 돌아올 수 없지만, 바울은 자신이 영적으로 그의 서신을 통해 고린도교회와 그곳에 함께 있다고 간주한다. 사실상, 바울은 함께 한 모임 속에서 읽히게 되는 자신의 서신이 성령의 능력을 전해준다고 믿는다. 고린도에 있는 그의 비판자들조차 그의 서신들을 힘이 있다고 여겼다(고후 10:10)."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다음 견해를 더 선호했습니다. 

 

  "바울은 6장 17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한 이들은 그리스도와 한 영이 된다고 설명한다. 이런 근본적인 사상이 바울의 영이(참고. 롬 1:9; 8:16; 고전 14:14-15; 고후 2:13) 고린도 교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의 기초일지도 모른다. 영(spirit)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과 있을 수 있다."

 

  현재 가장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견해가 이것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견해입니다. 그러나 너무 인간적이고 인위적인 견해 같아 보이지 않나요? 어쨌든 이 중 어느 견해가 옳은가는 지금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옳든 영과 혼에 대한 제 견해와 충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썬다 싱의 생애를 다룬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썬다는 전에 만났던 똑같은 동굴을 찾아 마하리시를 만났다. 그는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 사년 전 그가 예기치 않게 이 성사를 만나고 사람들에게 그 조우사건을 말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믿으려 들지 않았다. 이에 썬다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성사를 대면시켜주고자 자기와 함께 히말라야를 등정하자고 제의하였는데, 그때 월리암스(Padre Williams)라고 하는 사람만이 나선 적이 있다. 그러나 그도 출발을 얼마 앞두고 무슨 일이 생겨서 따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썬다는 그 사실을 7월 14일의 '통신문'에다 밝히고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계속했다.

 

  '나는 마하리시가 같은 동굴에 있음을 알았다. 놀랍게도 그는 내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다 알고 있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서, 나는 내가 잘 아는 한 선교사의 부탁을 그에게 전했다. 선교사는 그를 위해 마하리시가 특별히 기도를 좀 해주기를 부택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지금 죄를 많이 짓고 있소. 가서 먼저 회개하라고 이르시오. 만약 그가 회개한다면 그때 기도를 하여 드리리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는 그 스스로는 자기의 범죄를 아무도 못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보고 듣고 하셔서 알고 계시지요.'

 

  나는 성사가 깊은 산속에서 거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나의 족적과 그 선교사의 비행을 훤히 알고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자기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사명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받았기 때문에 영력을 갖고 있다고 말한 다음,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알려주었다. 

 

  열왕기하 5장 26절, 고린도전서 5장 3절, 고린도후서 12장 2절, 골로새서 2장 5절.

 

  하나님께서 능력만 주시면 비록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사람의 영은 멀리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까지도 능히 알 수 있게 된다는 말인 것 같았다.'"

 

  앞의 견해들처럼 이 구절들이 진짜 이런 뜻이라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몸을 떠나지 않고 몸 안에서 영과 혼이 결합된 생태에서 즉 혼의 생명과 의식과 지정의를 공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능히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도 같은 이유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다루는 두 구절을 입신할 때처럼 바울의 몸에서 영이 빠져나와 실제로 그 도시들을 방문한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피터 오브라이언은 그 가능성을 인정했습니다. 

 

  "오토(Otto)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옳을 수도 있다. '실제로 주저함이 없이 그는 자신이 영적으로 먼 곳까지 활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다.'"

 

  또, 놀랍게도 가장 그럴 것 같지 않은 현대성서주석이 이 견해를 지지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이 그들과 함께 모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가볍게 읽어 단지 심리적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바울은 자신의 영이 일종의 신비한 방식으로 그들의 행동에 실질적으로 동참하면서, 실제로 그곳에서 공동체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바울이 비록 발설하여 말하는 것을 꺼리기는 했지만, 강력한 신비체험과 확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갈 수 있다면(고후 12:2), 자신이 '영으로' 에베소에서(고전 16:8) 고린도로 옮겨서 신비하지만 실질적인 방식으로 교회의 결정적인 징계 행위에 동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

 

  혹시 이 모든 것이 20세기 말에 위치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소 기괴하게 들린다면, 그것은 이 편지가 계몽주의 이후의 이성주의자들에게 전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상기시켜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 편지는 성령의 능력이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실재였던 세계 속에서 살며, 움직이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던 공동체에게 전달된 것이다."

 

  저는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옳을 경우, "몸에서 영이 빠져나가 다른 도시를 방문했는데 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었다. 그러니 생명과 의식이 영이 아니라 혼에 있다는 영과 혼에 대한 견해가 잘못된 것 아니냐?"라는 반론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영과 혼에 대한 저의 견해를 완전히 뒤집을 수 있는 강력한 반론입니다.

 

  때문에 저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급히 이 구절을 연구해보았습니다. 먼저, 저는 이 구절에 나오는 "영으로는"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았습니다. 

 

  로마서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고린도전서 5:3 "내가 실로 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베드로전서 3:18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전서 4: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으로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모두 "영"이 혼이 아니라 육과 대비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구절에는 "영"이라는 단어가 세 번 연속 나타납니다. 

 

  고린도전서 5:3-5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영"이 모두 육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골로새서 2장 5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프뉴마)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이처럼 영이 혼이 아니라 육신과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과 혼의 용례에 대해 설명할 때 말한 것처럼, 여기서 "영"은 단지 영이 아닌 영혼을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 3장 18-1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가 또한 영으로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이 중 18절의 "영으로는"과 19절의 "영으로"가 같은 뜻이라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이것은 "영으로는"의 의미를 보여줍니다. 또, "영으로는"이 18절에서 "육체"와 대조를 이루고 있고, 죽은 후의 일을 설명한 19절에 "영으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면 영뿐 아니라 영과 혼이 몸을 떠납니다. 예수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19절의 "영으로"는 단지 영이 아니라 영과 혼을 뜻하는 것입니다. 영과 혼이 함께 간 것을 영으로 갔다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이 사용한 "영으로는"도 이와 똑같은 표현입니다. 절대로 영만 함께 있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의 견해와 모순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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