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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량경기전참봉(김여옥)묘갈명

작성자죽산|작성시간07.04.24|조회수210 목록 댓글 0
通訓大夫 利城縣監 贈純忠補祚功臣 資憲大夫 兵曹判書

宣敎郞慶基殿參奉墓碣銘

선교랑 경기전 참봉 묘갈명(김 여옥,1641~1685)

原文 : 1802년 壬戌譜

解釋 : 2005. 7. 2. 金順大

參判 李縡 撰(참판 이재[1] 지음)

[1]이재(李縡, 1680~174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한천(寒泉). 진사 만창(晩昌)의 아들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다. 저서로는 《도암집 陶菴集》·《도암과시》·《사례편람 四禮便覽》·《어류초절 語類抄節》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재가 참판에 임명된 해는 1719년(형조참판), 1721년(이조와 예조참판), 1725년(이조참판)이고 1726년에는 대제학이 되었다.

이 묘갈의 작성연대를 유추하면 휘우항(1649~1723)의 묘표도 이재가 썼으니, 같은 시기에 썼으면 휘우항이 돌아가신 후이므로 1725년 이라고 볼 수 있다.


公諱汝沃字啓乃其先出金海世將家有鶴城君諱完誅逆适有名其弟府使諱宇 策振武勳府使有子汝沃獨能用儒學顯府使公老于家嘗喜公曰生子不當學文耶 公爲人端重讀小學慨然爲已手書四勿敬齋諸箴以寓警動遵縄墨

공의 휘는 여옥이고 자(字)는 계내이다. 그의 선조는 김해에서 나왔으며 대대로 장군의 가계로서, 반역자 이괄을 처단하여 유명해진 학성군 휘완이 있었고, 그(완)의 동생은 부사 휘우로서 진무공신에 책록되고, 부사(우)의 아들 여옥은 혼자서 능히 유학에 능통하고 두드러져, 부사공(우)이 늙어서 집에 있으면서 기쁨을 맛보았다.  공(우)이 말하기를 “내가 낳은 아들이 학문을 한다는 것이 어찌 어울리지 않구나.”하였다.  공이 커서는 단아하며 정중하였으며, 소학을 읽고는 슬퍼서 탄식하였다[1]. 이미 손으로 사물[2]을 썼으며, 여러 잠언들을 공경하게 느끼고 경거망동하는 것을 멀리하였으며 규범을 준수하였다.

[1]소학의 의미를 깊게 깨달았다는 의미

[2]사물(四勿);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 듣지 말며, 말하지 말며, 움직이지 말라는 네 가지 가르침.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九歲母夫人久疾輒坐而達曙府使公每出送至衢候歸亦如之雖 夜深不敢先父食

9살에 모친께서 고질병을 앓다가 갑자기 주저앉으시자 밤을 새웠다.(達曙) 부사공(우)이 오셨다가 가실 때 마다 큰길까지 마중을 나간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비록 밤이 깊어지더라도 감히 부친보다 먼저 식사를 하시지 않았다.


十八府使公卒哀毁幾不勝送終以禮有疑質李典翰壽仁李亟歎賞事母夫人有深愛及喪廬于墓日上墓哭涕處草盡枯春秋不廢時享晨謁如事生拜宗家下馬巷外燕處

18살(1658년)에 부사공(우)이 돌아가시자, 어찌나 참을 수 없이 슬퍼서 몸이 쇠약해지고 예로서 장례를 마치자, 천성을 궁금하게 여긴 전한(典翰) 이수인[1]이 아끼고 칭찬하여 상을 주었다. 모친에게도 깊은 사랑이 있어서 묘 곁에 초막을 짓고 시묘하며 날마다 묘소에서 곡하고 눈물을 흘려 근처의 풀이 없어지고 나무가 말랐다. 봄가을을 쉬지 않고 제사를 드리고 아침 일찍 사당에서 문안을 드리는 것이 살았을 때 절하는 것과 같았으니, 종가(宗家)에서는 말(馬)을 주어 마을 밖으로 나가 편안하게 생활하라고 하였다.

[1]이수인(李壽仁, 1601~166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유안(幼安), 호는 성암(惺菴). 전라남도 강진출신. 이조판서 후백(後白)의 증손자이며, 현감 태길(泰吉)의 아들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양하였다. 경사·성리학에 모두 밝았다.


不戱言子弟出入拜於堂下閨門肅若朝廷與宗族合力置祭田以祀祧廟設義學義田宗會法令子孫遵行鄕黨感服有不善曰毋令公知公則恥言人過於子弟不貸也

실없는 장난말은 하지 않았고 자제들이 출입할 때 당 아래의 작은 문에서 절하는 것이 엄숙하기가 임금이 계시는 조정과 같았다. 종족들과 힘을 합쳐 제전[1]을 만들고, 먼 조상을 합사(合祀)한 사당을 세우고, 의학(義學?)과 의전(義田?)에 대한 종회법(宗會法)을 만들어, 자손들에게 준수하여 따르도록 하니 향당(鄕黨)이 감복하였다. 착하지 못한 행실이 있으면 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공은 공 자신을 알았으니 부끄러운 말이 사람들을 통하여 자제들에게 들리는 것을 엄격히 다스렸다.

[1]祭田; 조상의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농토


口不道黨論人有問者笑曰人受於天自有公平正大道理豈可以東西二字著在畦畛於胸中乎

입으로 도리에 맞지 않는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 물어오면 웃으면서 말하기를 ‘사람은 하늘로부터 스스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졌다.’라고 하였다. 공은 평소에 공명정대하고 도리를 지켰으니 어찌 동과 서 두자(흑백 논리로?)로 구분되고 마음속에 경계심을 갖겠는가.


不喜交遊不跡官府置屋花樹<原文은竹>間左右經籍終日亢坐人不見其惰容覃思實踐其進盖未已矣 方伯薦于 朝除 慶基殿參奉不就 翌年乙丑二月二十四日病卒 年四十五

서로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관청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집에 꽃나무의 방[1]을 설치하고, 좌우의 경서와 서적에 종일 파묻혀 앉아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가 게으르고 단정하지 않은 용모는 보지 못했다. 생각한 것은 실천하고 나아가는 것이 중도에 그치지 않았다. 방백(관찰사)이 추천하여 조정에서 경기전[2] 참봉으로 임명했으나 가지 않았다. 다음해 을축(1685)년 2월 24일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나이는 45세였다.

[1]또는 종친회 사무를 보는 방?

[2]경기전(慶基殿).  태종(太宗) 10년(1410)에 창건된 태조(太祖)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곳 이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으며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호이다.


有中庸標語啓蒙補鮮<원문은解>藏于家公素篤信石潭翁讀 其理氣諸說曰明白發越體用全備且以擊蒙一書爲終身用其的礭如此奮起遐陬力學悖行以光其門可謂考矣 今夫詩禮家子弟朝夕擩染而不能踐一善者其視公何如也

중용에 나오는 표어로 가르치고 보충 해석하여 집에 보관하였다. 공은 평소 석담(율곡 이이)을 진실하게 믿어, 그 이기설[1]을 읽고 말하기를 ‘명백하게 기상이 빼어난 신체는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또 격몽요결[2] 한권의 책은 종신토록 참고가 된다.’고 했으니 그 정확한 말은 이와 같다. 분발하여 일어나 삐뚤어진 권력과 도리에 어긋난 행동(悖行)을 배우는 것을 멀리하니, 그 영광으로 그 가문을 짐작할 만하다. 지금 무릇 시(詩經?)과 예(禮記?)의 가문의 자제들이 아침저녁으로 배워 몸에 익혔으나, 하나의 선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우면, 이를 보고 공이 어떻게 하겠는가.

[1]이기설(理氣說); 우주생성의 근원이 이[理]와 기[氣]에서 나왔다는 설

[2]擊蒙要訣; 이이(李珥)가 학문을 시작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책


妣忠州池氏考諱達汶 配陽城李氏諱弘佶女 先公一年卒 同葬駐龍之先塋 四男世純世忱世恭世寬 世恭來乞銘 銘曰

모친은 충주지씨로서 그의 부친은 휘달문이다. 부인은 양성이씨로서 휘홍길의 따님인데 공보다 1년 먼저 돌아가셔서 주룡의 선영에 같이 장사지내었다. 4남을 낳았는데 세순, 세침, 세공, 세관이다. 세공이 와서 글을 청하니 새긴 것은 다음과 같다.


有美一人 生此南垂 兎罝之門 有禮有詩 其德孔備 孝以爲基

아름다운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태어나 이 남쪽에 드리워졌네. 토끼그물의 가문(?)이지만 예의와 시가 있었네. 그 공덕이 커서 효도의 기초가 되었네. 

토저지문

我服芬芳 我佩陸離 寢言永歌 石潭我師 靑靑綠竹 煌煌靈芝

우리는 꽃향기를 흠복하고 또 지니고 있으나 우리와 이별했네. 그가 잠들어도 그의 말은 영원히 불리어질 것이고 석담(율곡 이이)은 우리의 스승이라네. 푸르고 푸른 저 대나무와 빛나고 빛나는 영지버석과 같네.


月出扶輿 其水漣漪 有挹遺風 請攷刻辭

달뜨는 곳에 가마타고 올라가니 그 물에 잔잔한 물결이 인다. 물을 떠보니 그 가르침이 남아 있으니 청컨대 상고한 것을 새겨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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