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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선생문집

탁영선생문집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

작성자죽산|작성시간14.09.30|조회수99 목록 댓글 0

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3권(卷之 三)

기(記)

 

4. 영산현감신담생사당기(靈山縣監申澹生祠堂記)

 

<개요>

신담이라는 사람이 영산 현감으로 있으면서 베푼 선정에 감동한 백성들이 그의 생사당(生祠堂)을 지은 전말을 기록한 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성종 20년 기유년 1489년 4월 19일 기록된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김여석(金礪石)이 보고에도 그 내용이 실려있다.

 

 

靈山爲縣 古矣 在新羅 爲西火 爲尙藥 入高麗 爲靈山 今仍之 吾之外曾祖漢城府尹李公暕 居之 以是吾外族 多在縣焉 吾先業在淸道郡 郡距縣僅六十里 居近也而多所聞於人 因外族而常往來於彼 靈之事 吾及得而詳焉

영산(靈山)은 현(縣)이 된 지는 오래이다. 신라에서는 서화(西火)와 상약(尙藥)이라 하였고, 고려에 들어와 영산이라 하였다가, 지금에 이르러서 그대로 하였다. 나의 외증조(外曾祖) 한성 부윤(漢城府尹) 이동(李)공이 여기에 살았더니, 이로부터 나의 외족(外族)이 많이들 이 고을에 살았다. 나의 선세 세업이 청도군(淸道郡)에 있는데, 청도군은 이 고을에서 겨우 60리 가까이 되므로, 사람에게 들은 바 많고 외족의 인연으로 늘 왕래하였으므로, 영산의 일에 대하여 나는 상세히 듣게 되었다.

 

歲癸卯夏 高陽申侯澹 由軍器主簿 求便養出爲是縣 聞於人者 皆善政也 丁未秋 仲氏乞養昌寧 以奉老母焉 馹孫繼爲晉州學 由晉而覲於昌靈 又道也 每行拜侯 而悅其人之慈祥 及其考滿而去也 吾以詩贈之曰 琴鶴淸風遠 黔黎遺愛長 今君雖捨去 他日是桐鄕

계묘년(1483, 성종14) 여름에 고양(高陽) 신담(申澹)후가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였다가 어버이 섬기기에 편리하다 하여 나와서 이 고을 원이 되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은 모두 선정(善政)뿐이었다. 정미년(1487) 가을에, 중씨(仲氏,둘째형 驥孫)가 봉양을 하고자 소원하여 창녕현감으로 와서 노모(老母)를 모셨고, 일손(馹孫)이 이어서 진주(晉州)학의 교수가 되어, 진주를 거쳐 창녕으로 가서 모친을 뵙곤 하였다. 또 그 길을 갈 때마다 신후를 뵈었는데, 그 사람의 자상함을 기뻐하였다. 신공이 만기가 되어 떠날 때(1488년), 나는 시를 헌증하였다. 그 시에, “금학이요 청풍이던 임은 멀리 떠나셔도, 백성에게 끼친 사랑은 길이 남았네. 이제 그대 버리고 가셨으나, 훗날 이곳이 바로 동향[1]이 되리이다.” 하였다.

[1] 동향(桐鄕) : 한(漢)나라 때 주읍(朱邑)이 동향(桐鄕)의 관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뒤에 유언에 따라 자손들이 동향에 장사지내니, 고을 백성이 그의 선덕을 기려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낸 고사에서 ‘선정을 베푼 관원을 백성이 사모함’ 을 이른다.

 

其秋 吾以病辭晉學 家食淸道 晨昏之餘 常謝俗車 杜門端坐 一日有客扣門 呼童出應之 則靈之士人也 延而坐之 其言曰 申侯下車 推赤心於赤子 惠以臨民 而莊以莅之 威以御吏 而簡以居之 賦役平刑罰中 廉而能幹 不取諸民而公用足 和易使人而令行疾 不察察爲明 不皎皎爲白 侯之爲政 無往而不用其極 靈之土高亢 傍大湖而不可以灌漑 稍水旱則先諸邑受害 乙巳之災 侯戴星躬出入閭閻 所以備荒者咸盡其方 行齎粥飯 遇飢者必哺之 如母乳子 遠近聞者 皆以靈爲歸

그해 가을에, 내가 병으로 진주학 교수직을 사직하고 청도 집에 있을 때, 조석으로 어머니를 봉양하고 남은 여가에는 늘 속세의 수레를 타지 않고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았더니, 어느 날 손이 문을 두드리기에 아이를 불러 나가보게 하니 영산에 사는 선비였다. 맞이하여 앉혔더니, 그의 말이, “신후가 수레에서 내려와, 백성들(赤子)에게 참된 마음으로 대하고 은혜로서 백성에게 임하되 공경으로 다스리고, 위엄으로 아전을 제어하되 간명하므로 대하여 부역이 공평하고, 형벌이 알맞으며, 청렴하면서도 일을 잘 처리하는 능력(能幹)이 있어 백성에게 받지 않고도 공적으로 쓰는 재물이 넉넉하고, 화합으로 사람을 부리되 명령이 빨랐으며, 일일이 감시하여(察察) 밝으려고 애쓰지 않고, 아주 결백하게(皎皎) 흰 것을 위해 애쓰지 않았으니, 신후의 다스림이 어디를 가도 그 극치에 달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영산의 지대가 높고 곁에 큰 호수가 있으나 물을 끌어다 대기에는 어려워 조금이라도 홍수와 가뭄(水旱)이 있으면 다른 고을보다 먼저 해를 입었는데, 을사년(1485, 성종16) 재난에, 신후가 새벽에 친히 백성들이 사는 동네에 출입하면서 흉년에 대한 모든 방도를 다하고, 죽과 밥을 싸 갖고 다니면서 주린 자를 만나면 반드시 먹이되, 마치 어머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듯이 하였으매, 원근에서 들은 자는 모두 영산으로 돌아왔습니다.

 

侯又引靑州故事而賑之 闔境無一人捐瘠者 靡申侯 吾其爲枯土久矣 然靡不有初 鮮克有終 侯之爲政六期 其終如初 民所以悠久而益不厭 且不忍欺者也 將受代 齎咨涕洟 咸願借寇一年 而君門九重 螻蟻之誠 未必能達 使鸞鳳久棲于枳棘 非爲申侯計也 不若圖侯之像 留靈之土 春秋盡敬事之懷耳 父老共募畫工 隨牒訴者入庭 俟侯治事 使侯不知 仰而眞焉 出而點校 一髭髮不似 則更審之

신후는 또 청주(淸州)의 옛 일을 참고하여 구휼하니 온 경내에 한 사람도 희생을 당한 자 없었으니, 신후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메마른 흙으로 화한 지가 오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이 있지 않은 경우는 없지만 끝까지 마무리 짓는 경우는 드물거늘[2], 신후의 다스림은 6년(六期)를 걸쳐 시종이 한결같았으므로, 백성들은 오랠수록 더욱 싫어하지 않을 뿐 아니라, 차마 속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장차 퇴임할 때는 모두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여 1년 동안만 더 머물러 달라고 원하였으나, 구중 궁월에 개미처럼 작은 정성이 전달되지 못하였고, 봉황새(鸞鳳)로 하여금 가지에 오래도록 깃들게 함은 신후를 위해서 꾀할 수 없는 것이므로, 신후의 초상을 그려서 영산에 머물러 두고 봄과 가을에 공경을 다하여 섬기는 생각을 하여 동네 어른들이 함께 화공을 모집하여 송사하는 자를 따라 뜰에 들어가서 신후가 송사 다스릴 때를 기다려 신후가 알지 못하게 쳐다보고 그렸다가, 나와서 점검하여 한 점 털끝만큼이라도 같지 않으면 다시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2]미불유초 선극유종(靡不有初鮮克有終) 시작이 있지 않은 경우는 없지만 끝까지 마무리짓는 경우는 드물다는 뜻. 우리가 잘 쓰는 유종의 미는 이말이 변형된 것이다. (출전: 주역. 겸괘)

 

如此旬月 點化惟肖矣 旣上綃糚䌙(糸+黃) 愼密藏之 侯旣去 且構宇 民歡趨之 大小各出財力 雖鰥夫嫠婦朝夕不謀者 亦不惜費 合粟布百計 乃購材而堂之縣治之東隙地 父老又謀久侯之實於茲土 當倩文士而記之 先使某告于先生 俟堂成之日 鏤諸板以爲不朽云

그런 지 한 달이 되자, 그 손을 보아 그린 것(點化)이 아주 비슷하기에(酷肖) 비단에 올려 꾸미고 묶어 삼가 간직하였다가, 신후가 이미 떠난 뒤에 사당을 세우려 하니 백성이 환영하며 찾아와 크나 작으나 각기 재력을 거출하되, 비록 홀아비와 홀어미로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자라도 역시 경비를 아끼지 않아, 곡식과 벼를 합하여 아주 많이 모였기에, 곧 재목을 사서 사당을 고을 동쪽 빈 터에다 세우고는 부로가 또 ‘신후의 실제 사적을 이 땅에 오래도록 남게 하려면, 당연히 문사(文士)에게 청하여 기문을 써야겠다.’ 하고 먼저 누군가로 하여금 선생에게 말씀드려 사당이 이룩되는 날, 현판에 새겨서 썩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馹孫起而拜曰 子之請重 侯之事鉅 而吾之筆拙 奈不足以張之 何 子歸而更求諸文學老手 仍復嘆賞久之 誦與前日贈侯桐鄕之句 曰侯其沒而永享於茲土 如桐鄕也 然遺命子孫 葬於桐鄕 鄕人因爲之立祠者 朱邑也 今靈人之立祠靈山 思其德耳 申侯不與也 思其德而追奉之 無以盡其誠 則生而祀之

일손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그대가 청한 것이 귀중하고 신후에게 대한 일이 존귀하나 나의 글은 옹졸하여 족히 포장하지 못할지니, 그대는 돌아가서 다시금 문학에 능숙한 사람(老手)을 구하시오.” 하고, 이내 다시금 감탄하면서 전날에 신후에게 준 동향(桐鄕)의 글귀를 외우면서 말하기를, “신후가 죽은 뒤에 길이 이 땅에 제사 흠향함이 동향과 같을 것입니다. 자손에게 유언을 하여 동향에다 장사하니, 그 동네 사람들이 이내 사당을 세운 것은 주읍(朱邑)이니, 이제 영산 사람이 사당을 세운 것은 영산 사람이 그 덕을 사모함인 만큼, 신후 자체는 이에 관계가 없는 것이요, 덕을 생각하여 추모하고 받드는 것에(追奉) 있어서는 무엇으로도 그 정성을 다하지 못하므로 살았을 제 사당을 세우는 것이요.

 

昔魏州民 爲狄梁公立生祠 則生祠非創於靈人也 益州民 爲張方平設畫像 則靈人之像申侯 亦可也 民將追申侯之德而不可見 拜申侯之像而起其思 肅然典刑 侯雖去而猶在也 以此知靈父老 亦有非常人者矣 將子爲謝焉 酌而遣之

옛날 위주(魏州) 백성이 적량공(積梁公)[3]을 위해서 생사당을 세웠으니, 생사당은 영산 사람에게서 창안된 것이 아니요, 익주(益州) 사람이 장방평(張方平)[4]을 위해서 화상을 만들었으니, 영산 사람이 신후를 그린 것 역시 잘한 일이었소. 백성이 장차 신후의 덕을 추모하되 직접 볼 수가 없을 때에는 신후의 초상에 절하여 그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 숙연한 전형(典刑)이 신후는 비록 갔으나 오히려 머물러 있는 것이요. 이로써 영산의 부로 중에도 역시 비상한 사람이 있음을 알았으니, 그대는 나를 위해서 사례하여 주오.” 하고는 술을 주어 보내었다.

[3] 적양공(狄梁公) : 당나라 적인걸(狄仁傑)로, 양공은 그의 봉호이다. 자는 희영(憘英),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벼슬은 시랑, 자사, 행군 부원수 등을 지냈다. 측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을 잘하였고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다.

[4] 장방평(張方平) : 송나라 때의 문신으로, 자는 안도(安道), 호는 낙전거사(樂全居士),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 진주 지주사(陳州知州事) 등을 역임하였다.

 

尋以遼東質正被召 思其不俟駕者 而惶遽赴召 於記未遑也 南還數月 靈父老又走書於馹孫曰 君子 樂道人之善 前之請記懇而不見採 非不知更求於他手 然知申侯者 莫君伍也 而詳於靈者 又莫君若也 敢告請焉

이윽고 요동질정(遼東質正)[5]으로 부르심을 입어 불사가(不竢駕)[6]의 뜻을 생각하여 급급히 떠나느라고 기문 지을 틈을 얻지 못하였더니, 남쪽으로 돌아온 지 몇 달 만에 영산의 어른들이 또 일손에게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군자란 남의 어진 일을 이끌기를 좋아하는 것이니, 이전에 기문을 청한 것이 간절하였으나 수락을 하지 않아, 다시금 다른 이에게 부탁하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신후의 일을 잘 아는 이가 그대만한 이가 없고, 또 영산 일을 상세히 아는 이도 그대만한 이가 없으므로 굳이 청하오.” 하는 것이었다.

[5]요동질정(遼東質正); 탁영연보에 의하면 1489년 11월4일(음) 요동질정에 임명되어 11월13일 요동으로 출발하여 다음해 3월1일 한양으로 귀환

[6]不竢駕(불사가); 말에 멍에를 메우는 것도 기다릴 여가가 없이 간다. 는 것으로 급하게 간다는 의미.

 

余惟我殿下卽位二十年于今 勵精民事 每委重於親民之官 而奉承者蓋寡 今申侯能自拔於恒品 使惠澤下流 而入人心之深如此 申侯賢矣哉 旣求畫工而圖之 又倩文士而記之 靈人之心 亦勤矣 世之爲吾君牧吾民者 可以觀感 而爲其民者 亦可以知報德矣

나는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殿下;성종)께서 즉위하신 지 20년에 지금까지 정신을 가다듬어 백성의 일을 보살피어, 매양 백성에 친근한 관리에게 위임하였으나 그 뜻을 받드는 자가 대개 적더니, 이제 신후는 능히 스스로 보통보다 뛰어나 그의 혜택이 내리 전해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들어갔음이 이러하니, 신후는 참으로 어질도다. 이미 화가를 구하여 초상을 그리고 또 문사에게 청하여 기문을 쓰게 하니, 영산 사람의 마음씨가 역시 돈독하도다. 세상에서 우리 임금을 위해서 우리 백성을 기르는 자는 가히 이를 보아 느낄 것이요, 그 백성된 자 역시 은덕 갚을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按東方之故 自三國以來數千年間 名於宦者總總也 而未聞所謂生祠者 國家之盛 當我殿下之時而創見焉 亦見其聖明人才俗化之美也

상고하건대, 동방 고사에 삼국(三國) 이래 수천 년 동안 관리에 이름난 사람이 많건만, 아직 이른바 생사당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국가가 융성한 우리 전하의 시대에 있어서 비로소 보았으니, 이에서 역시 임금이 밝고 사람이 재주 있으며 풍속이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겠다.

 

侯字淸卿 壬辰 進士 爲人厚重 訥而敏 善吟詩知讀書 蓋其爲治有根本者也 於是 備書顚末以復焉 旣而 有問於余曰 申侯爲縣 無大異於人 而得民至此者 何也 余答曰 立異以爲高 君子不取 而悃愊無華者 眞循吏也 遂係之辭曰

신후의 자는 청경(淸卿)이니, 임진년(1472년) 진사(進士)로서 사람됨이 온후하고 정중하여 말은 어눌하나 일에는 재빠르고, 시 읊기를 좋아하며, 글을 읽을 줄 아니, 대개 그의 다스림에도 근본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었다. 이제 그 전말(顚末)을 갖추어 써서 되짚어보니, 이윽고 어떤 이가 나에게 묻기를, “신후가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다른 이보다 크게 다른 것이 없었으나, 백성의 마음을 이토록 얻었음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남다른 일을 꾸며서 높다고 생각하는 것은 군자가 취하지 않는 것이요, 성심껏 하되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참다운 관리(循吏)인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시를 읊어 뒤에 붙였다.

 

生我者父母 活我者申侯 侯之德兮與生敵 捨而去兮挽不留 侯生而飮食兮 何有於祠 我去而追思兮 無以寓其微衷 侯之身兮仕於朝 侯之像兮在我堂中

나를 낳은 이는 어버이요, 나를 살린 이는 신후님이시라.

임의 은덕이시어 나의 생과 같거늘, 버리고 가실 때 만류해도 머물지 않는구나.

임이 살아 계셔서 음식을 잡수신다면, 사당이 어찌 필요할까 마는,

임이 가시니 추모하는 마음, 이 작은 성의(微衷)를 어디에 붙일까.

임의 몸은 조정에서 벼슬하시나, 임의 초상은 우리 사당 가운데에 있답니다.

 

 

 

                                                                    ※역문참조 : 속동문선 제14권 기(記) , 註 : 김순대, 편집 : 2014. 9. 28. -죽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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