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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6. 월간문학 권두언 / 김복근

작성자별꽃서리|작성시간26.06.11|조회수9 목록 댓글 0

2026. 6. 월간문학 권두언

언어는 문학의 뿌리이고
문학은 언어의 꽃이다

김복근(한국문인협회 자문위원⸱문학박사)


언어는 인간의 숨결이다. 보이지 않으나 살아 움직이며, 생각을 일으키고 감정을 물들인다. 문학은 작가의 숨결 위에 피어나는 꽃이다. 말 한마디, 문장 하나에 깃든 미세한 떨림이 한 줄의 시가 되고, 한 편의 소설이 된다. 그러므로 언어 없는 문학은 존재할 수 없고, 문학 없는 언어는 제 아름다움을 드러내지 못한다. 언어는 문학의 뿌리이고 문학은 언어의 꽃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오랫동안 가지런히 다듬어진 표준어의 길을 걸어왔다. 광복 이후 국가의 언어 정책과 교육 제도는 표준어를 중심으로 정비되었고, 문학 또한 그 흐름을 따르게 되었다. 이 과정은 소통의 효율성과 언어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지만, 언어의 생태적 다양성을 위축하는 결과를 낳았다.

문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와 닮았으되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라, 감정을 머금고 의미를 확장하는 숨결이다. 단어는 다른 말을 불러내고, 문장은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문체는 물결의 흐름과 같다. 길고 짧은 호흡, 부드럽거나 거친 리듬, 선택된 어휘가 작가마다 고유한 색채를 보인다. 작가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언어의 세계를 새롭게 길어 올리는 존재이다. 따라서 문학의 언어는 하나로 고정될 수 없다. 표준어는 공적 소통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언어이지만, 우리의 삶을 하나의 언어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하다. 특히 개인의 체험과 감정은 어린 시절부터 익힌 말, 어머니의 목소리, 지역어의 억양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배운다. 그 말은 교과서의 문장이 아니라 삶의 온기와 함께 스며드는 소리이다. 우리는 그것을 사투리라 부르며 주변으로 밀어냈지만, 그 안에는 삶에 대한 체온과 정서와 기억이 담겨 있다. 사투리는 변형된 언어가 아니라, 한 지역이 오랫동안 빚어온 삶의 자취이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배경으로 작품을 창작하고, 그 작품은 현실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맥락을 바탕으로 형성하게 된다. 역사적 사건이나 문화적 변화는 작품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미치며, 작품에 사용된 언어는 작품의 의도와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유용하게 사용된다. 이런 입장에서 작가가 자기 지역의 말로 작품을 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표준어는 역사적 질곡 속에서 형성된 언어이다. 대일항쟁기, 우리말을 지키고자 했던 선인들의 노력은 언어 체계를 바로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어학회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표준어 규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0) 등을 제정하면서 맞춤법의 표기 대상이 표준어임을 명시하고, 표준어는 ‘현재 서울의 중류사회가 쓰는 말’로 규정했다. 그 이후 『우리말큰사전』을 비롯한 국어사전에서 표준어는 공용어로서 자리를 굳혔다. 광복 후 교육과 언론이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명실상부한 한국 공용어로서의 위치를 구축하게 됐다. 1988년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이 두루 쓰는 서울말’로 기준이 바뀌면서 ‘중류’와 같은 계층의 개념 대신 ‘교양 있는’이라는 포괄적인 기준으로 바꾸어 적용했다. 그 결과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말씨라는 인식이 굳어지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의 언어 환경은 변하고 있다. 소통의 통일성만큼이나 다양성 회복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문학 역시 지역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표준어는 인위적으로 설정된 공용어이며 표준어만으로 문학의 전 영역을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따라 문학도 지역어를 수용하여 창작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윤재근(2021, 문단실록)은 “표준말로 문학을 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표준말이 있어도 표준말을 문학어로 사용하지 않는다. 표준말이 문학어가 될 수 없음은 인위적으로 정한 공용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어는 문학의 뿌리이고 문학은 언어의 꽃이다. 따라서 문학에 사용되는 언어는 표준어와 사투리, 공통어 등을 다양하게 아우르는 방향으로 사용돼야 하고, 문학은 언어를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 표현하는 촉매제로서 꽃을 피우는 상보적인 관계가 형성돼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필자는 경상도 말로 된 시조집 『천지삐까리』를 펴냈다. ‘천지삐까리’라는 말은 표준어로는 쉽게 치환되지 않는 표현이다. 들판 가득 번지는 생명의 기운, 시장의 활기, 감정이 넘쳐나는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 이를 표준어로 풀어 ‘아주 많다’, ‘가득하다’라고 표현하면 의미는 전달될지 모르나, 그 말 속의 생동하는 기운과 현장의 숨결은 사라진다.
반면 지역어를 그대로 사용할 때, 독자는 그 울림만으로도 풍경을 떠올리고, 정서를 직감하게 된다. 이처럼 지역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세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힘을 지닌다. 문학이 이러한 지역어를 수용할 때, 언어는 비로소 깊은 숨을 쉬게 된다. 인물은 생동감을 얻고, 풍경은 구체성을 띠며, 감정은 깊이를 더하게 된다. 특히 시와 시조에서는 말의 미묘한 울림이 곧 작품의 생명이 된다. 표준어가 정제된 빛이라면, 지역어는 흙의 온기를 머금은 토양이다. 그 빛이 더해질 때 문학은 비로소 입체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언어는 다양할수록 풍요롭고, 문학은 넓을수록 깊어진다. 표준어만으로는 삶의 결을 온전히 담아내기 어렵다. 서로 다른 지역의 말들이 만나고 스미면서 비로소 인간의 삶은 총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게 된다. 충청도 사람은 충청도 말로, 강원도 사람은 강원도 말로, 전라도 사람은 전라도 말로, 제주도 사람은 제주도 말로, 경상도 사람은 경상도 말을 사용할 때, 독자의 정서적 미감을 자극할 수 있다. 물론 지역어는 독자의 이해를 어렵게 할 수 있다는 한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어의 다양성을 회복하는 일은 곧 문학의 생명력을 되살리는 일이다. 언어는 문학의 뿌리이며, 문학은 그 위에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이다. 그 꽃이 더욱 풍성하게 피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뿌리 또한 깊고 넓게 뻗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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